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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문[記文],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
작성자 관리자 [2017-12-23 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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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卷之五]    구전선생문집권지오 

 

                                                   유 청량산기(遊淸凉山記)

   1601년 스승인 월천조목(月川趙穆)을 모시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자취가 남아 있는

   청량산(淸凉山) 일대를 둘러보고 쓴 기행문(記行文)이다.

   1월 3일 부분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선생(先生)을 만나 산행(山行) 일자를 정하는 내용이고

   8일에서 12일까지의 부분에는 날씨‚ 여정‚ 대화 등이 기록되어 있다.

 

 


    [原文]

[遊 淸凉山記유 청량산기

於戱人之於山以山愛者其愛也淺以人愛者其愛也深其淺者衆人所同也其深者君子所獨也盖奇奇巖怪怪石喜作物外之玩好爲

어희인지어산이산애자기애야천이인애자기애야심기천자중인소동야기심자군자소독야개기기암괴괴석희작물외지완호위

異境之遊者非其愛之所同乎若其思人之靜重端厚而景仰山之體思人之淸明脫灑而認看山之氣樂乎山無異於人則斯乃君子之

이경지유자비기애지소동호약기사인지정중단후이경앙산지체사인지청명탈쇄이인간산지기락호산무이어인칙사내군자지

所獨而愛之所以深也是以有人於此則愛專乎此而山不必深愛無人乎此則愛本於此而又不得不深愛於山也仲尼在魯則七十子

소독이애지소이심야시이유인어차칙애전호차이산불필심애무인호차칙애본어차이우부득불심애어산야중니재노칙칠십자

不遊於東山而遊於闕里茂叔在宋則二程不吟弄乎南嶽而吟弄乎濂溪至於世可遊可吟可弄如仲尼之聖茂叔之賢然後朱晦庵與

불유어동산이유어궐리무숙재송칙이정부음농호남악이음농호렴계지어세가유가음가농여중니지성무숙지현연후주회암여

張南軒乃有衡山之遊之唱酬是豈非思其人不得見於世而見其山之如其人寓深愛而不能自已者耶今夫淸凉之峰有以丈人稱者

장남헌내유형산지유지창수시기비사기인부득견어세이견기산지여기인우심애이불능자이자야금부청량지봉유이장인칭자

是果以人觀也然則其曰香爐硯滴卓筆金塔物之左右乎丈人者也其曰紫鸞仙鶴蓮花物之見玩於丈人者也祝融則丈人之賓也紫

시과이인관야연칙기왈향로연적탁필금탑물지좌우호장인자야기왈자란선학연화물지견완어장인자야축융칙장인지빈야자

霄則丈人之天也擎日則又其志也或其事也分而命之雖有十二之異號而而宗之只是一箇丈底人耳丈之言大也人而大乃人之

소칙장인지천야경일칙우기지야혹기사야분이명지수유십이지이호이이종지지시일개장저인이장지언대야인이대내인지

至而以人之大而至擬之於玆山則玆山之端重靜厚淸明脫灑出乎其類者可知而名之者之愛玆山不以山而以其人亦可想矣昔我

지이이인지대이지의지어자산칙자산지단중정후청명탈쇄출호기류자가지이명지자지애자산불이산이이기인역가상의석아

先正退陶李文純公春於斯秋於斯冬夏於斯今年焉明年焉又明年焉其在世七十年之間愛玩乎山遊詠乎山者不知其幾何而其思

선정퇴도이문순공춘어사추어사동하어사금년언명년언우명년언기재세칠십년지간애완호산유영호산자불지기기하이기사

則未嘗不在於闕里之壇濂溪之風月恨不得親見日月之光春風之座有以寓愛於內丈人外丈人怳然若翔乎元晦敬夫之間者夫

칙미상부재어궐리지단렴계지풍월한부득친견일월지광춘풍지좌유이우애어내장인외장인황연약상호원회경부지간자부

豈偶然哉當是時文純之端重靜厚淸明脫灑實人之一淸凉也山之爲淸凉固不若人之爲淸凉則世之人又安知淸凉之在淸凉耶以

기우연재당시시문순지단중정후청명탈쇄실인지일청량야산지위청량고부약인지위청량칙세지인우안지청량지재청량야이

故士之遊者不于淸凉而于退溪不吟弄乎淸凉而吟弄乎退溪有若七十子之於仲尼二程之於茂叔得而依依而歸尊尙愛樂之恐不

고사지유자불우청량이우퇴계불음농호청량이음농호퇴계유약칠십자지어중니이정지어무숙득이의의이귀존상애락지공불

及奚暇以山云乎哉雖或陪杖屨於洞天討詩書於山房亦無非遊退溪吟弄退溪而靡他其愛之也特衆人所同而已嗚呼人去山空風

급해가이산운호재수혹배장구어동천토시서어산방역무비유퇴계음농퇴계이미타기애지야특중인소동이이오호인거산공풍

寒月古今日月川先生之於文純其追憶感慕實有甚於思古人之常情而當日逍遙遺武之在是山者又不止其體其氣之有似而已先

한월고금일월천선생지어문순기추억감모실유심어사고인지상정이당일소요유무지재시산자우불지기체기기지유사이이선

生之遊是山也見其庵則以爲吾先師所棲息也見其臺則以爲吾先師所登陟也巖壑乎思其盤桓雲烟乎思其嘲咏仰丈人而彌高對

생지유시산야견기암칙이위오선사소서식야견기대칙이위오선사소등척야암학호사기반환운연호사기조영앙장인이미고대

香爐而若薰如或見則怡然感慨係則悵極此日深於昔日今歲劇於去歲其見於辭色者如此至於其心之致思於至樂寓愛於無窮者

향로이약훈여혹견칙이연감개계칙창극차일심어석일금세극어거세기견어사색자여차지어기심지치사어지락우애어무궁자

亦豈余小子之所可窺而測也噫微先生吾誰與歸

역기여소자지소가규이측야희미선생오수여귀

萬曆辛丑十一月三日丁酉(만력신축십일월삼일정유)

余拜月川先生于陶山書院先生曰我將遊淸凉山從我者其君乎請期先生曰八日過忌祀九日可行金院長圻裴察訪龍吉亦皆願陪

여배월천선생우도산서원선생왈아장유청량산종아자기군호청기선생왈팔일과기사구일가행김원장기배찰방용길역개원배

焉余恐日候之或未調啓行之或未果退留溫溪五朝五筮越

언여공일후지혹미조계행지혹미과퇴류온계오조오서월

八日壬寅.(팔일임인)

禀答書曰明早定發聞遠亦有同游之計云是夕蔡君樂而自李士安家步月而至喚于門外余倒履出樂而曰先生所騎弱僅能達此

품답서왈명조정발문원역유동유지계운시석채군악이자이사안가보월이지환우문외여도리출락이왈선생소기약근능달차

自此至山必求健馬可行子盍圖之余邀琴翕如借馬于其伯氏繹如則馬適出余曰我馬雖駑可抵洞口自洞口進籃輿何如蔡曰籃輿

자차지산필구건마가행자합도지여요금흡여차마우기백씨역여칙마적출여왈아마수노가저동구자동구진람여하여채왈남여

雖好如無力何余曰山遊帶以山人固非惡事子須招携龍壽僧二三人蔡曰諾

수호여무력하여왈산유대이산인고비악사자수초휴용수승이삼인채왈낙

九日癸卯(구일계묘)

雲陰暫翳朝暉似薄風勢可慮余與蔡君拜吳春塘借籃輿也余將徯于道左促飯而出才出門聞先生至泰溪邊雖疾以進已非

운음잠예조휘사박풍세가려여여채군배오춘당차람여야여장혜우도좌촉반이출재출문문선생지태계변수질이진이비

之孺惟幸婦翁在下家得趁稅篤以出拜也侍來冠一童一而卽其長男壽朋及表孫權命錫也錫朋之後至以其自浮浦也而蔡樂而衎

지유유행부옹재하가득진세독이출배야시래관일동일이즉기장남수붕급표손권명석야석붕지후지이기자부포야이채악이간

亦在士安家聞先生至奔走而來余願少于南阿賤窩固請乃許婦翁因以酒爲先生壽得奉留移刻吳進士春塘肩輿而至二子奫淦

역재사안가문선생지분주이래여원소우남아천와고청내허부옹인이주위선생수득봉류이각오진사춘당견여이지이자윤감

隨之洞中諸人來拜者李允迪李逸道李有道琴學古及妻兄李龜也阿玉鉉亦參隅坐之列進士以下各屬一盃而進士與先生年皆八

수지동중제인래배자이윤적이일도이유도금학고급처형이귀야아옥현역참우좌지렬진사이하각속일배이진사여선생년개팔

十邂逅之餘欣慨俱發欲別更挽飮進士曰冬月遊山可乎先生曰昔朱夫子遊南嶽正當此時有何不可進士曰彼乃南方地暖

십해후지여흔개구발욕별경만음진사왈동월유산가호선생왈석주부자유남악정당차시유하불가진사왈피내남방지난

先生曰此亦嶺南山也俄而先生起二三子從先生乘蔡馬蔡君乘余老牡琴學古騎驢先我我以貞牝最後僧二人以輿追乃先生所未

선생왈차역령남산야아이선생기이삼자종선생승채마채군승여로모금학고기려선아아이정빈최후승이인이여추내선생소미

知恐其固拒不曾告禀故也過博石村至洞濟先生將欲步過徒杠壽朋等諫不聽衎乃橫杠頭乃以馬涉于汀石飮學古酒先生始

지공기고거불증고품고야과박석촌지동제선생장욕보과도강수붕등간불청간내횡강두내이마섭우정석음학고주선생시

見籃輿至問其由余以實對先生曰何必乃爾將登洞路請進拒之甚牢過獅子項馬不前先生舍而徒攀歷數曲衎等憫其憊同辭請輿

견남여지문기유여이실대선생왈하필내이장등동로청진거지심뢰과사자항마불전선생사이도반력수곡간등민기비동사청여

而後可日暮得達蓮臺寺寺僧延入地藏殿殿古而陋僧亦醜穢無可語者因宿是殿僧言日氣불和明日則風不可出矣夜半山月滿

이후가일모득달연대사사승연입지장전전고이루승역추예무가어자인숙시전승언일기부화명일칙풍불가출의야반산월만

窓風聲已息先生語余曰近讀何書對曰讀經書仍質所疑數三處許多說話無非平日之所願聞先生誦古詩天覆吾地載吾一句因問

창풍성이식선생어여왈근독하서대왈독경서잉질소의수삼처허다설화무비평일지소원문선생송고시천복오지재오일구인문

末句余未記得衎稽諸梳帖以告乃其所甞聞而書者也先生曰期會之人皆不來可恠如是者三盖指琴孤山及裴金兩公也

말구여미기득간계제소첩이고내기소상문이서자야선생왈기회지인개불래가괴여시자삼개지금고산급배김양공야

十日甲辰(십일갑진)

