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발문(跋文) | |||||||||
작성자 | 관리자 [2017-12-23 14:03: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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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卷之五] 구전선생문집권지오
[跋文] 발문
[書赴京別章帖後] 사신으로 북경에 갈때 지어 준 별도의 문장을 모은 뒤에 쓰다
작별할 무렵에 좋은 말로 서로 주고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선행(善行)은 말로서 힘쓰게 하도록 하고 싶어하고 상대방의 실수는 말로서 경계하여 두렵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니 상대방을 아끼지 않으면 어떻게 힘쓰도록 할 것이며 후덕(厚德)하지 않으면 어떻게 경계가 되도록 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후덕하게 하여 오히려 그를 착하게 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려고 하는데, 항차 내가 내몸을 스스로 아끼고 후덕하게 하기를 의당 어떻게 절실하게 해야 하겠는가? 때문에 어진 사람[인자(仁者)]이라야 다른 사람을 전송하면서 역시 좋은 말을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남에게 전송을 받으면서 역시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내가 갑인년(甲寅年 광해군 6, 1614) 여름 천추사 겸 사은사(千秋使兼謝恩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되였다.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가는 것은 성인(聖人)도 어렵게 여겼던 바인데 하물며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겠는가? 명철(明哲)한 황제(皇帝)가 위에 있고 많은 신하들과 제제다사들이 포열(布列)해 있으며 예악(禮樂)이 일어나는 곳이고 문물(文物)이 풍성한 곳이며 만국(萬國)이 함께 그곳에서 조회(朝會)하여 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 일을 행하게 된다. 그런대 길이 멀기는 2,3천 리가 되고 걸리는 기간은 넉넉 잡아 반년이다. 위로는 상사(上使)가 있지만 지위도 높고 교분(交分)도 익숙하지 않은 터이고 아래로 통역관[설원(舌員)]이 있는데 딸린 사람이 30여명 이나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평소에 몸 가지기를 조심하고 일 처리에 민첩하다고 일컫는 자라하더라도 그 말과 행동을 반드시 훌륭하게 해서 그 충성심과 공경심을 떨어트리지 않는 다고는 보장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더구나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주선(周旋)하기를 어떻게 법도에 맞게 하며 수응(酬應)하기를 도리에 합당하게 하여, 산 넘고 물 건너는 먼먼 길을 가면서 조그마한 잘못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품위와 지조를 유지하고 지키기를 잘하여, 사신의 직분에 맞게 만에 하나라도 임금의 명(命)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것을 두려워해서 권면(勸勉)하는 말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조야(朝野)나 원근(遠近)을 논하지 아니하고 널리 사람들에게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아끼고 후덕하게 하여 옛날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분들이 역시 많아서 더러는 오언(五言) 더러는 칠언(七言)의 장편(長篇)과 단율(短律)을 써 주기도 하고 간혹 절구(絶句)에다 서문(序文)을 견(兼)하기도 하여 손을 잡고 정령(丁寧:친절함)하게 전해 주기도 하고 서면(書面)으로 그윽하게 부처 보내기도 하였는데 미흡(未洽)한 것은 두세 장(章)이였고 제때에 미치지 못 한 것은 추후(追後)에 보내기도 하였으니 부유(富裕) 하도다. 그 내용들이여! 옥하관(玉河館)에서 며칠 묵으면서 행장을 풀고 그 글들을 꺼내어 공인(工人)에게 장첩(粧帖)을 부탁하여 상하(上下) 두 질(秩)로 나누어 만들고는 아침 저녁으로 구경하니 마치 스승과 친구가 좌우(左右)에서 서로 함께 강독(講讀)하고 토론(討論)하기를 실컷 하느 것 같아 천리 밖의 면목(面目)이지만 정신(精神)은 한장의 종이에 남은 듯하여 어찌 잠깐의 꿈속에서 희미하게 한바탕 만나고 그치는 것만 같겠는가? 그러나 그 내용을 보니 간혹 옹졸한 나에 대하여 장황(張皇)하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힘쓰게 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였으니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고 부끄럽게여겨 격려하는 것이 나를 힘쓰게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말은 옛날 사람의 뜻을 오늘의 말로 얻게 되는 것이니 오늘날의 말은 옛날의 뜻인즉 오늘의 말이 옛 말에서 말미암은 겄이다. 아아! 이는 진실로 내가 하기에 달렸으니 대체로 힘쓰고 경계할 따름이다.
