자료실학술및 서류(책)
학술및 서류(책)
제목 반천창건록(槃泉創建錄)
작성자 관리자 [2017-11-17 09:15:42]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1
반천창건록.pdf

반천창건록(槃泉創建錄)

 

鄕黨通文(향당통문)

右文惟我 苟全金先生道學淵宏久欠俎豆之典 將於平日遊賞之地營建妥靈之計公議之定厥惟

우문유아 구전김선생도학연굉구흠조두지전 장어평일유상지지영건타령지계공의지정궐유

舊哉而凶歉連仍力擧嬴有志未就今者僉議詢 同將一邊建 廟一邊燔瓦事係嚴重不得不通告

구재이흉겸연잉력거영유지미취금자첨의순 동장일변건 묘일변번와사계엄중부득불통고

于留鄕座前仍冀鄕中諸賢兼照日後告急之事在 所不已姑此不宣伏惟 己酉十一月二日發文

우유향좌전잉기향중제현겸조일후고급지사재 소부이고차부선복유 기유십일월이일발문

 

배대유(琴大有),박돈(朴燉),권지중(權知重),김세명(金世鳴),김주명(金柱明),

권지절(權知節),김주려(金柱麗),금천달(琴天達),변유훈(邊有勳),박후기(朴后基),

금운달(琴雲達),권현(權俔),금경달(琴慶達),권경(權儆),금호(琴箎),금두(琴枓),

김세열(金世烈),김계열(金繼烈),권임(權任),김휘열(金徽烈),박주금().

 

향당통문(鄕黨通文)

위의 글은 삼가 우리 구전(苟全) 김선생(金中淸先生)께서는 도학(道學)이 연심(淵深)하고 굉대(宏大)

하셨지만 제사지내는 전례(典禮)가 오래도록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서 마땅히 평일(平日)

노니시며 완상(玩賞)하시던 곳에 건물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실 곳으로 하자는 계획을 공론(公論)으로

정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니 오래 됐습니다. 이는 연이은 흉년으로 인해서 힘이 모자라도 거행하려는 뜻은

넘쳐났지만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요즘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물어서 장차 건물 한편을 짓기로 같이

일을 꾀하여 사당[] 한 편을 기와 굽는 일은 엄중(嚴重)한 일에 관계되므로 부득불 유향소(留鄕所)

좌수(座首)께 통고했습니다. 이에 향중(鄕中)의 제현(諸賢)께는 소()에 급한 일이 있어서 뒷날에

알려주시길 바람도 아울러 통고합니다. 이미 잠시 뿐만이 아니라 삼가 생각하니 이를 다 적지를 못했습니다.

기유(己酉: 1669: 顯宗10)112일 통지서를 보냄.

금대유(琴大有), 박돈(朴燉), 권지중(權知重), 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 권지절(權知節),

김주려(金柱麗), 금천달(琴天達), 변유훈(邊有勳), 박후기(朴后基), 금운달(琴雲達), 권현(權俔),

금경달(琴慶達), 권경(權儆), 금호(琴箎), 금두(琴枓), 김세열(金世烈), 김계열(金繼烈), 권임(權任),

김휘열(金徽烈), 박주금().

 

同門中回文(동문중회문)

右文謹聞鳳城士林議建 金承旨苟全先生社廟 於晩退里今方始役而物力綿薄惟不克完事是惟我同門之人固當盡心

우문근문봉성사림의건 김승지구전선생사묘 어만퇴리금방시역이물력면박유불극완사시유아동문지인고당진심

於萬一之助玆以發文通告而事有曲折條列如左伏願僉尊一依所諭收送于本所幸甚

어만일지조자이발문통고이사유곡절조열여좌복원첨존일의소유수송우본소행심

庚戌 正月 16日 出文 南亨會 柳尙馣 柳亨立 此亦中在喪之員不得出於回文中而不爲通告亦涉未安故敢次

경술 정월 16일 출문 남형회 유상암 유형립 차역중재상지원부득출어회문중이불위통고역섭미안고감차

通諭於收合有司李棘人榮善 金棘人世鳴柳棘人震錫 琴棘人以正 宋棘人時徵 宋 喪者時鳳 琴棘人貞達

통유어수합유사이극인영선 김극인세명유극인진석 금극인이정 송극인시징 송 상자시봉 금극인정달

琴棘人邦達 前傳喩收合如何且所收物件各自懸書于宅下爲妙回 文隨記隨書未免年次之倒錯殊爲未安幷恕諒

금극인방달 전전유수합여하차소수물건각자현서우댁하위묘회 문수기수서미면년차지도착수위미안병서량

一吾黨致誠之道正在今日而窃惟及門之中已多 下世之員則其在子弟相應留意於繼述故或子或孫中代出一員事.

일오당치성지도정재금일이절유급문지중이다 하세지원칙기재자제상응유의어계술고혹자혹손중대출일원사.

一收合隨其便近各定有司物件則以好木一疋白米一斗爲式殊欠略少而窃念不齊富貧盖爲窮乏者企及之地故也

일수합수기편근각정유사물건칙이호목일필백미일두위식수흠략소이절념부제부빈개위궁핍자기급지지고야

至於財力稍優之員特施另助不必拘定式事.

지어재력초우지원특시령조불필구정식사.

一財粮必先措置然後凡干工役可以就緖收合之期遠處則二月望間近地則二月旬間有司無遺收合知數輸送于本所事.

일재량필선조치연후범간공역가이취서수합지기원처칙이월망간근지칙이월순간유사무유수합지수수송우본소사.

一回文邐迤遞傳必難迅速故分面各出須次次飛傳無或遲滯而到日時各自書塡終到處付諸收合有司物件輸送時送于

일회문리이체전필난신속고분면각출수차차비전무혹지체이도일시각자서전종도처부제수합유사물건수송시송우

本所以爲所收照數之地事.

본소이위소수조수지지사.

一奉安之期當俟廟役完畢定奪通諭而未前不可不一番同會與本里人議凡事須於三月十五日各持一日粮齊會本所事.

일봉안지기당사묘역완필정탈통유이미전불가불일번동회여본리인의범사수어삼월십오일각지일일량제회본소사.

一生等俱以後進當時及門之先輩不能盡記回文中必有落書子孫中如有逮知先世事而願爲之致意則聞奇隨行幸甚.

일생등구이후진당시급문지선배부능진기회문중필유낙서자손중여유체지선세사이원위지치의칙문기수행행심.

同門(동문)

송대건(宋大建),김종영(金宗泳),김종사(金宗泗),김명준(金命俊),이증효(李曾孝),이영계(李榮係),

금이로(琴以魯),황도명(黃道明),이력(),권이환(權以鍰),권이정(權以錠),남형구(南亨久),윤종경(尹宗敬),

이시겸(李時謙),권의강(權義綱),박돈(朴燉),이진남(李振南),금대유(琴大有),권지중(權知重),조숭주(趙崇周

), 김세명(金世鳴),금익겸(琴益謙),김주명(金柱明),이우(李鍝),금상운(琴尙韻),금시희(琴是熙),권달경(權達經),

금준달(琴俊達),박후기(朴后基),박원기(朴元基),류상시(柳尙時),조계(),변유훈(邊有勳),금형달(琴亨達),

금시열(琴是說),금시오(琴是五),홍진(洪鎭),변유한(邊有翰),권이강(權以綱),금이해(琴以諧),류종해(柳宗海),

권한징(權漢澄),권한장(權漢章),홍처호(洪處浩),이유안(李惟顔),이수(李琇),송시징(宋時徵),이직(李稷),

이선룡(李先龍),류명(柳蓂),권이장(權以鏘),이방로(李邦老),이영만(李榮萬),이훤(李萱).

 

동문중(同門中)회문(回文)

위 글을 삼가 들으니 봉성(鳳城)의 사림(士林)들이 만퇴리(晩退里)

승지(承旨) 구전(苟全) 김선생(金中淸先生)의 사묘(社廟)를 세우자는 의논(議論)으로 지금 막 공역(工役)을 시작하여

물력(物力)과 재력(才力)이 약하여 생각하니 완전한 계책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런 두려운 생각에 우리 동문(同門)분들에게 참으로 마땅히 진심(盡心)으로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에 아래와 같은 곡절(曲折)이 있음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통고(通告)하는 발문(發文)을 내니

바라옵건대 첨존(僉尊)께서는 만문의 일로 소()를 도와 기한이 참을 깨우쳐서 본소(本所)로 거둬서

보내주시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경술(庚戌: 1670: 顯宗11)년 정월(正月) 16일 통문(通文)을 냄.

남형회(南亨會),류상암(柳尙馣),류형립(柳亨立)

이들 중에는 역시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회문(回文) 중에 나오지 못하거나 통고(通告)를 하지 못하여

또한 관계가 미안(未安)하므로 감히 이처럼 수합(收合) 유사(有司)를 통하여 깨우쳐 주셨습니다.

상중(喪中)인 이영선(李榮善),김세명(金世鳴),류진석(柳震錫),금이정(琴以正),송시징(宋時徵),

송시봉(宋時鳳),금정달(琴貞達),금방달(琴邦達)상주(喪主)께 전해 주어서 수합(收合)이 가능한지와

또 소()에서 거두는 물건(物件)을 각자(各自) 회문(回文)을 집 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적고 써서 집안에 글을 걸어 두면

묘수(妙手)가 될 것입니다.

나이의 순서가 바꿔짐을 면하지 못해 특히 미안(未安)하오니 아울러 사정을 살펴 용서해 주십시오.

1.우리들이 정성을 다하는 길은 바로 오늘날 가만히 생각하니 문하생(門下生)들 중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 즉 그 남은 자제(子弟)들의 생각에 따라 선인(先人)이 남기신 뜻을 마음에 두고 있는 아들이나 혹은

손자 중에서 대신 한 사람을 내도록 한다.

1. 수합(收合)에 그 가까워서 편리함에 따라 유사(有司)가 각기 정한 물건(物件)은 좋은 광목 1, 백미 1말씩으로 했는데,

매우 모자라고 약소(略少)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빈부(貧富)가 같지 않아서 대개 궁핍(窮乏)한 사람도 얻어지기를 원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재력(財力)이 약간 뛰어난 사람은 특별히 시행하는 도움은 별도로 정해진 것에 구애 받을 필요는 없도록 한다.

1. 재량(財粮)은 반드시 먼저 조치(措置)를 한 연후에 대강 공역(工役) 사업이 가능하도록 한다. 수합(收合) 기간은

먼 곳은 2월 보름까지로 하고, 가까운 곳은 210일까지로 하여 유사(有司)가 수합(收合)을 주도 면밀히 알 수 있도록

자주 본소(本所)수송(輸送)하도록 한다.

1. 회문(回文)이 이곳저곳을 거쳐 가서 차례차례 전해 보내서 반드시 빨리 보내기 어려운 고로 방면을 나누어 각기 출발해서

모름지기 차차 역참의 빠른 말로 전해서 혹시라도 지체(遲滯)됨이 없게 도착하는 일시(日時)를 각자가 적어 두어 마지막

도착한 곳에 건네주어 모든 걸 수합(收合) 유사(有司)가 물건(物件)을 수송(輸送)할 때 본소(本所)로 보내도록 해서

()에서 수효를 맞춰보는 바탕으로 하도록 한다.

1. 봉안(奉安) 시기는 마땅히 사당[] 공역(工役)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 허락 여부를 결정해서 통문으로 알리기 전에 불가불

 한 번 본리(本里)의 사람들과 회동(會同)하여 모든 일의 근본을 논의해야하므로 모름지기 315일 각자가 하루치의 양식을

가지고 본소(本所)에 모두 모이도록 한다.

1. 우리 등은 모두 후진(後進)으로써 당시의 급문(及門) 제자(弟子)들인 선배(先輩)들께는 정성을 다하여 적기에는 불가능하므로

회문(回文)중에는 반드시 글이 빠진 자손(子孫)이 있을 수 있으니 그 중에 미침이 있어서 선세(先世)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의 뜻을 남에게 알리기를 원한다고 느닷없이 들리면 뒤쫓아 실행하도록 하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동문(同門: 같은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

송대건(宋大建),김종영(金宗泳),김종사(金宗泗),김명준(金命俊),이증효(李曾孝),이영계(李榮係),

금이로(琴以魯),황도명(黃道明),이력(),권이환(權以鍰),권이정(權以錠),남형구(南亨久),윤종경(尹宗敬), 이시겸(李時謙),

권의강(權義綱),박돈(朴燉),이진남(李振南),금대유(琴大有),권지중(權知重),조숭주(趙崇周), 김세명(金世鳴),금익겸(琴益謙),

김주명(金柱明),이우(李鍝),금상운(琴尙韻),금시희(琴是熙),권달경(權達經), 금준달(琴俊達),박후기(朴后基),박원기(朴元基),

류상시(柳尙時),조계(),변유훈(邊有勳),금형달(琴亨達), 금시열(琴是說),금시오(琴是五),홍진(洪鎭),변유한(邊有翰),

권이강(權以綱),금이해(琴以諧),류종해(柳宗海), 권한징(權漢澄),권한장(權漢章),홍처호(洪處浩),이유안(李惟顔),이수(李琇),

송시징(宋時徵),이직(李稷), 이선룡(李先龍),류명(柳蓂),권이장(權以鏘),이방로(李邦老),이영만(李榮萬),이훤(李萱).

 

경술(庚戌: 1670)315일 회록(會錄)

朴燉(박돈 字회이(晦而), 임진(壬辰:1592:宣祖25)년 생)

李振南(이진남 字위중(偉仲), 임진(壬辰:1592:宣祖25)년 생)

金柱漢(김주한 字의로(倚老), 계묘(癸卯:1603:宣祖36)년 생)

南亨會(남형회 字이원(貳元), 정미(丁未:1607:宣祖40)년 생)

柳尙時(류상시 字시재(時哉), 기유(己酉:1609:光海君1)년 생)

柳尙馣(류상암 字치원(致遠), 기유(己酉:1609:光海君1)년 생)

金宗烈(김종열 字선계(善繼), 정미(丁未:1607:宣祖40)년 생)

琴益謙(금익겸 字자수(子受), 기유(己酉:1609:光海君1)년 생)

李惟顔(이유안 字자우(子愚), 경술(庚戌:1610:光海君2)년 생)

洪處浩(홍처호 字호경(浩卿), 경술(庚戌:1610:光海君2)년 생)

權知節(권지절 字입경(立卿), 신해(辛亥:1611:光海君3)년 생)號만진(晩津)

金世鳴(김세명 字선숙(善叔), 무신(戊申:1608:宣祖41)년 생)

金柱明(김주명 字광하(光夏), 무신(戊申:1608:宣祖41)년 생)

金承烈(김승열 字선술(善述), 을묘(乙卯:1615:光海君7)년 생)

權以鎰(권이일 字형중(衡仲), 신유(辛酉:1621:光海君13)년 생)

邊有勳(변유훈 字양숙(陽叔), 병진(丙辰:1616:光海君8)년 생)

權達經(권달경 字중상(仲常), 기미(己未:1619:光海君11)년 생)

金崇烈(김숭렬 字광숙(光叔), 신유(辛酉:1621:光海君13)년 생)

金揚烈(김양렬 字극소(克紹), 갑자(甲子:1624:仁祖2)년 생)

金雄烈(김웅렬 字진세(振世), 병인(丙寅:1626:仁祖4)년 생)

(조계 字지롱(之瀧), 정묘(丁卯:1627:仁祖5)년 생)

琴慶達(금경달 字군선(君善), 정묘(丁卯:1627:仁祖5)년 생)

琴時達(금시달 字여중(汝仲), 경오(庚午:1630:仁祖8)년 생)

權任(권임 字치원(致遠), 경진(庚辰: 1640:仁祖18)년 생)

權漢碩(권한석 字보경(輔卿), 계미(癸未:1643:仁祖21)년 생)

琴自達(금자달 字운흥(雲興), 계미(癸未:1643:仁祖21)년 생)

權俔(권현 字이복(而復), 무자(戊子:1648:仁祖26)년 생)

金至寬(김지관 字율이(栗而), 갑술(甲戌:1634:仁祖12)년 생)

琴以薰(금이훈 字선오(鮮吾), 을해(乙亥:1635:仁祖13)년 생)

金至精(김지정 字치언(治彦), 을해(乙亥:1635:仁祖13)년 생)

權濯(권탁 字신지(新之), 경진(庚辰:1640:仁祖18)년 생)

金至輝(김지휘 字여응(汝凝), 임오(壬午:1642:仁祖20)년 생)

金至謙(김지겸 字군익(君益), 을유(乙酉:1645:仁祖23)년 생)

(이력 字정중(鼎重), 을묘(乙卯:1615:光海君7)년 생)

金至遠(김지원 字공근(公近), 병술(丙戌:1646:仁祖24)년 생)

金柱麗(김주려 字진보(震甫), 계축(癸丑:1613:光海君5)년 생)

趙彬(조빈 字지언(之彦), 신미(辛未:1631:仁祖9)년 생)

金至一(김지일 字군집(君執), 병술(丙戌:1646:仁祖24)년 생)

金至近(김지근 字공원(公遠), 신묘(辛卯:1651:孝宗2)년 생)

 

門徒中(문도중)收合(수합)

庚戌(경술:1670)2月 日 創建時(창건시)

金柱海(김주해)(광목)2() 朴燉(박돈)2,()1,()1

邊有勳(변유훈)1,1,1斗 金世鳴(김세명)2,1,1()

柳尙馣(류상암)2,1,1斗 朴后基(박후기)2,1

權義網(권의망)2,1斗 朴元基(박원기)1,1

金宗泳(김종영)1,1斗 金宗泗(김종사)1,1

李振南(이진남)1,1斗 金命俊(김명준)1,1

柳尙時(류상시)1,1斗 宋時徵(송시징)1,1

權達經(권달경)1,1斗 柳亨立(류형립)2,1,1

南亨會(남형회)2,1,1斗 權知重(권지중)2,1,1

宋大建(송대건)2,1斗 琴益謙(금익겸)2,1,1

黃道明(황도명)1疋 琴以正(금이정)2

柳震錫(류진석)1疋 洪處浩(홍처호)1

琴亨達(금형달)2,1斗 琴貞達(금정달)2

金柱明(김주명)2,1斗 權以錠(권이정)2,1

琴是說(금시열)2,1斗 權以綱(권이강)1,1,1

琴是熙(금시희)1,1斗 李時謙(이시겸)3

(권목)正租()10斗 李貞觀(이정관)1,1

琴以諧(금이해)2,1斗 李曾孝(이증효)1

邊有翰(변유한)1疋 尹宗敬(윤종경)1

權漢徵(권한징)1疋 李萱(이훤)1,1,1

琴大有(금대유)1

 

別扶助(별부조)

鄕所(향소):(광목)2(),(:항아리)2(),東海半文里(동해반문 리)1,掏只(도지)1,

(:)1(),飯竹(반죽)1,行擔(행 담:여행용 고리)1,古里(고리)1.