風和日朗有若三春先生早起盥洗命壽朋以其酒酌數巡而止遂周覽蓮臺寺法禪僧等堂轉登東崖尋向文殊三四達驂鸞臺僧天

풍화일랑유약삼춘선생조기관세명수붕이기주작수순이지수주람연대사법선승등당전등동애심향문수삼사달참란대승천

一引入其室乃下大乘庵也僧德藏自滿月庵來謁頗解文字稍可談命余誦周愼齋遊淸凉錄讀訖先生歎其文章識見者再三藏師在

일인입기실내하대승암야승덕장자만월암래알파해문자초가담명여송주신재유청량록독흘선생탄기문장식견자재삼장사재

傍請傳謄縣板于山之庵先生曰乃言有倫朝炊太晏諸人頗之衎戱曰使季路在此必已慍見先生哂之飯後學古歸衎命錫壽朋錫

방청전등현판우산지암선생왈내언유륜조취태안제인파지간희왈사계로재차필이온견선생신지반후학고귀간명석수붕석

朋等以遊出余獨侍坐僧雙明請詩先生首題七言一絶余次之午後遙聞笛聲吹徹洞雲乃琴城主孤山來也開戶視之則鶴髮牛背先

붕등이유출여독시좌승쌍명청시선생수제칠언일절여차지오후요문적성취철동운내금성주고산래야개호시지칙학발우배선

笛後壺亦一山中奇勝事也自蓮臺輿到大乘先生頗有朋來之樂是時衎等亦回問其遊才至白雲滿月間矣於是更酌先生酒傳飮再

적후호역일산중기승사야자련대여도대승선생파유붕래지악시시간등역회문기유재지백운만월간의어시경작선생주전음재

巡余戱曰琴學古去琴城主來所謂小往大來也座中皆笑先生亦莞爾孤山丈携余輩歷覽文殊普賢等庵因坐喚仙臺使尺童吹笛先

순여희왈금학고거금성주래소위소왕대래야좌중개소선생역완이고산장휴여배력람문수보현등암인좌환선대사척동취적선

生獨立驂鸞徘徊眺望深思遠想有若不釋然者旣而步下地藏令衎題名于壁因信宿焉余呈五言一絶先生和贈是夜尤從容問酬頗

생독립참란배회조망심사원상유약부석연자기이보하지장령간제명우벽인신숙언여정오언일절선생화증시야우종용문수파

細至於鄕國風習古今人賢否或慨歎或是之非之無不尙論而不敢記慮其資俗謗也孤山丈曰昔普雨時嶺南士子通文聚會共叫天

세지어향국풍습고금인현부혹개탄혹시지비지무불상론이불감기려기자속방야고산장왈석보우시영남사자통문취회공규천

閽此似吾黨可爲而先師猶謂儒者分外事不當如此云故其時吾鄕士子皆不赴矣月川先生曰有是言也然亦豈無可爲之事不可執

혼차사오당가위이선사유위유자분외사부당여차운고기시오향사자개부부의월천선생왈유시언야연역기무가위지사불가집

一論也盖是時聞大提學沈喜壽請以先賢陞祀文廟而乃以王陽明陳白沙並擧於薛文淸胡敬齋彼王陳異學之流沈之倡此議實人

일론야개시시문대제학침희수청이선현승사문묘이내이왕양명진백사병거어설문청호경재피왕진이학지류침지창차의실인

心世道升降汚隆之大機關爲吾徒者不可不及時辨難以杜燎原之禍故吾輩曾會議山院將通文以唱同志實月川所甞知而可之者

심세도승강오륭지대기관위오도자불가불급시변난이두료원지화고오배증회의산원장통문이창동지실월천소상지이가지자

而孤山之意似以是爲不急欲揆諸普雨時事也若先生則以爲不直則道不見也耶先生曰孟子云庶人召之役則往役此何說也因謂

이고산지의사이시위불급욕규제보우시사야약선생칙이위불직칙도불견야야선생왈맹자운서인소지역칙왕역차하설야인위

頃奉有旨以經書校正郞官給馬召進而老且病未赴無乃有乖於往役之義乎僉曰恐非一例雖可赴也其如年深路遠何忽聞窓外有

경봉유지이경서교정랑관급마소진이노차병미부무내유괴어왕역지의호첨왈공비일례수가부야기여년심로원하홀문창외유

口舌訊之乃僧輩以供臆事相爭余與衎等告曰僧輩甚頑頗有厭狀不可久請明日下歸先生曰諾

구설신지내승배이공억사상쟁여여간등고왈승배심완파유염상불가구청명일하귀선생왈낙

十一日乙巳(십일일을사)

