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장(書狀), 책(策), 서(書) | ||||||||||||||||
작성자 | 관리자 [2017-12-23 14:32: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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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卷之四] 구전선생문집권지사
[書狀] 서장
[朝天呈禮部請免宴文] 조천정예부청면연문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예부에다 글을 올려 연회 참석을 면제해 달라고 청원한 글
비직(卑職:자신의 직위를 낮춤) 등이 진향(進香), 진위(陳慰)하는 배신(陪臣)들과 같은 시기에 명나라 조정에 왔습니다만, 비직 등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 하는 전문(箋文)을 받들고 왔기에 길사(吉事)와 경사(慶事)에 관계되어 의복의 색깔도 검은 색이거나 흰색이 저절로 진위사 일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께서 하사하는 상마연(上馬宴)과 하마연(下馬宴)등의 항목에 이르러서도 혼자서만 행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조선(朝鮮)은 지역적으로 아주 멀리 떨아져 있어 가장 늦게야 부음(訃音)을 듣게 되므로, 진위 등의 사신이 애조(哀詔)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므로 이제야 바로서 북경에 도달한 것입니다. 비록 장례를 치른 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 조선의 입장으로는 조문(弔問) 온 초기가 됩니다. 우리 과군(寡君)께서는 바야흐로 거상(居喪)중에 있는 마음으로 조문하러 보냈는데, 신 등이 돌이켜보면 머리에 꽃을 꽂고 연회에 참석을 해야 하니 어떻게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거구나 지금 진위 배신(陳慰陪臣)에게는 연례 참석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 당연 합니다. 똑같은 제후국(諸侯國)의 배신인데 비직 등만 유독 편안한 마음으로 외람되이 공석(公席)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장례를 잘 치렀다는 소식이 과군의 귀에 이르지 않는 한 상복을 벗는 의식은 과군 자신이 행하지 못함니다. 그런데 비직 등이 어찌 감히 우라 과군보다 먼저 길연(吉宴)에 앞질러 나아가 몸소 술과 고기를 먹으며 귀로는 풍악을 듣고 후하게 은총을 도둑질하며 모람되게 전례(典禮)를 실수하여 우리 과군의 명나라를 섬기는 지극한 정성을 져버릴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데, 예부[대하(臺下)]에서 특별히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정곡(情曲)을 용서하여 으례 하사하는 연회 석상의 참석을 면제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신(陪臣:제후(諸侯)의 대부(大夫)가 천자(天子)에 대하여 자신을 이르는 말.] [전문(箋文:한문 문체(文體)의 이름. 나라에 길흉(吉凶)의 일이 있을 때,신하가 임금에게 써 올리는 4,6체의 글.] [상마연(上馬宴:어떤 임무를 위하여 또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기 위하여 길을 떠라는 사람에게 떠나기 전에 베푸는 잔치,] [하마연(下馬宴:사신이 임지에 도착하면 환영하는 의미에서 베푸는 찬치.말에서 내리자 차리는 잔치라는 뜻임.] [애조(哀詔:명나라 황실(皇室)의 상사(喪事)를 알리는 조서.] [과(寡君:자기 나라 임금을 낮추어 이르는 말.] [거상(居喪:상중에 있음을 말함.]