鄕校(향교):2(),135,立沙鉢(입사발)5(),帖是(접시)1(),大接(대접)6(),

半文里(반문리)1().

書院(서원):(광목)5(),(:)3(:).

別會(별회):木麥(목맥:메밀)3(:).

洞內(동내):正租(정조:)35(:).

權以鎰(권이일):白紙(백지)1()13(),(:)2(:),曲子(곡 자:누룩)8().

鄭昌言(정창언):1,1.

 

子孫中(자손중)收合(수합)

金柱漢(김주한): 6, 4, 3, 2, 曲子1, 1.

金柱衍(김주연): 4, 3, 餘 上同(3,2,曲子1), 5.

金宗烈(김종렬): 6, 4, 3, 2, 曲子1圓半, 1.

金承烈(김승렬):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元烈(김원열):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崇烈(김숭렬):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別扶助(별부조)正租5.

金丕烈(김비열): 4, 3, 餘上同(3,2,曲子1圓半,1).

金揚烈(김양열): 6, 4, 3, 2, 曲子1圓半, 1.

金弘烈(김홍렬):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雄烈(김웅열):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光烈(김광열):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亨烈(김형열): 3, 5, 3, 1, 1, 曲子1.

金至寬(김지관): 4, 6, 3, 2, 曲子1圓半, 1.

金至精(김지정):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剛(김지강):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白(김지백):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輝(김지휘):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謙(김지겸):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遠(김지원):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一(김지일):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明(김지명):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近(김지근): 物件(물건) 同上(위와 같음).

金至雅(김지아): 3, 4, 3, 2, 曲子1圓半, 5.

琴以薰(금이훈): 2, 3.

李先龍(이선룡): 2, 3.

李後龍(이후룡): 2, 3.

權濯(권탁): 2, 3.

琴以中(금이중): 2, 3.

 

奉安時(봉안시)扶助(부조)

丁巳(정사:1677:肅宗3)10月 日.

金柱海(김주해)2. 趙彬(조빈)1

李惟顔(이유안)2. 洪爾遠(홍이원)2,眞荏1,1.

李時馣(이시암)(:)1. 權知義(권지의)1,白楮1.

琴瑞奎(금서규)2. 權俔(권현)1,1.

柳尙時(류상시)2. 琴箕達(금기달)1,1.

李榮係(이영계)5,1斗 邊洙(변수)2.

朴次基(박차기)1. (이력)1.

李鍝(이우)1,1斗 琴世鳴(금세명)1,1.

琴南操(금남조)1,1首 權漢澄(권한징)1.

琴南譜(금남보)1,1首 琴亨達(금형달)2.

琴自達(금자달)2,1首 琴雲達(금운달)1,1.

鄕校(향교)정목1. 書院(서원)正租1,1

文村洞內(문촌동네)8疋 並峴(병현)6

昌坪洞內(창평동네)4疋 筽內洞內(외내동네)1

所也洞內(소야동네)3疋 臥丹洞內(와단동네)3

南面洞內(남면동네)4

 

同門中回文(동문중회문)

右文槃泉 社廟營建有年而連値凶歉尙未完事豈非獘縣士林之羞也玆於今月二十四日謹行

우문반천 사묘영건유년이연치흉겸상미완사개비폐현사림지수야자어금월이십사일근행

妥靈之禮惟我同門之人固當齊會入齋敢此奉告伏願僉尊前期賁臨幸甚 丁巳十月十二日

타령지례유아동문지인고당제회입재감차봉고복원첨존전기분임행심 정사십월십이일

金世鳴 金柱明 柳尙時 琴亨達 此亦中

금세명 금주명 유상시 금형달 차역중

吾黨致誠之道正在今日而窃惟及門之中已多下世之員則其在子孫想應留意於繼述故就一

오당치성지도정재금일이절유급문지중이다하세지원칙기재자손상응유의어계술고취일

家中或子或孫通告爲弥生等俱以後進當時及門之先輩不能盡記如有逮知先世事而願爲之

가중혹자혹손통고위미생등구이후진당시급문지선배불능진기여유체지선세사이원위지

致意則聞奇賁臨爲弥門徒子弟中名字亦未詳知回文只書地名勿以此致訝爲彌 奉安日字

치의칙문기분임위미문도자제중명자역미상지회문지서지명물이차치아위미 봉안일자

已迫此文急急鱗次飛傳俾免遲滯而終到處還傳本 社幸甚

이박차문급급린차비전비면지체이종도처환전본 사행심

안동(安東),남형회(南亨會),남형구(南亨久),윤종경(尹宗敬),이시겸(李時謙),권이장(權以鏘),금이해(琴以海),변수(邊洙),

류명(柳蓂),이선룡(李先龍),류종해(柳宗海),금이정(琴以正),권석휘(權碩輝),이수(李琇),이방로(李邦老).

영천(榮川),김명준(金命俊),김종영(金宗泳),김종사(金宗泗),김고산(金高山),송시징(宋時徵),이력(), 이직(李稷).

예안(禮安),이영계(李榮係),권이환(權以鍰),황도명(黃道明),李節音(이절음).

봉화(奉化),조숭주(趙崇周),이우(李鍝),이유안(李惟顔),권달경(權達經),금시희(琴是熙),변유훈(邊有勳),박원기(朴元基),

박후기(朴后基),금남조(琴南操),금운달(琴雲達),금취규(琴聚奎),조계(),금시열(琴是說),금경달(琴慶達),권현(權俔),

금이훈(琴以薰),홍처호(洪處浩),권한징(權漢澄).

 

동문중(同門中) 회문(回文)

위의 글은 반천(槃泉) 사묘(社廟)를 건축하는데 오곡이 익는 것이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오히려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어찌 우리 고을 사림(士林)들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이에 이달 24일 위패를 사당에 잘 섬겨서 모시는 예()를 삼가

행하고자 합니다. 생각하니 우리 동문(同門)들은 진실로 모두 모여서 입재(入齋)를 함이 당연하기에 이에 받들어 고()합니다.

삼가 여러분들께서는 앞의 기일[1024]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몹시 행복합니다. 정사(丁巳:1677:肅宗3)1012

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 류상시(柳尙時), 금형달(琴亨達)이 역시 우리들이 정성을 다하는 길은 오늘날 바른 가운데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급문(及門)제자 중에는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으니 그런 즉 그 자손(子孫)이 선인(先人)

남기신 일이나 뜻을 이어서 명백히 서술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사람을 거두어야 하므로 따라서 일가(一家) 중이나 혹은 아들,

혹은 손자들에게 통고(通告)하는 것이 우리들 모두 후진(後進)으로서 당시(當時)의 급문(及門) 선배(先輩)들을 다 기록할 수

없지만 마땅히 선세(先世)의 일을 앎에 미칠 수 있기에 자기의 뜻을 밝히기를 원하는 즉 갑자기 들으면 방문해 오도록 함입니다.

우리들 문도(門徒)의 자제(子弟) 중에는 또한 이름이나 자()를 알 수 없으므로 회문(回文)에 단지 지명(地名)만 적었으니,

이에 두루 만나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봉안(奉安) 일자(日字)가 이미 급박하니 이 글을 빨리빨리 역참의 빠른 말로 비늘처럼

정연히 늘어서서 지체(遲滯)됨이 없도록 하여 마지막 도달하는 곳에서 다시 본() 사묘(社廟)로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행심(幸甚: 편지 끝말로 몹시 행복합니다.).

안동(安東),남형회(南亨會),남형구(南亨久),윤종경(尹宗敬),이시겸(李時謙),권이장(權以鏘),금이해(琴以海),변수(邊洙),

류명(柳蓂),이선룡(李先龍),류종해(柳宗海),금이정(琴以正),권석휘(權碩輝),이수(李琇),이방로(李邦老).

영천(榮川),김명준(金命俊),김종영(金宗泳),김종사(金宗泗),김고산(金高山),송시징(宋時徵),이력(), 이직(李稷).

예안(禮安),이영계(李榮係),권이환(權以鍰),황도명(黃道明),李節音(이절음).

봉화(奉化),조숭주(趙崇周),이우(李鍝),이유안(李惟顔),권달경(權達經),금시희(琴是熙),변유훈(邊有勳),박원기(朴元基),

박후기(朴后基),금남조(琴南操),금운달(琴雲達),금취규(琴聚奎),조계(),금시열(琴是說),금경달(琴慶達),권현(權俔),


금이훈(琴以薰),홍처호(洪處浩),권한징(權漢澄).

 

上樑文(상량문)

金啓光 鳩齋(김계광 구재)

學者有師以傳道難忘育我之恩歿而可祭其在斯   

학자유사이전도난망육아지은몰이가제기재사

爰闢妥靈之所辰良日吉而有待天作地藏而以遺   

원벽타령지소진량일길이유대천작지장이이유

恭惟 苟全先生太白鍾靈東璧揚彩遙遙家世太    

공유 구전선생태백종령동벽양채요요가세태

師諫議之雲仍袞袞淵源皐翁川老之徒弟魚游千   

사간의지운잉곤곤연원고옹천로지도제어유천

里貫穿史漢之文雪立三年契悟圖書之妙退而省  

리관천사한지문설입삼년계오도서지묘퇴이성

亦足以發推其有遂及諸人寬閑之野寂寞之濱爰  

역족이발추기유수급제인관한지야적막지빈원

得我所絃誦之聲禮讓之風樂育英材若將終身肯  

득아소현송지성예양지풍악육영재약장종신긍

下南山之豹雨無以爲養遂折東堂之桂枝文章自

하남산지표우무이위양수절동당지계지문장자

露於世間溝壑不變於心裡魯衛之頌盈耳符季札之

로어세간구학부변어심리로위지송영이부계찰지

觀風齊滕之路不言得孟氏之遺意靑雲紫陌試風   

관풍제등지로부언득맹씨지유의청운자맥시풍

濤而驚心墨綬朱幡望鄕園而在目白魚靑竹之異   

도이경심묵수주번망향원이재목백어청죽지이

饌佳山麗水之窮探戒石在前儼朝冠而朝服蓍龜   

찬가산려수지궁탐계석재전엄조관이조복시귀

住近每考德而考言南州之士望傾盡文敎藹藹北   

주근매고덕이고언남주지사망경진문교애애북

海之治聲第一璽書煌煌栗里之松菊欲荒倻山之   

해지치성제일새서황황율리지송국욕황야산지

風雨正急歸舟無恙載琴書而輕遙倦鳥知還釋樊   

풍우정급귀주무양재금서이경요권조지환석번

籠而自適彤庭暫入本非志於久淹玉節纔宣仍占   

롱이자적동정잠입본비지어구엄옥절재선잉점

便於長往瓜田李逕跡不涉於嫌疑蘿月松風興自

편어장왕과전이경적부섭어혐의라월송풍흥자

專於閑寂雖當聖作而咸覩其奈年邁而宜休講席   

전어한적수당성작이함도기나년매이의휴강석

長虛起名儒之嗟惜緇帷重闢爲後輩之依歸歲在   

장허기명유지차석치유중벽위후배지의귀세재

龍蛇報賢人之夕夢樓成十二赴巫陽之下招鄕里   

용사보현인지석몽루성십이부무양지하초향리

凄凉永斷相杵之響門庭冷落爭抱築場之悲風流   

처량영단상저지향문정냉락쟁포축장지비풍류

難作於九原歲月已周於三祀靑衿學子攬遺訣而   

난작어구원세월이주어삼사청금학자람유결이

翹心白首門生想摳衣而抆淚睠玆槃隱之洞實是   

교심백수문생상구의이문루권자반은지동실시

碩人之寬武夷之泉石依然芬芳可挹西河之遙路

석인지관무이지천석의연분방가읍서하지요로

不昧精爽猶存丘壑幽深宜小子莊修之地松楸掩   

불매정상유존구학유심의소자장수지지송추엄

暎卽當日望思之庵不計時詘而事贏便見人 

영즉당일망사지암부계시굴이사영편견인

士勸松楹栢板彷佛宮墻之像竹苞翬飛備盡工   

사권송영백판방불궁장지상죽포휘비비진공

之巧山蟠龍首接壟雲之靑蒼地盡龜城分竹溪之   

지교산반룡수접농운지청창지진귀성분죽계지

源派讀其書而尙友薰其德而善良吾黨勉哉里仁   

원파독기서이상우훈기덕이선량오당면재리인

美矣斯陳燕語用擧虹梁兒卽偉抛梁東金輪峰兀   

미의사진연어용거홍량아즉위포량동김륜봉올

接靑空山下小泉流不息須將果育擊群蒙兒卽偉   

접청공산하소천류부식수장과육격군몽아즉위

抛梁西一水逶迤接文溪西山信是夷齊地留得殘   

포량서일수위이접문계서산신시이제지류득잔

暉未遽低兒卽偉抛梁南豊樂蒼蒼望裡含千載歐   

휘미거저아즉위포량남풍락창창망리함천재구

翁文字在 先生筆力可同參兒卽偉抛梁北望日   

 옹문자재 선생필력가동참아즉위포량북망일

危峰連太白後重不遷實體仁嵐翠玲瓏更可悅兒   

위봉연태백후중불천실체인람취령롱경가열아

卽偉抛梁上太虛寥廊何淸朗凡爲君子欲希天須   

즉위포량상태허요랑하청랑범위군자욕희천수

向心中除慾障兒卽偉抛梁下門前官路連平野寄   

향심중제욕장아즉위포량하문전관로연평야기

語紛紛冠盖人爭似明讀書者伏願上梁之後人   

어분분관개인쟁사명독서자복원상량지후인

興文運大啓誠意以享豈文具之徒爲正學是   

흥문운대계성의이향개문구지도위정학시

崇無技藝之橫騖灝灝爾噩噩爾咸工古文于于焉

  숭무기예지횡무호호이악악이함공고문우우언

濟濟焉鼎來同好庶光明之永錫則堂室之共躋   

제제언정래동호서광명지영석칙당실지공제.

 

상량문(上樑文)

구제(鳩齋) 김계광(金啓光)

배우는 사람에게는 스승님이 있어서 도()를 전()하게 하였으니, 나를 육성(育成)시킨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자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기에 이에 위패(位牌)를 봉안할 곳을 지어 모시게 됐으니,

좋은 날과 좋은 시()를 기다림이 있었고,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두었다가 물려주셨습니다.

삼가 생각하니, 구전(苟全)선생은 태백산(太白山)의 영기(靈氣)를 모아서 <문장(文章)을 주관하는> 동벽성(東璧星)

문채(文彩)를 드날리셨습니다. 아득히 먼 가세(家世)는 태사공(太師公: 金宣平)과 간의공(諫議公: 定獻公 寶白堂 金係行)

후예(後裔)이시고, 이어진 연원(淵源)은 소고(嘯皐: 朴承任)선생과 월천(月川: 趙穆)선생의 문도(門徒)셨습니다.

물고기가 천리를 헤엄치듯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문장을 꿰뚫고,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만에 도서(圖書)의 오묘한

관계를 깨달으시고, 물러나서는 성찰(省察) 또한 풍족하게 하여 이를 미루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여러 사람들과 한가한 들판과 적막(寂寞)한 물가를 언급하면서 이에 나 자신이 해야 할 거문고 타며 시 읊는 소리와

예양(禮讓)의 기풍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영재(英材)를 기르는 것을 즐기며, 장차 종신(終身)토록 하려고 하셨습니만

어찌 남산(南山)의 표범이 비가 온다고 먹이를 구하려고 내려올까만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동당시(東堂試)에서

계림일지(桂林一枝)를 꺾으[及第]셨습니다.