갑인년(甲寅年)동짓달 구전옹(苟全翁) 이 북경(北京)의 관[연관(燕舘)]에서 쓰다.
[聾巖李賢輔先生退休屛跋文] 농암 이현보선생 퇴휴병 발문
세상에서 농암 이선생(聾巖李先生)은 20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3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서 40여년 동안 벼슬을 하다가 물러나 쉰지 14년 만인 8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 아아! 선생의 늦게 시작한 학문과 이론 현달(顯達)이 선생다운 바가 아니며 선생의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것이 선생다운 바가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그 오직 벼슬에서 자진 사퇴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국가가 있고부터 내려오면서 선비들이 진출하여 벼슬한 이들을 어찌 한정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용퇴(勇退)한 것으로 한(漢)나라 때와 당(唐)나라 때에 이름이 난 사람인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 두 사람과 당나라 양거원(楊巨源)한 사람 외 에는 다시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신라(新羅), 고려(高麗)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조용하게 수 천년을 내려 왔는데 유독 우리 농암선생께서 쇠퇴한 세상의 풍속 가운데서 분연이 일어나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자취를 계승하여 용퇴하여 떠났다. 그가 떠날 때에 이회재(李晦齋:이언적(李彦迪), 권충정공(權忠貞公:권발(權橃)이 이미 전송하는 대열에 있었고,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와 퇴계(退溪:이황(李滉) 두 분의 대현(大賢) 또한 각기 시(詩)를 지어 작별하였으니, 옛날 소광, 소수가 떠날 때에 수천 명이 구경하고 1백 양(兩) 의 수레가 줄을 이었던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젊어서 사기(史記)를 읽으면서 소광,소수와 양거원이 용퇴한 기사(記事)를 보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매우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농암(聾巖)의 문려(門閭)를 지나면서 선생이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자취를 잘 계승하였음을 듣고도 역시 마음속 깊이 감복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머리를 험난한 파도가 밀려오는 벼슬길에 빠트려 버둥대며 빠져드는데 벗어나려고 하면 도로 빠지곤 하면서 끝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더욱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뛰어남은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였고 우리 농암(聾巖) 선생이 천만백(千萬百) 명 가운데 한 사람 뿐임을 흠모(欽慕) 하게 되였다. 진사(進士) 이신승(李愼承)이 선생의 방계 손[방손(傍孫)]으로 선생이 물러 날 때에 제현(諸賢)들이 지은 시(詩)와 선생이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퇴계와 주고 받은 시(詩) 약간편(若干篇)을 뽑아내어 우리집 아이 주우(柱宇)에게 15장의 종이에 쓰게 한 뒤 나누어 두 좌(座)의 병풍감을 만들고는 나에게 그 시종(始終)을 기록하도록 청하였다. 아아! 나를 부끄럽게 한 분은 선생님이고 나를 흥기(興起)하게 한 자는 진사(進士) 이다. 내가 감히 글 솜씨가 졸렬하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주우(柱宇)를 시켜 신안(新安:성주(星州)의 경사당(敬事堂)에서 쓰게 하였는데, 때는 기미년(己未年 광해군 11, 1619) 정월 초 하루였다.
[농암 이선생(聾巖李先生:이현보(李賢輔)세종 12, 1467)~명종10, 1555: 조선시대의 문신(文臣).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설빈옹.시호는 효절(孝節). 본관은 영천(永川) 1498년 급제. 교서관, 검열,정언,지평, 밀양,안동부사 충주,성주목사,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 관찰사,호조참판, 상호군,자헌대부,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음.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 됨.)
[題司馬稧帖後] 제사마계첩후 사마계첩 뒤에 쓰다
대과(大科)를 용방(龍榜) 이라고 한다. 그리고 용(龍) 다음이 말(馬) 이기 때문에 소과(小科)를 지목(指目) 하여 마방(馬榜) 이라고 하는데, 옛날의 사마(司馬)의 칭호(稱號)를 취하여 사마방(司馬榜)이라고 일컬으니 대저 사마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좋아해서이다. 선비가 용방에 올라 조정의 벼슬하는 이라도 그 한가하기는 진실로 사마가 시골 구석에서 자유 자재로 여유있게 지내는 것만 못하며 그 재질(材質)을 이미시험하여 간혹 성과가 없는 데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또한 사마로 좌석상의 보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못하다. 그러므로 문묵(文墨)으로 모이며 술로 회포를 풀고 경치 좋은 시내와 산 그리고 꽃과 달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 우리 조정의 전성시대 사마가 된 이들에게 사마계(司馬稧)가 있고, 사마소(司馬所) 가 있게 된 까닭이다.
