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苟全先生文集
苟全先生文集
제목 발문(跋文)
작성자 관리자 [2017-12-23 14: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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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卷之五]    구전선생문집권지오 

 

[跋文]  발문

 

                            서부경별장첩후(書赴京別章帖後)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갈 때 주위 사람들에게 받은

   송별시문(送別詩文)들을 중국에서 첩(帖)으로 만들고 이에 붙인 글이다.

 

   原文(원문)

  赴京別章帖後 (서부경별장첩후)

   臨別贈言。古之道也。欲人之善而勉之以言。恐人之失而戒之以言。非愛惡勉非厚惡戒。人之愛厚於人。

  별증언。고지도야。욕인지선이면지이언。공인지실이계지이언。비애악면비후악계。인지애후어인

   猶欲其善而無失。况吾之自愛厚吾身。宜如何切也。故惟仁人能送人以言。而人之見送於人也。亦惟言是求。

   유욕기선이무실。황오지자애후오신。의여하절야。고유인인능송인이언。이인지견송어인야。역유언시구

   余於甲寅夏。以下价忝千秋兼謝恩行赴燕京。使於四方。聖人所難。而况上國乎。明明在上。濟濟布列。

   여어갑인하。이하개첨천추겸사은행부연경。사어사방。성인소난。이황상국호。명명재상。제제포열

   禮樂之所興。文物之所盛。與萬國同其朝。代一人行其事。而道路之遠則二三千里也。日月之久則半一年強也。

   악지소흥。문물지소성。여만국동기조。대일인행기사。이도로지원칙이삼천리야。일월지구칙반일년강야

   上有上价焉。位顯而交新。下有舌員焉三十餘。其人雖素稱謹於持身而敏於處事者。

   상유상개언。위현이교신。하유설원언삼십여。기인수소칭근어지신이민어처사자

   難保其必善於言行而不墜其忠敬。矧乎如吾之愚。其何以周旋之中於則。酬應之合乎宜。無悔吝乎跋涉。

   난보기필선어언행이불추기충경。신호여오지우。기하이주선지중어칙。수응지합호의。무회린호발섭

   能終始以持守。有以稱使職完君命於萬一也。余爲此懼。求一言之勉乎余。不論朝野遠近。博請於人。

   능종시이지수。유이칭사직완군명어만일야。여위차구。구일언지면호여。불론조야원근。박청어인

   則人之愛厚人而行古人之道者。亦不爲不多。或五言或七言。長篇焉短律焉。間以絶句。兼之叙文。

   칙인지애후인이행고인지도자。역불위불다。혹오언혹칠언。장편언단률언。간이절구。겸지서문。 

   有握手丁寧而贈。有替面綢繆而寄。未洽則二三其章。不及則追而送之。富哉言乎。玉河之數日。解裝而出之。

   유악수정녕이증。유체면주무이기。미흡칙이삼기장。불급칙추이송지。부재언호。관옥하지수일。해장이출지

   付工人粧帖。分爲上下兩秩。朝夕而玩。有若師友乎左右。相與講討之無厭。千里面目。一紙精神。

   부공인장첩。분위상하량질。조석이완。유약사우호좌우。상여강토지무염。천리면목。일지정신

   豈特如片夢中依然一塲會合而已哉。第見其中或有張皇於拙者。至加以不虞之辭。是亦勉而戒耳。引而進之。

   기특여편몽중의연일장회합이이재。제견기중혹유장황어졸자。지가이불우지사。시역면이계이。인이진지。 

   而激之。非勉戒余而何。然則是言也。古之意而今之言也。由今之言。得古之意。則今言由古言也。噫是誠在我。

  이격지。비면계여이하。 연칙시언야。고지의이금지언야。유금지언。득고지의。칙금언유고언야。희시성재아。 

   盖亦勉戒之而已。是年南至月。苟全翁書于燕

  개역면계지이이。시년남지월。구전옹서우연관서                       

 

[赴京別章帖後]     사신으로 북경에 갈때 지어 준 별도의 문장을 모은 뒤에 쓰다

 

작별할 무렵에 좋은 말로 서로 주고 받는 것은 옛날의 도리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선행(善行)은 말로서 힘쓰게 하도록 하고 싶어하고 상대방의 실수는 말로서 경계하여 두렵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니 상대방을 아끼지 않으면 어떻게 힘쓰도록 할 것이며 후덕(厚德)하지 않으면 어떻게 경계가 되도록 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후덕하게 하여 오히려 그를 착하게 하고 실수가 없도록 하려고 하는데,

항차 내가 내몸을 스스로 아끼고 후덕하게 하기를 의당 어떻게 절실하게 해야 하겠는가?

때문에 어진 사람[인자(仁者)]이라야 다른 사람을 전송하면서 역시 좋은 말을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남에게 전송을 받으면서 역시 좋은 말을 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내가 갑인년(甲寅年 광해군 6, 1614) 여름 천추사 겸 사은사(千秋使兼謝恩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되였다.