문장(文章)은 절로 세상에 드러났지만 <바른 말을 하다가 배척당하여 시체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내버려져도 굴하지 않겠다는 지조는>마음속에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나라와 위()나라에 대한 칭송이 귀에 가득해서 <()나라의> 계찰(季札)<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풍물을 관람한 것

[구전(苟全)선생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신 일]과 부합되고, ()나라와 등()나라로 가는 길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맹자(孟子)가 남긴 뜻[맹자가 왕환(王驩)과 등()나라에 가면서 한마디도 의논을 안 한 고사에서 같이 간 정사(正使)

허균(許筠)과 같은 소인과는 말을 안 한 것을 비유함.]을 터득함이셨습니다.

벼슬길에서 뜻이 맞지 않은 일로 풍파(風波)에 시험당하여 마음이 놀라기도 했으며, 검은 인끈차고 붉은 깃발 펄럭이며

고향의 지방관을 의망(擬望)함이 목전에 있었습니다.

백어(白魚)와 청죽(靑竹)의 특이한 반찬을 아름다운 산과 고운 물에서 끝까지 찾으셨고, 경계석(警戒石)이 앞에 있으니

엄연히 조관(朝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고 집무하셨으며, 시귀(蓍龜)가 가까이 머물고 있으니, 매번 덕()

고찰하고 말을 상고하셔서 남쪽 고을 선비들의 인망(人望)이 모두 <선생에게로> 기울어 문치(文治)의 교화가 성대하고,

<공융(孔融)> 북해상(北海相)이 되어 문치(文治)를 했듯이 <구전선생의 선정을 베푼> 명성이 제일이어서 옥새(玉璽)가 찍힌

글발[고과표(考課表)와 자급(資級)] 빛났습니다.

<도연명의>율리(栗里)의 소나무와 국화가 황폐해지려는데,<歸去來辭> 가야산(가야산)의 바람과 비[합천(陜川)

요집조권(遙執朝權)하고 있던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비판]는 급박하기만 하여 금서(琴書)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는

가벼워서 흔들렸고, 돌아갈 곳 아는 새는 늦게나마 깨달아 새장을 벗어나듯 잠시 조정에서 벼슬하기는 했지만 본래 오래 머물겠다는

뜻이 아니었고, 지방관이 되어 겨우 왕화(王化)를 폈던 것은 길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셨습니다.

참외밭과 오얏나무가 있는 길에서의 자취는 혐의스러운데 관계하지 않으셨으며, 칡넝쿨에 걸린 달과 소나무에 부는 바람의 흥취(興趣)

한적(閑寂)함을 스스로 오로지 하셨습니다.

비록 성인(聖人)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때를 당했더라도 그 나이가 많아 당연히 쉬어야 하는 데야 어찌 하리오?

의당 강의하던 자리[講席]가 오래도록 비게 되자 명유(名儒)들이 한탄하며 애석히 여기고 있다가 학문을 닦던 곳이 다시 열려서

후배(後輩)들이 의귀(依歸)하게 되었습니다.

<현인(賢人)이 죽는다는> 용사(龍蛇)의 해에 현인(賢人)의 저녁 꿈[운명이 다함.]을 알렸고,

12곳의 백옥루(白玉樓)가 완성[문사(文士)의 죽음.]되자 무양(巫陽)을 보내 혼()을 불러들였습니다.

향리(鄕里)는 처량(凄凉)하게 <애도로> 절구질 소리도 오래도록 끊겼고, 집안[門庭]은 냉락(冷落)하여 다투어 마당을 다지듯 슬픔을

다졌습니다. 풍류(風流)는 저승[九原]에서 일으키기 어렵고, 세월은 이미 48[周於3]이 지났습니다.

<급제하여> 푸른 깃의 옷을 입은 학생들은 물려주신 비결[]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벼슬안한 백수(白首)의 제자[門生]들은

옷을 걷어 올리고 경의를 표하던 때를 생각하며 눈물을 닦습니다.

돌이켜보니 이곳 반은동(槃隱洞)은 실제로 석인(碩人:賢人)의 너그러움으로<주자(朱子)>무이(武夷)의 천석(泉石)처럼 의연(依然)하게

향기로움을 잡아당길 수 있고,

<자하(子夏)가 은거하여 강학(講學)> 서하(西河)로 통하는 오솔길은 막히지 않아 정상(精爽:精靈)이 계신 것 같고,

언덕과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서 우리들이 학문을 수습(修習)하는 곳으로 마땅하며, 소나무 호두나무[松楸]가 막아서 가려주는

즉 당일(當日)에 우러르며 사모하는 집입니다.

때가 어려움에도 도리어 넘치는 일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한편 사람들이 따라주고 선비들의 권면함을 보게 되어,

소나무 기둥과 잣나무 판자는 궁장(宮墻)의 모양과 방불(彷佛)하고, 신축 건물의 하부의 견고함은 더부룩한 대나무 같고,

상부의 치밀함은 휘치(翬雉)가 날듯이 화려하여 공수()와 같은 공교(工巧)함을 다 갖췄습니다.

산은 서려 있는 용()의 머리가 도산서원 농운정사(壟雲精舍)의 푸른 하늘과 닿아있고,

땅은 귀성(龜城: 영주) 끝 죽계(竹溪: 紹修書院)를 원류(源流)로 지파(支派)가 갈라졌습니다.

그 글을 읽고 옛날의 어진 이를 벗으로 삼아 그 덕()에 감화되어 선량(善良)하게 됐습니다. 우리들은 힘쓸지니! 살고 있는 곳에

어진 이가 많아야 아름답게 되는 법입니다. 이에 터놓고 재잘거리는 말[燕語]을 늘어놓으며 무지개 같은 대들보를 들어 올립니다.

 

兒卽偉抛梁東   아즉위포량동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金輪峰兀接靑空 김륜봉올접청공 금륜봉(金輪峰)이 우뚝하게 푸른 하늘 닿아있네.

山下小泉流不息 산하소천류불식 산 밑의 작은 샘물 쉬지 않고 흐르듯

須將果育擊群蒙 수장과육격군몽 반드시 장차 과감히 길러 뭇 어리석음 깨뜨리세.

 

兒卽偉抛梁西   아즉위포량서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一水逶迤接文溪 일수위이접문계 한 물줄기가 구불구불 문계(文溪)에 닿아있네.

西山信是夷齊地 서산신시이제지 서산은 바로 백이 숙제의 땅이라 믿고

留得殘暉未遽低 류득잔휘미거저 지는 해를 머물게 하여 뉘엿뉘엿 거리게 하네.

 

兒卽偉抛梁南   아즉위포량남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豊樂蒼蒼望裡含 풍락창창망리함 풍락산은 푸르러 바라보니 가슴 와 닿네.

千載歐翁文字在 천재구옹문자재 천년의 구양수(歐陽脩) 기문(記文)이 있으니

先生筆力可同參 선생필력가동참 선생의 필력(筆力)도 동참(同參)할 만 하겠네.

 

兒卽偉抛梁北   아즉위포량북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望日危峰連太白 망일위봉연태백 날마다 보는 우뚝한 봉우리 태백산에 이어졌네.

厚重不遷實體仁 후중부천실체인 후중함은 변함없이 인()의 실체라

嵐翠玲瓏更可悅 람취영롱갱가열 푸른 아지랑이 영롱해 새삼 즐겁게 하네.

 

兒卽偉抛梁上   아즉위포량상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리니

太虛寥廊何晴朗 태허요랑하청랑 텅 빈 허공은 어찌 그리도 맑은지,

凡爲君子欲希天 범위군자욕희천 모든 군자들 하늘 본받고 싶어 하는데

須向心中除慾障 수향심중제욕장 모름지기 마음속 욕심의 장애 제거해야지.

 

兒卽偉抛梁下   아즉위포량하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내리니

寄語紛紛冠蓋人 기어분분관개인 문 앞의 관아 길은 평야로 이어졌고,

寄語紛紛冠蓋人 기어분분관개인 분분한 갓 쓴 사람에게 전할 말은

爭似明讀書者 쟁사명독서자 밝은 창가에서 다투어 책 읽는 자가 되게나.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樑)후에 인재(人才)가 무성하고 문운(文運)이 흥성하게 크게 열리고 성의(誠意)로 제향(祭享)해야지만

어찌 겉만 꾸며[文具]서야 되겠는가?

또 바른 학문[正學]을 숭상하여 기예(技藝)가 제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없이 넓고도 엄숙하게 모두들 고문(古文)을 공부하여 학문에 뜻을 같이 하는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와서 광명(光明)을 길이 내려 준다면 당실(堂室)이 함께 높아지리라.

 

奉安文(봉안문)

嵬嵬太白 公鐘其英赫赫太師 公世其聲端潔    외외태백 공종기영혁혁태사 공세기성단결

植志孝友成德夙奮承師周流學殖敷是華以配  식지효우성덕숙분승사주류학식부시화이배

其實貫穿經史愈深於易進退之義講之旣熟鳴鶴  기실관천경사유심어역진퇴지의강지기숙명학

屢聞幽蘭自馥築室養靜碩人之軸倡學育才君子  누문유란자복축실양정석인지축창학육재군자

之樂科第非心爲親而屈忠移於 國祿宜隨之由   지락과제비심위친이굴충이어 국록의수지유

我者志不我者時一網于飛前觸後罹槎海之錄直  아자지부아자시일망우비전촉후이차해지록직

氣貫牛螭階之筆義言盈口虫或矢傍俟 公豈可久 기관우리계지필의언영구훼혹시방사 공개가구

左授于南乃隱乃吏朝衣坐府仁浹訟理如何河江  좌수우남내은내리조의좌부인협송리여하하강

慨之尋尺治功亟聞遂遷其秩卒成官諺名昇已屈  개지심척치공극문수천기질졸성관언명승이굴

由初至終焯其行事不于危展也明智號曰苟全  유초지종작기행사불우위전야명지호왈구전

意豈偶爾盛際拔茅朝望攸寄若有以爲柰此年至  의개우이성제발모조망유기약유이위내차년지

持服不起以孝自殉蓋 公之生畜大靡伸肆其盡   지복불기이효자순개 공지생축대미신사기진

用綽乎經綸先輩見推匪我言私盛名之傳西山不  용작호경륜선배견추비아언사성명지전서산불

移高風藹然終不可諼睠彼槃洞密爾丘園羹墻彌  이고풍애연종불가훤권피반동밀이구원갱장미

切典刑如存作廟翼翼衿佩盈門以日之良以將厥  절전형여존작묘익익금패영문이일지량이장궐

事詩書一邦俎豆千祀                        사시서일방조두천사

 

봉안문(奉安文)

정필달(鄭必達)

우뚝 솟은 태백산의 그 영기(英氣)가 공()에게 모아졌고, 혁혁한 태사공(太師公)의 그 명성을 공()이 이으셨네.

단중(端重) 결백함에 뜻을 세우시고 효우(孝友)로 덕()을 이루셨네. 일찍이 분발하여 스승을 이어서 두루 다니며 학문을 넓혀서

널리 꽃 피우게 하여 그 열매로 짝을 삼아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꿰뚫어 주역에 더욱 조예가 깊으셨네.

진퇴(進退)의 의리는 이미 익숙하게 강론하고, 학의 울음은 여러 번 들렸으며, 그윽한 골짜기의 난초는 절로 향기롭네.

집을 지어 조용한 마음을 기르며 큰 덕()있는 사람으로 나아가 학문을 창도(倡道)하고 인재를 기르는 것이 군자의 즐거움이네.

과거(科擧)에 급제할 마음은 없었으나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혀서 충성을 국가로 옮기니, 녹봉은 의당 따랐네.

나로 말미암음은 뜻이고 나와 같지 않음은 시절이라, 하나의 그물을 공중에 치니 먼저는 살짝 닿았다가 나중에는 걸렸네

.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기록은 곧은 기상은 견우성을 꿰뚫고, 궁전 계단인 조정(朝廷)에서의 필력(筆力)은 의로웠다고 입에 가득했으나,

<음해하는>물 여우의 화살이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어찌 오래 버틸 수 있었으랴? 영남의 신안현감에 제수되어 은거하는 관리가 됐네.

조복(朝服)을 입고 관부(官府)에 앉으니 송사 다스려져 인정(仁政)이 두루 미치고 송사(訟事)는 다스려졌네.

저 장강(長江)과 황하(黃河)강도 관개(灌漑)는 몇 자[]되지도 않듯이, 치민(治民)의 공적은 빨리 알려져,

드디어 그 직질(職秩: 品階)이 올라가게 됐으나 마침내 관원(官員)의 비방이 무성하여 명망은 높았지만 이미 물러나야 했네.

처음부터 끝까지, 그 행한 일들 빛이 났고, 위태로운 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밝은 지혜로 펼치자며 호()를 구전(苟全)이라 한 그 의미가 어찌 우연(偶然)이리오?

성세(盛世)에 현인(賢人)이 기용되어 조정(朝廷)에서 바라고 의지한 바였으니,

마치 해 봄 직하다고 여겼는데 연세가 많은 데야 어쩌겠으며 상복을 입으셨기에 기용되지 못하고 효도 다하다가 돌아가셨네.

대체로 공()의 생애는 쌓은 것이 컸지만 모두 펴지를 못하셨으니,

그것을 모두 활용하게 했더라면 경륜(經綸)하는데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선배들이 미루어 짐작했는데,

내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네.

융성한 명망은 전해지고 서산(西山)은 옮겨지지 않듯이 고상한 풍교(風敎)는 무성하여 끝까지 잊을 수가 없네.

저 반은동(槃隱洞)을 바라보니 은거하시던 언덕 화원(花園)과 아주 가까워 사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며,

전형(典刑)이 그대로 있는 듯한데, 날아갈 듯 한 묘우(廟宇)를 지으니, 선비들에 문에 가득하네.

좋은 날을 가려서 그 행사를 치르려 하네. 한 나라에 시서(詩書)로 알려졌으니, 제사(祭祀)는 천년토록 받드리라.

 

奉安文 () (봉안문 우)

山河氣全降傑生賢在理則然質稟純精才賦超英  

산하기전강걸생현재리칙연질품순정재부초영

挺我 先生齠年負笈從嘯門學稱器嘖嘖長而有

정아 선생초년부급종소문학칭기책책장이유

造心誠求道親炙川老昭源獨到宗訣是斅樂而  

심성구도친자천로소원독도종결시효락

敎旣貫經義尤精易理藻華餘技從容函丈業期于  

교기관경의우정역리조화여기종용함장업기우

廣工深向上奚助我爲發於省私妙契賢師退歸中

광공심향상해조아위발어성사묘계현사퇴귀중

年藏修志專爰得槃泉澗幽山環卜築安閒碩人之  

년장수지전원득반천간유산환복축안한석인지

寬潛心靜居一室蕭疎左圖右書緇帷一闢吾黨坌  

관잠심정거일실소소좌도우서치유일벽오당분

集覺我後覺討談墳典毫分縷卞訓誨不倦半世貞

집각아후각토담분전호분루변훈회불권반세정

固素履自裕何累外慕應擧釋褐初非所欲爲親而  

고소리자유하루외모응거석갈초비소욕위친이

屈一出於世志存經濟賢路庶泰學優 經幄才宜   

굴일출어세지존경제현로서태학우 경악재의

館閣咸期任責君子道消不安於朝三日臺僚嗟世  

관각함기임책군자도소불안어조삼일대료차세

淟涊奈此屯蹇抱負莫展顧惟學力隨遇而發事爲  

전년내차둔건포부막전고유학력수우이발사위

信赫扶倫正紀言凜立幟具僚魄觀周專對文雅  

신혁부륜정기언름입치구료백관주전대문아

儘出詩禮返齊滕路鄒範爲度彼焉我汚矧伊  

진출시례반제등로추범위도피언아오신이

誣錄箚對明白骨寒奸慝方正之則潁敏之局何施  

무록차대명백골한간특방정지칙영민지국하시

不適斂此利具專於一府百里太古絃歌化洽來暮  

불적렴차이구전어일부백리태고현가화흡래모

頌溢誰肆搆捏田園入望寄懷元亮歸舟輕颺琴書  

송일수사구날전원입망기회원량귀주경양금서

隨鶴行返鄕國婆娑初服心閒身靜樂天安命不容  

수학행반향국파사초복심한신정락천안명불용

何病始 公之用群望屬重孰不欣聳望去咨咨庶

하병시 공지용군망속중숙불흔용망거자자서

幾復施幸 公不衰仁壽莫徵喬嶽遽崩矜式誰憑   

기복시행 공불쇠인수막징교악거붕긍식수빙

高山景仰馨德彌朗愈久愈尙人懷大雅里遺仁化  

고산경앙형덕미랑유구유상인회대아리유인화

允宜祭祀彼槃一曲仗屨遺躅宛然如昨源流混混  

윤의제사피반일곡장구유촉완연여작원류혼혼

雲物淸婉祠宇可建盍相經營用妥 英靈老少彈  

운물청완사우가건합상경영용타 영령노소탄

誠大適丁力擧贏三歲不成方伯致粟守宰相

성대적정력거영삼세불성방백치속수재상

役功始告訖日吉辰良縟儀斯將不顯其光衿佩鼎  

역공시고흘일길진량욕의사장부현기광금패정

至告厥成事傳示千祀維孝與忠根于秉衷入道之  

지고궐성사전시천사유효여충근우병충입도지

宗顯允我 公識大收功行修德崇養志供職愛敬   

종현윤아 공식대수공행수덕숭양지공직애경

並篤孝思維則求忠孝門何間事君進退憂勤實德  

병독효사유칙구충효문하간사군진퇴우근실덕

之修經術之優展也眞儒講筵推能恨不同升愚翁  

지수경술지우전야진유강연추능한부동승우옹

所稱三千三百融會明說沙爺亦服凡厥所孰非  

소칭삼천삼백융회명설사야역복범궐소숙비

事業不負所學見者德薰聞風鄙敦功在斯文廟食  

사업불부소학견자덕훈문풍비돈공재사문묘식

於斯其不在玆稽典而宜罇俎淨潔明禋芬苾其庶  

어사기부재자계전이의준조정결명인분필기서

來食誠專禮隆肅肅雝雝若覩 英風歆此衷情惠   

래식성전례융숙숙옹옹약도 영풍흠차충정혜

我光明永世攸寧 南上舍主張 社事自製不用而求用上文

아광명영세유녕 남상사주장 사사자제불용이구용상문

 

() 봉안(奉安) 제문(祭文)

산하(山河)의 정기(精氣)가 온전하여 걸출한 현인(賢人)이 탄강(誕降)함은, 이치로 보면 당연한 일로,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정밀하며 재주는 뛰어나게 영명하게 타고 나신 우리 선생님이 빼어나셨습니다.