或陽或陰日氣則如昨日先生早朝步出蓮臺假坐僧祖一以其師惠默詩軸進呈先生之作有二絶焉末軸又有裴明瑞一生終老釋儒

혹양혹음일기칙여작일선생조조보출연대가좌승조일이기사혜묵시축진정선생지작유이절언말축우유배명서일생종노석유

間之句先生哂之因謂閱軸亦事之煩也何苦爲遂投之巖底令余又讀愼齋遊錄其惹興激感之情見於顔面於是起而彷徨因語昔年

간지구선생신지인위열축역사지번야하고위수투지암저령여우독신재유록기야흥격감지정견어안면어시기이방황인어석년

退陶先生來遊時事琴孤山又誦退陶當日此間之作殆五六篇皆憮然良久此時懷想必有吾儕所不及知者飯後衎命錫壽朋錫朋等

퇴도선생래유시사금고산우송퇴도당일차간지작태오륙편개무연량구차시회상필유오제소불급지자반후간명석수붕석붕등

又請遊盖欲周歷昨游未及之地而亦莫之能所到又不過般若臺擎日峯而已祖一呈寸紙乞詩先生題五言一絶其次孤山又其次余

우청유개욕주력작유미급지지이역막지능소도우불과반약대경일봉이이조일정촌지걸시선생제오언일절기차고산우기차여

也先生因以筆墨各一授余前此因壽朋告乏故日已午先生曰可以歸僉曰諾遂步抵城門流門樓請輿之乃許才過獅子項命以

야선생인이필묵각일수여전차인수붕고핍고일이오선생왈가이귀첨왈낙수보저성문류문루청여지내허재과사자항명이

騎琴胤古爲先生送馬俟于江滸矣至津下馬登杠如來時請止不得二三子瞻企失色先生穩踏如大道上不一瞬已至西岸盖孤山及

기금윤고위선생송마사우강호의지진하마등강여래시청지부득이삼자첨기실색선생온답여대도상불일순이지서안개고산급

衎輩之不能從焉然孤山之於洞路不牛則步步極而輿牛之時少輿之時尤少步實三分而二殊非健少之可及殆亦人世所罕余尙年

간배지불능종언연고산지어동로불우칙보보극이여우지시소여지시우소보실삼분이이수비건소지가급태역인세소한여상년

少所負者力而其於杠也凜凜乎不可著脚恐墜之心旣渡猶甚良可笑于博石村之溪磐罷余酒也酒一行先生謂孤山曰君何不

소소부자력이기어강야름름호불가저각공추지심기도유심량가소우박석촌지계반파여주야주일행선생위고산왈군하불

讀書耶衰耗雖不可讀古書尙可讀先師文集矣吾欲罰之因呼衎曰以子之才全不讀汝亦當罰良久乃行將行先生回視丈人峯悠然

독서야쇠모수불가독고서상가독선사문집의오욕벌지인호간왈이자지재전불독여역당벌량구내행장행선생회시장인봉유연

有感慨意至日洞日欲雨先生欲直向月川孤山請宿于其書堂諸小子亦以不可窘步告先生久之曰日暮道遠奈何遂止夕雨灑旋止

유감개의지일동일욕우선생욕직향월천고산청숙우기서당제소자역이불가군보고선생구지왈일모도원내하수지석우쇄선지

終夜大風余呈一絶先生亦題一絶衎悉次山中韻以進先生頗許之是夜明月滿江虛堂靜寂誨晤穩適有浮前宵余問濟渡必由危杠

종야대풍여정일절선생역제일절간실차산중운이진선생파허지시야명월만강허당정적회오온적유부전소여문제도필유위강

何也曰立脚如平地履險夷有何二道耶語及一時交遊少時信結而義服者莫如舜擧云舜擧卽金芝山八元也不幸短命今也則亡先

하야왈입각여평지이험이유하이도야어급일시교유소시신결이의복자막여순거운순거즉김지산팔원야불행단명금야칙망선

生又曰學者立志爲大壽朋輩近甚解緩殊無刻厲意君等須相責勉對曰小子亦坐在這病裏何暇責人然敢不從敎余問先生有謀生

생우왈학자립지위대수붕배근심해완수무각려의군등수상책면대왈소자역좌재저병리하가책인연감불종교여문선생유모생

漸作論財意喜譽方知佞已多之句未知何時作也曰少年時作未記的在某年孤山曰我知之此乃十八歲時也又問著荀彧論退溪先

점작논재의희예방지녕이다지구미지하시작야왈소년시작미기적재모년고산왈아지지차내십팔세시야우문저순욱논퇴계선

生歎賞不已云有諸曰果有之我作論僅六七是乃最後作先師謂議論文字甚可嘉尙終不考批因問少時學文次第曰戊子夏讀大學

생탄상불이운유제왈과유지아작론근육칠시내최후작선사위의론문자심가가상종불고비인문소시학문차제왈무자하독대학

乃五歲在家時也稍長學通鑑于先師時先師在溫溪余未免歸覲頻數一日先師曰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自後告歸不敢數又問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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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讀書過幾遍成誦乎曰十三四歲前讀十遍無不記誦及其志學之後以熟讀爲貴凡書殆皆已百之矣先生就寢未久與孤山倚枕團

소독서과기편성송호왈십삼사세전독십편무불기송급기지학지후이숙독위귀범서태개이백지의선생취침미구여고산의침단

欒余尙困眠先生問曰鼾睡聲出自誰衎以實告余於夢寐中聞是語驚覺而起此眞所謂呼寐而覺之者也於是益聞其所不聞

란여상곤면선생문왈한수성출자수간이실고여어몽매중문시어경각이기차진소위호매이각지자야어시익문기소불문

十二日丙午(십이일병오)

風止日候不齊昧朝孤山以酒餉之語余曰者君自山來此香醪方熟以無主不飮但自開見而去云何其拙耶余曰嚴不敢先生曰過長

풍지일후불제매조고산이주향지어여왈자군자산래차향료방숙이무주불음단자개견이거운하기졸야여왈엄불감선생왈과장

者居是禮也何拙之有衎曰今日則可飮而客多酒不多孤山曰雖有之酸而濁奈何然少年嗜飮何擇爲遂命漉進以大鍾殆六七行於

자거시례야하졸지유간왈금일칙가음이객다주불다고산왈수유지산이탁내하연소년기음하택위수명록진이대종태육칠행어

是發向白雲地乃孤山丈先塋所也僧之還俗者二三人居于齋舍辦泡甚味坐頃雪花漫天殆不可行孤山曰不霽當留余曰古有渡海

시발향백운지내고산장선영소야승지환속자이삼인거우재사판포심미좌경설화만천태불가행고산왈불제당류여왈고유도해

者見風波大揚舟多覆沒不得渡方趑趄俄逢一君子至喜而理裝忽有狐仡之狀同路者問其故曰此人之威容德儀可以鎭服海神吾

자견풍파대양주다복몰부득도방자저아봉일군자지희이리장홀유호흘지상동로자문기고왈차인지위용덕의가이진복해신오

可賴矣語未旣海乃妥帖旣渡風作今之行亦然入山日朝風午止出山日夜風朝止且辰巳常雨多晴少而昨昨及昨皆不雨冬至之月

가뢰의어미기해내타첩기도풍작금지행역연입산일조풍오지출산일야풍조지차진사상우다청소이작작급작개불우동지지월

其氣宜烈其日宜寒而數日之日暖而不寒氣又和而不烈如是是行豈無所賴者耶若然則又安知是雪之不復止於臨行也先生大笑

기기의렬기일의한이수일지일난이불한기우화이불렬여시시행기무소뢰자야약연칙우안지시설지불복지어림행야선생대소

曰謂我乎君何好議論耶旣而果霽於是先生題一絶余與衎亦皆和飯後乃行至退溪口皆下馬過李先生閭及墓也余乃拜辭先生將

왈위아호군하호의논야기이과제어시선생제일절여여간역개화반후내행지퇴계구개하마과이선생려급묘야여내배사선생장

欲歷登天淵臺未知果爾爲不也是時有人來言裴察訪來山院一行皆以爲赴前期也更問之則乃鄭察訪允偉也官相近而誤傳也余

욕력등천연대미지과이위불야시시유인래언배찰방래산원일행개이위부전기야경문지칙내정찰방윤위야관상근이오전야여

歸溫溪移時雪作夜乃大來深幾一尺餘吳春塘以詩戱之余和焉黃醴泉會元路中聞先生遊作四韻詩寄春塘

귀온계이시설작야내대래심기일척여오춘당이시희지여화언황예천회원로중문선생유작사운시기춘당


 

    

[遊淸凉山記]     유청량산기    청량산에서 유람한 일을 기록하다

 

아아!! 사람이 산(山)에 대해서 산 자체만을 가지고 애호(愛護) 하는 것은 그 애호하는 강도가 얕고

그 산과 관련된 인물 때문에 애호 하는것은 그 애호하는 강도가 깊다.

그 얕은 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바이고 그 깊은 것은 군자(君子)만이 하는 것이다.

대체로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들이 즐겁게 세상 밖의 진기한 노리개감을 이루어 특이한 지경(地境)에서

노닐게 하였으니,

그 애호함이 같은 바가 아니겠는가?

그 인물의 정중(靜重)하고 단후(端厚)함을 사모(思慕)하면서 산의 본체(本體)를 우러러보고,

그 인물의 청명(淸明)하고 탈쇄(脫灑)함을 사모하면서 산의 기상(氣像)을 알아보고 산을 좋아함이

다른 사람들과 다름이 없으면 이것은 바로 군자(君子)만이 하는 바이며 애호함이 깊게 하는 까닭이기도하다.

이러므로 어떤 인물이 여기에 있으면 애호함이 오로지 여기에 있어 산을 깊이 애호할 필요가 없게 되고,

인물이 여기에 없으면 애호함은 여기에 근본하여 또한 산을 깊이 애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니(仲尼:孔子의 字)가 노(魯)나라에 계실 떼에는 70명의 제자들이 동산(東山:노나라 성동(城東)의 고산(高山)에서

유람(遊覽)하지 않고 궐리(闕里:孔子가 誕生하여 성장한 故鄕)에서 유람 하였으며,

무숙(茂叔:주돈이(周敦頤의 字)이 송나라에 있을 적에는

이정(二程: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이 남악(南嶽:호남성(湖南省) 오악(五嶽)의 하나)에서

읊조리지 않고 염계(濂溪:주무숙(周茂叔)이 살던 곳)에서 읊조렸다.

세상에 유람할 만하거나 읊조릴 만하거나 장난할만하기가 중니같은 성인(聖人)과 무숙갗은 현인(賢人)이 없는데

이른 연후에야 주회암(朱晦庵:주희(朱熹)과 장남헌(場南軒:장식(張栻)이 형산(衡山:南嶽)에서 시(詩)를 지어

주고받은 것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그 인물을 세상에서 볼 수 없고 그 산이 그 인물같음을 사모하여 길이 애호하기를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을 시에나 붙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청량산(淸凉山)의 봉우리 가운데 장인봉(丈人峰)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으니 이것은 정말 인물로 관찰한 것이다.

그곳에 있는 향로봉(香爐峰),연적(硯滴),탁필(卓筆),금탑(金塔)은 장인의 좌우에 있는 물건들이며,

자란(紫鸞),선학(仙鶴),연화(蓮花)는 장인이 구경하는 물건들이다.

축융(祝融)은 장인의 손님이고 자소(紫宵)는 장인의 하늘이며 경일(擎日)은 또한 그의 의자이기도 하며

간혹 그의 일이라고 한다.

나누어서 명명(命名)하면 비록 12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지만 합쳐서 높인다면 단지 한 개의 큰 사람이라는 것일 뿐이다.

장(丈)이란 말은 크다는 것이다.

사람이면서 크다는 것은 바로 사람으로서의 극치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큰것을 가지고 이 산에다 견주는데 이른다면,

이 산의 단중(端重),정후(靜厚)하고 청명(淸明),탈쇄(脫灑)함이 그 부류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이름을 부른 자가 이 산을 애호하는 것은 단순한 산 때문만은 아니고

그 인물 때문임을 역시 상상할 수 있다.

옛날 우리 선정(先正) 퇴도 이 문순공(退陶 李文純公:이황(李滉)이 봄이면 이 청량산에서 노닐고 가을에도

그렇게 하며 여름과 겨울에도 그렇게하고 금년과 명년 또 명년에도 여기서 노닐며,

그가 세상에 살아 계신 70년 동안 이 산을 애호하며 구경하였고 이 산에서 유람하며 시(詩)를 읊은 것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일찍이 궐리의 행단(杏壇)과 염계의 풍월(風월)에 떠나지 않으면서

일월(日月)같은  빛과 춘풍(春風)같은 좌석을 직접 볼 수 없었음을 한(恨)스럽게 여기며

애호하는 마음을 내장인봉(內丈人峰),외장인봉(外丈人峰)에 붙여 어렴풋이나마주원회(周元晦:주희(周熹)의 字)와

장경부(張敬夫:장식(張栻)의 字)의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할 터이니,

어떻게 우연(偶然)한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 때를 당하여 문순공의 단중(端重),정후(靜厚)하고 청명(淸明),탈쇄(脫灑)함은 실로 사람들에게

한 분의<신선한 활력을 주는>청량(淸凉)인 것이다.