사방(四方)에 사신(使臣)으로 가는 것은 성인(聖人)도 어렵게 여겼던 바인데 하물며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겠는가?

명철(明哲)한 황제(皇帝)가 위에 있고 많은 신하들과 제제다사들이 포열(布列)해 있으며 예악(禮樂)이 일어나는 곳이고

문물(文物)이 풍성한 곳이며 만국(萬國)이 함께 그곳에서 조회(朝會)하여 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 일을 행하게 된다.

그런대 길이 멀기는  2,3천 리가 되고 걸리는 기간은 넉넉 잡아 반년이다.

위로는 상사(上使)가 있지만 지위도 높고 교분(交分)도 익숙하지 않은 터이고 아래로 통역관[설원(舌員)]이 있는데

딸린 사람이 30여명 이나된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평소에 몸 가지기를 조심하고 일 처리에 민첩하다고 일컫는 자라하더라도 그 말과 행동을 반드시

훌륭하게 해서 그 충성심과 공경심을 떨어트리지 않는 다고는 보장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런데 더구나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주선(周旋)하기를 어떻게 법도에 맞게 하며 수응(酬應)하기를 도리에 합당하게 하여,

산 넘고 물 건너는 먼먼 길을 가면서 조그마한 잘못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품위와 지조를 유지하고 지키기를 잘하여,

사신의 직분에 맞게 만에 하나라도 임금의 명(命)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것을 두려워해서 권면(勸勉)하는 말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조야(朝野)나 원근(遠近)을 논하지 아니하고 널리 사람들에게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아끼고

후덕하게 하여 옛날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분들이 역시 많아서 더러는 오언(五言) 더러는 칠언(七言)의 장편(長篇)과

단율(短律)을 써 주기도 하고 간혹 절구(絶句)에다 서문(序文)을 견(兼)하기도 하여 손을 잡고 정령(丁寧:친절함)하게

전해 주기도 하고 서면(書面)으로 그윽하게 부처 보내기도 하였는데 미흡(未洽)한 것은 두세 장(章)이였고 제때에 미치지

못 한 것은 추후(追後)에 보내기도 하였으니 부유(富裕) 하도다.

그 내용들이여!

옥하관(玉河館)에서 며칠 묵으면서 행장을 풀고 그 글들을 꺼내어 공인(工人)에게 장첩(粧帖)을 부탁하여 상하(上下)

두 질(秩)로 나누어 만들고는 아침 저녁으로 구경하니 마치 스승과 친구가 좌우(左右)에서 서로 함께 강독(講讀)하고

토론(討論)하기를 실컷 하느 것 같아 천리 밖의 면목(面目)이지만 정신(精神)은 한장의 종이에 남은 듯하여 어찌 잠깐의

꿈속에서 희미하게 한바탕 만나고 그치는 것만 같겠는가?

그러나 그 내용을 보니 간혹 옹졸한 나에 대하여 장황(張皇)하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힘쓰게 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였으니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고 부끄럽게여겨 격려하는 것이

나를 힘쓰게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말은 옛날 사람의 뜻을 오늘의 말로 얻게 되는 것이니 오늘날의 말은 옛날의 뜻인즉 오늘의 말이 

옛 말에서 말미암은 겄이다.

아아!

이는 진실로 내가 하기에 달렸으니 대체로 힘쓰고 경계할 따름이다.

 

갑인년(甲寅年)동짓달 구전옹(苟全翁) 이 북경(北京)의 관[연관(燕舘)]에서 쓰다.

 

 

                                 농암선생퇴휴병발(聾巖先生退休屛跋)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후손 이신승(李愼承)이 이현보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시문(詩文)과 평소에 퇴계(退溪)와 주고받은 시문들을 모아서

   병풍(屛風)으로 만들고 김중청(金中淸)에게 부탁해서 쓰게 한 발문(跋文)이다.

 

     原文(원문)

    聾巖李賢輔先生退休屛跋文 (농암이현보선생퇴휴병발문)