어릴 적에 책 상자 짊어지고 소고(嘯皐: 朴承任)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울 때 기국(器局) 칭찬이 그치지 않았고,

장성해서 학문이 진취하자 정성스런 마음으로 바른 도()를 구하려고 월천(月川: 趙穆)선생께 배우셨습니다.

근원을 밝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러 종지(宗指)가 되는 진결(眞訣)을 가르쳐 교화(敎化)되는 즐거움을 얻으셨습니다.

이미 경전(經典)의 대의(大義)를 꿰뚫고 더욱 주역(周易)의 이치에 정통하셨으며 문장(文章)은 여가로 하는 재주셨습니다.

한강(寒岡: 鄭逑)선생과 조용히 오래 지내시며 학문을 넓히기를 기약하며 공부는 깊이 있게 향상되셨으니 어찌 나 자신만을

돕는 것이랴? 스스로를 성찰(省察)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묘하게도 어진 스승과 마음이 맞았습니다.

중년(中年)에 고향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학문을 닦는데 뜻을 오로지하여 이에 반천(槃泉)을 얻게 되어 산이 둘러싸여 골짜기

깊은 곳 안한(安閒)곳을 골라 집을 지으니 큰 덕()이 있는 사람처럼 넉넉하였습니다.

마음을 가라 앉혀 조용히 거처하니 온 집이 조용하고 손님도 적지만 왼쪽 벽에는 그림을, 오른쪽 벽에는 글씨를 써 붙였는데

, 강학하는 서당(書堂)이 한번 열리자 우리 무리들 모여들어 나보다 뒤에 깨치는 자를 깨우치시며, 옛날의 전적(典籍)들을 토론하고

담론(談論)하면서 자세한 부분까지 분석하고 변별하면서 가르치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 세()동안 정도(正道)를 굳게 지켜서 평소의 조행(操行)이 절로 여유가 있었으니,

어찌 학문 밖의 일에 연연 하셨으랴?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관복(官服)을 입게 된 것은 애초에 하고 싶어서 했던 바가 아니라

어버이를 위하여 자신의 뜻을 굽힌 것이었습니다.

한 번 벼슬길에 진출해서는 뜻을 세상 다스리고 백성 구제함에 두었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이 열리기를 바랐었고,

학문이 뛰어나 경연(經筵) 강론의 임무를 맡았으며, 재능은 관각(館閣:奎章閣,弘文館,藝文館,春秋館,承文院,成均館 등의

청요직(淸要職).)의 직임에 마땅하여 모두들 그런 책무 맡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군자(君子)의 도()가 사라지니 조정에서의 벼슬살이도 불안하고,

3일 동안 대각(臺閣)의 관료로 있었지만 세태의 더러움이 한탄스러운데 이처럼 험악하게 막힌 상황에서 어찌

<자신의>포부를 펼칠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니 학문의 역량은 만나는 곳마다 발로되고, 일을 함에 있어서는 신실하게 빛나셨으며,

인륜(人倫)을 부지시키고 기강을 바로 잡으니, 말씀은 늠름하여 기치를 세우게 되고, 관료들 정신을 차리게 하는 복이 되셨습니다.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함[專對]에 있어서 문장과 풍아가 빛나고 여유로웠음은 모두가 시()와 예()

익힌 데서 나왔으며, ()나라와 등()에 다녀오는 길에 맹자(孟子)가 보여준 모범을 <소인(小人)과는 말을 하지 않은>본보기로

삼으셨으니, (許筠)가 어떻게 선생을 오염시킬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저 열성조(列聖朝)를 무함(誣陷)한 기록에 대해서는 차자(箚子)로 명백히 대답하여 간특한 자들의 골수를 오싹하게 하셨으니,

방정(方正)한 법칙과 영민(潁敏)한 기국(器局)은 어디서 시행하더라도 적합하지 않으리오?

이렇게 유리한 자질을 거두어다 한 고을에 전념하게 하였으니, 작은 고을이 태고(太古)의 기풍을 되살려 학문과 예악(禮樂)

교화(敎化)가 흡족하고, <훌륭한 수령이 자기네 고을에> 늦게 왔다는 칭송이 넘쳤는데, 누가 방자하게 터무니없는 허물을 얽었던가?

전원(田園)으로 들어가길 바라며,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 벼슬 버리고 떠난 심정을 이해하니, 전원으로 돌아가는

배 나는 듯이 경쾌하네. 거문고와 책 실은 짐에는 학()이 따르고, 그 행차 고향으로 돌아오니, 벼슬하기 전의 옷자락만 너울대네.

마음은 한가하고 정신은 안정되어 자연을 즐기며 운명을 편안히 여기니 무슨 병()인들 용납되지 않으리?

맨 처음 공()께서 등용되어 모든 인망(人望)이 무겁게 모여들자 누군들 좋아하며 우쭐해지지 않았던가? 이미 떠남에 있어서는

한탄하면서 다시 등용되시기를 바랐는데, ()께서는 노쇠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어진 분이 장수한다는 징험이 없음인지, 태산 같던 선생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누구를 의지하여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며, 향기 나는 덕행(德行)은 더욱 맑아 오래될수록 더욱 숭상하게 되네. 사람들은 큰 학자라 사모하고,

마음에는 어진 교화가 남아 있으니, 의당 그분을 제향(祭享)합니다.

저 반천(槃泉)의 한 골짜기는 선생께서 남기신 자취가 남아 있어서 어제처럼 완연하고,

근원 있는 샘물 졸졸 흘러 경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니 사우(祠宇)를 짓기에 알맞습니다.

어찌 서로 경영(經營)하여 영령(英靈)을 편안히 하도록 노소(老少)가 정성을 다하지 않으랴?

때마침 큰 흉년을 만나 재력(財力)에 비하여 큰 공사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3년 동안이나 완성하지 못하다가 관찰사[方伯]도 곡식을

보내주고 수령도 공역(工役)을 도와서 이제야 그 준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때 좋은 날을 가려 이에 번거로운 의례(儀禮)를 하게 됐으니 그 빛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많은 선비들이 줄줄이 이르러 그 일이

완성됨을 고()하며 천년토록 향사(享祀)함을 보입니다.

효도와 충성은 사람의 떳떳한 도리를 근본으로 하여 도()에 들어가는 종지(宗指)가 되는데,

밝고 진실한 우리 공()께서는 식견도 크시고 공()도 거두어 행신(行身)을 닦아 덕망(德望)이 높으시고 어버이 뜻을 따라

봉양(奉養)하며 자식 된 직분을 다하시며 애호(愛護)와 공경이 아울러 독실하여 효도하는 생각이 법이 되셨습니다.

충신은 효자 집안에서 구하듯이 임금을 섬김에 어찌 차이가 있으셨을까? 진퇴(進退)함에 부지런하고 근심하며,

실질적인 덕()을 닦고, 경술(經術)이 뛰어나서 참 선비로 알려져 경연(經筵) 강석(講席)에서의 능력을 미뤄보고 함께 자리하지 못해

한스럽다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공이 칭찬한 바 있으며,

곡례(曲禮) 3천과 경례(敬禮) 3백을 소상히 설명하고 분명하게 설명한다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공 역시 감복했답니다.

무릇 그 터득하는 것은 누구나의 사업이 아니고, 배운 바를 져버리지 않으셨기에 보는 이는 덕()에 감화(感化)되고,

기풍을 듣는 이는 비루함이 돈독하게 바뀌니 유학(儒學)을 진흥시킨 공로가 있어서 여기서 제향(祭享)을 받으셔야 할 테니

여기에 계시지 않겠는가? 옛날의 전례를 상고하여 마땅히 제주(祭酒)와 제수(祭需)들을 정결하게 하여 깨끗하게 지내는 제사가

향기로우니, 이에 강림하셔서 드시기 바랍니다.

정성은 전일하고 의례(儀禮)는 융성하여 엄숙하고도 화기가 넘쳐서 영걸스런 기풍을 뵙는 듯 하오니,

이 충정(衷情)에 흠향하시고 저희들에게 광명한 은혜를 내리시고 영원토록 평안하옵소서.

(南亨會) 진사가 제사 받드는 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자신이 지은 봉안문을 사용하지 않고,

위의 글<정필달의 봉안문>을 구하여 사용했다.

 

常享祝文(상향축문)

柳經立(류경립)

積學自修 적학자수 학문을 쌓아 스스로 수양하셔서

推敎後生 추교후생 후생(後生)들에게 미루어 가르치시니

名尊德邵 명존덕소 명망 높고 덕망(德望)도 높으셔서

瞻慕彌誠 첨모미성 우러러 사모하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합니다.

 

() 追至(나중에 왔음)

鄭必達(정필달)

學造承師 학조승사 학문 조예는 스승을 계승하셔서

道全守志 도전수지()는 지조 지키기를 온전히 하셨으며

留馥鄕邦 유복향방 향기를 고향에 머물게 하셨으니,

永奠勿墜 영전물추 영원토록 제향(祭享)올림이 끊임이 없으리라.

 

呈文1(정문1)

化民生員朴燉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伏以   

화민생원박돈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복이

故分承政院承旨苟全金先生諱中淸天稟穎秀學

고분승정원승지구전금선생휘중청천품영수학

問精博早遊月川趙先生門下見道已明歸而築室  

문정박조유월천조선생문하견도이명귀이축실

于槃隱先墓之下遠近志學之士聞風益進日夜孜  

우반은선묘지하원근지학지사문풍익진일야자

孜講論不輟歲庚戌魁擢文科第二篤學之誠未嘗  

자강론불철세경술괴탁문과제이독학지성미상

少弛鄕人之束脩已上無不敎育其餘薰德而善良  

소이향인지속수이상무불교육기여훈덕이선량

者幾許人哉世之人爭務崇報之擧稍有學問上事

자기허인재세지인쟁무숭보지거초유학문상사

業則其沒也或書院或鄕社皆有所享而民等身居  

업칙기몰야혹서원혹향사개유소향이민등신거

十室小邦旣有鄕校又有書院物力凋凶歉且酷  

십실소방기유향교우유서원물력조흉겸차혹

致令成就後學大有功於斯道之宗儒尙稽血食之  

치령성취후학대유공어사도지종유상계혈식지

典豈惟民等之所大愧抑又遠方多士之所慨惜者  

전개유민등지소대괴억우원방다사지소개석자

也今者公議歸一旣定燔瓦及成造有司期以開春  

야금자공의귀일기정번와급성조유사기이개춘

解凍卽令赴役創建里社于槃隱書室之基而時  

해동즉령부역창건리사우반은서실지기이시

力嬴百事無形必賴斯文 城主大有所扶顧然後   

역영백사무형필뢰사문 성주대유소부고연후

可以濟事而所急者必春前先運石塊石塊之運莫  

가이제사이소급자필춘전선운석괴석괴지운막

於移市近地自今月二十五日場市爲始 命定   

어이시근지자금월이십오일장시위시 명정

官吏一人驅送捧石之地是固移市就役之通規而  

관리일인구송봉석지지시고이시취역지통규이

前頭烟軍使用之日亦當呈請伏願 城主閤下特 

  전두연군사용지일역당정청복원 성주합하특

軫民等崇報之誠另施行下無任感恩祈懇屛營之至伏惟  

진민등숭보지성령시행하무임감은기간병영지지복유

기유(己酉:1669: 현종10)11월 일

화민(化民)생원(生員)박돈(朴燉),첨지(僉知)금대유(琴大有),유학(幼學)권지중(權知重),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권지절(權知節),김주려(金柱麗),금대달(琴大達),변유훈(邊有勳),박후기(朴后基),

금운달(琴雲達),권현(權俔),금경달(琴慶達),권경(權儆),금호(琴箎),금두(琴枓),김세열(金世烈),

김계열(金繼烈),권임(權任),김휘열(金徽烈),박주금().

 

題辭 移場運石亦似有弊而猶愈於發軍就役限兩月許移 제사 이장운석역사유폐이유유어발군취역한양월허이.

 

정문1(呈狀文1: 청원서1)

고을의 백성들인 생원(生員) 박돈(朴燉)등은 삼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엎드려 글을 올립니다.

() 분승정원(分承政院) 승지(承旨)인 구전(苟全) 김선생(金先生) () 중청(中淸)께서는 천품(天稟)이 총명하고 빼어나고

학문(學問)이 깊고 넓어서 일찍이 월천(月川) 조선생(趙穆先生)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셔서 도()에 이미 밝음을 보이셔서

집에 돌아와서는 반은동(槃隱洞) 선조(先祖)의 묘소(墓所) 아래에 집을 짓자, 원근(遠近)의 배움에 뜻을 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더욱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나아가려고 하여 강론(講論)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경술(庚戌: 1610)년 문과(文科)에 갑과(甲科)2등으로 급제하셔서 독실한 학문의 정성으로 과연 게으름 없이 향인(鄕人)에게

() 1()의 폐백을 갖고 집지(執贄)를 한[束脩] 사람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은 바가 없어서 그 훈자(薰炙)의 덕()이 남아

선량(善良)해진 사람이 그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은덕 갚는 거사에 힘쓰지만 학문상(學問上)의 사업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혹 서원(書院)이나

혹은 향사(鄕社) 모두 제향(祭享)하는 바가 있지만 우리들은 10()의 작은 지역에 살고 있어서 이미 향교(鄕校)가 있지만

또 서원(書院)의 물력(物力)이 쇠약하여 병들고, 흉년이 또한 혹심하여 지금 후학(後學)들에게 유학(儒學)의 종유(宗儒)가 되게

하는 큰 공()이 있어서 국전(國典)으로 제사를 지내는 혈식(血食)의 법도[]를 이룬 바 있습니다.

어찌 우리들의 크게 부끄러운 바가 아니겠습니까? 또 먼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개탄하고 애석해 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공의(公儀)가 하나로 돌아와서 이미 번와(燔瓦)를 하기로 정()해서 만드는 유사(有司)가 해동(解凍)되는 봄철이 되기를

기다리는 즉 지금 반은동(槃隱洞) 서실(書室)터에 이사(里社)를 창건(創建)하는 부역(赴役)을 하기로 해서 시기도 물리치고 힘도

넘쳐나서 모든 일이 형체가 없지만 반드시 유학(儒學)의 힘입는 바가 되었습니다.

성주(城主)께서 돌아본 연후에 큰 도움이 있었는 바 이룰 수 있도록 급한 바는 반드시 봄이 되기 전에 먼저 석괴(石塊)를 운반해야

됩니다. 석괴(石塊)의 운반을 끊지 마시고 가까운 곳으로 시장을 옮기는 이달 25일 장시(場市)가 시작될 때 명()하셔서

관리(官吏) 1명을 정해서 돌을 들어 올리는 곳으로 달려 보내게 하십시오.

이는 진실로 시장을 옮기는 역할을 하는 일반에게 적용되는 규칙으로 이전의 광부(鑛夫)를 사용하는 날 또한 마땅히 엎드려

청원합니다. 성주(城主)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마음 아파하는 우리들의 은덕을 갚는 정성과 따로 시행되도록 해 주시면

쓸모없지만 은혜에 고맙게 여기고 간절히 기원합니다. 삼가 생각하오니 마음이 갈팡질팡함에 이르게 됩니다.

기유(己酉:1669: 현종10)11월 일

화민(化民)생원(生員)박돈(朴燉),첨지(僉知)금대유(琴大有),유학(幼學)권지중(權知重),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권지절(權知節),김주려(金柱麗),금대달(琴大達),변유훈(邊有勳),박후기(朴后基),

금운달(琴雲達),권현(權俔),금경달(琴慶達),권경(權儆),금호(琴箎),금두(琴枓),김세열(金世烈),

김계열(金繼烈),권임(權任),김휘열(金徽烈),박주금().

 

제사1(題辭1: 판결문1)

돌을 운반하여 현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또한 더욱 군사를 일으켜 공역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폐단이 있는 것 같으니

두 달에 한()하여 허락한다.

