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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성지(鳳城誌)
작성자 관리자 [2018-01-02 2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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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성지(鳳城誌)

 

책주(冊主)가 김숙진(金肅鎭)으로 기록된 이 봉성지(鳳城誌)는 봉화현(奉化縣)의 현지(縣誌)로 나중에 편찬되는

옥마지(玉馬誌)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은 기미(己未: 1919)년 봄에 베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원 기록은 그 보다 훨씬 이전의 기록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바꿔 말하면 이 책의 내용의 하한선이 기미(己未: 1919)년이고 그 안에 실린 내용은 그 보다는 한참 이전이 된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점을 보면 먼저 면지에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는 향청(鄕廳: 지금의 봉성)을 중심으로 황지(黃池)에서 발원한 낙동강인 도미천(道美川)에서 지금의 운곡천(雲谷川)

매토천(買吐川)을 동쪽에 두고 북쪽에는 태백산과 문수산(文殊山)을 경계로 서쪽으로는 순흥부(順興府)를 경계로 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태자산(太子山)과 풍락산(豊樂山)을 경계로 한 안동계(安東界)와 접하고 있으면서

망일봉(望日峰) 옆 금륜봉(金輪峰)자락에 반천서원(槃泉書院)이 뚜렷이 그려져 있음이다.

학교(學校) 서원(書院) 항목의 반천서원(槃泉書院)의 기사를 보면

처음에는 반천정사(槃泉精舍)로 되어 있는 것을 반천서원(槃泉書院)으로 정정해 두었다.

在縣西五里 顯宗十一年庚戌創建祀承旨金中淸講堂 安孔夫子畵像

(현청(縣廳)의 서쪽 5()에 있으며,

현종(顯宗) 11년 경술(庚戌: 1670)년에 창건(創建)되어 승지(承旨) 김중청(金中淸)의 강당(講堂)이었으며,

그를 향사(享祀)하고 있고, 공자(孔子)의 화상(畵像)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총기(塚基)편에는 김중청묘(金中淸墓)에 대한 기록으로