     世說聾巖李先生。二十而始學。三十二而登第。立朝四十餘年。而退休十有四年。終於八十九歲。嗚呼。

     세설농암이선생。이십이시학。삼십이이등제。입조사십여년。이퇴휴십유사년。종어팔십구세。오호 

     先生之晩學早達。非所以爲先生也。先生之位邵年遐。非所以爲先生也。先生之所以爲先生者。其惟退休也乎。

     선생지만학조달。비소이위선생야。선생지위소년하。비소이위선생야。선생지소이위선생자。기유퇴휴야호

     盖自有國以來。士之出而仕者何限。而以退名於漢唐者二疏一楊之外。無復有聞。我國自羅麗以及我朝。

     개자유국이래。사지출이사자하한。이이퇴명어한당자이소일양지외。무부유문。아국자라려이급아조。 

     寥寥數千載以下。獨我先生奮然於頹波之中。繼疏楊蹤迹而去。其去也李晦齋權忠定公旣在送者之列。

     요요수천재이하。독아선생분연어퇴파지중。계소양종적이거。기거야이회재권충정공기재송자지열

     慕齋退溪兩大賢又各賦詩以別。則豈特數千人百兩車而止哉。嗚呼。少讀史記見踈楊之勇退。猶不甚異於心。

     모재퇴계양대현우각부시이별。칙기특수천인백양차이지재。오호。소독사기견소양지용퇴。유불심이어심

     過聾巖閭。聞先生之能繼疏楊。而亦未甞有所深服。及今沒首宦海波頭。拍拍汩汩。欲脫而旋溺。終無以自振也。

     과농암려。문선생지능계소양。이역미상유소심복。급금몰수환해파두。박박율율。욕탈이선닉。종무이자진야

     然後益信踈楊氏之卓卓難及。而欽我先生之能爲一於千萬百也。李上舍愼承。先生之旁孫。

     연후익신소양씨지탁탁난급。이흠아선생지능위일어천만백야。이상사신승。선생지방손。 

     拈出先生退去時諸賢之作及其居閑與退溪唱酬若干篇。令阿豚柱宇書諸十五紙。分爲兩屛。請余誌其顚末。

     념출선생퇴거시제현지작급기거한여퇴계창수약간편。영아돈주우서제십오지。분위양병。청여지기전말。 

     噫耻我者先生也。起余者上舍也。余不敢辭以拙。仍使柱宇題于新安敬事堂。時維己未元正。

     희치아자선생야。기여자상사야。여불감사이졸。잉사주우제우신안경사당。시유기미원정

                                                                                            

 

 [聾巖李賢輔先生退休屛跋文]     농암 이현보선생 퇴휴병 발문

 

세상에서 농암 이선생(巖李先生)은 20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32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서 40여년 동안 벼슬을 하다가 물러나 쉰지 14년 만인 8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

아아!

선생의 늦게 시작한 학문과 이론 현달(顯達)이 선생다운 바가 아니며 선생의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은것이 선생다운 바가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그 오직 벼슬에서 자진 사퇴한 것이라고 하겠다.

대체로 국가가 있고부터 내려오면서 선비들이 진출하여 벼슬한 이들을 어찌 한정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용퇴(勇退)한 것으로

한(漢)나라 때와 당(唐)나라 때에 이름이 난 사람인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 두 사람과 당나라 양거원(楊巨源)한 사람

외 에는 다시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신라(新羅), 고려(高麗)로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조용하게 수 천년을

내려 왔는데 유독 우리 농암선생께서 쇠퇴한 세상의 풍속 가운데서 분연이 일어나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자취를 계승하여

용퇴하여 떠났다.

그가 떠날 때에 이회재(李晦齋:이언적(李彦迪), 권충정공(權忠貞公:권발(權橃)이 이미 전송하는 대열에 있었고,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와 퇴계(退溪:이황(李滉) 두 분의 대현(大賢) 또한 각기 시(詩)를 지어 작별하였으니,

옛날 소광, 소수가 떠날 때에 수천 명이 구경하고 1백 양(兩) 의 수레가 줄을 이었던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젊어서 사기(史記)를 읽으면서 소광,소수와 양거원이 용퇴한 기사(記事)를 보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매우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농암()의 문려(門閭)를 지나면서 선생이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자취를 잘 계승하였음을 듣고도

역시 마음속 깊이 감복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머리를 험난한 파도가 밀려오는 벼슬길에 빠트려 버둥대며 빠져드는데 벗어나려고 하면 도로 빠지곤

하면서 끝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런 연후에야 더욱 소광,소수와 양거원의 뛰어남은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였고 우리 농암() 선생이

천만백(千萬百) 명 가운데 한 사람 뿐임을 흠모(欽慕) 하게 되였다.

진사(進士) 이신승(李愼承)이 선생의 방계 손[방손(傍孫)]으로 선생이 물러 날 때에 제현(諸賢)들이 지은 시(詩)와

선생이 한가한 생활을 하면서 퇴계와 주고 받은 시(詩) 약간편(若干篇)을 뽑아내어 우리집 아이 주우(柱宇)에게

15장의 종이에 쓰게 한 뒤 나누어 두 좌(座)의 병풍감을 만들고는 나에게 그 시종(始終)을 기록하도록 청하였다.

아아!

나를 부끄럽게 한 분은 선생님이고 나를 흥기(興起)하게 한 자는 진사(進士) 이다.

내가 감히 글 솜씨가 졸렬하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주우(柱宇)를 시켜 신안(新安:성주(星州)의

경사당(敬事堂)에서 쓰게 하였는데,

때는 기미년(己未年 광해군 11, 1619) 정월 초 하루였다.

 

[농암 이선생(巖李先生:이현보(李賢輔)세종 12, 1467)~명종10, 1555: 조선시대의 문신(文臣).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巖) 설빈옹.시호는 효절(孝節).  본관은 영천(永川) 1498년 급제. 교서관,

                                     검열,정언,지평, 밀양,안동부사 충주,성주목사,동부승지,부제학,경상도 관찰사,호조참판,

                                     상호군,자헌대부,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음.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 됨.)