 

呈文2(정문2)

奉化僉知琴大有等謹齋沐上書于安東貳道 閤  

봉화첨지금대유등근재목상서우안동이도 합

下伏以尊賢之誠秉彛同得崇報之擧立祠爲先自

하복이존현지성병이동득숭보지거입사위선자

古聖人內而庠序學校外而書院里社無非出於尊

고성인내이상서학교외이서원리사무비출어존

賢之誠而崇報之典所以始也況今 聖化雲興文 

 현지성이숭보지전소이시야황금 성화운흥문

敎日照院社之設無賢不尊竊惟我故分承政院承

교일조원사지설무현부존절유아고분승정원승

旨苟全金先生諱中淸幼而穎悟夙曉經史必欲聞

지구전금선생휘중청유이영오숙효경사필욕문

道學淵源之所自從遊月川趙先生門下見道已明

도학연원지소자종유월천조선생문하견도이명

歸而築室于先塋之下弟子益進日夜講劘以老親

귀이축실우선영지하제자익진일야강마이로친

之命屈意擧業魁捷庚戌甲科講學之誠孜孜彌篤

지명굴의거업괴첩경술갑과강학지성자자미독

一鄒之中有拔萃文才而未知儒學者皆提撕警覺

일추지중유발췌문재이미지유학자개제서경각

至於隣近士類咸聚成德韓子所謂薰其德而善良

지어인근사류함취성덕한자소위훈기덕이선량

幾千者非此之謂與凡今之士有裨於吾道者旣歿

기천자비차지위여범금지사유비어오도자기몰

之後皆立祠尊慕而生等僻在峽中力擧嬴尙未

지후개입사존모이생등벽재협중력거영상미

伸崇報之願今將稍待春和先建社廟或燔瓦或成

신숭보지원금장초대춘화선건사묘혹번와혹성

造而十室居民至尠將無以模樣窃以生等介處   

조이십실거민지선장무이모양절이생등개처

府春陽奈城才山三縣之間伏聞 貳道閤下凡在  

부춘양내성재산삼현지간복문 이도합하범재

尊賢之擧必欲務致其誠此生等之所以吐露唐突

존현지거필욕무치기성차생등지소이토로당돌

者伏願 貳道閤下俯採輿情春陽奈城才山三縣  

자복원 이도합하부채여정춘양내성재산삼현

烟軍各三四十名特施題級 行下生等無任區區  

연군각삼사십명특시제급 행하생등무임구구

感恩屛營之至伏惟                         

감은병영지지복유

경술(庚戌:1670:顯宗11)년 정월 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금대유(琴大有),생원(生員)박돈(朴燉),유학(幼學)권지중(權知重),

생원(生員)이우(李鍝),유학(幼學)이유증(李惟曾),홍진(洪鎭),김세명(金世鳴),김주명(金柱明),

류상시(柳尙時),이유안(李惟顔),금익겸(琴益謙),변유훈(邊有勳),찰방(察訪)권지절(權知節),금시희(琴是熙), 권달경(權達經),

조숭주(趙崇周),김주려(金柱麗),권이일(權以鎰),이로(李鑪),금상운(琴尙韻),금형달(琴亨達), 이유민(李惟閔),금자달(琴自達),

금시중(琴是中),조계(),박민기(朴旻基),금천달(琴天達),박후기(朴后基), 박원기(朴元基),금경달(琴慶達),권현(權俔),

금호(琴箎),이응명(李應明),김휘열(金徽烈),이연정(李延挺),조유(趙楡),금륜(琴綸),권임(權任),금역(琴繹),권백윤(勸伯胤),

금경(琴絅),금두(琴枓),금성훈(琴聖勛),금홍달(琴弘達),이응협(李應莢),금무달(琴武達).

 

題辭 越境調級煙軍事甚非便尊師建宇之誠懇切故春城山三縣役丁各二十名題給

제사 월경조급연군사심비편존사건우지성간절고춘성산삼현역정각이십명제급

 

정문2(呈狀文2: 청원서2)

봉화(奉化)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금대유(琴大有)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안동(安東) 2()의 합하(閤下)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정성은 인간의 도리를 굳게 지키는 동시에 은덕을 갚는 사당을 세우는 거사를 하게 됐습니다.

우선 옛날부터 성인(聖人)께서는 안으로는 상서(庠序)라는 학교와 밖으로는 서원(書院)이나 이사(里社)를 세워서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정성과 은덕을 갚는 법도를 나타내지 않음이 없게 하신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성인의 교화인 문교(文敎)가 구름처럼 일어나고 원사(院社)의 설치가 해를 내리 쪼여도 존경하지 않아

현인(賢人)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고() 분승정원(分承政院) 승지(承旨)셨던 구전(苟全) 김선생(金先生) () 중청(中淸)께서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셔서 일찍부터 경사(經史)에 밝아 반드시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듣고자 하여 스스로 월천(月川:趙穆)선생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시면서 도()에 이미 밝음을 보이자 고향으로 돌아오셔서 선영(先塋) 아래에 집을 지으니 제자(弟子)들이

나아감을 더하여 밤낮 강론하고 연마하셨습니다.

나이 많은 어버이의 명()으로 뜻을 굽혀서 과거(科擧)에 대비한 학문으로 경술(庚戌: 1610)년에 갑과(甲科) 수석에 잇닿았습니다.

강학(講學)의 정성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두루 유학(儒學) 하나에 독실한 중에 문필의 재능이 여럿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서 아직 알지

못하는 유학자(儒學者) 모두에게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여 경계하여 각성시켜 인근의 사류(士類)에 이르기 까지 모두 모여 몸에 덕()

지니게 하여 한유(韓愈)가 말한 바 그 덕()의 향기로 선량(善良)해진 사람이 기천(幾千)명은 됩니다. 이런 말은 무릇 요즘의 선비들

뿐 만 아니라 우리 도()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이미 돌아가신 뒤라서 모두들 사당을 세워서 받들어 사모하여 산골짜기 후미진 곳에 있는

우리들이 나머지를 일으키기엔 힘이 모자라 도리어 은덕을 갚는 소망을 펼치지 못하다가 지금 점점 화창한 봄이 되기를 기다려 먼저

사묘(社廟)를 세우고자 혹은 기와를 굽고, 혹은 10()의 작은 고을에 사는 적은 사람들이 만들어 이루기에는 모양이 갖춰짐이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부()의 춘양(春陽),내성(奈城),재산(才山)3개 현() 사이에 삼가 듣기를 2()합하(閤下)

께서는 무릇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거사에 있어서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고 싶어 한다고 하니 우리들이 당돌하게 토로(吐露)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2()의 합하(閤下)께서는 구부려 백성들의 심중을 가려서 춘양(春陽), 내성(奈城), 재산(才山)3개 현()

광부(鑛夫) 3~40명씩의 인원을 내리는 문제를 특별히 시행해주신다면 맡은 일이 없는 변변치 못한 우리들은 은혜에 감사하며 엎드려

생각하니 두려워 마음이 갈팡질팡하여 몹시 편하지 않습니다.

경술(庚戌: 1670: 顯宗11)년 정월 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금대유(琴大有),생원(生員)박돈(朴燉),유학(幼學)권지중(權知重),

생원(生員)이우(李鍝),유학(幼學)이유증(李惟曾),홍진(洪鎭),김세명(金世鳴),김주명(金柱明),

류상시(柳尙時),이유안(李惟顔),금익겸(琴益謙),변유훈(邊有勳),찰방(察訪)권지절(權知節),금시희(琴是熙), 권달경(權達經),

조숭주(趙崇周),김주려(金柱麗),권이일(權以鎰),이로(李鑪),금상운(琴尙韻),금형달(琴亨達), 이유민(李惟閔),금자달(琴自達),

금시중(琴是中),조계(),박민기(朴旻基),금천달(琴天達),박후기(朴后基), 박원기(朴元基),금경달(琴慶達),권현(權俔),

금호(琴箎),이응명(李應明),김휘열(金徽烈),이연정(李延挺),조유(趙楡),금륜(琴綸),권임(權任),금역(琴繹),권백윤(勸伯胤),

금경(琴絅),금두(琴枓),금성훈(琴聖勛),금홍달(琴弘達),이응협(李應莢),금무달(琴武達).

 

제사2(題辭2: 판결문2)

 

경계를 넘어서 광부(鑛夫)를 조달하는 일은 매우 아니나 스승을 높이는 건물을 짓는 정성이 간절하므로 춘양(春陽),내성(奈城),

재산(才山)3()에서 역정(役丁)을 각 20명씩 주기로 한다.

 

呈文3(정문3)

化民生員朴燉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伏以  

화민생원박돈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복이

故民承旨金中淸道學文章有大功於吾道遠近後

고민승지금중청도학문장유대공어오도원근후

學之所尊師而爭慕立祠崇報之擧不謀而同辭   

학지소존사이쟁모입사숭보지거부모이동사

今方伐木創始成造之役而必賴 官家優惠民丁  

금방벌목창시성조지역이필뢰 관가우혜민정

庶幾成事故民等前已列明呈訴伏蒙 城主右文  

서기성사고민등전이열명정소복몽 성주우문

之政許令移市運石適値積雪之下姑停運石而今

지정허령이시운석적치적설지하고정운석이금

則煙軍之役最急移市之擧亦切自今月十日爲始

칙연군지역최급이시지거역절자금월십일위시

運石至於煙軍則必出六面相遞赴役嗚呼必有非

운석지어연군칙필출육면상체부역오호필유비

常之政然後能建非常之事苟非我 城主爲斯文  

상지정연후능건비상지사구비아 성주위사문

非常之政民等更無所訴之地民等之遑遑愍

비상지정민등갱무소소지지민등지황황민

聲疾呼而不能自己者豈徒然哉迺者花府及宣城

성질호이불능자기자개도연재내자화부급선성

少得煙軍而越他官來役者豈能一一乎伏願 城  

소득연군이월타관래역자개능일일호복원 성

主特命題給煙軍又令移市以副遠近多士之望民

주특명제급연군우령이시이부원근다사지망민

等不勝感恩迫切祈懇之至伏惟               

등부승감은박절기간지지복유

경술(庚戌:1670:顯宗11)2월 일

화민(化民:지역 주민)첨지(僉知)이진남(李振南),금대유(琴大有),유학(幼學)조숭주(趙崇周),권지중(權知重), 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생원(生員)남형회(南亨會),유학(幼學)권지절(權知節:뒤에 성현(省峴)찰방(察訪)에 제수됨.),변유훈(邊有勳),

금시희(琴是熙),금형달(琴亨達),금시중(琴是中),금호(琴箎),박원기(朴元基),조계(),생원(生員)이우(李鍝),

유학(幼學)금자달(琴自達),이로(李鑪),금만달(琴萬達),권백윤(權伯胤),금두(琴枓),금경(琴絅),김시열(琴是說),박후기(朴后基),

천달(琴天達),이유안(李惟顔),권현(權俔),이유증(李惟曾),이유민(李惟閔), 금경달(琴慶達),권경(權儆),이연정(李延挺),

김세열(金世烈),김계열(金繼烈),금륜(琴綸),금성훈(琴聖勛), 김휘열(金徽烈),권임(權任),조한기(趙漢基),금역(琴繹),

권한석(權漢碩).

 

題辭 移市段日寒石凍乙仍于姑不移送是在果自後場許移爲弥香徒軍五十名限三日題級

제사 이시단일한석동을잉우고부이송시재과자후장허이위미향도군오십명한삼일제급

 

정문3(呈狀文3: 청원서3)

지역 주민인 생원(生員) 박돈(朴燉)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성주(城主)합하(閤下)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살피니 고() 승지(承旨) 김중청(金中淸)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우리 도(: 儒學)에 공()이 커서 원근(遠近)

후학(後學)들이 스승으로 존경하여 다투어 사당을 세워서 숭모(崇慕)하는 바입니다.

은덕을 갚는 거사를 헤아리지 못하고 말처럼 금방 벌목(伐木)을 하고 집을 짓는 공역(工役)을 시작하려고 합니다만 반드시 장정들을

관가(官家)의 도타운 혜택을 의지하여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므로 우리들은 앞서 이미 이름을 나열하여 소청(訴請) 올렸었습니다.

성주(城主)께 엎드려 바라옵건대 위의 글들의 부역을 허락하는 명령을 내리셔서 시장을 옮기면서 돌 운반이 적설(積雪)을 당하여

돌을 운반하는 것이 잠깐 정지하고 있는 지금은 광부(鑛夫)들의 역할이 가장 급합니다.

시장을 옮기는 거사(擧事) 역시 절실하지만 이달 10일부터 돌을 운반하기 시작하여 광부(鑛夫)들이 이르기까지 반드시 6()에서

나와서 서로 번갈아 부역(赴役)해야 합니다.

아아! 반드시 비상(非常)의 행정이 있은 연후에 비상(非常)의 일을 세울 수 있으며, 진실로 우리 성주(城主)가 아니면 유학(儒學)

위한 비상(非常)한 행정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다시 하소연 할 바가 없는 지역 주민 등이 자기 자신들은 할 수 없음에 황황히 미련하게 격렬하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어찌 까닭 없이 그러겠습니까?

요사이 안동부(安東府: 花府) 및 선성(宣城: 義城)에서 광부(鑛夫)들을 조금 얻었는데, 지경을 넘어 타관(他官)에서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주(城主)님의 특명(特命)으로 광부(鑛夫)들을 배정해 주시고, 또 시장을 옮기는 일을 부차적인 명령으로

해 주시길 원근(遠近)의 선비들의 바람이자 우리들은 그 은혜에 고맙게 여김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니 절박(切迫)하여 간절히 기원함에 이르렀습니다.

경술(庚戌:1670:顯宗11)2월 일

화민(化民:지역 주민)첨지(僉知)이진남(李振南),금대유(琴大有),유학(幼學)조숭주(趙崇周),권지중(權知重), 김세명(金世鳴),

김주명(金柱明),생원(生員)남형회(南亨會),

유학(幼學)권지절(權知節:뒤에 성현(省峴)찰방(察訪)에 제수됨.),변유훈(邊有勳),금시희(琴是熙),

금형달(琴亨達),금시중(琴是中),금호(琴箎),박원기(朴元基),조계(),생원(生員)이우(李鍝),

유학(幼學)금자달(琴自達),이로(李鑪),금만달(琴萬達),권백윤(權伯胤),금두(琴枓),금경(琴絅),

김시열(琴是說),박후기(朴后基),금천달(琴天達),이유안(李惟顔),권현(權俔),이유증(李惟曾),이유민(李惟閔), 금경달(琴慶達),

권경(權儆),이연정(李延挺),김세열(金世烈),김계열(金繼烈),금륜(琴綸),금성훈(琴聖勛),

김휘열(金徽烈),권임(權任),조한기(趙漢基),금역(琴繹),권한석(權漢碩).

 

제사3(題辭3: 판결문3)

 

이시(移市)는 일단 날이 춥고 돌이 얼어서 잠시 이송(移送)을 않고, 이 결과에 있어서 후장(後場)부터 옮기는 것을 허락할 것이며,

얽히기 위해 향도군(香徒軍: 상여꾼) 50명을 3일간 주도록 함.

 

呈文4

化民生員李鍝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惶汗  

화민생원이우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황한

無任伏以民等與豊榮安禮等邑士子數百人協力

무임복이민등여풍영안례등읍사자수백인협력

同心營建里社於槃泉洞以承旨金先生號苟全諱

동심영건리사어반천동이승지금선생호구전휘

中淸廟享又以 文宣王畵像奉安於講堂槃泉則  

중청묘향우이 문선왕화상봉안어강당반천칙

先生平日築室講學之地也 畵像則先生朝 天   

선생평일축실강학지지야 화상칙선생조 천

之日印來也講堂奉安則一遵白雲洞書院明倫堂

지일인래야강당봉안칙일준백운동서원명륜당

奉安之規也豊榮安禮等邑之士則先生之徒弟及

봉안지규야풍영안례등읍지사칙선생지도제급

徒弟之子孫也先生依歸月川趙先生門下學有淵

도제지자손야선생의귀월천조선생문하학유연

源而訓誨後生隨才成就餘馥遺存慕切羹墻歿而

이훈회후생수재성취여복유존모절갱장몰이

可祭其在斯人而白地營創未經十年凡百之具不

가제기재사인이백지영창미경십년범백지구불

成模樣只有墻下半畝之田以爲廟庫直居接之基

성모양지유장하반무지전이위묘고직거접지기

而急走位田之故權俔金至精一樣見侵於驛卒等

이급주위전지고권현금지정일양견침어역졸등

天水之變幸賴我 閤下明正處決得有所伸則作  

천수지변행뢰아 합하명정처결득유소신칙작

木之納在法固然卽當盡心措納而新創之所物力

목지납재법고연즉당진심조납이신창지소물력

尺寸之布辦備無策不得已齊聲冒陳伏乞   

척촌지포판비무책부득이제성모진복걸

閤下特采輿情屈法施德特蠲作木俾護書齋則在

합하특채여정굴법시덕특견작목비호서재칙재

公少損而在社大補 閤下興學之政洋溢於境表  

공소손이재사대보 합하흥학지정양일어경표

而翁歸右文之化永賴於蜀州民等無任激切祈懇

이옹귀우문지화영뢰어촉주민등무임격절기간

之至 癸亥三月 日                         

지지 계해삼월 일

題辭 多士所請豈不依施耶                  

제사 다사소청개부의시야

 

정문4(呈狀文4: 청원서4)

화민(化民: 선산(先山)이 있는 제 고장의 수령에 대한 백성의 지칭 대명사.) 생원(生員) 이우(李鍝)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니 너무 두려워서 흘리는 땀을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우리들은 풍기(豊基),영주(榮州),안동(安東),예안(禮安) 읍 등의 과거(科擧) 준비생[士子]수백 명이 한 마음으로 협력(協力)하여

반천동(槃泉洞)에 승지(承旨)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선생의 이사(里社)인 사당(祠堂)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습니다.