산의 청량함이 진실로사람의 청량함만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이 또한 청량산에 청량함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때문에 선비들로 유람하는 자가 청량산에 유람하지 않고 퇴계(退溪)에서 유람할 것이며,

청량산에서 시를 읊지 않고 퇴계에서 읊기를 마치 칠십제자가 중니(仲尼:孔字)에게와

이정(二程)이 무숙(茂叔)에게 처럼 의귀 (依歸) 할 때를 얻어,

존모(尊慕)하며 숭상(崇尙)하고 애호하며 즐겁게 하기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느 겨를에 산을 가지고 말하겠는가?

아무리 간혹 장로(長老)를 경치 좋은 곳으로 모시기도 하고 시서(詩書)를 산방(山房)에서 토론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퇴계에서 노닐고 퇴계에서 읊조리지 않음이 없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애호하는 마음이 특별히 여러 사람과 동일한 것일 뿐이다.

아! 인물은 떠나고 산만 텅비어 있으며 바람은 쓸쓸하고 달빛은 예스러워 보인다.

오늘날 월천선생(月川先生)이 문순공(文純公)에 대한 그 추억(追憶)과 감모(感慕)는

실제로 옛날 사람을 사모하는 보통 사람의 마음 보다 더 간절하니,

당일 소풍하면서 남긴 자취도 이 산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본체(本體)와 기상(氣像)이 비슷한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니고,

선생이 이 산에 유람하면서 그 암자를 보면서 우리 선사(先師)께서 기거 하신 곳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대(臺)를 보면 우리 선사께서 오르시던 곳이라고 말씀하시고,

바위 골짜기에서는 그 머뭇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며 구름과 연기가 머무는 곳에서는 장난과 읊는 것을 생각하면서,

장인봉을 우러러보면 더욱 높게 보이고 향로봉을 마주하면 향기가 나는 듯하여,

혹시라도 보는 듯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감개(感慨)에 얽매이면 서글픔이 극도에 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이 어제보다 심각하고 올해가 지난해보다 더 심하니 그 말과 얼굴빛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은데,

그 마음의 지극한 즐거움을 이루려고 생각하는 것과 한없이 애호하는 마음을 붙이려 하는데 이르러서는 역시

어떻게 나 소자(小子)가 엿보고 헤아릴 수 있는 바이겠는가?

아! 선생이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의귀(依歸)할 것인가?

 

만력(萬曆) 신축년(辛丑年 선조34,1601년:苟全先生 36세 때)

 

11월 3일 정유(丁酉)

내가 월천선생(月川先生)을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뵈알 하였더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장차 청량산(淸凉山)에 유람 하려고 하는데,

자네가 나를 따르겠는가?

하셨다.

날짜를 여쭈었더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8일의 기사(忌祀)를 지나고 9일 이면 출발 할 수 있겠다.

고 하셨다.

그러자 원장(院長)인 김기(金圻)와 찰방(察訪) 배용길(裵龍吉)도 모두 모시고 가겠다고 청원하였다.

나는 날씨가 혹시라도 고르지 못하여 출발을 못할까 두려워서 물러나 온계(溫溪)에 머물면서

5일 동안 다섯 번이나 점(서:筮) 쳐 보았다.

 

11월 8일 (壬寅)

하인을 보내어 여쭙게 하였더니 답서(答書)에 이르기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금문원(琴聞遠)의 자(子)도 함께 놀러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셨다.

이 날 밤에 채낙이(蔡樂而)군이 이사안(李士安)의 집에서 달빛을 받으며 이르러 문 밖에서 부르자

내가 신을 거꾸로 신고 뛰어 나갔다.

채낙이(蔡樂而) 가 말하기를,

선생이 타실 말(馬)이 약하여 겨우 여기까지 도착할  수 있었으나 여기서부터 산(山)까지는 반드시

건강한 말을 구해야 떠날 수 있겠는데 자네가 어찌 그것을 계획하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금흡여(琴翕如)를 맞이하여다가 그의 백씨(伯氏)인 금역여(琴繹如)에게 말을 빌리게 하였더니,

마침 말을 타고 외출 이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말이 비록 노둔하기는 하지만 동구(洞口)까지는 갈 수 있겠으며,

동구에서는 남여(藍輿:남빛의 가마)를 이용하는 것이 어땋겠는가?

하니,

채낙이 가 말하기를,

남여가 아무리 좋기는 하지만 멜 사람이 없는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산을 유람하는 데는 산사람(山人:중)을 데리고 가는 것이 진실로 나쁜 일이 아니니 자네가 모름지기

용수사(龍壽寺)의 중 2~3명을 불러서 데리고 오게나.

하였더니,

채낙이 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11월 9일 (癸卯)

구름이 잠깐 끼였으므로 아침의 태양빛이 엷은 듯 하였으며 바람부는 기세가 염려할 만하였다.

내가 채군(蔡君)과 오춘당(吳春塘)을 뵈알하고 남여(藍輿)를 빌렸다.

내가 장차 길가에서 기다리려고 조반(朝飯)을 재촉하여 먹고 나왔는데 겨우 문을 나서서 들으니 선생께서

태계(泰溪) 가 에 이르셨다고 하기에 아무리 빨리가서 가마를 댄다 하더라도 이미 이하(圯下)의 유자(孺子)가 아니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장인(부옹:婦翁)께서 하가(下家)에 계셨으므로 쉬는 말을 얻으려고 나아가 배알하였다.

모시고 올 때에는 성인(관자:冠者) 1명과 동자(童子) 1명 이였으니 바로 그의 장남(長男)인 이수붕(李壽朋)과

외손(外孫) 권명석(權命錫)이였다.

그리고 이석붕(李錫朋)이 나중에 온 것은 그가 부포(浮浦)에서 왔기 때문이였다.

채낙이 간(蔡樂而 衎)엿시 이사안(李士安)의 집에 있다가 선생이 도착하셨음을 듣고 달려서 왔다.

내가 남아(南阿)의 천와(賤窩)에서 잠깐 쉬기를 원했는데 굳이 청하자 그제야 허락하셨다.

장인(장인)이 선생을 위하여 장수(長壽)하시도록 술잔을 올리려고 받들어 머물게 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오 진사 춘당(吳進士春塘)이 견여(肩輿)를 타고 왔는데,

그의 두 아들 오윤(吳奫)과 오감(吳淦)이 수행(隨行) 하였다.

동중(洞中)의 여러 사람으로 와서 배알한 자는 이윤적(李允迪),이일도(李逸道),이유도(李有道),금학고(琴學古)및

그의 처형(妻兄)이귀(李龜) 였다.

그리고 이귀의 아들 이현(李鉉)도 참여하여 한쪽에 앉았다.

진사 이하 에게 각기 술 한 잔씩을 권하였는데 오 진사는 선생과 연세가 모두 80이였다.

기약없이 만난 나머지라 기쁨과 감개(感慨)가 한꺼번에 발로되어 작별을 하려다 다시 만류하며 술을 드시면서

회포를 풂이 자못 관곡(款曲:매우 정답고 친절함)하였다.

진사가 말씀 하기를,

겨울철에 산에 유람하여도 괜찮은가?

하니,

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옛날 주부자(朱夫子)께서 남령(南嶺:남악(南嶽)에 유람하였을 때도 바로 겨울이였는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하자,

진사가 말씀 하시기를,

그곳은 남방(南方) 지역이라서 따뜻했지.

하니,

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이곳도 영남(嶺南)의 산일세,

하셨다.

조금 있다가 선생이 일어나니 좌우에서 두 셋이 따라 일어났다.

선생이 채낭이 의 말을 타고 채군은 나의 늙은 황소를 타고,

금학고는 나보다 먼저 당나귀를 탔으며,

나는 암소를 타고 맨 뒤에 갔으며 중 두사람도 남여를 가지고 따랐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 께서 모르시는 바로 그것을 굳게 거절하실까봐 일찍이 어뢰지 않았기 때문에서였다.

나분돌(박석촌:博石村)을 지나 골(동:洞)을 건너는 곳에 이르렀는데 선생님께서 걸어서 다리를 건너시려 하므로,

이수붕 등이 간(諫)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므로,

채간(蔡衎)이 외나무다리의 윗부분을 가로로 눕히고서 말을 타고 건너갔다.

물가의 들애서 쉬며 금학고의 술을 마셨다.

선생님이 비로서 가마를 가지고 온 것을 보시고 그 연유를 믈으시므로 내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셨다.

골짜기의 길을 오르려하면서 가마에 타기를 청하였으나 매우 굳게 거절하셨다.

사자목(사자항:獅子項)을 지나자 말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선생님이 말을 두고 걸어서 오르는데 몇 구비를 지나자 채간 등이 선생님의 피로를 민망하게 여겨 같은 말로

가마에 오르기를 청하였는데 억지로 궝한 뒤에야 따르셨다.

해가 저물어서야 연대사(蓮臺寺)에 도달하였다.

절의 중이 맞아 주면서 지장전(地藏殿)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지장전은 오래되어 누추하기가 그지없었고 중도 누추하여 말할만한 자가 없었다.

이어서 지장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중의 말이 날씨가 고르지 않아 내일이면 바람이 불 것 같은데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밤은 깊었는데 산에 비치는 달빛은 창문에 가득하고 바람 소리는 이미 멎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요즈음은 무슨 책을 읽느냐?