 

  

                                 제사마계첩후(題司馬稧帖後)

   아들 주국(柱國)과 그의 친구 박사회朴士晦)의 건의에 따라

   사마계(司馬稧)를 만들게 하고 그 내용을 첩으로 만들어 이에 붙인 글이다.

 

    原文(원문)

   題司馬稧帖後 (제사마계첩후)

    大科謂之龍榜。而次於龍者馬。故目其小曰馬。而取古司馬之稱以稱之。夫司馬者。好其號也。

    대과위지용방。이차어용자마。고목기소왈마。이취고사마지칭이칭지。부사마자。호기호야

    士之登龍牓仕於朝者。其閑固不如司馬之優遊俛仰於鄕曲間。其材或未免爲已試無效之歸。

    사지등용방사어조자。기한고불여사마지우유면앙어향곡간。기재혹미면위이시무효지귀

    則又不若司馬之猶爲席上珍也。故會之以文墨。叙之以杯酒。溪山焉花月焉。自有所不能已者。

    칙우불약사마지유위석상진야。고회지이문묵。서지이배주。계산언화월언。자유소불능이자

    此我朝全盛時司馬者之所以有稧有所也。十室玆鄕。多士攸作。司馬之聯翩一世。初無讓於州郡。

    차아조전성시사마자지소이유계유소야。십실자향。다사유작。사마지련편일세。초무양어주군

    其往來追隨醉醒酬唱。至于今風韻之餘在後人視聽者。吁其盛矣。不幸六七十年來。爲擧子力於業者不爲不多。

    기왕래추수취성수창。지우금풍운지여재후인시청자。우기성의。불행륙칠십년래。위거자력어업자불위불다

    而無一人占選其大小。遂使司馬並與其稧與所而墜盡焉。山縣寥寥。章甫踽踽。相與聚首而歎曰某生員乃吾先。

    이무일인점선기대소。수사사마병여기계여소이추진언。산현요요。장보우우。상여취수이탄왈모생원내오선

    某進士乃爾祖。吾與爾未趾其美。非不欲脩遺緖而莫之能。雖或有擅塲文藝而善於屈。或疑其邑運之否。

    모진사내이조。오여이미지기미。비불욕수유서이막지능。수혹유천장문예이선어굴。혹의기읍운지부

    或諉以天荒之甚。殆將泯泯乎終無以振拔於萬一。豈意近歲有才能售。踵成其名。自庚而己十年之間。

    혹위이천황지심。태장민민호종무이진발어만일。기의근세유재능수。종성기명。자경이기십년지간

    四五其司馬其自玆土移他。由他邑贅玆者。又不止六七八。而方且利其鋒刃。誓將一戰勝齊。笑雍齒之先封。

    사오기사마기자자토이타。유타읍췌자자。우불지육칠팔。이방차리기봉인。서장일전승제。소옹치지선봉

    謂無患於吾屬者。亦可屈伸人左右指而有餘。則雖謂之天荒大破邑運欲泰可也。一日阿豚柱國與朴君士晦。

    위무환어오속자。역가굴신인좌우지이유여。칙수위지천황대파읍운욕태가야。일일아돈주국여박군사회

    同辭告余曰今也吾鄕已有傾否之象。重修我古人好事。以開他日大盛之基如何。余曰銅甁物也而好古者愛之。

    동사고여왈금야오향이유경부지상。중수아고인호사。이개타일대성지기여하。여왈동병물야이호고자애지

    况此吾儒古武。有能倡而明之。繼而行之。則夫誰不拭目而聳耳也哉。於是士晦司其事。晦甫叙其義。

    황차오유고무。유능창이명지。계이행지。칙부수불식목이용이야재。어시사회사기사。회보서기의

    遂名之曰司馬稧。噫斯稧之成。豈偶然哉。廢久惟新。在今行古。實有關於斯文隆替。而天之所興。

    수명지왈사마계。희사계지성。기우연재。폐구유신。재금행고。실유관어사문륭체。이천지소흥

    人不敢不作者也。然諸君子亦豈直爲張皇誇大。以苟肩於隣壤人而已耶。其自相戒警。終始孚好之意。

    인불감불작자야。연제군자역기직위장황과대。이구견어린양인이이야。기자상계경。종시부호지의

    若稽序文而炳炳矣。以余所望。不獨馳騁於塲屋文字。而向裏著力。收拾身心。相率而爲君子儒。

    약계서문이병병의。이여소망。불독치빙어장옥문자。이향리저력。수습신심。상솔이위군자유

    則庶幾無愧於一時輩出。而或將濂洛我鳳城。彼雲翻雨覆之態。有不足言矣。下此則不以小成爲安。

    칙서기무괴어일시배출。이혹장렴락아봉성。피운번우복지태。유불족언의。하차칙불이소성위안

    各自亹亹以廣大其業。不終於鄕曲間優遊。而必衒其珍於致君澤民之用。又豈非脩稧者之能事耶。

    각자미미이광대기업。불종어향곡간우유。이필현기진어치군택민지용。우기비수계자지능사야

    若余者欲馬而不得。倖而龍於泥困中耳。前所云已試無效之才。役役於宦途。無優遊俛仰之閑者。非余而誰也。

    약여자욕마이불득。행이룡어니곤중이。전소운이시무효지재。역역어환도。무우유면앙지한자。비여이수야