또 반천(槃泉) 강당(講堂)에 공자[文宣王]님의 화상(畵像)을 봉안(奉安)한 즉 선생께서 평소에 강학(講學)하시던 곳에 집을 지으신

것입니다. 화상(畵像)인 즉 선생께서 북경(北京)에 가셨을 적에 인출(印出)해 온 것 입이다.

강당(講堂)에 봉안(奉安)한 것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명륜당(明倫堂)의 봉안(奉安) 규정을 그대로 준수하여,

풍기(豊基), 영주(榮州), 안동(安東), 예안(禮安) 등 읍()의 선비들인 즉 선생(先生)의 제자들이거나 제자(弟子)의 자손들입니다.

선생(先生)께서는 월천(月川) (趙穆)선생의 문하에 의지하여 학문의 연원(淵源)이 있어 후생(後生)들을 가르쳐서 재능에 따라 성취시켜

사모하는 남은 향기가 있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공을 남기셨습니다.

돌아가셔서 그 유림(儒林)들이 제사할 곳으로 경영하기 시작하여 아직 10년이 지나도록 공연히 모든 것이 모양이 갖춰지거나 구비되지를

못하고, 단지 담장 밑에 반 이랑(1a)의 밭이 있어서 사당[] 고직(庫直)이가 잠시 몸을 의탁하여 거주하는 터도 역졸(驛卒)에게

급료 대신으로 준 토지라서 권현(權俔)과 김지정(金至精)이 같이 역졸(驛卒)등이 침범하는 하늘과 물의 변()하는 모양을 보고는 다행히

우리 합하(閤下)께 부탁하여 공명정대한 판결 처분을 얻은 바가 있습니다.

말씀 드리는 바인 즉 곡식 대신에 무명으로 조세를 납부하는 법은 원래 그러한 즉 당연히 진심(盡心)으로 납부를 해야겠지만 새로 만든 것

인 바 물력(物力)이 조채(: 병들어 시든 백성)하여 한 토막의 베도 판상(辦償)할 대비책이 없으니 부득이 합하(閤下)께 한 목소리로

진정을 무릅쓰고 엎드려 비오니 특별히 백성들의 마음을 가려서 법을 거두어 덕()을 시행하셔서 특별히 무명으로 납부하는 것을 밝혀서

서재(書齋)를 수호하는 것을 따른 즉 공()적으로는 작은 손실일지 몰라도 사()에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고, 합하(閤下)의 흥학(興學)하는

정사(政事)가 차고 넘쳐서 지경(地境)의 표석(表石: 송덕비)이 될 것이고, 촉주(蜀州)에서 영원히 의지하는 학문을 숭상하여 교화를 한

<전한의 촉군 태수>문옹(文翁)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맡은 일 없이 말이 격렬하고 절실하여 간절히 기원함에 이르렀습니다.

계해(癸亥: 1683: 肅宗9)3월 일

 

제사4(題辭4: 판결문4)

 

많은 선비들의 청원(請願)인바 어찌 청원에 의하여 허가하지 않으랴?!

 

呈文5

化民幼學琴箎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惶恐    

화민유학금호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황공

無任伏以尊賢之誠秉彛同得崇報之擧立祠爲先   

무임복이존현지성병이동득숭보지거입사위선

自古聖人內以庠序學校外以書院里社無非出於   

자고성인내이상서학교외이서원리사무비출어

尊賢之誠而崇報之典所以始也曾在十數年前民

존현지성이숭보지전소이시야증재십수년전민

等與本縣儒生及隣近數三邑士子營建精舍於槃   

등여본현유생급인근수삼읍사자영건정사어반

泉洞以故承旨苟全金先生諱中淸廟享又以 先    

천동이고승지구전금선생휘중청묘향우이 선

聖文宣王畵像奉安於講堂蓋苟全先生幼而穎悟   

성문선왕화상봉안어강당개구전선생유이영오

夙曉經史欲聞道學淵源之所自從遊月川趙先生門

숙효경사욕문도학연원지소자종유월천조선생문

下早知斯道蹊逕退而築室于槃泉洞以爲藏修之   

하조지사도혜경퇴이축실우반천동이위장수지

所弟子日進日夜講磨以老親之命屈意科場魁捷   

소제자일진일야강마이로친지명굴의과장괴첩

庚戌甲科講學之誠晩而彌篤一鄕之中有文才拔   

경술갑과강학지성만이미독일향지중유문재발

萃而未知儒學者皆提撕警覺至於隣近士類咸聚   

췌이미지유학자개제서경각지어인근사류함취

成德韓子所謂薰其德而善良幾千者非此之謂與   

성덕한자소위훈기덕이선량기천자비차지위여

本縣及近隣士子徒有蟻慕之誠而不諒守護之難   

본현급근린사자도유의모지성이불량수호지난

營建廟宇於白地旣無典僕又無土田幸賴從前

영건묘우어백지기무전복우무토전행뢰종전

城主七八等內右文之化許令募入假屬若干人踏   

성주칠팔등내우문지화허령모입가속약간인답

印成案以爲完護之地矣今者社屬承男者被抄於   

인성안이위완호지지의금자사속승남자피초어

栢林都山直所謂假屬輩本非元居閒丁之有根着   

백림도산직소위가속배본비원거한정지유근착

而大關於官家者也右漢若不蒙減下之 命則其    

이대관어관가자야우한약부몽감하지 명칙기

餘烏合流民皆不自固而將有潰散之心社齋守護   

여오합류민개불자고이장유궤산지심사재수호

豈不誠悶慮哉至於 夫子畵像先生朝 京之日     

개불성민려재지어 부자화상선생조 경지일

得來於上國而平日書齋朝暮對越者也社齋旣成   

득래어상국이평일서재조모대월자야사재기성

之後一遵紹修書院規奉 安於講堂則槃泉里社 

지후일준소수서원규봉 안어강당칙반천리사

固非一洞書堂之化民等之盡誠守護而永無廢墜

고비일동서당지화민등지진성수호이영무폐추

者豈不切至哉伏願 閤下俯采輿情承男山直之 

자개불절지재복원 합하부채여정승남산직지

役特 命蠲減使新創儒齋終得守護則蜀郡文翁    

역특 명견감사신창유재종득수호칙촉군문옹

之化復見於今日而一境儒生鼓舞於德政之下民   

지화복견어금일이일경유생고무어덕정지하민

民等無任激切祈懇之至伏惟 丙寅七月 日       

민등무임격절기간지지복유 병인칠월 일

題辭 豈重一山直之減下而竟孤多士之請乎況    

제사 개중일산직지감하이경고다사지청호황

又 先聖畵像奉安之處則尤當盡心守護也所      

우 선성화상봉안지처칙우당진심수호야소

謂承男減下事 謂承男減下事                  

위승남감하사 위승남감하사

 

정문5(呈狀文5: 請願書5)

화민(化民) 유학(幼學) 금호(琴箎) 등은 삼가 목요재계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니 황공하여 참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정성은 사람으로서 떳떳한 도리로 함께 은덕을 갚는 사당을 세우는 거사를 얻었습니다.

우선 옛날부터 성인(聖人)께서는 안으로는 상서(庠序) 학교(學校)를 세우시고, 밖으로는 서원(書院)과 이사(里社)를 세워서

현인(賢人)을 존경하여 나타내지 않음이 없도록 하는 정성과 은덕을 갚는 것을 가르치는 바의 시작이셨습니다.

일찍이 10수년 전에 여기에 사는 우리들과 본현(本縣)의 유생(儒生) 및 인근의 여러 읍()의 과거를 준비하고 있는 선비들이

반천동(槃泉洞)에 정사(精舍)를 건축하여 고() 승지(承旨)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선생을 사묘(社廟)에 제향하면서

또한 선성(先聖)인 공자님[文宣王]의 화상(畵像)을 강당(講堂)에 봉안(奉安)해 왔습니다.

대개 구전(苟全)선생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찍이 경사(經史)에 밝아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인 바를 듣고 싶어서

스스로 월천(月川) (趙穆)선생 문하에 좇아 배워서 일찍이 유학의 지름길을 알고는 물러나 반천동(槃泉洞)에 집을 짓고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자 제자(弟子)들이 날로 진보하여 밤낮 강론하고 연마하다가 늙으신 어버이의 명()으로 뜻을 굽혀서 과장(科場)

나아가 수석을 하고는 경술(庚戌: 1610)년 갑과(甲科)를 차지하셨습니다.

강학(講學)의 정성은 만년에 더욱 독실해져서 한 시골 중에서는 문재(文才)로는 여럿 가운데 특별히 뛰어나셔서 알지 못하던

유학자(儒學者) 모두 떨쳐 일으켜 경각(警覺)시킴이 인근의 사류(士類)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여 덕()을 이루게 하여

한유(韓愈)가 말한 소위 그 덕()에 감화됨[薰其德]에 선량(善良)해 진 사람이 기천명은 될 것입니다.

이는 본현(本縣) 뿐만이 아니라 근린(近隣)의 과거 공부를 하는 유생들이 면학(勉學)함을 사모하는 정성이 있었지만

수호(守護)의 어려움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백지(白地)에 묘우(廟宇)를 건축하여 이미 맡아 관리하는 사람도 없고,

또 전토(田土)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종전의 성주(城主) 7~8명에게 힘입어 학문을 숭상하는 교화를 위하여 허락하는 명령으로 임시 소속 약간 명을 모집하고

초안이나 방안에 도장을 받아 완전히 수호하는 곳으로 되었습니다.

요사이 사()에 소속된 승남(承男)이란 자를 백림(栢林) 도산직(都山直)이로 잡히게 됐는데, 소위 가속배(假屬輩)들은 본래 원래부터

뿌리박고 살지 않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잡일을 하는 빈민(貧民)으로 대개 관가(官家)에 관계하는 자들입니다.

위의 사내는 현직의 관원 수를 줄이는[減下]명령을 입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 유민(流民)들은 오합지졸이 되어 모두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사재(社齋)를 수호(守護)하려는 것보다 장차 흩어져 도망가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어찌 고민스런 생각의 정성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공자(孔子)님의 화상(畵像)은 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상국(上國)에서 얻어 온 것으로 평소에 서재(書齋)에서

조석으로 마주 대하여 경배하시던 것입니다.

사재(社齋)가 이미 완성된 뒤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규정을 그대로 준수하여 강당(講堂)에 봉안(奉安)한 즉 반천이사(槃泉里社)

참으로 한 동네의 서당으로 지역 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수호(守護)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구히 폐()하여 실추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찌 간절함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백성들의 심정을 구부려 헤아려서 승남(承男)의 산직(山直)하는 부역()을 특명(特命)으로 세금을

()하게 하시어 새로 창건된 유재(儒齋)에 종신토록 수호(守護)하게 한 즉 <()나라> 촉군(蜀郡) 태수였던 문옹(文翁)의 교화를

오늘에 다시 보게 될 것이며 일대 지경의 유생(儒生)들을 덕정(德政)의 백성으로 고무(鼓舞)시킬 것입니다.

저희들은 맡은 일 없이 삼가 생각하니 쓸모없이 말이 격하고 절실하게 간절히 빌게까지 이르렀습니다.

병인(丙寅: 1686: 肅宗12)7월 일.

 

제사5(題辭5: 판결문5)

 

하나의 산직(山直)의 관원의 수를 줄이는 것[減下]이 중()하지만 어찌 마침내 많은 선비들의 청원을 돌보지 않으랴?

하물며 또 선성(先聖: 공자님)의 화상(畵像)을 봉안(奉安)한 곳인 즉 더욱 진심(盡心)을 다해 수호(守護)를 해야 마땅하다.

소위 승남(承男)은 감하(減下: 관원의 수를 줄임. 즉 그 부역을 면하게 해 준다는 말.)할 것.

 

呈文6(정문6)

化民幼學權俔等謹齋沐百拜上書于 城主閤下    

화민유학권현등근재목백배상서우 성주합하

伏以謹按學記曰古之敎者家有塾黨有庠術有序

복이근안학기왈고지교자가유숙당유상술유서

國有學三代立敎必先興學而今之里社古之塾序   

국유학삼대입교필선흥학이금지리사고지숙서

也俎豆之禮講學之方一遵古制培養儒士豈不小   

야조두지례강학지방일준고제배양유사개불소

補於 聖代菁莪之化哉曾在庚戌年間本縣儒生    

보어 성대청아지화재증재경술년간본현유생

等與安禮豊榮等邑多士議建本社爲故承旨苟全   

등여안례풍영등읍다사의건본사위고승지구전

金先生諱中淸妥靈之所又以 夫子遺像奉安於    

선생휘중청타령지소우이 부자유상봉안어

講堂扁之曰槃泉精舍所爲槃泉苟全先生築室講   

강당편지왈반천정사소위반천구전선생축실강

學之地也 夫子遺像先生朝 天之日印來者也     

학지지야 부자유상선생조 천지일인래자야

講堂奉 安一依竹溪之規也社之有齋視諸校院    

강당봉 안일의죽계지규야사지유재시제교원

雖有等第之差而奉安 夫子遺像則此亦重地士    

수유등제지차이봉안 부자유상칙차역중지사

子等尊敬而思盡守護之道者爲如何哉第以白地   

자등존경이사진수호지도자위여하재제이백지

創建無田無僕初焉方伯閔相公捐捧助成後焉方   

창건무전무복초언방백민상공연봉조성후언방

伯鄭相公盡誠扶護賴以孱功僅成模樣伊時 地    

백정상공진성부호뢰이잔공근성모양이시 지

主韓侯許入假屬成案踏印自玆後經歷十餘等內   

주한후허입가속성안답인자자후경력십여등내

得蒙優恩仍作流來定規逮至 閤下下車令尹舊    

득몽우은잉작유래정규체지 합하하차령윤구

政遵轍不改社屬之被抄於 官役者特命蠲減一 

정준철불개사속지피초어 관역자특명견감일

邑儒生欣然相告曰我有我 侯社事其庶幾乎聚    

읍유생흔연상고왈아유아 후사사기서기호취

首而相賀者雅矣不意迺者社屬汗宗抄入於使令   

수이상하자아의불의내자사속한종초입어사령

之役自本社再次牒報得蒙隨後處分之 命儒生    

지역자본사재차첩보득몽수후처분지 명유생

等受題音以後不勝感激翹企待 令而汗宗者方    

등수제음이후불승감격교기대 령이한종자방

在未減之前越視本社顧望徘徊汗宗所爲理勢固   

재미감지전월시본사고망배회한종소위리세고

然而其他若干餘屬望風思散十餘年守護之地將

연이기타약간여속망풍사산십여년수호지지장

未免一朝瓦解豈不誠悶慮也哉本縣偏小人物鮮

미면일조와해개불성민려야재본현편소인물선

少民等居在此土慮念 官事村漢之安堵着根可    

소민등거재차토려념 관사촌한지안도착근가

合於 官役者曾不募入於社屬則所謂案付者皆    

합어 관역자증불모입어사속칙소위안부자개

是私奴之無依而朝聚暮散者也惟一汗宗住接社   

시사노지무의이조취모산자야유일한종주접사

底廟宇之典守寶穀之斂散使之擔當則汗宗之於   

저묘우지전수보곡지렴산사지담당칙한종지어

本社奚啻盲者之有相乎不待 處分而累次煩瀆    

본사해시맹자지유상호부대 처분이루차번독

雖甚未安情在切至不得自已伏望 閤下俯采輿    

수심미안정재절지부득자이복망 합하부채여

情特命減下一以副多士之望一以助新創之社則   

정특명감하일이부다사지망일이조신창지사칙

民等幸甚社事幸甚伏惟 己巳閏三月 日         

민등행심사사행심복유 기사윤삼월 일

題辭 各人畢現之後則雖無所訴當有酌處之道

제사 각인필현지후칙수무소소당유작처지도

矣今觀呈文辭緣思退之流非但一汗宗云此則    

의금관정문사연사퇴지류비단일한종운차칙

所關甚緊不可等待其畢現後處分汗宗段特爲

소관심긴부가등대기필현후처분한종단특위

減除相考施行                             

감제상고시행.

 

정문6(呈狀文6: 청원서6)

화민(化民) 유학(幼學) 권현(權俔) 등은 삼가 목욕재계한 뒤 백배(百拜)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삼가 고찰해 보니 학기(學記)에 이르길 옛날의 가르침에는 집에는 숙()이 있고, ()에는 상()이 있고,

취락[: 12,500]에는 서()가 있고, 나라에는 학()이 있어서 <,,주의> 3()에는 반드시 먼저 흥학(興學)으로 가르침의

방향을 세워 정했으며, 지금의 이사(里社)는 고대의 숙서(塾序)일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예()는 옛 제도를 하나같이 지키는 강학(講學)의 방편으로 유림 선비들을 배양(培養)하는데 어찌 성대(聖代)

인재를 교육하는 교화를 돕는데 적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경술(庚戌: 1670: 顯宗11)년간에 본현(本縣)의 유생(儒生)등과 안동(安東),예안(禮安),풍기(豊基),영주(榮州)등 읍()

많은 선비들이 고()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선생의 위패를 일정한 곳에 잘 섬겨 모시는 곳인 본사(本社)를 세우는 것을 꾀했습니다.