在縣南三十里太子山撰曰公安東人諱中淸字而和晩退其號又以苟全行鼻祖諱宣平在麗爲三重太師入我朝世襲冠冕大司

재현남삼십리태자산찬왈공안동인휘중청자이화만퇴기호우이구전행비조휘선평재려위삼중태사입아조세습관면대사

諫係行是五代祖也成均生員克禮承議郞世殷成均進士廷憲比三世宜達而窒考曰夢虎折衝將軍中樞府事公生而穎爽聰敏異凡兒

간계행시오대조야성균생원극례승의랑세은성균진사정헌비삼세의달이질고왈몽호절충장군중추부사공생이영상총민이범아

幼受書于嘯皐朴公慥慥日就朴公亟稱之曰是子也材而器終必大成及長從月川學經傳靡不淹貫尤精於易一時論知易者首屈指金

유수서우소고박공조조일취박공극칭지왈시자야재이기종필대성급장종월천학경전미부엄관우정어역일시논지역자수굴지김

生云退而築室敎授諸生南中子弟爭聲望籍甚道臣以行誼聞公以親老故晩始攻擧子業爲文辭典雅中式己酉魁鄕鮮庚戌擢榜眼

생운퇴이축실교수제생남중자제쟁성망적심도신이행의문공이친로고만시공거자업위문사전아중식기유괴향선경술탁방안

倒除漢城府參軍辛亥調監察癸丑由典籍轉禮曹佐郞陞正郞選帶知製敎甲寅以賀節使書狀官朝京丙辰補新安縣至則必具朝衣笠

도제한성부참군신해조감찰계축유전적전예조좌랑승정랑선대지제교갑인이하절사서장관조경병진보신안현지칙필구조의입

事越四年己未用最特加通政階辛酉除分承政院承旨逮癸亥改玉如將用者而竟巡家居惟以經史自娛愚伏鄭公嘗歎經席不得與

사월사년기미용최특가통정계신유제분승정원승지체계해개옥여장용자이경순가거유이경사자오우복정공상탄경석부득여

公進講義沙溪金公每服公論說禮經而相疑難公性至孝及老持服病毁不救磋呼以公之學之材而止於斯固歸之時矣古稱長德食報

공진강의사계김공매복공논설예경이상의난공성지효급로지복병훼불구차호이공지학지재이지어사고귀지시의고칭장덕식보

不于躬而于其後則其所不止者宜在持平君而又不能祿豈所謂理者非耶雖然公子孫克繁且秀其將定而勝也歟銘曰古學爲己今爲

불우궁이우기후칙기소부지자의재지평군이우불능록개소위리자비야수연공자손극번차수기장정이승야여명왈고학위기금위

仕師傅有自公則是與世異嗜莫我以起由我致躓行志保終如始斯稱士遺厥弗遂而予子奪又倏爾神之恥善人何恃吾徒喟余辭匪詭

사사부유자공칙시여세이기막아이기유아치지행지보종여시사칭사유궐불수이여자탈우숙이신지치선인하시오도위여사비궤

告大隧不誣者理公其俟

고대수부무자리공기사

(() 남쪽 30리에 있다.

황호(黃戽)가 짓기를 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휘()는 중청(中淸), ()는 이화(而和), 만퇴(晩退)는 그 호()인데

구전(苟全)으로 쓰기도 한다.

비조(鼻祖) () 선평(宣平)은 고려(高麗)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였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는데,

대사간(大司諫) 김계행(金係行)은 바로 5대조(代祖)이다.

고조(高祖)인 성균(成均) 생원(生員) 극례(克禮)

증조(曾祖)인 승의랑(承議郞) 세은(世殷)

()인 성균(成均) 진사(進士) 정헌(廷憲)의 나란히 3()는 벼슬길이 막혔다.

()는 몽호(夢虎)인데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은 태어나서 재주가 뛰어나고 시원스러웠으며, 총명하고 민첩함이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다.

유년기(幼年期)에 소고(嘯睾) 박승임(朴承任)공에게 글을 배웠는데,

독실하게 하여 날마다 나아갔으므로 박공(朴公)이 여러 차례 칭찬하기를

이 아이는 재주도 있고, 기국(器局)이 있으니 끝내는 반드시 크게 성취할 것이다.”라고 했다.

커서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선생께 종유(從遊)하며 경전(經傳)을 배웠는데, 널리 통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역(周易)에 가장 정통했다. 그래서 당시에 주역(周易)을 안다고 논()하는 자는 맨 먼저 김생(金生)을 지목했다고 한다.

물러나 고향에다 집을 짓고 여러 생도(生徒)들을 가르치자 남쪽 지역의 자제(子弟)들이 다투어 나아가 명성(名聲)과 인망(人望)이 대단했다.

감사(監司)가 공()의 행의(行誼)를 듣고 <조정에>천거하기도 했다.

()은 어버이가 늙으셨다며 늦게 과거 공부를 시작했는데, 문사(文辭)가 전아(典雅)했다.

기유(己酉: 1609: 광해군1)년 식년(式年) 향시(鄕試)에 장원(壯元)을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 1610)년 과거의 갑과(甲科) 2등으로 급제(及第)하여 관례대로 한성부(漢城府) 참군(參軍: 7품직)에 제수(除授)되고,

신해(辛亥: 1611)년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6품직)로 조용(調用)되고,

계축(癸丑: 1613)년에는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6품직)을 경유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예조정랑(禮曹正郞: 5품직)으로

승진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는데 선발됐다.

갑인(甲寅: 1614)년에는 하절사(賀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병진(丙辰: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보임(補任)되어

조복(朝服)을 입고 집무를 하여 4년만인 기미(己未: 1619)년에 근무 평정에서 최고를 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 3품 당상 품계)로 계자(階資)되고,

신유(辛酉: 1621)년에 분승정원(分承政院) 승지(承旨)에 제수(除授)되고 계해(癸亥: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차 기용될 것 같았으나

끝내 뒷걸음치는 격이 되고 말았다.