하시므로 대답하기를,

경서(經書)를 읽습니다.

하고,

이어서 의심나는 몇 곳을 질문하고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평소 듣기를 원하던 바가 아닌 것이 없었다.

선생님이 고시(古詩) ``하늘이 나를 덥어주고[천복오:天覆吾]``

                               ``땅이 나를 실어준다   [지재오:地載吾]`` 는

한 귀절을 외우고는 그 끝 구절을 물으셨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였다.

채간(蔡衎)이 여러 소첩(梳帖)을 상고하여 고(告)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알찍이 듣고서 기록해 둔 것이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모두 오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다.

하시면서,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는데,

대체로 금고산(琴孤山:금난수(琴蘭秀)과 배용길(裵龍吉), 김기(金圻),양공(兩公)을 가리키는 것이였다.

 

11월 10일 (甲辰)

바람도 온화하고 날씨도 맑아 마치 삼춘(三春) 같았다.

선생님이 일찡 일어 나셔서 세수하고 이수붕에게 명하여 술잔을 몇 차려 돌리게 한 뒤 멈추게하고,

드디어 연대사(蓮臺寺)의 법당(法堂)이며 선당(禪堂)과 승당(僧堂) 을 두루 구경하고 옮겨서 동애(東崖)로 올라가

문수암(文殊庵)으로 향하였는데,

3~4차례 쉬어가며 참란대(驂鸞臺)에 도달하니 중(僧) 천일(天一)이 인도하여 그의 방(室)로 들어갔다가 바로

대승암(大乘庵)으로 내려갔다.

그랬더니 중 덕장(德藏),자만(自滿),월암(月庵)이 와서 배알 하였는데 제법 문자(文字)를 이해하였으므로

조금은 이야기 할 만하였다.

선생님이 나에게 주신재(周愼齋:주세붕(周世鵬)가 청량산(淸凉山)에 유람한 기록을 외우도록 명 하셨다.

읽기를 마치자선생님이 그의 문장(文章)과 식견(識見)을 두세 차례 감탄 하셨다.

덕장선사(德藏禪師)가 곁에 있다가 그 글을 베껴서 청량산의 암자에다 현판(懸板)하기를 청하니,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차례가 있다.

하셨다.

아침 취사가 너무 늦어 여러 사람들이 매우 더디다고 여기니 채간이 장난 삼아 말하기를,

계로(季路:孔子의 제자 자로(子路)) 로 하여금 여기에 있게 하였으면 틀림없이 성난 얼굴로 선생님을 뵈었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선생님이 빙긋이 웃으셨다.

조반(朝飯)이 끝나고 금학고는 돌아가고,

채간(蔡衎),권명석,이수붕,이석붕,등은 노닐려고 나가고 나 혼자 선생님을 모시고 있었다.

중 쌍명(雙明)이 시(詩)를 청하자 선생님께서 먼저

칠언(七言) 일절(一絶)을 써주셨으므로 내가 거기에 차운(次韻)하였다.

오후(午後)에 멀리서 피리 소리가 구름 낀 산골짜기에 사무쳐 들려 오는데

그것은 바로 성주(城主) 금고산(琴孤山)이 오는 것이였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소 등에 학발(鶴髮)을 드리우고 앉아 앞에는 피리를 불고 뒤에는 술병을 가지고 오는데,

그것도 산 속에서는 기이하게 좋은 한 가지 일이였다.

연대(蓮臺)에서부터는 가마([輿]로 대승암(大乘庵) 까지 이르렀다.

선생님께서는 친구가 온 즐거움이 대단하셨는데 이 무렵 채간 등도 돌아왔다.

그들이 노닐던 곳을 물었더니 겨우 백운암(白雲庵)과 만월암(滿月庵) 사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술잔을 선생님께 올렸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아가자 내가 장난 삼아 말하기를,

금학고(琴學古)는 떠나고 금성주(琴城主)는 오셨으니 이른바 작은 이는 가고 큰 어른은 오셨도다.

하였더니,

좌중(座中)이 모두 웃고 선생님 역시 빙그래 웃으셨다.

고산장(孤山丈)이 우리 무리를 이끌고 문수(文殊),보현(普賢) 등의 암자(庵子)를 두루 구경하고

환선대(喚仙臺)에 앉아  동자(童子)를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으며,

선생님은 홀로 참란대(驂鸞臺)에 서서 서성거리며 멀리 바라보시고 깊은 생각을 하시면서

마치 석연(釋然)치 않은 것이 있는 듯 하였다.

얼마 있다가 걸어서 지장암(地藏庵)으로 내려와 채간 으로 하여금 벽(壁)에다 이름을 쓰게 하고

거기서 이틀째 밤을 지냈다.

오언일절(五言一絶)을 올리니 선생님께서 화답(和答)하여 주셨다.

이날 밤에 더욱 조용하여 질문하고 수응(酬應)하기를 매우 상세히 하였으며,

심지어 지방과 국가의 풍습(風習)과 고금(古今) 인물의 현명하고 현명하지 않은데 대하여 언급하면서

간혹 개탄(慨歎) 하기도 하며,

간혹 옳다 그르다 하기도 하면서 논(論)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러나 감히 기록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세속에서 비난의 자료가 될까 염려해서이다.

고산장이 말씀 하시기를,

옛날 보우(普雨)가 행세할 때에 영남의 선비(선비) 들이 통문(通文)을 내어 모여서 함께

대궐에 호소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무리로서 할 만 하다고 여겼는데,

선사(先師:퇴계선생(退溪先生)께서 오히려 선비들의 분수 밖의 일이라고 여기시며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셨기 때문에 그 당시 우리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하니,

월천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 일이 없었겠는가?

한 가지 의논으로 고집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셨는데,

그것은 대체로 이 당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제학(大提學) 심희수(沈喜壽)가 선현(先賢)을 문묘(文廟)에

올려서 제사 지내도록 청원하면서,

왕양명(王陽明:명나라 왕수인(王守仁)의 호(號)), 진백사(陳白沙:명나라 진헌장(陳獻章)의 호(號))과 아울러

설문청(薛文淸:명나라 설선(薛瑄)의 시호(諡號)) 호경재(胡敬齋:송나라 호거인(胡居仁) 의 호(號))을

거론 하였는데 저 왕양명과 진백사는 이단(異端)의 학설을 주장하는 부류이다.

심희수가 이 의논에 앞장섰으니,

이것은 실제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의 승강(昇降)과 오융(汚隆:쇠퇴와 융성)에 크게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무리들이 제때에 미처 결점을 들어 분변하여 평원(平原)을 태우는 화(禍)는

막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 무리들이 일찍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모여 의논하고 장차 통문(通文)을 내어 뜻이 같은 사람에게

제창(提唱) 한 것은 실제로 월천(月川)이 일찍 알고서 옳게 여겼던 바이다.

그런데 고산(孤山)의 뜻은 이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보우(普雨)때의 일을 해아려서 대처하려고 한 듯하다.

하지만 선생님의 경우는 바르지 않으면 도(道)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여겨서였다.

선생님이 말씀 하시기를,

맹자(孟子) 가 이르기를,

서인(庶人)이 군주(君主)가 자신을 불러 부역(賦役)을 시키면 가서 부역을 한다.

고 하였는데,

이는 무슨 말인가?

하고,

말씀 하시기를,

지난번에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으니 경서교정낭관(經書校正郎官)으로 임명하여 역마(驛馬)를 주면서

불러들여 나오게 하였는데,

늙은데다 또 병이 들어 나가지 못하였으니 가서 부역(賦役)하는 의리에 어긋나지 않은가?

하셨다.

모두들 말하기를,

아무도 동일한 사례(事例)는 아닌 듯 합니다.

아무리 달려가는 것이 가하다 하더라도 그 연세가 많고 길이 먼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갑자기 창문 밖에서 말 소리가 들리므로 물어 보았더니 중의 무리가 음식 제공에 관한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이였다.

내가 채간 등과 고(告) 하기를,

중의 무리는 매우 완악(頑惡)하여 보기 흉한 일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오래 머물 수 없겠습니다.

내일 내려가도록 하소서.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허락하셨다.

 

11월 11일 (乙巳)

간혹 볕이 나기도 하고 간혹 구름이 끼기도 하였으나 날씨는 어제와 같았다.

선생님께서 아침 일찍이 걸어서 연대(蓮帶)로 나아가 임시로 앉으셨는데 중(僧) 조일(祖一)

그의 스승 혜묵(惠默)의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을 올렸으며,

선생님이 지으신 두 수(首) 절귀(絶句) 가 있었다.

그리고 맨 끝의 시축에 또 배명서(裵明瑞)의,

일생동안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 늙었다[일생종석유간:一生終老釋儒間] 는 귀절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고 빙긋이 웃으셨다.

그리고 말씀 하시기를,

시축을 열람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무엇 때문에 고달프게 하겠는가?

하시면서,

드디어 바위 밑으로 던져 버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영(令)을 내려 또 주신재(周愼齋)의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을 앍도록 하셨는데,

그 흥취(興趣)가 일어나 감격(感激)하는 정(情)이 얼굴[顔面]에 나타났다.

이에 일어나셔서 방황(彷徨)하다가 옛날 퇴도선생(退陶先生)이 이곳에 오셔서 노니실 적의 일을 말씀하시자,

금고산(琴孤山)이 또 퇴도선생께서 당시 이곳에서 지으신 시(詩)를 외우셨는데 5~6편(篇)은 되었다.