또 공자님의 유상(遺像)을 강당에 봉안하고, 편액하기를 반천정사(槃泉精舍)라고 했습니다. 소위 반천(槃泉)

구전(苟全) 선생께서 강학(講學)하시던 곳에 건물을 지은 것입니다.

공자님 유상(遺像)은 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적에 찍어서 오신 것으로 죽계서원(竹溪書院)의 규정과 꼭 같이 강당(講堂)

봉안한 것입니다.

()에는 모든 향교나 서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재()가 있는데, 비록 등급의 차이는 있더라도 공자(孔子)의 유상(遺像)을 봉안한

즉 이는 역시 중요한 곳이라서 공부하는 선비들은 존경하고 마음을 다해 수호(守護)하는 길이 어떠합니까?

다만 백지(白地)로 창건(創建)하여 밭도 없고, 노복도 없는 초창기에 민(閔蓍重) 상공(相公)께서 녹봉을 희사하여 조성한 뒤에

방백(方伯)인 정(鄭樸) 상공(相公)께서 성의를 다한 부호(扶護)에 힘입어 잔약(孱弱)하던 것이 겨우 모양을 이루는 공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지주인 한후(韓侯)께서 가속(假屬)을 허락해 들이자는 성안(成案)에 결재를 한 뒤에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습니다. 안으로는

뛰어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다 합하(閤下)에 이르러 만들어 흘러오던 정해진 규정에 짐을 부리라는 현감(縣監)의 명령에 옛 정사(政事)의 법도를 따라

사속(社屬)의 관역(官役)에 초록(抄錄)되는 것을 고치지 않도록 하고 세금을 견감(蠲減)하라는 특명(特命)에 한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흔연(欣然)히 서로 말하길 우리는 우리의 후()가 있다고 하면서 사()의 일은 그 바람이라며 머리를 모아서 서로 바르다고

경하(慶賀)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요사이 사속(社屬)인 한종(汗宗)이 사령(使令) ()의 초록(抄錄)에 들어서 본사(本社)에서

재차 첩보(牒報)를 얻어 보니 처분(處分)의 명()에 따른 뒤에 유생(儒生)등이 제사(題辭)의 말을 받은 후에 발돋움을 기대하는 명령에

감격을 이기지 못했으나 한종(汗宗)이란 자와 같은 무리는 아직 감()하기 전이라 남의 환난을 범연히 보아 넘기며 본사(本社)를 배회하며

형세를 살피고 있습니다.

한종(汗宗)은 소위 자연의 이치가 원래 그러하다지만 기타 약간의 나머지 소속()들은 기세를 바라보고 흩어질 생각입니다.

10여년을 수호(守護)하던 곳이 장차 하루아침에 와해(瓦解)될 것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어찌 참으로 고민스런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본현(本縣)은 구석지고 작아서 인물(人物)도 적은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의 관()의 배려와 생각해 주는 일로 시골뜨기는

안도(安堵)하며 뿌리를 내려서 관역(官役)에 적합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사속(社屬)을 모집하지 않고 들어온 즉 소위 관청의 서류에 부비(付俾)된 자들로서 모두 이 사노(私奴)의 의탁할 곳이 없이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 한종(汗宗)은 사()에 붙어살면서 묘우(廟宇)의 법도를 철저히 지키고 보곡(寶穀)을 간수하면서 거두고 나눠주는 일을 담당한

즉 본사(本社)에 있어서 한종(汗宗)은 어찌 장님의 보조자가 될 뿐만 아니겠습니까?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누차 번거롭고 버릇없이 굴어서 비록 매우 미안하지만 사정이 절박한데 이르러 부득이 합하(閤下)께 엎드려 바라오니

백성들의 심정을 구부려 헤아려서 감하(減下)하는 특명(特命)을 내리신다면 하나로써 많은 선비들의 여망에 부응함이고,

하나로써 새로 창건된 사()의 도움이 되는 즉 삼가 생각하니 우리들의 행복이자 사()의 일에도 다행일 것입니다.

기사(己巳: 1689: 肅宗15)년 윤3월 일.

 

제사6(題辭6: 판결문6)

 

각각의 사람은 현역(現役)을 마친 후인 즉 비록 소()를 하는 바가 없더라도 당연히 참작하여 처분하는 길이 있다.

지금 정문(呈文)을 보니 하고자 하는 내용이 물러나는 부류의 생각으로 비단 하나의 한종(汗宗)을 말한 즉 관계되는 바는 매우 현()

호구(戶口)에 의하여 구별한 이름이지만 같은 자격으로 마주 대하여 그 현역(現役)을 마친 뒤에 처분(處分)을 내리기는 불가(不可)하므로

한종(汗宗)은 일단 특별히 감제(減除: 줄여서 뺌.)하여 시행할 것을 상고(相考: 서로 견주어 고찰함.)한다.

 

呈文7(정문7)

化民幼學琴箎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惶悚    화민유학금호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황송

無任伏以爲國之道莫先於文敎敷敎之要亦在於   무임복이위국지도막선어문교부교지요역재어

興學我 朝數百年培養之化夫豈偶然哉本縣雖    흥학아 조수백년배양지화부개우연재본현수

以墨子之彈丸介處於安榮數邑之間菁莪之敎有   이묵자지탄환개처어안영수읍지간청아지교유

所觀感校學之外又設書院里社以爲培育之地遵   소관감교학지외우설서원리사이위배육지지준

奉 聖代宏規者厥惟舊哉十餘年前與近隣列邑    봉 성대굉규자궐유구재십여년전여근린열읍

多士議建槃泉精舍而白地創立不多年所旣無土   다사의건반천정사이백지창립불다년소기무토

田又無典僕募得若干假屬以爲守護之地以所爲   전우무전복모득약간가속이위수호지지이소위

假屬乃是烏合之徒也朝聚夕散流接無常幸賴我   가속내시오합지도야조취석산류접무상행뢰아

閤下軫念於右文興學大而校院小而里社不無保   합하진념어우문흥학대이교원소이리사불무보

護而得有今日一邑儒生欣欣然聚首相告曰我有   호이득유금일일읍유생흔흔연취수상고왈아유

我 閤下儒宮之政其庶乎無替文翁之化復覩於    아 합하유궁지정기서호무체문옹지화부도어

蜀州矣不意今者社屬保一保元兩漢被抄於軍伍   촉주불부의금자사속보일보원양한피초어군오

豈是 閤下之本意哉習陣迫頭急於充額故也習    개시 합하지본의재습진박두급어충액고야습

陣後變通之 令特下於渠等呈訴之日儒生等矯    진후변통지 령특하어거등정소지일유생등교

首企足日望德政而尙難得代定之人姑未蒙永減   수기족일망덕정이상난득대정지인고미몽영감

之命其他社屬之羈縻者從此思散自無完固之意   지명기타사속지기미자종차사산자무완고지의

豈不誠悶慮哉明伊一金兩漢又抄於使令之役所   개불성민려재명이일김양한우초어사령지역소

謂明伊居在墻下方在廟直之役一金亦在近地擔   위명이거재장하방재묘직지역일김역재근지담

當園蔬之役若失明伊則守廟無人若無一金則供   당원소지역약실명이칙수묘무인약무일김칙공

儒無策此兩漢之要緊於本社豈啻如元奴僕哉玆   유무책차양한지요긴어본사개시여원노복재자

敢齊聲來訴伏願 閤下俯察輿情減下明伊一金    감제성래소복원 합하부찰여정감하명이일김

使令之役又減保日軍伍之役俾得保護儒宮則     사령지역우감보일군오지역비득보호유궁칙

閤下右文之政覃被於一境而樸之化永頌於百   합하우문지정담피어일경이박지화영송어백

載民等無任激切祈懇之至伏惟 辛未十一月 日   재민등무임격절기간지지복유 신미십일월 일

題辭 多士齊呼爲里社血誠可想官家亦不成模    제사 다사제호위리사혈성가상관가역불성모

樣別星入本縣時尤難容手之地此擧實出於萬     양별성입본현시우난용수지지차거실출어만

萬不獲已之故從當有餘地則可以變通姑徐事     만불획이지고종당유여지칙가이변통고서사

 

정문7(呈狀文7: 請願書7)

화민(化民) 유학(幼學) 금호(琴箎) 등은 삼가 목요재계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니 맡은 바 없이 황송합니다.

엎드려 나라를 위한 길은 문교(文敎)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교육을 널리 베푸는 요체는 역시 흥학(興學)에 있습니다.

우리 조선(朝鮮)은 수백 년 동안 배양한 교화(敎化)가 무릇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본현(本縣)은 비록 묵자(墨子)의 탄환(彈丸)이 적은 곳으로 안동(安東) 영주(榮州)의 여러 읍() 사이에서 인재를 교육하는 가르침으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향교(鄕校)에서 배우는 외에 또 서원(書院)이나 이사(里社)를 설치하여 배양해 교육하는 곳으로 성대(聖代)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준수하여 오로지 숙인 지 오래입니다.

10여 년 전 인근의 여러 읍()의 많은 선비들과 반천정사(槃泉精舍)를 세우기를 논의하여 백지(白地)에 창립(創立)한 지 여러 해가 아니라서 이미 토전(土田)도 없고, 규정된 노복(奴僕)도 없어서 약간 명의 가속(假屬)을 모아 얻어서 수호(守護)하는 곳으로 했습니다만 소위(所謂) 가속(假屬)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아침에는 모였다가 저녁에는 흩어지는 부류로 모임이 일정함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합하(閤下)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학문을 숭상하는 흥학(興學)을 위해서 크게는 서원과 향교를, 작게는 이사(里社)를 보호(保護)함을 얻은 오늘날 한 고을의 유생(儒生)들은 기뻐하며 흔연히 머리를 맞대고 서로 우리에게는 합하(閤下)의 유학(儒學)의 정치가 있다며 한()나라 문옹(文翁)의 교화를 촉주(蜀州)에서 다시 보는 것과 바꿀 수 없을 것이라고 그 얼마나 말했는지 모릅니다.

뜻밖에도 요즘 사속(社屬)인 보일(保一)과 보원(保元)이란 두 사내가 군오(軍伍)의 초록(抄錄)에 뽑혔는데, 어찌 이것이 합하(閤下)의 본 뜻이겠습니까? 습진(習陣)이 박두하니 급히 충원(充員)한 것일 것입니다.

습진(習陣) 뒤에는 변통(變通)을 하겠다는 명령을 어찌 우리들이 정소(呈訴)하는 날 특별히 내리시니 유생(儒生)들은 머리를 쳐들고 발돋움하며 날로 덕정(德政)을 바랐지만 오히려 대신 정할 사람을 얻기 어려워 잠시 영원히 감()한다는 명령을 입지 못하여 기타 사속(社屬)의 제갈 굴레에 묶인 자들은 이후에는 흩어질 생각에 완고한 뜻이 없으니 어찌 참으로 고민스런 염려가 아니겠습니까?

명이(明伊)와 일금(一金)이란 두 사내는 또 사령(使令: 관청 심부름꾼.)의 역()에 초록(抄錄)됐습니다.

소위(所謂) 명이(明伊)란 사람은 담장() 아래 살면서 바야흐로 묘직(廟直)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금(一金) 역시 가까이 살면서 채원(菜園)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여 만약 명이(明伊)를 잃는다면 묘()를 지킬 사람이 없고, 만약 일금(一金)이 없다면 선비들을 받들 대책이 없으니, 이 두 사람은 본사(本社)에서는 요긴(要緊)하니 어찌 원() 노복(奴僕)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에 감히 목소리를 가지런히 해서 소청(所請)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백성들의 심정을 굽어 살피셔서 명이(明伊)와 일금(一金)의 사령(使令) 역할을 감하(減下)해 주시고, 또 보일(保日)의 군오(軍伍)의 역()도 감()해 주신다면 유궁(儒宮)의 보호를 보태어 얻게 되는 즉 일대의 지경이 합하(閤下)의 학문을 숭상하는 정사(政事)가 미침을 입게 되고, 재야(在野)의 인재를 만드는 근본이 되게 하는 교화로 백 년 동안 영원히 기리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들은 맡은 일 없이 말이 격렬하고 절실하여 간절히 기원함에 이르렀습니다.

신미(辛未: 1691: 肅宗17)11월 일.

 

제사7(題辭7: 판결문7)

 

많은 선비들이 이사(里社)를 위해 갖추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는 가상하지만 관가(官家) 역시 모양을 갖추지 않으면 봉명(奉命) 사신(使臣)이 본현(本縣)에 들어 올 때 더욱 수단을 쓰기 어려운 처지가 되므로 이 모두 실로 결코 얻기 어려운 데서 나온 것이므로 그 뒤에 여지(餘地)가 있는 즉 변통(變通)할 수 있으니 잠시 천천히 할 것.

 

呈文8(정문8)

化民幼學琴雲達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惶   화민유학금운달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황

恐無任伏以故承旨苟全金先生諱中淸斯文碩老  공무임복이고승지구전김선생휘중청사문석로

幼而穎悟夙曉經史欲聞道學淵源之所自從遊月  유이영오숙효경사욕문도학연원지소자종유월

川趙先生門下早知斯道蹊逕而晩節謝仕閑居卜  천조선생문하조지사도혜경이만절사사한거복

築書齋於槃泉洞講學爲任勸後進近隣數邑子  축서재어반천동강학위임권후진근린수읍자

弟稍益來趁幾至百數先生辭世八九十年後本縣  제초익래진기지백수선생사세팔구십년후본현

士子及安東榮川禮安順興等邑儒生議建里社於  사자급안동영천예안순흥등읍유생의건리사어

當日書齋舊基以爲妥靈之所此所謂斯人歿而可  당일서재구기이위타령지소차소위사인몰이가

祭於社者也又以 文宣王畵像奉 安於講堂此    제어사자야우이 문선왕화상봉 안어강당차

則一遵白雲洞院規而 畵像則先生朝 天之日    칙일준백운동원규이 화상칙선생조 천지일

印來故也儒生等只有慕羶之誠而不計物力凋  인래고야유생등지유모전지성이불계물력조

創建不久百不成一樣至於藏穫土田更無出處募  창건불구백불성일양지어장확토전갱무출처모

入流民之不關於軍役者若干人以爲享祀時使喚  입류민지불관어군역자약간인이위향사시사환

之地創社以後八九等內 城主及數三方伯顧念   지지창사이후팔구등내 성주급수삼방백고념

保護得有今日矣不意前 城主等內明伊一金兩   보호득유금일의불의전 성주등내명이일김양

漢抄入於 官家使令之役是豈前 城主本意也    한초입어 관가사령지역시개전 성주본의야

使令輩不念自 官庇護之所而混訴之致前 城    사령배불념자 관비호지소이혼소지치전 성

主旋卽減下不付 官案矣 城主下車之初明伊    주선즉감하불부 관안의 성주하차지초명이

一金等發牌現身行下而明伊則 令前出去尙州   일김등발패현신행하이명이칙 령전출거상주

未還一金則入在染病中故俱未卽現金進士揚烈  미환일김칙입재염병중고구미즉현김진사양렬

進謁之日具由陳達 城主面敎內明伊一金則自   진알지일구유진달 성주면교내명이일김칙자

官旣知里社之假屬此後分揀勿推 行下故姑未   관기지이사지가속차후분간물추 행하고고미

現身矣至以不卽現身之故施罪而使之立番此則  현신의지이불즉현신지고시죄이사지입번차칙

非敢拒양 官令而遲緩不現也癡愚下民專恃     비감거양 관령이지완불현야치우하민전시

官家勿推之敎而不識政體攸致誠極惶恐而明伊  관가물추지교이불식정체유치성극황공이명이

一金居在里社籬底異於遠處散在之假屬或爲庫  일김거재이사리저이어원처산재지가속혹위고

直之役或當園蔬之任若未蒙減下則其爲切迫有  직지역혹당원소지임약미몽감하칙기위절박유

同失杖之盲不得已陳訴於 嚴威之下伏願 閤    동실장지맹부득이진소어 엄위지하복원 합

下原情宥罪特施仁政一金明伊使令之役分揀減  하원정유죄특시인정일김명이사령지역분간감

下俾得保護儒齋則 閤下右文興學之化豈下於   하비득보호유재칙 합하우문흥학지화개하어

蜀郡之文翁而儒生等歌頌至德永有辭於千載之  촉군지문옹이유생등가송지덕영유사어천재지

下私情所迫言不知哉無任惶悚待罪之至伏惟    하사정소박언부지재무임황송대죄지지복유

壬申十月 日                               임신십월 일

題辭 使令代他假屬望定                     제사 사령대타가속망정

 

정문8(呈狀文8: 청원서8)

화민(化民) 유학(幼學) 금운달(琴雲達) 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니 맡은 바 없이 황공합니다.