규모가 작은 우리 고장에도 많은 선비글이 배출되여 사마가 한 세대에 끊어지지 않고 잇달기를 애당초에 다른 주.군(州.郡)에 양보함이 없어 그 왕래(往來)하며 뒤따라가 모시기도 하고 술에 취하고 깨면서 시(詩)를 지어 주고 받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풍운(風韻)이 후인(後人)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게 남아있으니 아! 그것이 융성하기도 하다. 그런대 불행하게도 6,70년 동안 내려 오면서 과거 지망생으로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한 자가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한 사람도 대과나 소과에 뽑힌 자가 없게되어 드디어 사마로 하여금 그 사마계와 사마소가 함께 모두 떨어져 나가게되었다. 그래서 산골 고을이 조용해지고 선비들이 외롭게 되어 서로 함께 모여서 탄식하기를 아무 생원[모생원(某生員)]은 바로 우리선조(先祖)이고 아무진사[모진사(某進士)]는 바로 그대의 조선(祖先)인데 나와그대가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지 못하고있다. 고, 하면서 남긴 업적을 솔선하여 가다듬으려고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잘 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간혹 장중(場中)에서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글재주[문예(文藝)]가 있더라도 과거에 낙방(落榜)하기 일쑤이므로, 더러는 그 고을의 운수가 비색(否塞)함을 의심하기도 하고, 더러는 천황(天荒)이 심하다는 것으로핑계를 대면서 거의 합격자가 없어져 끝내 만에 하나라도 진작되고 선발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마는 근년에는 재능이 있으면 잘 먹혀들어 그 명성을 계승하여 이루는데 경술년(庚戌年 광해군2,1610)에서 기미년(己未年 광해군11, 1619)까지 10년 사이에 4,5명이 사마가 되고, 또 본 고을에서 다른 고을로 옮겨 갔거나 다름 고을에서 이 고을로 옮겨 온 자로 사마가 된 자가 6,7명을 넘었다. 그래서 또 그들의 글 솜씨를 칼날처럼 예리하게 하여 장차 한번 과거 시험장에서 기량을 겨누어 급제를 차지하려고 맹세하고, 일제히 옹치(雍齒)가 먼저 제후(諸侯)에 봉(封)해진 것을 기뻐하며 우리들도 염려할것이 없다 고 말하는 자 또한 여유가 있게 좌우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되였으니 비록 천황(天荒)은 크게 깨트려지고 고을의 운수가 트이려 한다고 말하여도 좋겠다. 어느날 우리집 아이 주국(柱國)이 박사회(朴士晦)군과 같은 말로 나에게 고(告)하기를 오늘날 우리 고을이 이미 비색함이 없어진 형상이 있으니 고인(古人)들의 좋은 일을 중수(重修)하여 뒷날 크게 융성하게할 기반을 열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구리로 된 병(甁)은 물건으로서 옛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아끼는데 하물며 우리 선비들의 옛날 법식(法式)을 앛장서서 잘 밝히고 계승하여 행한다면 누군들 눈을 닦고 보지 않겠으며 귀를 쫑긋하여 듣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에 박사회가 그 일을 맡고 회보(晦甫)가 그 뜻을 써서 드디어 이름을 사마계(司馬稧)라고 하였다. 아아! 이 계가 이루어진 것이 어찌 우연(偶然)이라고 하겠는가? 없어진지 오랜만에 다시 새롭게 되었으며 오늘에 살면서 옛날의 법을 행하려 하니 실제로 유교[사문(斯文)]의 융성과 쇠퇴에 관계가 있으며 하늘이 흥기(興起)시키는 바이니 사람이 감히 진작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러 군자(君子)들 또한 어떻게 단지 장황(長皇)하게 과장시켜 구차히 이웃 지역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할 뿐이겠는가? 그 스스로 서로를 경계(警戒)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좋아하는 뜻을 마치 서문(序文)과 일치하게 하여 분명히 해야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장옥문자(場屋文字:과거공부(科擧工夫)를 가리킴)만 향하여 내달릴 것이 아니고 심성(心性)공부에도 힘써서,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收拾)하여 서로 인도해서 군자유(君子儒)가 된다면 한때에 출세한 무리들에게 거의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더러는 장차 우리 봉성(鳳城)도 염락(濂洛) 처럼 될 터이니, 저 구름이 끼였다 비가 내렸다 하는 변화 무쌍한 사람들과는 말할것이 못된다. 