모두들 멍한 모양으로 한참 있었는데 이 때의 회포와 상상은 틀림없이 우리 무리가 미쳐 알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조반(朝飯)이 끝난 뒤에 채간,권명석(權命錫),이수붕,이석붕 등이 또 노닐기를 청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어제 미쳐 노닐지 못한 곳을 두루 구경 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도달한 곳 또한 반야대(般若臺)와 경일봉(擎日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였다.

중 조일 이 조그마한 종이를 올리면서 시(詩)를 청하니 선생님께서 오언일절(五言一絶)을 써주셨다.

그 다음은 고산(孤山)에게 그렇게 하고 그 다음은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

선생님이 붓과 먹 각 한개를 주셨는데 이보다 앞서 이수붕이 붓과 먹이 떨어졌다고 말씀드렸기 때문에서였다.

해가 벌써 정오(正午)가 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하시자,

여럿이 모두 말하기를,

예 하고,

드디어 걸어서 성문(城門)까지 가서 문루(門樓)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쉬었다.

선생님께서 남여(藍輿)로 이동하시도록 청하고 억지로 권한 뒤에야 허락하셨다.

겨우 사자목(獅子項)을 지나자 말(馬)에 하도록 명하셨다.

금윤고(琴胤古)가 선생님을 위하여 말을 보내어 강(江)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루터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외나무 다리에 오르기를 올 때처럼 하였다.

정지하시도록 청원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좌우에서 쳐다조고 놀라서 얼굴빛이 변하였는데 선생님은 안온(安穩)하게 큰 길 위를 밟는 것처럼

눈 깜박할 사이도 안되어 벌써 서쪽 언덕에 이르셨다.

대체로 고산(孤山)이 산골짜기 길을 가는데 소(牛)를 타지 않으면 걷고 걷다가 힘이 그도로 지치면 가마를 타셨는데,

소를 탄 경우도 적었고 가마를 탄 경우는 더욱 적었으며 걸은 것이 실제로 3분의2가 되었으니,

너무나 건장한 젊은이도 미칠 수 없는 바였으며,

자못 인간 세상에 드문 일이였다.

나도 오히려 나이가 젊어 자부하는 바는 힘이 세다는 것이 였는데 그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서 늠름하게

두 다리를 외나무다리에 밀착시킬 수 없어 떨어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이미 그 다리를 건넜는데도

오히려 심하였으니 참으로 가소(可笑)롭다. 

박석촌(博石村:현제의 나분들(광석리(廣石里))의 시냇가 반석(盤石)애서 쉬며내가 가지고 있던 술을 내어 놓았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선생님이 고산에게 말씀 하시기를,

자네는 어찌하여 책을 읽지 않는가?

늙고 쇠약하여 비록 고인(古人)의 서적(書籍)은 읽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선사(先師)의 문집(文集)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벌(罰)을 주려고 한다.

하고,

채간(蔡衎)을 불러다 말씀 하시기를,

자네의 제주로 전혀 책을 읽지 않으니 너도 역시 벌을 받아야 마땅 하다.

하셨다.

한참 있다가 출발하였다.

막 떠나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청량산의 장인봉을 돌아보시며 아득하게 감개(感慨)하는 뜻이 있으셨다.

일동(日洞)이르자 날씨가 비가 내리려고 하였다.

선생님께서 월천(月川)으로 곧장 가시려고 하자,

고산이 그의 서당(書堂)에서 유숙(留宿)하기를 청하고 수행했던 여러 문생(門生)들도 군색하게 걸어가시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으로 선생님께 아뢰었더니 한참 있다가 말씀 하시기를,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야 어찌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떠날 채비를 멈추게 하셨다.

저녁에 비가 뿌리다가 도로 그쳤으며 밤이 새도록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내가 시(詩) 일절을 올렸더니,

선생님께서 일절을 써 주시었다.

채간(蔡衎)이 산중(山中)에서 지은 운(韻)에 모두 차운(次韻)하여 올리니 선생님께서 대단하게

허여(허여:마음속으로 허락함) 하셨다.

이날 밤에 밝은 달빛은 강(江)에 가득하고 빈 서당은 고요하고 적막하여 가르치고 깨닫기에 온편하고 알맞아

전날 밤보다 더 나았다.

내가 여쭙기를,

골짜기를 건너는데 반드시 위태로운 외나무 다리를 경유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더니,

말씀 하시기를,

다리 세우기를 평지(平地)처럼 하면 험한 곳이나 평평한 곳을 밟는데 어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느냐?

하셨다.

이야기가 한때의 교유(交遊)에 미치자,

젊었을 때에 믿음으로 맺고 의리로 따른 이는 순거(舜擧) 만한 이가 없었는데

순거란 바로 김지산 팔원(金芝山八元)이며 불행하게도 명(命)이 짧았고 지금은 없다.

고 하셨다.

선생님이 또 말씀 하시기를,

학자는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

이수붕의 무리가 요사이 느슨하게 풀어져 비상하게 애를 쓰며 노력하는 뜻이 너무 없으니

자네들이 모름지기 서로 책망하고 힘쓰도록 하여라.

하시므로,

대답 하기를,

소자(小子)들도 역시 그 병(病)에 걸려 있는 중인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책망 하겠습니까?

하오나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질문하기를,

선생님이 지으신 시(詩) 가운데,

생계를 도모하여 점차로 재물을 논하는 뜻이 일어나고[모생점작논재의:模生漸作論財意]

칭찬을 좋아하니 나에게 아첨함이 많음을 알겠도다    [희예방여영기다:喜譽方如佞己多] 고 한

귀절은 모르기는 하겠습니다만 언제 지으셨습니까?

하니,

말씀 하시기를,

소년(少年) 때 지은 것이라서 어느 해에 지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겠다.

고 하자,

고산(孤山)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바로 18세 때 지은 것이다.

하셨다.

또 질문 하기를,

순욱론(荀彧論)을 지으셨는데 퇴계 선생께서 감탄하시며 칭찬하시기를 마지 않으셨다고 들었사온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맣씀 하시기를,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

내가 논(論)을 지은 것이 겨우 6~7편(篇) 인데 이것이 바로 맨 나중에 지은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의론(議論) 문자(文字)에 대하여 매우 가상(嘉尙) 히 여길 만하다고 하셨지만 끝네

고평(考評:시문의 우열을 고사하여 평함) 하지는 않으셨다.

하였다.

그리고 어렸을 때의 학문(學問)의 차례를 질문 하였더니,

말씀 하시기를,

무자년(戊子年 중종23,1528) 여름에 대학(大學)을 읽었는데 바로 다섯 살 때로 집에 있을 시기였다.

조금 성장하여 통감(通鑑)을 선사(先師)에게 배웠는데,

당시 선사께서 온계(溫溪)에 계셨다.

내가 부모님을 뵈러 자주 집에 갔더니 어느 날 선사께서 말씀 하시기를,

어찌 이렇게도 잗달게 왕래하여 번거로운 것을 꺼려하지 않는가?

하셨으므로,

그 뒤로부터는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씀을 감히 자주하지 못하였다.

고 하셨다.

또 젊었을 적부터 글을 읽으시면서 몇 번 정도 읽으면 외울 수 있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말씀 하시기를,

열 두세 살 이전 에는 열 번 정도 읽으면 외우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다가 열 다섯이 됨에 이른 뒤에는 익숙하게 읽는것을 귀중하게 여겨 모든 책을 거의 일백번 정도는 읽었다.

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잠자리에 드신 지 얼마 않되어 고산(孤山)과 단란(團欒)하게 베개에 기대어 있다가 나도 피곤하여

깜빡 졸았는데,

선생님이 물으시기를,

코 고는 소리가 누구에게서 나느냐?

하시자,

채간이 자신이 코를 골았다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내가 꿈결에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일어 났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말 이른바 꿈결에 부름으로 깨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전에 듣지 못한 이야기를 더 듣게 되었다.

 

11월 12일 (丙午)

바람은 그쳤으나 날씨가 개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고산(孤山)이 술을 대접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저께 자네가 산에서 여기에 와보니 향기로운 막걸리가 익기는 하였으나 주인이 없다고 하여 마시지 못하고

단지 뚜껑만 열어 보고서 갔다고 하던데 어찌 그렇게도 옹졸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삼가 두려워서 감히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선생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장자(長者)가 먼저 맛을 본 다음에 마시는 것이 예의(禮儀)이다.

그런데 무슨 옹졸함이 있단 말인가?

하셨다.

채간(蔡衎)이 말히기를,

오늘은 마실 수 있는데 손님은 많고 술은 많지 않습니다.

하니,

소산이 말씀 하시기를,

비록 있기는 하지만 시고(산:酸) 텁텁한데 어쩌랴?

그러나 나이가 젊어 마시기를 즐기는 데야 무엇을 가리겠느냐?

하고,

드디어 걸러서 올리라고 명하여 큰 그릇으로 자못 6~7순배를 돌리고야 출발하여 백운지(白雲地)로 향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소산장(孤山丈)의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였다.

그곳에는 중(僧)으로 있다가 속세(俗世)로 돌아온 자(者) 2~3명이 재사(齋舍)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만든 묵[포:泡]의 맛이 일품이였다.

앉아 있노라니 눈꽃[雪花]이 하늘에 가득하여 거의 떠날 수가 없었다.

고산이 말씀 하시기를,

날이 개이지 않으면 유숙(留宿)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시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풍파(風波)가 크게 일어 배거 많이 뒤집혀서 물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건널 수가 없어 주저하고 있더니,

조금 있다가 어느 군자(君子)가 이르는 것을 보고는 좋아하며 행장을 가다듬으면서 갑자기 날랜 모습을 보이므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위용(威容)과 덕의(德儀)가 해신(海神)을 진정시키고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기에

내가 의뢰할 수 있다고 여겨서이요.