    羊腸失脚。龜甲藏頭。怔仄俟譴之中。覩此鄕里盛擧。敢以是題于稧編之末。未知諸友以爲如何也。噫。

    양장실각。구갑장두。정측사견지중。도차향리성거。감이시제우계편지말。미지제우이위여하야。희

    倘偸小閑。得與講席。則擧白一浮。吾亦何辭。按周禮王制。命鄕論秀士。升之司徒曰選士。司徒論選士之秀者。

    당투소한。득여강석。칙거백일부。오역하사。안주례왕제。명향론수사。승지사도왈선사。사도론선사지수자

    升之學曰俊士。升司徒不征於鄕。升學不征於司徒曰造士。大樂正論造士之秀者。告于王而升諸大司馬曰進士。

    승지학왈준사。승사도불정어향。승학불정어사도왈조사。대악정론조사지수자。고우왕이승제대사마왈진사

    大司馬辨論進士之賢者。告于王而定其論。論定然後官之。任官然後爵之。位定然後祿之。又按唐貞觀六年。

    대사마변론진사지현자。고우왕이정기론。론정연후관지。임관연후작지。위정연후록지。우안당정관육년

    罷周公祠。以孔子爲先聖。顔氏爲先師。召天下惇師考德爲學官。數臨幸觀釋菜。命祭酒博士講討經義。

    파주공사。이공자위선성。안씨위선사。소천하돈사고덕위학관。수림행관석채。명제주박사강토경의

    能通一經之士得署吏。遂廣學舍千二百區。諸生員額至三千二百。謂之增廣生員。若其進士之科。

    능통일경지사득서리。수광학사천이백구。제생원액지삼천이백。위지증광생원。약기진사지과

    始於隋而專尙文辭。唐之十二科。惟進士明經久行。而進士以聲韻爲學。宋亦有此二科。而進士得人爲盛。

    시어수이전상문사。당지십이과。유진사명경구행。이진사이성운위학。송역유차이과。이진사득인위성

    其第一甲第二甲則勑賜進士及第。三甲四甲則進士出身。五甲則同進士出身。皇明因之。文曰文進士。

    기제일갑제이갑칙래사진사급제。삼갑사갑칙진사출신。오갑칙동진사출신。황명인지。문왈문진사

    武曰武進士。海東制擧。式遵中華。而高麗則有同進士如宋制。我朝則以唐增廣之規而謂之生員。

    무왈무진사。해동제거。식준중화。이고려칙유동진사여송제。아조칙이당증광지규이위지생원

    所試者四書疑五經義。明經遺法也。以周論升之制而謂之進士。所試者詩賦聲韻。爲學也進士與生員皆爲大學生。

    소시자사서의오경의。명경유법야。이주론승지제이위지진사。소시자시부성운。위학야진사여생원개위대학생

    雖有薦用之路。而未遽爲釋褐立朝之士。及登大科則不復稱生員進士。故生進爲科擧之小者矣。

    수유천용지로。이미거위석갈립조지사。급등대과칙불부칭생원진사。고생진위과거지소자의

    然則謂進士爲司馬者。實因升諸大司馬之古制。而所謂生員亦與進士同科。故因並其稱。夫進士也生員也。

    연칙위진사위사마자。실인승제대사마지고제。이소위생원역여진사동과。고인병기칭。부진사야생원야

    旣有一定之號。而又必別稱爲司馬。如是者盖亦好其號而慕諸古也。噫居今之世。慕古之名。是誡生進者之好事

    기유일정지호。이우필별칭위사마。여시자개역호기호이모제고야。희거금지세。모고지명。시계생진자지호사

    而今日司馬之會。又是吾鄕追古之擧。則豈非衰世小縣之一大勝耶。况春服旣成。有浴泝風詠之胷次。

    이금일사마지회。우시오향추고지거。칙기비쇠세소현지일대승야。황춘복기성。유욕소풍영지흉차

    則雖聖人亦且與之。而從容樽俎。講君子交際之信義。則初非衆富兒醉紅裙者之比。猗歟美哉。或者謂是會也。

    칙수성인역차여지。이종용준조。강군자교제지신의。칙초비중부아취홍군자지비。의여미재。혹자위시회야

    苟非曾爲司馬者。則雖登龍之客。亦未免爲籧篨。惡是何言也。第一第二三甲四甲。或賜進士及第。

    구비증위사마자。칙수등룡지객。역미면위거저。악시하언야。제일제이삼갑사갑。혹사진사급제

    或賜進士出身。乃古之規也。則第二甲如吾病龍。雖或翹首而從司馬之後。恐不至於太濫也。諸君子以爲如何。

    혹사진사출신。내고지규야。칙제이갑여오병룡。수혹교수이종사마지후。공불지어태람야。제군자이위여하

    噫斯言戱之耳。某向旣以拙語跋晦甫之叙。猶有所未盡者。今又稽古實據而踵其題。吁亦蔓矣。是年春季欲望。

    희사언희지이。모향기이졸어발회보지서。유유소미진자。금우계고실거이종기제。우역만의。시년춘계욕망

    苟全書于桂塲洞寓居琴書小窩之眄柯軒。

    구전서우계장동우거금서소와지면가헌                                                         

 