이보다 아래의 경우는 작은 성취(成就)를 편안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각기 스스로 힘써서 그 공부를 넓히고 크게 하여 시골구석에서 여유있게 일생을 마치지 않고 반드시 임금을 보좌하여 훌륭한 군주(君主)가 되게 하고 백성에게는 은택이 베풀어지게 하는데 그 보배로운 재능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수계(修稧:계를 정비함)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곘는가? 나 같은 사람은 사마가 되 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요행으로 매우 곤궁한 가운데서 용방(龍榜)에 올랐을 뿐인데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실험을 해 보았지만 벼슬길에서 골몰하며 성과가 없었던 재질로 여유있게 자유 자재로 하면서 한가함도 없는 자가 내가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양(羊)의 창자처럼 험난한 벼슬길에서 실패[실각(失脚)]하고 거북 등껍데기에 머리를 감춘 채 두려워하며 견책(譴責)을 기다리는 가운데 이렇게 향리(鄕里)의 성대한 일을 보고서 감히 이 말을 계편(稧編)의 끝에다 쓰노니, 모르기는 하지만 여러 친구들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아! 혹 잠시 한가한 시간을 훔쳐서 강론(講論)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있다면 벌(罰)로 마시는 술한잔 들기를 내또한 어찌 사양하리. 주례(周禮) 왕제(王制)를 살펴보니, 향(鄕)에다 수사(秀士)중에서 논의(論議)하도록 명하여 사도(司徒)로 승진하게 하는데, 그것을 선사(選士)라 하고, 사도로 선사된 중에 뛰어난 자를 논의하여 태학(太學)으로 승진케 하는데, 그것을 준사(俊士)라 한다. 사도에 승진한 자는 향(鄕)에다 요역(徭役)을 지급하지 않고 태학에 승진한 자는 사도에게 요역을 지급하지 않는데, 그것을 조사(造士)라고 한다. 대악정(大樂正:악관(樂官)의 수장)이 조사 가운데 뛰어난 자를 논의하여 왕(王)에게 보고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승진 시키는데, 이것을 진사(進士) 라고 한다. 대사마가 진사 가운데 현명한 자를 논의하여 왕에게 보고하여 그 논의한 것을 결정짓는데, 그 논의가 경정된 연후에 벼슬을 시키며 벼슬에 임명한 뒤에 작위(爵位)를 주고 작위가 정해진 뒤에 녹봉(祿俸)을 준다. 하였으며, 당(唐)나라 정관(貞觀:태종(太宗)의 연호) 6년을 살펴보니 주공(周公)의 사당(祠堂)을 없애고 공자(孔子)를 선성(先聖)으로 안씨(顔氏:안자(顔子)를 선사(先師)라 하였으며 천하의 돈사(惇師)를 불러다 덕행(德行)을 상고하여 학관(學官)으로 산고 제왕(帝王)의 거둥에 자주 나타나게 하여, 석채(釋菜) 를 관람하게 하며, 좨주(祭酒)와 박사(博士) 에게 명하며 경서(經書)의 뜻을 강독(講讀), 토론(討論)하게 하여 한 경서를 통(通)하는 선비를 관리로 서명(署名) 을 얻게 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학사(學舍)를 1천 2백 구역(區域)으로 넓히게 하고 여러 생원(生員)의 정원을 3천 2백명에 이르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증광 생원(增廣生員)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사과(進士科)는 수(隨)나라에서 시작되어 오로지 문사(文辭)만을 숭상 하였으며 당(唐)나라 때의 12과(科)에서 오직 진사과와 명경과(明經科)만이 오래도록 시행되었는데 진사과는 성운(聲韻)을 학문으로 삼았다. 송(宋)나라 역시 두 과(科)를 두기는 하였으나 진사과가 사람을 뽑는데는 더 성대(盛大)하였으니, 그 제1갑은 칙사진사급제(勅賜進士及第)이고 3갑, 4갑은 진사출신(進士出身)이며, 5갑은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였다. 명[황명(皇明)]나라 때에는 그것을 따라서 문과(文科)는 문진사(文進士), 무과(武科)는 무진사(武進士)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는 중국의 법식을 그대로 따랐는데 고려(高麗)의 경우는 동진사(同進士)를 두었는데, 그것은 송나라 제도와 같고 조선(朝鮮)의 경우는 당나라의 증광생원(增廣生員)의 규범을 가지고 새원(生員)이라고 하였다. 그 시험은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疑)로 경술(經術)을 밝게 이해하려는 유법(遺法) 이다. 