라고 하였는데,

말이 끝나고 얼마 않되어 바다가 별일 없이 순조로와져 바람을 타고 건너게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의 여행도 역시 그런 것 같으니 산에 들어가던 날 아침에 바람이 불다가 정오(正午)에는 그쳤으며,

산에서 나오던 날 밤에 바람이 불다가 아침에 그쳤고,

또 10일(甲辰)과 11일(乙巳)에는 비오는 때가 많고 개일 때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와 어제 모두 비가 내리지 않았고 동짓달에는 그 날씨가 매섭도록 추운 것이 당연한데도,

며칠간의 날씨가 따뜻 하면서 춥지 않았고 일기 또한 온화하고 매섭지 않았으니 이번 여행도 어찌 의뢰하는

바가 없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또 지금 내리는 눈도 출발할 무렵이면 다시 그치지 않는 다고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자,

선생님이 크게 웃으시면서 말씀 하시기를,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자네가 어찌 그리도 의론(議論)을 좋아하는가?

하셨다.

얼마 있다가 과연 날씨가 개였다.

이에 선생님께서 일절(一絶)을 쓰셨으므로 나와 채간도 역시 모두 화답(和答)하였다.

조반(朝飯)이 끝난 뒤에 출발하여 퇴계(退溪) 어귀에 이르러 모두 말에서 내려 이선생(李先生)의

문려(門閭)와 묘소(墓所)를 지나왔다.

내가 곧 선생님께 절하며 하직하고서 장차 지나는 길에 천연대(天淵臺)에 올라가려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배 찰방(裵察訪)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오셨다.

고 하므로,

일행이 모두 지난 번 약속 때문에 온 줄로 여겼는데,

다시 물어보니 정 찰방 윤위(鄭察訪允偉) 였다.

고을이 서로 가까워서 잘못 전해진 것이였다.

나는 온계(溫溪)로 돌아 갔는데 올 때에 시작한 눈이 밤사이 많이 내려 깊이가 거의 한 자 남짓 되였다.

오춘당(吳春塘)이 시(詩)를 지어 희롱하므로 내가 화답하였으며,

황예천 회원(黃醴泉會元)이 길에서 선생님이 청량산(淸凉山)에 유람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오춘당 편에 보내왔다.

 

참된 도리를 깨우침
아아!! 사람이 산을 대할 때 산으로 좋아하면 얄팍하게 좋아하는 것이고,

사람으로 좋아하면 깊이 좋아하는 것이다.

얄팍하게 좋아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다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깊이 좋아하는 것은 군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기이한 바위를 기이하게 생겼다고 하고,

이상한 돌을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면서 특별한 즐길 거리로 삼아서 색다른 곳에서 노닐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좋아하는 것이 같다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이 조용하고 신중하며 단정하고 침착한 것을 생각하게 되면 산의 모습같이 우러러보게 되고,

사람이 맑고 깨끗하여 탈속한 것을 생각하면 산의 기운을 바라보는 것 같으니

산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군자만이 할 수 있으니 좋아함에 깊은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에 사람이 있으면 오로지 그를 좋아하게 되니 산을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없고,

산에 사람이 없으면 좋아할 대상이 오직 산밖에 없으니 또한 산을 깊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鳴巖記]     명암기     을축년(乙丑年)

    原文(원문)

    鳴巖記 (명암기)

     剛州北里有愚叟洞。士夫多居焉。水東山麓向西而斗斷。巖石截然聳峙。旣峻而夷。其上可坐二十餘人。

     강주북리유우수동。사부다거언。수동산록향서이두단。암석절연용치。기준이이。기상가좌이십여인

    老槐一株不知何代栽擁。而大至於連抱。枝葉蔭博。掩盡石面。故不待營築而爲一絶勝之榭。其亦故矣。

    괴일주불지하대재옹。이대지어련포。지엽음박。엄진석면。고불대영축이위일절승지사。기역고의

    居斯里者或閑吟或携酒登臨以時  而春夏異景  秋冬異賞  若驅入詞人之筆  以照人耳目  雖名區殊境之載在職方。

    거사리자혹한음혹휴주등림이시  이춘하이경  추동이상  약구입사인지필  이조인이목  수명구수경지재재직방

    擅聲千古者  殆將蔑以尤矣  人之呼之必以鳴  仍以鳴爲其名  巖豈能於鳴耶。是未可知也。有謂形勝鳴於一時。

    천성천고자  태장멸이우의  인지호지필이명  잉이명위기명  암기능어명야。시미가지야。유위형승명어일시

    有謂野鶴鳴於巖角  有謂水路古由於此抵巖而成灘  其聲如鳴琴  有謂槐枝陰密引凉  及秋而蟬鳴。其音最可愛。

    유위야학명어암각  유위수로고유어차저암이성탄  기성여명금  유위괴지음밀인량  급추이선명。기음최가애

    此固古今人傳相騰說  而或未爲不出於遊人騷客之好爲辭以文之也  孫上舍興慶主是巖  家巖內以傳胄子直長禧。

    차고고금인전상등설  이혹미위불출어유인소객지호위사이문지야  손상사흥경주시암  가암내이전주자직장희

    家巖外以傳次子生員禴  使伯仲相與優游於巖上  晩年又創三架亭於巖之左偏  槐下臺則依舊也。凉燠具戶牖稱。

    가암외이전차자생원약  사백중상여우유어암상  만년우창삼가정어암지좌편  괴하대칙의구야。량욱구호유칭

    規甚巧妙而制不侈淫。上舍之意蓋可想矣。上舍兄興國平生窶八十而。渾家資活於上舍。

    규심교묘이제불치음。상사지의개가상의。상사형흥국평생궁구팔십이환。혼가자활어상사

    上舍與其兄共一被處斯亭。晝夜昕夕無一刻或離。衣之食之。靡物我間。有若髫齔時同遊於乳下。

    상사여기형공일피처사정。주야흔석무일각혹리。의지식지。미물아간。유약초츤시동유어유하

    豈叔世之所常得見者耶。人之欽我上舍而憧憧者。旣以見其人。又以遊乎巖。指點上舍所管溪風洞月。

    기숙세지소상득견자야。인지흠아상사이동동자。기이견기인。우이유호암。지점상사소관계풍동월

    山紅野綠之循序成象  惹人興趣。不一而足  然後遠近皆知是巖之在是洞  其名之以其鳴  使談勝者恐揭說之或後。

    산홍야록지순서성상  야인흥취。불일이족  연후원근개지시암지재시동  기명지이기명  사담승자공게설지혹후

    吟興者爭吐脾之欲先。於是乎巖不獨鳴於里。乃鳴於隣邑。鳴於隣不止。遂將大鳴於世。鳴之爲名。始不虛矣。

    음흥자쟁토비지욕선。어시호암불독명어리。내명어린읍。명어린불지。수장대명어세。명지위명。시불허의

    然則其鳴也非自鳴也。鳴於上舍也。上舍之前鳴其名者。盖有待也。上舍之後鳴其名者。不其符乎。

    연칙기명야비자명야。명어상사야。상사지전명기명자。개유대야。상사지후명기명자。불기부호

    噫天地間萬物之見呼於人。因爲其號者。實由於理數之自然。而不容毫髮私智以也明矣。直長與生員。

    희천지간만물지견호어인。인위기호자。실유어리수지자연。이불용호발사지이야명의。직장여생원

    繼先人共被於斯亭。不墜友愛之餘風。式彰家行之有傳。則上舍門庭淑德之鳴於千萬世。又豈特巖之勝而已耶。

    계선인공피어사정。불추우애지여풍。식창가행지유전。칙상사문정숙덕지명어천만세。우기특암지승이이야

    斯巖之名以鳴。亦當爲上舍一家之旌表矣。勖哉兩賢。余於上舍結姻有年。來往頗慣。心服其爲人。

    사암지명이명。역당위상사일가지정표의。욱재양현。여어상사결인유년。래왕파관。심복기위인

    常欲識其行蹟而未焉者久。阿柱旻以直長言請記鳴巖。故不敢辭以拙。試爲上舍而有作。豈曰文以鳴於斯巖耶。

    상욕식기행적이미언자구。아주민이직장언청기명암。고불감사이졸。시위상사이유작。기왈문이명어사암야

    噫爲上舍有作。而所闡者才一二於十分。甚矣余之筆之蹇且鈍也。

    희위상사유작。이소천자재일이어십분。심의여지필지건차둔야

    天啓乙丑季春九未。苟全翁記。

    천계을축계춘구미。구전옹기                                                                  

 

강주[剛州:영주(榮州)의 옛날 이름] 의 북쪽 마을로

우수동(愚叟洞)이란 데가 있는데 사대부(士大夫)가 많이 살고 있다.

수동산(水東山) 기슭이 서쪽으로 향하여 뻗어 내리다가 말(斗)을 자른 듯 바위가 끊은 것처럼 우뚝 솟아 있는데,

높으면서도 평평하여 그 위에 20명이 앉을 수 있으며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지만 언제 심어서 가꾸었는지

모르며 그 나무가 커서 아름드리가 되는데 이르렀다.

그래서 가지와 잎이 넓게 그늘을 지어 바위의 표면을 모두 가리워주기 때문에 ,

건물을 짓거나 축대를 쌓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하나의 뛰어난 경치의 정자가 만들어진 것이니

그렇게 된 것 떠한 오래 되었다.