 [題司馬稧帖後]     제사마계첩후  사마계첩 뒤에 쓰다

 

대과(大科)를 용방(龍榜) 이라고 한다.

그리고 용(龍) 다음이 말(馬) 이기 때문에 소과(小科)를 지목(指目) 하여 마방(馬榜) 이라고 하는데,

옛날의 사마(司馬)의 칭호(稱號)를 취하여 사마방(司馬榜)이라고 일컬으니 대저 사마라고 하는 것은 그 이름을 좋아해서이다.

선비가 용방에 올라 조정의 벼슬하는 이라도 그 한가하기는 진실로 사마가 시골 구석에서 자유 자재로 여유있게 지내는 것만

못하며 그 재질(材質)을 이미시험하여 간혹 성과가 없는 데로 돌아가게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또한 사마로 좌석상의

보배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못하다.

그러므로 문묵(文墨)으로 모이며 술로 회포를 풀고 경치 좋은 시내와 산 그리고 꽃과 달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그만

둘 수 없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 우리 조정의 전성시대 사마가 된 이들에게 사마계(司馬稧)가 있고,

사마소(司馬所) 가 있게 된 까닭이다.

규모가 작은 우리 고장에도 많은 선비글이 배출되여 사마가 한 세대에 끊어지지 않고 잇달기를 애당초에 다른 주.군(州.郡)에

양보함이 없어 그 왕래(往來)하며 뒤따라가 모시기도 하고 술에 취하고 깨면서 시(詩)를 지어 주고 받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풍운(風韻)이 후인(後人)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게 남아있으니  아!  그것이 융성하기도 하다.

그런대 불행하게도 6,70년 동안 내려 오면서 과거 지망생으로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한 자가 적은 것은 아니였지만,

한 사람도 대과나 소과에 뽑힌 자가 없게되어 드디어 사마로 하여금 그 사마계와 사마소가 함께 모두 떨어져 나가게되었다.

그래서 산골 고을이 조용해지고 선비들이 외롭게 되어 서로 함께 모여서 탄식하기를 아무 생원[모생원(某生員)]은 바로

우리선조(先祖)이고 아무진사[모진사(某進士)]는 바로 그대의 조선(祖先)인데 나와그대가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지 못하고있다.

고, 하면서 남긴 업적을 솔선하여 가다듬으려고 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잘 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간혹 장중(場中)에서 상대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글재주[문예(文藝)]가 있더라도 과거에 낙방(落榜)하기 일쑤이므로,

더러는 그 고을의 운수가 비색(否塞)함을 의심하기도 하고,

더러는 천황(天荒)이 심하다는 것으로핑계를 대면서 거의 합격자가 없어져 끝내 만에 하나라도 진작되고 선발될

기미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마는 근년에는 재능이 있으면 잘 먹혀들어 그 명성을 계승하여 이루는데

경술년(庚戌年 광해군2,1610)에서 기미년(己未年 광해군11, 1619)까지 10년 사이에 4,5명이 사마가 되고,

또 본 고을에서 다른 고을로 옮겨 갔거나 다름 고을에서 이 고을로 옮겨 온 자로 사마가 된 자가 6,7명을 넘었다.

그래서 또 그들의 글 솜씨를 칼날처럼 예리하게 하여 장차 한번 과거 시험장에서 기량을 겨누어 급제를 차지하려고 맹세하고,

일제히 옹치(雍齒)가 먼저 제후(諸侯)에 봉(封)해진 것을 기뻐하며 우리들도 염려할것이 없다 고 말하는 자 또한 여유가 있게

좌우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되였으니 비록 천황(天荒)은 크게 깨트려지고 고을의 운수가 트이려 한다고 말하여도 좋겠다.

어느날 우리집 아이 주국(柱國)이 박사회(朴士晦)군과 같은 말로 나에게 고(告)하기를 오늘날 우리 고을이 이미 비색함이

없어진 형상이 있으니 고인(古人)들의 좋은 일을 중수(重修)하여 뒷날 크게 융성하게할 기반을 열도록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구리로 된 병(甁)은 물건으로서 옛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아끼는데 하물며 우리 선비들의

옛날 법식(法式)을 앛장서서 잘 밝히고 계승하여 행한다면 누군들 눈을 닦고 보지 않겠으며 귀를 쫑긋하여 듣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에 박사회가 그 일을 맡고 회보(晦甫)가 그 뜻을 써서 드디어 이름을 사마계(司馬稧)라고 하였다.