그리고 주(周)나라의 승진을 논의하는 제도를 진사(進士)라고 하는데 그시험은 시부(詩賦)로 성운(聲韻)을 학문으로 삼는것이다 진사와 생원은 모두 태학생(太學生)이 되니 아무리 추천하여 등용하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포의(布衣)를 벗고 관복(官服)을 입는 관원이 되지 못하며 조정의 반열(班列)에 선 인사(人士)가 대과(大科)에 급제하게 되면, 다시는 생원, 진사라고 일컫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생원, 진사는 과거에 있어서 소과(小科)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사를 일러 사마(司馬)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대사마(大司馬)에 승진된 옛날 제도를 따라서며, 이른바 생원도 역시 진사와 같은 소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함께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대저 진사와 생원이 일정한 이름이 있는데도 또한 반드시 특별하게 부르기를 사마라고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은 대체로 역시 그 사마라는 이름을 좋아해서이며 옛날 것을 사모(思慕)해서 이기도 하다. 아! 오늘날의 세상에 살면서 옛날의 이름을 사모하니 이는 진실로 생원, 진사의 좋은 일이며 오늘 사마가 모이는 것 또한 바로 우리 고장에서 옛날의 법을 따르는 일이니 어찌 괴미(衰微)해 가는 세상에 작은 고을에서의 하나의 큰 승리가 아닌가? 더구나 봄옷이 이미 완성되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이며 시(詩)를 읊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터이니,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역시 거기에 참여 할 것이다. 그런데 조용히 연회(宴會)를 베풀며 군자(君子)가 교제하는 신의(信義)를 강론하니 당초부터 뭇 부자집 아이들이 고운 옷 입고 술에 취하는 것과는 비교 할 바가 아니니, 아아! 아름답기도 하도다. 어떤 사람이 이 모임을 두고 말하기를 진실로 일찍이 사마가 된 사람이 아니면 비록 용방(龍榜)에 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앞가슴이 튀어나온 장애인이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목할 것이다. 하였는데 아! 이 무슨 말인가? 제1갑, 제2, 3갑, 4갑이며, 간혹 진사급제(進士及第)를 하사(下賜)하고 간혹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하는 것은 바로 얫날의 법규(法規)이니 제2갑의 나와 같이 병든 용방의 출신이 비록 더러 머리를 들고서 사마의 뒤를 따른다 하더라도 아마 매우 외람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긋한데 여러 군자(君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 이 말은 장난삼아 한 말일 뿐이다. 모(某)가 지난번에 이미 서툰 솜씨로 회보(晦甫)의 서문 뒤에 발문(跋文)을 쓰면서 오히려 미진(未盡)한 바가 있어서 이제 또 옛날의 실질적인 근거를 상고 하여 그 제목에 잇게 하니, 아! 역시 수다스럽도다.
[사마(司馬):중국의 주(周)나라 때 벼슬로 육경(六卿)의 하나. 나라의 군정(軍政)을 맡아 보았음.] [사마소(司馬所:외방의 고을마다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이 모이 던 곳.] [천황(天荒:과거(科擧)에서 지나칠 정도로 급제자(及第者)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함.] [염락(濂洛: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頣)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頣)등 주자(朱子:주희(周熹)로 이어지는 정주학(程朱學)을 말함.] [석채(釋菜: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祭祀)의 하나. 제물(祭物)을 나물만으로 차리는 것이 특이함.] [좨주(祭酒:고려(高麗),조선(朝鮮)초의 종3품 벼슬.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의 수장(종3품).조선 태종 때 사성(司成)으로고침.] [박사(博士:당나라 태학(太學)의 정6품, 또는 국자학의 정5품. 조선시대 때는 예조의 정7품.]
이해 삼월[춘계(春季)] 십사일[욕망(欲望)]에 구전(苟全)은 계장동(桂場洞)의 우거(寓居)인 금서소와(琴書小窩)의 면가헌(眄柯軒)에서 쓰다.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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