집안에 있으면서 오직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는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공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공()과 함께 나아가 강의(講義)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공은 매번 공()의 예경(禮經)을 논설(論說)하는데 탄복하면서 서로 의심나는 부분을 논란(論難)하곤 했다.

()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노경(老境)에 이르러 상복(喪服)을 입고 애통(哀痛)으로 병이 났는데, 구료(求療)하지 못했다.

아아! ()의 학문과 재능을 가지고 이 정도의 벼슬에 그쳤으니 진실로 돌아갈 시기였다.

예로부터 일컫기를 덕행(德行)을 수양한 이에게 보답해 주기는 자신에게 하지 않고, 그 후손에게 한다.’라고 했는데,

그 보답이 중지되지 않았던 것은 의당 지평군(持平君: 柱宇)에게 달려 있었는데,

그도 또한 복록을 누릴 수가 없었으니, 이른바 천리(天理)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의 자손(子孫)이 번성(繁盛)하고 또 빼어났으니 앞으로 안정을 시켜서 훌륭하게 될 것이다.

()하기를

古學爲己今爲仕 (고학위기금위사) 옛날은 위기지학을 했으나 요즘은 벼슬하기 위함인데

師傅有自公則是 (사부유자공칙시) 연원 있는 스승을 모신 분, 공이 바로 그 분이네.

與世異嗜莫我以 (여세이기막아이) 세상과 기호가 다르면 나를 써 주지 않지만

起由我致躓行志 (기유아치지행지) 내 행신과 뜻이 넘어짐을 연유로 일어나게 되었고

保終如始斯稱士 (보종여시사칭사) 한 결 같이 보존하니 이 선비라 일컫고

遺厥弗遂而予子 (유궐불수이여자) 물려받은 계책은 완수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넘기고

奪又倏爾神之恥 (탈우숙이신지치) 그 자식을 빨리 빼앗아 갔으니 이는 신명의 수치라

善人何恃吾徒喟 (선인하시오도위) 훌륭한 사람인데 뭘 믿나? 우리는 한숨만 짓네.

余辭匪詭告大隧 (여사비궤고대수) 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저승에 고하면서

不誣者理公其俟 (부무자리공기사) 속이지 않는 것이 이치이니 공께서는 기다려 보소서.

인물(人物)김정헌(金廷憲) 조 기사에는

大司諫係行之曾孫李滉門人嘉靖戊午中進士志行雅飭以筆名於世號訥巖

대사간계행지증손이황문인가정무오중진사지행아칙이필명어세호눌암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증손(曾孫)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가정(嘉靖: 明 世宗) 무오(戊午: 1558: 명종13)년에 진사(進士) 에 입격했으며,

지행(志行: 뜻과 행동)이 고상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세상에 필명(筆名)이 있었다. ()는 눌암(訥巖)이다.) 係行-克禮-世殷-廷憲

김정준(金廷準)조 기사에는

廷憲之弟嘉靖庚子登別試文科官至學諭

정헌지제가정경자등별시문과관지학유

(정헌(廷憲)의 동생으로 가정(嘉靖) 경자(庚子: 1540: 중종35)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관직은 학유(學諭: 성균관 종9품직)에 이르렀다.) 係行-克禮-世殷-廷準