아아!

이 계가 이루어진 것이 어찌 우연(偶然)이라고 하겠는가?

없어진지 오랜만에 다시 새롭게 되었으며 오늘에 살면서 옛날의 법을 행하려 하니 실제로 유교[사문(斯文)]의 융성과

쇠퇴에 관계가 있으며 하늘이 흥기(興起)시키는 바이니 사람이 감히 진작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러 군자(君子)들 또한 어떻게 단지 장황(長皇)하게 과장시켜 구차히 이웃 지역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할 뿐이겠는가?

그 스스로 서로를 경계(警戒)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좋아하는 뜻을 마치 서문(序文)과 일치하게 하여 분명히 해야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장옥문자(場屋文字:과거공부(科擧工夫)를 가리킴)만 향하여 내달릴 것이 아니고 심성(心性)공부에도 힘써서,

흐트러진 마음을 수습(收拾)하여 서로 인도해서 군자유(君子儒)가 된다면 한때에 출세한 무리들에게 거의부끄럽지 않을 것이며

더러는 장차 우리 봉성(鳳城)도 염락(濂洛) 처럼 될 터이니,

저 구름이 끼였다 비가 내렸다 하는 변화 무쌍한 사람들과는 말할것이 못된다.

이보다 아래의 경우는 작은 성취(成就)를 편안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각기 스스로 힘써서 그 공부를 넓히고 크게 하여

시골구석에서  여유있게 일생을 마치지 않고 반드시 임금을 보좌하여 훌륭한 군주(君主)가 되게 하고 백성에게는

은택이 베풀어지게 하는데 그 보배로운 재능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수계(修稧:계를 정비함)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곘는가?

나 같은 사람은 사마가 되 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요행으로 매우 곤궁한 가운데서 용방(龍榜)에 올랐을 뿐인데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실험을 해 보았지만 벼슬길에서 골몰하며 성과가 없었던 재질로 여유있게 자유 자재로 하면서 한가함도

없는 자가 내가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양(羊)의 창자처럼 험난한 벼슬길에서 실패[실각(失脚)]하고 거북 등껍데기에 머리를 감춘 채 두려워하며 견책(譴責)을

기다리는 가운데 이렇게 향리(鄕里)의 성대한 일을 보고서 감히 이 말을 계편(稧編)의 끝에다 쓰노니,

모르기는 하지만 여러 친구들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아!

혹 잠시 한가한 시간을 훔쳐서 강론(講論)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있다면 벌(罰)로 마시는 술한잔 들기를 내또한 어찌 사양하리.

주례(周禮) 왕제(王制)를 살펴보니,

향(鄕)에다 수사(秀士)중에서 논의(論議)하도록 명하여 사도(司徒)로 승진하게 하는데,

그것을 선사(選士)라 하고,

사도로 선사된 중에 뛰어난 자를 논의하여 태학(太學)으로 승진케 하는데,

그것을 준사(俊士)라 한다.

사도에 승진한 자는 향(鄕)에다 요역(徭役)을 지급하지 않고 태학에 승진한 자는 사도에게 요역을 지급하지 않는데,

그것을 조사(造士)라고 한다.

대악정(大樂正:악관(樂官)의 수장)이 조사 가운데 뛰어난 자를 논의하여 왕(王)에게 보고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승진 시키는데,

이것을 진사(進士) 라고 한다.

대사마가 진사 가운데 현명한 자를 논의하여 왕에게 보고하여 그 논의한 것을 결정짓는데,

그 논의가 경정된 연후에 벼슬을 시키며 벼슬에 임명한 뒤에 작위(爵位)를 주고 작위가 정해진 뒤에 녹봉(祿俸)을 준다.

하였으며, 당(唐)나라 정관(貞觀:태종(太宗)의 연호) 6년을 살펴보니 주공(周公)의 사당(祠堂)을 없애고 공자(孔子)를

선성(先聖)으로 안씨(顔氏:안자(顔子)를 선사(先師)라 하였으며 천하의 돈사(惇師)를 불러다 덕행(德行)을 상고하여

학관(學官)으로 산고 제왕(帝王)의 거둥에 자주 나타나게 하여,

석채(釋菜) 를 관람하게 하며, 좨주(祭酒)와 박사(博士) 에게 명하며 경서(經書)의 뜻을

강독(講讀), 토론(討論)하게 하여 한 경서를 통(通)하는 선비를 관리로 서명(署名) 을 얻게 하였다. 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학사(學舍)를 1천 2백 구역(區域)으로 넓히게 하고 여러 생원(生員)의 정원을 3천 2백명에 이르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증광 생원(增廣生員)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사과(進士科)는 수(隨)나라에서 시작되어 오로지 문사(文辭)만을 숭상 하였으며 당(唐)나라 때의 12과(科)에서

오직 진사과와 명경과(明經科)만이 오래도록 시행되었는데 진사과는 성운(聲韻)을 학문으로 삼았다.