살피니 고() 승지(承旨)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선생은 유학(儒學)의 덕()이 높은 노인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穎悟]하여 일찍이 경사(經史)에 밝아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듣고 싶어서 스스로 월천(月川) (趙穆)선생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하면서 일찍 유학(儒學)의 지름길을 알고는 만년(晩年)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집에 있으면서 반천동(槃泉洞)에 좋은 곳을 가려서 서재(書齋)를 짓고는 강학(講學)하시면서 후진(後進)들을 권하고 이끄는 임무를 하여 인근의 여러 읍()의 따라와 붙은 자제(子弟)들이 점점 늘어 거의 1백 수()명에 이르렀습니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8, 9, 10년 후 본현(本縣)의 과거(科擧) 공부를 하는 선비[士子] 및 안동(安東), 영주(榮州), 예안(禮安), 순흥(順興) 등의 읍()에 사는 유생(儒生)들이 당시의 서재(書齋)였던 옛 터에 이사(里社)를 세우기를 의논하여 위패를 잘 섬겨 모시도록 한 바 이는 소위 이 사람이 죽어서 사()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공자님[文宣王]의 화상(畵像)을 강당(講堂)에 봉안(奉安)하여 백운동(白雲洞)서원의 원규(院規)를 그대로 준수한 즉 화상(畵像)은 성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인출(印出)해 오신 것입니다.

유생(儒生)들은 단지 높이 흠모하는 정성에 물력(物力)의 쇠약하여 병든 것도 계산하지 않고 창건(創建)을 하니 오래도록 백 가운데 하나도 이루지 못한 모양에 심지어 토전(土田)도 거두지 못하고 게다가 출처(出處)도 없는 유민(流民)들을 모아 들여서 군역자(軍役者)도 상관 않고 약간 명으로 향사(享祀) 때 사환(使喚)의 지위로 있도록 창사(創社) 이후에 8~9명의 성주(城主) 및 수 3명의 방백(方伯: 觀察使: 監司)들이 돌보아주는 보호를 얻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뜻밖에도 전() 성주(城主)등이 내적으로 명이(明伊)와 일금(一金)의 두 사내를 관가(官家)의 사령(使令)의 역()에 초입(抄入)했는데, 이것이 어찌 성주(城主)의 본뜻이겠습니까?

사령(使令)의 무리들은 관()으로 부터의 비호(庇護)를 받는 곳에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소()의 전함을 섞어서 전() 성주(城主)는 되돌린 즉 감하(減下)한다는 관안(官案: 각 마을의 이름과 그 곳에 딸린 벼슬 이름을 적은 책.)도 주지 않았습니다.

성주(城主)께서 부임 초에 명이(明伊)와 일금(一金) 등에게 명패(命牌)를 발행하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뵈면 보수를 준다고 했지만 명이(明伊)는 전의 명령으로 상주(尙州)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일금(一金)은 염병(染病: 장티푸스)이 걸려 있는 중이라서 모두 현신(現身)을 못한 즉 김양열(金揚烈) 진사(進士)가 나아가서 알현할 때 성주(城主)께 갖추어서 진달(陳達)한 까닭입니다.

성주(城主)께서 면대(面對)하여 일러 주시길 명이(明伊)와 일금(一金)으로 하여금 관()으로부터 이미 이사(里社)의 가속(假屬)으로 하게 한 즉 차후에는 범죄의 정상(情狀)을 살펴서 죄를 용서하여[分揀] 행하(行下)를 꾸짖지 말라고 한 연고로 잠시 현신(現身)을 않고 있었던 겁니다.

현신(現身)을 하지 않은 까닭에 죄()를 입어 번()을 서게 시킨 즉 이번에는 감히 거부하며 머뭇거릴 수 없지만 관령(官令)이 더디고 늦어서 실현이 안 됐습니다.

못나고 어리석은 백성은 오로지 관가(官家)에서 죄상을 문초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믿어서 정치하는 다스림의 방도를 알지 못하고 정성을 다하니 매우 황공(惶恐)합니다만 명이(明伊)와 일금(一金)은 이사(里社)의 울타리 밑에 살고 있지만 다른 데 멀리 흩어져 있는 가속(假屬)들은 혹 고직(庫直)의 역할을 하거나 혹은 원소(園蔬)의 임무를 담당하려면 감하(減下)를 입지 못하면 그 절박함이 봉사가 지팡이를 잃어버림과 같아서 부득이하게 엄위(嚴威)의 아래에 소()를 늘여놓습니다.

합하(閤下)께 엎드려 바라옵건대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도록 사정을 하소연 하여 특별히 인정(仁政)을 시행하셔서 일금(一金)과 명이(明伊)의 사령(使令)의 역()을 감하(減下)하여 죄를 용서하여 주시면 더하여 유재(儒齋)를 보호함을 얻는 즉 합하(閤下)의 학문을 숭상하고 흥학(興學)하는 교화(敎化)가 어찌 촉군(蜀郡)의 문옹(文翁)의 아래가 되겠습니까?

또 유생(儒生)등은 지극한 덕()을 천년 아래토록 영원히 노래 가사로써 공덕을 찬송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니 사사로운 정()으로 절박한 말에 이르렀습니다. 아무 맡은 바 없이 황송(惶悚)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기다림에 이르게 했습니다.

임신(壬申: 1692: 肅宗18)10월 일

 

제사8(題辭8: 판결문8)

 

사령(使令)은 대신 다른 가속(假屬)을 정()하기 바람.

 

呈文9(정문9)

化民幼學琴以薰等謹齋沐上書于 城主閤下惶   화민유학금이훈등근재목상서우 성주합하황

悚無任伏以槃泉里社卽苟全金先生諱中淸妥靈  송무임복이반천리사즉구전김선생휘중청타령

之所而 文宣王畵像奉安之地也先生早遊月川   지소이 문선왕화상봉안지지야선생조유월천

趙先生門下學有淵源功著訓迪崇報之擧出於隣  조선생문하학유연원공저훈적숭보지거출어린

近邑蟻慕之誠而槃泉則先生書舍之遺址也 畵   근읍의모지성이반천칙선생서사지유지야 화

像則先生赴京時印來也一依紹修書院明倫堂奉  상칙선생부경시인래야일의소수서원명륜당봉

安之規奉 安于講堂先生平日書齋對越之意亦   안지규봉 안우강당선생평일서재대월지의역

以之遵尙之矣斯文 城主字莅玆邑或於 畵像    이지준상지의사문 성주자리자읍혹어 화상

瞻謁之日軫念本社保護之道許令孱民之不緊於  첨알지일진념본사보호지도허령잔민지불긴어

官役者名之假屬落印成案於是乎廟庫直及齋直  관역자명지가속낙인성안어시호묘고직급재직

負木園頭等役賴以成樣吁邑小民殘丁口無閑苟  부목원두등역뢰이성양우읍소민잔정구무한구

非上之人曲賜扶護則民等慕羶之誠其何以伸而  비상지인곡사부호칙민등모전지성기하이신이

白地新創之所其何以守也玆者假屬深然有被訴  백지신창지소기하이수야자자가속심연유피소

事民等謹奉社任報狀中題辭有曰旣許假屬不可  사민등근봉사임보장중제사유왈기허가속불가

減出炮手深然代改定他假屬以便公私云云重護  감출포수심연대개정타가속이편공사운운중호

儒宮辭旨委曲右文興敎之下民等情私得以伸矣  유궁사지위곡우문흥교지하민등정사득이신의

假屬之役何必深然而後乃關於社也第當初募入  가속지역하필심연이후내관어사야제당초모입

之日卽以訴 官庇護之意籍重開諭使之從役已   지일즉이소 관비호지의적중개유사지종역이

至累年今此深然未免他役則代以他屬社雖蒙惠  지누년금차심연미면타역칙대이타속사수몽혜

而社於下屬實有所負案付中八九名必將曰某也  이사어하속실유소부안부중팔구명필장왈모야

如彼吾等之從役社儒其亦虛矣望風離心十無一  여피오등지종역사유기역허의망풍리심십무일

保此則必然之勢也更將何說募得他丁哉況且深  보차칙필연지세야경장하설모득타정재황차심

然元非炮手不遇爲炮手等奉足出價之丁而被訴  연원비포수불우위포수등봉족출가지정이피소

於嚴威不敢伸白峽裡愚氓其亦矜矣深然實無炮  어엄위불감신백협리우맹기역긍의심연실무포

手之才而被誣炮手之訴則炮手奉足不必此漢而  수지재이피무포수지소칙포수봉족불필차한이

社屬之失望實係深然深然之不保而將未免社案  사속지실망실계심연심연지불보이장미면사안

俱空豈不誠大可悶迫哉伏乞 城主閤下洞燭如   구공개불성대가민박재복걸 성주합하통촉여

右情狀深然山獵之役特 命除減令社屬輩聳聆   우정상심연산렵지역특 명제감령사속배용령

官家庇護儒齋之政而板蕩之所賴以得保則文翁  관가비호유재지정이판탕지소뢰이득보칙문옹

蜀郡之化復見今日民等不勝激切祈懇之至伏惟  촉군지화복견금일민등불승격절기간지지복유

癸未十月 日                               계미십월 일

題辭 心玄名字果入於官上案中乙仍于特爲脫   제사 심현명자과입어관상안중을잉우특위탈

減此後額內假屬如有侵犯之事則官家亦當脫    감차후액내가속여유침범지사칙관가역당탈

下以爲尊慕先賢保存里社之地事              하이위존모선현보존리사지지사

 

정문9(呈狀文9: 청원서9)

화민(化民) 유학(幼學) 금이훈(琴以薰)등은 삼가 목욕재계하고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니 아무 맡은 바 없어서 황송(惶悚)합니다.

살펴보니 반천이사(槃泉里社)는 즉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선생의 위패를 섬겨서 모신 곳이자 공자님[文宣王] 화상(畵像)을 봉안(奉安)한 곳입니다.

선생은 어려서 월천(月川) (趙穆)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셔서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훈계하여 인도하는데 공()이 뛰어나셔서 면학(勉學)을 사모하는 정성에 인근 읍()에서 은덕을 갚는 거사에 나섰는데, 반천(槃泉)은 즉 선생의 서사(書舍)의 축조물이 있었던 터입니다.

화상(畵像)은 즉 선생께서 북경(北京)에 가셨을 때 인출(印出)해 오신 것으로서 소수서원(紹修書院) 명륜당(明倫堂)에 봉안(奉安)한 규정을 그대로 강당(講堂)에 봉안하여 선생께서 평소에 서재(書齋)에서 너머에서 마주 대하시던 뜻 역시 그대로 좇아서 숭상하고 있습니다.

유학(儒學)하는 성주(城主)님께서도 혹 이 읍()의 화상(畵像)을 우러러 배알하게 되시는 날 임금께서 백성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본사(本社)를 보호하는 길인데, 잔약한 백성의 긴요하지 않은 관역자(官役者) 이름에 가속(假屬)을 초안(草案)한데 결재를 하는 명령을 허락하셔야 되겠습니까?

사당의 고직(庫直)이나 재직(齋直)의 나무꾼이나 밭에 심어 가꾸는 과일이나 채소 등의 역할에 힘입어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 고을은 작고 백성들도 나머지 장정들도 한가할 겨를이 없어 참으로 상지인(上之人)이 구부려서 은혜를 베풀지 않고선 부호(扶護)할 수 없는 즉 우리들은 남들이 흠모하는 착한 행위인 전행(羶行)을 사모하는 정성에 그 어떤 말을 하며 백지(白地)에 새로 창건(創建)한 바 어떻게 그것을 지키겠습니까?

이에 가속(假屬)인 심연(深然)이란 자가 피소(被訴)된 일이 있어서 우리들은 삼가 봉사(奉社)의 임무에 상관에게 보고하는 공문[報狀] 중의 판결문[題辭]에 이르길 기왕에 허락한 가속(假屬)은 감출(減出)할 수 없고, 포수(炮手) 심연(深然)은 대신 다른 가속(假屬)으로 고쳐 정하는 편이 공사(公私) 운운(云云)이라고 했습니다.

유궁(儒宮)을 수호(守護)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사(文辭)의 취지는 학문을 숭상하고 흥교(興敎)를 내림에는 찬찬하고 자상하여 허리를 굽히고 좇지만 우리들은 개인적인 사정을 얻고자 말씀드립니다.

가속(假屬)의 역할은 하필 심연(深然)은 뒤에 사()에 관계했습니다. 만일 당초 모입(募入)한 때라면 소()에서처럼 중요한 점에 의거해 사리를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 일을 시켰어야 관()의 비호(庇護)의 뜻이지 이미 이 역할을 한지 여러 해인데 지금 이 심연(深然)은 다른 역()을 면하지 못하고 있은 즉 다른 가속(假屬)으로 대신하라니 사()는 비록 혜택을 입어도 사()에 있는 바로 관청 서류에 적혀 있는 8~9명의 하속(下屬)들은 반드시 다음에는 누구다. 라고 실로 부담을 지게 됩니다.

그들처럼 우리 사()의 일에 종사하는 역할을 하는 선비들 역시 허망합니다.

높은 덕망을 듣고 사모하는[望風] 마음이 떠나기에 10 중에 하나도 지킬 수 없을 것인 즉 이는 필연적인 추세일 것입니다.

다시 장차 어떤 설명으로 다른 장정들을 모집해 들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또 심연(深然)은 원래는 포수(炮手)가 아닌데도 때을 잘못만난 불운으로 포수(炮手)등이 되어 봉족(奉足: 출역(出役)했을 때 출역하지 않은 여정(餘丁)을 한 두 사람 정정(正丁)의 집에 주어 집안일을 돕게 하는 일.)으로 나간 장정(壯丁)의 값을 지불하도록 엄위(嚴威)에 피소(被訴)됐으니, 감히 결백을 아뢰지 않으면 산골짜기 속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그 역시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심연(深然)은 실지로 포수(炮手)의 재주가 없고, 포수(炮手)의 소()에 무함을 받은 즉 포수(炮手)의 봉족(奉足)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이 사내로 사속(社屬)의 실망이 실로 심연(沈然)에게 관계될 것입니다.

심연(深然)의 보호하지 않음은 장차 사안(社案)도 모두 비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 참으로 큰 고민이 닥쳤다고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성주(城主) 합하(閤下)께 엎드려 비오니 위와 같은 사정을 통촉(洞燭)하셔서 심연(深然)의 산렵(山獵)하는 역()을 제감(除減)한다는 특명(特命)을 내리신다면 사속(社屬)의 무리들은 관가(官家)의 비호(庇護)로 유재(儒齋)의 정사(政社)에 삼가 따르기를 바랄 것이고, 세상의 어지러운 바의 의지하여 지킴을 얻은 즉 문옹(文翁)이 촉군(蜀郡)의 교화를 오늘에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우리들이 말이 격렬하고 절심하여 간절히 기원함에 이르렀습니다.

계미(癸未: 1703: 肅宗29)10월 일

 

제사9(題辭9: 판결문9)

 

심현(心玄)이란 이름이 과연 관안(官案)중에 올라와 있는 것을 특별히 탈감(脫減)한다. 차후(此後)에라도 액내(額內)의 가속(假屬)이 이와 같은 침범(侵犯)이 있는 일이 있은 즉 관가(官家) 역시 당연히 탈하(脫下)하여 선현(先賢)을 존모(尊慕)하는 이사(里社)를 보존(保存)하는 일을 하도록 한다.

 

成造都監 權俔 성조도감(成造都監)권현(權俔)

金至寬 〃 김지관(金至寬)

燔瓦都監 金雄烈 번와도감(燔瓦都監)김웅열(金雄烈)

都有司 金世鳴 도유사(都有司)김세명(金世鳴)

別有司 金至謙 별유사(別有司)김지겸(金至謙)

 

惟我(유아)

曾祖考苟全先生早遊川門積學自修而久欠俎  증조고구전선생조유천문적학자수이구흠조

豆之典常爲士林之恥矣越在庚戌公議大發    두지전상위사림지치의월재경술공의대발

營建 廟宇而白地創立完就未易在世及門     영건 묘우이백지창입완취미역재세급문

之賢及其下世子若孫咸願顧助各捐財力其    지현급기하세자약손함원고조각연재력기

時文籍落在散帙亡失殆盡十不存一恐其久    시문적락재산질망실태진십부존일공기구

而泯滅故收得如干而謄諸一冊以爲傳之永    이민멸고수득여간이등제일책이위전지영

久云爾 赤猪暮春至一誌                   구운이 적저모춘지일지

 

이 우리 증조(曾祖)할아버지인 구전(苟全) 선생(先生)은 일찍이 월천(月川)선생 문하(門下)

종유(從遊)하시면서 학문을 쌓아 스스로 수양하셨는데 오래도록 제사를 지내는 전범(典範)의 흠이 있어서 항상 사림(士林)의 수치로 되어왔었다.

집을 떠나 먼 타향에 있었던 경술(庚戌:1670:顯宗11)년에 묘우(廟宇)를 세우자는 공론(公論)이 크게 일어나 흰 바탕에 창립(創立)하여 완전히 이루기 생존해 있는 문하생(門下生)의 현인(賢人) 및 그 후세의 아들이나 손자들은 바뀌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돌아보고 도와주길 원해서 각자 재력(財力)을 출연(出捐)했었는데,

그 당시의 문적(文籍)들이 떨어져 흩어지고 책갑이 망실(亡失)되어 거의 10분의 1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오래되고 다하여 없어짐이 두려워서 이와 같은 약간을 모아 얻어서 한 책으로 베껴 만들어서

영구(永久)히 전()하고자 할 따름이다.

적저(赤猪:丁亥:1707:肅宗33)모춘(暮春:3)지일(至一) .

 

이상 반천창건록(槃泉創建錄)2017(丁酉)625일에

해헌고택(海軒古宅)에서 백천(白川) 김세현(金世顯)이 우리말로 풀어 쓰다.

 

 

이전글 ...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