김중청(金中淸)조 기사에는

廷憲之孫天資穎爽器度凝遠師事月川趙穆文章經術爲一時名輩所推尤精於易一松沈喜壽月沙李廷龜咸稱其詩律精神勝似叔平

정헌지손천자영상기도응원사사월천조목문장경술위일시명배소추우정어역일송심희수월사이정귀함칭기시률정신승사숙평

愚伏鄭經世沙溪金長生每服其易學禮說不可及性至孝事親無違萬曆庚戌擢第甲寅以賀節使書狀官朝京時新葬皇太后我國陳慰

우복정경세사계김장생매복기역학예설부가급성지효사친무위만력경술탁제갑인이하절사서장관조경시신장황태후아국진위

使繼至而賀節則例賜恩宴中淸以爲一宴一否雖緣哀慶之殊情禮相事理未安再呈禮部以辭之禮部稱歎以爲君子理勝之文歷文

사계지이하절칙례사은연중청이위일연일부수연애경지수정례상사리미안재정예부이사지예부칭탄이위군자리승지문력문

學正言有詩曰兩日正言言不正一句文學學惟文以見其志焉官至承旨自號苟全退居林泉築室敎授遠近子弟爭後士林立祠以祀

학정언유시왈양일정언언부정일구문학학유문이견기지언관지승지자호구전퇴거임천축실교수원근자제쟁후사림입사이사

有文集七卷行于世

유문집칠권행우세

(정헌(廷憲)의 손자로 천품이 영리하고 시원스러우며 기국(器局)과 도량이 엄정하고 깊이가 있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문장(文章)과 경학(經學)에는 당시에 이름 있는 분 들 중에는 제일로 추앙을 받았다.

특히 역학(易學)에 정통(精通)하여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모두 다 칭찬을 했다.

그 시율(詩律) 정신(精神)은 흡사 말세를 평정하듯 뛰어났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도 그 역학(易學)과 예설(禮說)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매양 감복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모심에 있어서 어김이 없었다.

만력(萬曆) 경술(庚戌: 1610)년에 급제하여

갑인(甲寅: 1614)년에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래조(來朝)했는데,

그 때 새로 황태후(皇太后)의 장례(葬禮)가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진위사(陳慰使)가 잇달아 오자 하절사(賀節使)에게는

관례(貫例)따라 사은연(賜恩宴)을 베풀어 준다고 하자 공()은 비록 애경(哀慶)의 다른 정에 연유하므로 한 연회는 부당하다면서

()에 서로 손바닥으로 가리는 일이므로 사리(事理)로는 미안하지만 사양한다고 예부(禮部)에 다시 정문(呈文)을 올리자

예부(禮部)에서는 군자(君子)의 도리가 뛰어난 글이라며 칭탄(稱歎)을 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문학(文學: 5품직)을 역임하고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6품직)이 되자 시()를 짓기를 이틀에

정언(正言)이 됐지만 말은 바르지 않다. 라는 한 구절을 읊었는데, 문학(文學)을 배움에는 오직 문()으로 그 뜻을 볼 수 있겠다.

관직은 승지(承旨: 3품 당상관)에 이르렀으며 스스로 호()를 구전(苟全)이라 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임천(林泉)의 자연 속에 집을 짓고

가르치니 원근(遠近)의 자제(子弟)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나중에 사림(士林)에서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향(祭享)을 했다.

문집(文集) 7권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係行-克禮-世殷-廷憲-汝虎-中淸

김경호(金景虎)조 기사에는

大司諫係行玄孫壬辰倭亂年三十九以義兵帥癸巳六月十日赴醴泉廣大院陣戰死有殉節詩四句生員朴燉鳳隱公識惟公忠君冒

대사간계행현손임진왜란년삼십구이의병수계사육월십일부예천광대원진전사유순절시사구생원박돈봉은공식유공충군모

死之節凜凜烈烈使人興感云勵節校尉

사지절름름열열사인흥감운려절교위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현손(玄孫)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나이 39살에 의병장수(義兵將帥)가 되어

계사(癸巳: 1593)610일 예천(醴泉)으로 가서 광대원(廣大院) 전투에서 전사(戰死)를 했다.

순절시(殉節詩) 4구가 있다. 생원(生員) 박돈(朴燉) () 봉은(鳳隱)공이 짓기를 오직 공()은 충군(忠君) 모사(冒死)의 지절(志節)

늠름(凜凜) 열열(烈烈)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감흥(感興)을 일으키게 한다. 라고 했다.

여절교위(勵節校尉: 6西班).)

係行-克禮-世殷-廷老-景虎(苟全 선조의 堂叔)

김주민(金柱旻)조 기사에는

中淸之長子萬曆戊午中生員隱德以終號拙修齋

중청지장자만력무오중생원은덕이종호졸수재

(중청(中淸)의 장자(長子)로 만력(萬曆) 무오(戊午: 1558)년에 생원(生員)에 입격하고 은덕(隱德)으로 마쳤다.