송(宋)나라 역시 두 과(科)를 두기는 하였으나 진사과가 사람을 뽑는데는 더 성대(盛大)하였으니,

그 제1갑은 칙사진사급제(勅賜進士及第)이고 3갑, 4갑은 진사출신(進士出身)이며, 5갑은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였다.

명[황명(皇明)]나라 때에는 그것을 따라서 문과(文科)는 문진사(文進士), 무과(武科)는 무진사(武進士)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는 중국의 법식을 그대로 따랐는데 고려(高麗)의 경우는 동진사(同進士)를 두었는데,

그것은 송나라 제도와 같고 조선(朝鮮)의 경우는 당나라의 증광생원(增廣生員)의 규범을 가지고 새원(生員)이라고 하였다.

그 시험은 사서의(四書疑)와 오경의(五經疑)로 경술(經術)을 밝게 이해하려는 유법(遺法) 이다.

그리고 주(周)나라의 승진을 논의하는 제도를 진사(進士)라고 하는데 그시험은 시부(詩賦)로 성운(聲韻)을 학문으로 삼는것이다

진사와 생원은 모두 태학생(太學生)이 되니 아무리 추천하여 등용하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포의(布衣)를 벗고

관복(官服)을 입는 관원이 되지 못하며 조정의 반열(班列)에 선 인사(人士)가 대과(大科)에 급제하게 되면,

다시는 생원, 진사라고 일컫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생원, 진사는 과거에 있어서 소과(小科)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사를 일러 사마(司馬)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대사마(大司馬)에 승진된 옛날 제도를 따라서며,

이른바 생원도 역시 진사와 같은 소과이기 때문에 그래서 함께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대저 진사와 생원이 일정한 이름이 있는데도 또한 반드시 특별하게 부르기를 사마라고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은 대체로 역시

그 사마라는 이름을 좋아해서이며 옛날 것을 사모(思慕)해서 이기도 하다.

아!

오늘날의 세상에 살면서 옛날의 이름을 사모하니 이는 진실로 생원, 진사의 좋은 일이며 오늘 사마가 모이는 것 또한

바로 우리 고장에서 옛날의 법을 따르는 일이니 어찌 괴미(衰微)해 가는 세상에 작은 고을에서의 하나의 큰 승리가 아닌가?

더구나 봄옷이 이미 완성되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이며 시(詩)를 읊고 싶은 마음이 있을 터이니,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역시 거기에 참여 할 것이다.

그런데 조용히 연회(宴會)를 베풀며 군자(君子)가 교제하는 신의(信義)를 강론하니 당초부터 뭇 부자집 아이들이 고운 옷 입고

술에 취하는 것과는 비교 할 바가 아니니,

아아!

아름답기도 하도다.

어떤 사람이 이 모임을 두고 말하기를 진실로 일찍이 사마가 된 사람이 아니면 비록 용방(龍榜)에 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앞가슴이 튀어나온 장애인이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목할 것이다.

하였는데 아! 이 무슨 말인가?

제1갑, 제2, 3갑, 4갑이며, 간혹 진사급제(進士及第)를 하사(下賜)하고 간혹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하는 것은 바로

얫날의 법규(法規)이니 제2갑의 나와 같이 병든 용방의 출신이 비록 더러 머리를 들고서 사마의 뒤를 따른다 하더라도

아마 매우 외람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긋한데 여러 군자(君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

이 말은 장난삼아 한 말일 뿐이다.

모(某)가 지난번에 이미 서툰 솜씨로 회보(晦甫)의 서문 뒤에 발문(跋文)을 쓰면서 오히려 미진(未盡)한 바가 있어서

이제 또 옛날의 실질적인 근거를 상고 하여 그 제목에 잇게 하니,

아!

역시 수다스럽도다.

 

[사마(司馬):중국의 주(周)나라 때 벼슬로 육경(六卿)의 하나. 나라의 군정(軍政)을 맡아 보았음.]

[사마소(司馬所:외방의 고을마다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들이 모이 던 곳.]

[천황(天荒:과거(科擧)에서 지나칠 정도로 급제자(及第者)를 내지 못하는 것을 말함.]

[염락(濂洛: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頣)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頣)등

                 주자(朱子:주희(周熹)로 이어지는 정주학(程朱學)을 말함.]

[석채(釋菜: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祭祀)의 하나. 제물(祭物)을 나물만으로 차리는 것이 특이함.] 

[좨주(祭酒:고려(高麗),조선(朝鮮)초의 종3품 벼슬.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의 수장(종3품).조선 태종 때 사성(司成)으로고침.]

[박사(博士:당나라 태학(太學)의 정6품, 또는 국자학의 정5품. 조선시대 때는 예조의 정7품.]

  

이해 삼월[춘계(春季)] 십사일[욕망(欲望)]에 구전(苟全)은 계장동(桂場洞)의

우거(寓居)인 금서소와(琴書小窩)의 면가헌(眄柯軒)에서 쓰다.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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