이 마을에 사는 이들이 더러는 한가하게 시(詩)를 읊기도 하고 더러는 술을 가지고 가끔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는데,

봄 여름에는 경치가 특이하고 가을 겨울에는 구경꺼리가 특이하다.

그래서 마치 시문(詩文)을 짓는 사람의 글 솜씨를 그곳으로 몰아오게 하여

사람들의 귀와 눈을 통하여 알리게 하는 듯 하다.

그러므로 비록 이름난 구역(區域)이나 특수한 지경(地境)이라고 직방(職方)에 기재되어

오랜 세월 동안 그 명성을 독차지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앞으로는 거의 이보다 뛰어나다고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부르기를 반드시 울린다는 명(鳴)으로 하고 이어서 울린다는 것으로 그 이름을 짓기는 하였으나,

바위가 어떻게 잘 울릴 수 있을런지 이것을 알 수 없다.

어떤이는 경치가 한 시대에 울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꿩[야계(野鷄)]이 바위 위[암각(巖角)]에서 울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물길[수로(水路)]이 예전에는 이곳을 경유하게 되어 바위 밑에서는 여울을 이루어

그 소리가 거문고를 울리는 것 같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느티나무 가지의 으슥한 그늘이 서늘한 기운을 끌어 가을이 되면 매미가 울어대는데

그 소리가 가장 아낄 만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는 진실로 예나 지금의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입에 올려진 말이기도 한데

간혹 유람하는 사람과 글을 쓰는 사람이 말 만들기를 좋아하니,

그것을 글로서 표현한 데서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다.

손진사흥경(孫進士興慶)이 이 명암(鳴巖)의 주인인데 명암 안쪽에다 집을지어

맏아들인 직장(直長) 희(禧)에게 전하여 주고,

명암 바깥쪽에다 집을 지어 차자(次子) 생원(生員) 약(禴)에게 전해주어

맏이와 차자로 하여금 서로 함께 명암 위에서 여유있게 노닐게 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또 삼간 정자를 명암의 왼편에다 지었는데 느티나무 아래의 대(臺)는 옛날 그대로 였다.

그리하여 서늘하고 따뜻함이 갖춰지고 방으로 드나드는 출입구와 들창문을 알맞게 내어 그 규모가 매우

교묘(巧妙)하면서도 제도가 사치스럽거나 지나치지 않았으니 진사(進士)의 뜻을 대제로 상상할 수 있다.

진사의 형(兄) 손흥국(孫興國)은 평생토록 가난하게 살다가 80세가 되어 홀아비가 되였는데,

온 집안의 살림살이를 진사를 의뢰하여 꾸려 나갔다.

진사가 그의 형과 한 이불을 덮으며 이 정자에 거처하면서 아침 저녁이나 밤낮으로 한 시각도 떨어져 있지를 않았으며,

의복이나 음식을 제공함에 간격이 없게 하는 것이 마치 어렸을 적에 젖을 먹으며 함께 놀던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말세(末世)에 심상하게 얻어 볼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사람들이 우리 진사를 흠모(欽慕)하고 애틋하게 여겨 이미 그 사람을 보고 또 명암에서 노닐며,

진사가 관리하는 바 시내 사람과 골짜기의 달빛 그리고 붉은 산 푸른 들판의 자연경관의 순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리를 이루게 되어,

사람들의 흥취(興趣)를 불러일으킴이 한 가지 뿐만이 아니고 풍족한 연후에야 원근(遠近)에서

모두 이 바위가 이 동리에 있다는 것과,

그 이름을 울린다는 명암(鳴巖)으로 한 것을 알고 경치를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입에 올리기를 혹시라도

뒤쳐질까 두렵게 하고,

흥취를 읊은 사람으로 하야금 좋은 문장의 표현을 먼저 하도록 다투게 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바위가 그 동리에서만 울리는 것이 아니고 곧 이웃 고을에까지 우리게 되였으며,

또 이웃 고을에 울리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드디어 앞으로는 세상에 크게 울리게 되였으니 울린다는 것으로

이름을 은 것이 이제야 비로서 허황되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 울림은 저절로 울린 것이 아니고 진사에게서 울려진 것이다.

진사 이전에 그 이름을 울린다고 한 것은 데체로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고,

진사 이후에 그 이름을 울린다고 한 것은 그 이름과 부합(符合)이 되지 않았는가?

아! 천지간(天地間)의 만물로 사람에게 불려지는 것이 그 이름 때문인 것은 실제로 이수(理數)의 자연(自然)스러움에

연유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지혜를 억지로 끌어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직장(直長)과 생원(生員)이 그의 선인(先人)이 이 정자에서 형제분이 이불을 함께 덮은 정신을 계승하여

우애(友愛)하는 남은 풍습을 떨어뜨리지 않고,

한 집안의 행실로 본받고 드러낼 만한 것을 전수(傳授) 하게 한다면 진사 집안의 훌륭한 덕(德)을

천만세(千萬世)토록 리게 할 것이니,

이것이 또한 어떻게 특별히 바위의 좋은 경치 뿐 이겠는가?

이 바위를 울린다는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 역시 진사 한 집안의 정표(旌表)가 되기에 합당하다.

힘 쓸지어다  직장,생원 두 분이여!

내가 진사에게는 인척(姻戚) 관계를 맺은 지 몇 해가 되어 자못 익숙하게 왕래 하면서 그 분의 이품 됨됨이에

마음속으로 감복(感服)하고 늘 그의 행적(行蹟)을 기록하려고 하였지만 그렇게 못한 지가 오래였다.

그러던 차 우리 아이 주민(柱旻)이 직장(直長)의 말을 가지고 명암(鳴巖)의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서툰 솜씨로 진사를 위하여 시험삼아 짓기는 하였으나,

어찌 문장(文章)서 이 바위를 울리게 한다고 말하겠는가?

아! 진사를 위하여 짓기는 하였지만 드러낸 것은 겨우 열 가지에 한두 가지 뿐이니 심하도다.

나의 글 솜씨가 날카롭지 못하고 무딤이여!!

 

[직방(職方:주(周)나라 시대의 벼슬 이름. 천하(天下)의 지도(地圖)와 토지(土地)에 관한 일을 맡은 벼슬.]

[천계(天啓) 을축년(乙丑年 인조3년 1625)  3월 [계춘(季春)]에 구미 구전옹(九未苟全翁)이 기문(記文)을 쓰다.]

 

 

  [苟全 金先生致遠庵重修勸謗文]구전 김선생치원암중수권방문           구전 김중청(苟全金中淸)

  한강선생(寒岡先生)께서 리안동지(莅安東之)사월에 승가일(乘暇日)하야 래등청량산(來登淸凉山)하니,

  위방선사 퇴도 이선생유적지(爲訪先師 退陶 李先生遺跡地)라 견봉만사찰(見峯巒寺刹)과 촌초편석(寸草片石)이

  개개선생지유영칙 기격감추모지심(蓋皆先生之遊詠則 其激感追慕之心)이

  고기무소불연이 지어원암(固己無所不然而 至於遠庵)하니,

  벽상(壁上)에 앙견선사급 일시생십수인성자(仰見先師及 一時生十數人姓字)하고

  지기위선사수필칙수렴임기경(知其爲先師手筆則遂斂袵起敬)하야 잉위지창연양구(仍爲之愴然良久)라가

  기이탄일 아선사지제우차 우금사십사년(旣而嘆日 我先師之題于此 于今四十四年)이요,

  몰우삼십팔년지구이 우벽유묵(沒又三十八年之久而 右壁遺墨)이 상여일성(尙如日星)하야

  늠연약면승경해(凜然若面承謦咳)하니, 금래소득(今來所得)이 기복유대어차야(豈復有大於此也)리오

  항암공기구(恒庵空己久)에 풍우표요(風雨飄搖)하야 양상(樑橡)이 욕최(欲摧)에 세장퇴전(勢將頹顚)하니,

  약불급금수복칙심구선사수적(若不及今修復則深懼先師手跡)이 역구수암이민멸(亦具隨庵而泯滅)하야

  무이기후학지감이계아유차산자 우장하소득언(無以起後學之感而繼我遊此山者 又將何所得焉)이리오,

  위오배자 개모소이중창시암(爲吾輩者 蓋謀所以重創是庵)하야

  위존경무궁지지야 종유오육인(爲尊敬無窮之地耶 從遊五六人)이 개재배사(皆再拜謝)하고

  인천가간승명일훈자(因薦可幹僧名一勳者)하야 위화주(爲化主)하다.

  어시(於是)에 선생(先生)이 명중청(命中淸)하사 작일문자(作一文字)를 여승가권연지례(如僧家勸緣之例)하야

  부제훈사(付諸勳師)하야 금걸화어소제문인후예급타후생지모 선현자(今乞貨於所題門人後裔及他後生之慕 先賢者)하야

  이성기사(以成其事)하라하니 희(噫)라 한강지어퇴도(寒岡之於退陶)에 기존경지지(其尊敬之至)를

  어차가견의(於此可見矣)라 금자지거 기위구구일승사운호재(今玆之擧 豈爲區區一僧舍云乎哉)아

  범아인근사림(凡我隣近士林)이 약능견득차의(若能見得此意)어든 손출미포약간(損出米布若干)하야

  이부만일칙역가위한강지도야기(以扶萬一則亦可謂寒岡之徒也己)라.

  만력정유(萬歷丁酉) 月 日에 안동인 구전 김중청(安東人 苟全 金中淸)은 서(書)하노라.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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