()가 졸수재(拙修齋)이다.)

김주국(金柱國)조 기사에는

中淸之二子早有文名萬曆丁巳中生員養靜山林敎授生徒

중청지이자조유문명만력정사중생원양정산림교수생도

(중청(中淸)의 둘째 아들로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있었다.

만력(萬曆) 정사(丁巳: 1617)년에 생원(生員) 입격하고, 산림(山林)에서 정양(靜養)하며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다.)

김주우(金柱宇)조 기사에는

中淸之三子英達夙成以筆鳴於世年十二書晉州矗石樓扁額十五中進士二十七魁謁聖科書進闕門扁額上命賜堂上馬裝以旌之官

중청지삼자영달숙성이필명어세년십이서진주촉석루편액십오중진사이십칠괴알성과서진궐문편액상명사당상마장이정지관

至持平參仁祖朝八達號易眠

지지평참인조조팔달호역면

(중청(中淸)의 셋째 아들로 영달(英達)했다.

일찍 성취한 필력(筆力)은 세상을 울려서 12살 때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의 편액(扁額)을 썼고,

15살에 진사(進士)에 들고, 27살에 알성시(謁聖試)에서 장원(壯元)을 했다.

대궐 문의 편액을 써서 올리자 임금이 당상관(堂上官)의 말안장을 하사(下賜)하며 표창했다.

관직은 사헌부 지평(持平: 5품직)으로 인조(仁祖) 조정에서 모든 일에 정통한 8(八達)로 참여했다. ()는 역면(易眠)이다.)

김주한(金柱漢)조 기사에는

中淸之四子崇禎乙亥中生員器度宏大士林推重

중청지사자숭정을해중생원기도굉대사림추중

(중청(中淸)의 넷째 아들로 숭정(崇禎) 을해(乙亥: 1635: 인조13)년에 생원(生員)에 입격됐으며,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굉장히 커서 사림(士林)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김양렬(金揚烈)조 기사에는

中淸之孫學術精明志行高潔號淸休辛卯中生員

중청지손학술정명지행고결호청휴신묘중생원

(중청(中淸)의 손자로 학술(學術)이 깨끗하고 밝고[精明], 의지와 품행[志行]이 고결(高潔)했다.

()는 청휴(淸休)고 신묘(辛卯: 1651)년에 생원(生員)에 입격했다.) 係行-克禮-世殷-廷憲-夢虎-中淸-柱旻-揚烈

김이명(金爾銘)조 기사에는

中淸之玄孫天性愼默孝友俱至康熙己卯中進士

중청지현손천성신묵효우구지강희기묘중진사

(중청(中淸)의 현손(玄孫)으로 천성(天性)이 삼가고 잠잠히 있으며[愼默] 효유(孝友)가 지극함을 갖췄다.

강희(康熙) 기묘(己卯: 1699)년에 진사(進士)에 입격했다.)

係行-克禮-世殷-廷憲-夢虎-中淸-柱旻-崇烈-至遠-爾銘.

김태운(金泰運)조 기사에는

中淸之後康熙己亥中生員

중청지후강희기해중생원

(중청(中淸)의 후예(後裔)로 강희(康熙) 기해(己亥: 1719)년에 생원(生員)에 입격했다.)

係行-克禮-世殷-廷憲-夢虎-中淸-柱旻-宗烈-至寬-爾鐄-泰運.

 

관적(官蹟)에 보백당(寶白堂)선조의 고()이신

김삼근(金三近)선조의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서

족보에 奉化縣先生案載府君諱라고 봉화현감을 역임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柳洽, 張乙齊, 趙夏, 康勸善, 朴愚, 鄭鄰, 李猷, 金三近, 元自正, 成三龜....

유흡, 장을제, 조하, 강권선, 박우, 정린, 이유, 김삼근, 원자정, 성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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