[再呈禮部文] 재정예부문 다시 예부에 올린 글
비직(卑職) 등이 연회 참석을 면제해 달라는 한 건의의 일로 앞서 이미 낭중 대인(郎中大人)에게 글을 올려 보고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이렇다 저렇다 할 회답이 없기에 또 다시 감히 모람되게 그 실정과 곡절을 집사(執事)에게 전달하오니 집사께서 살펴주소서 가만히 본국(本國)에서 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가늠해 보면 부모(父母) 섬기는 것과 같아 그 정성과 공경을 극도로 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께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제후국으로 보지 않으시고 경하(慶賀)와 조문(弔問)을 때맞추어 하며 명나라 내국의 제후처럼 대우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과군께서는 조석(朝夕)으로 보살펴야 할 업무가 있어 스스로 떠날 수 없어 한 두 명의 배신(陪臣)을 시켜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받들어 싸 가지고 와서 해바라기 같은 정성을 집사에게 대신 진달 합니다. 비직 등은 사실 과군을 대신하여 일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비직 등이 지난 4월 21일에 천추절(千秋節)사신으로 출발하였으며 진위(陳慰), 진향(進香) 두 배신도 바로 애조(哀詔)가 반포되자 5월 18일에 뒤따라 출발하여 허둥지둥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서 비직 등과 같은 날짜에 북경에 함께 도달하였으니 비록 장례는 이미 지난 뒤라 하더라도 진실로 우리 과군에게는 조문하러 보낸 초기입니다. 갈혹 흉례(凶禮)를 주관하거나 길례(吉禮)를 주관하는데 있어서 옷의 색깔은 검거나 흰 것이 저절로 피차(彼此)사이에 차이가 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조문 사신을 파견할 때에 과군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픔 뿐이고 다른 마음은 없었으니 과군의 슬픔은 바로 우리 배신들의 슬픔입니다. 슬픔 가운데서의 길례는 하례(賀禮)를 받드는 자가 혼자서 잠깐 동안 당하는 것이겠지만 길례 밖의 슬픔은 진향사,진위사와 봉하사를 논할 것 없이 과군의 마음과 동일 합니다. 그러니 바야흐로 하례하는 데는 길례가 비직 등에게 적용이 되였으나 지금부터 말한다면 균일하게 과군의 슬픔을 따라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다른 편에는 연회 참석을 면제해 주면서 비직 등에게는 면제하여 주지 않는다면 이는 과군이 두 분이나 되는 샘입니다. 만약 진향, 진위사가 먼저오고 봉하사가 나중에 왔다면 이미 들쑥날쑥하여 그렇게 하여도 되겠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같은 시기에 이르렀고 같은 날짜에 조회에 참여하였으며 11일에 이미 하례하였고 19일에 바야흐로 제사(祭祀)를 올리며 조문하는 사람과 하례하는 사람이 함께 같은 관(館)에 있었으니 어떻게 진(秦)나라와 월(越)나라처럼 구분을 지우겠습니까? 설령 과군으로 하여금 몸소 와서 의식을 행하는 경우라도 더러는 노래를 부르고 더러는 곡(哭)을 하는 것이 단지 그 일의 길흉(吉凶)만을 따르고 그 마음의 슬픔을 따르지 않으셨겠습니까? 슬픔은 진실로 마음에 있는 것이니 감히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군깨서도 감히 못하는 바인데 비직 등이 감히 하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과군의 신하인데 한쪽에서는 참석하게 하고 한쪽은 면제해 준다면 아마도 과군에게 돌아가 보고하지 못할듯합니다 이른바 연회라는 것이 어찌 심상하게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으례 머리에 꽃을 꽂게 하는 등 화려하게 자리를 꾸미고 풍악을 갖추어 들어와서 영화와 즐거움을 극도로 한 뒤에 그만 두는 것이니 우리 마음에 편안 하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경사(慶事)에 관계된 것이여서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장례가 혹시 천추절 뒤에 있어서 영절(令節:명절(名節)에 전문(箋文)을 받들고 와서 하례한다면 경사라고 핑계대면서 기필코 장례 전에 연회에 참석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이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과군께서 애조(哀詔)를 받은 것이 맨 나중이였고 과군께서 조문하고 치제한 것은 지금이였으니 과군에게 있어서의 이날은 실제로 장례하지 않은 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헤아려 보면 비직 등에게 연회 참석을 면제한 뒤에야 예의가 갖추어지는 것이며 면제하지 않는다면 실례가 됩니다. 대체로 예는 인정일 뿐이며 이치일 뿐이니 인정이 편안한 곳에 이치 또한 따르기 마련입니다. 비직 등이 비록 외진 먼 나라에 있기는 하지만 일찍이 예의를 연구하였는데 어떻게 감히 인정의 불안(不安)한 바와 이치의 불순(不順)한 것을 머리를 구부려 받들겠으며 자신의 실수를 마음에 달갑게 여겨 예의를 아는 이들이 배를 쥐고 비웃어 댈 꺼리를 두둑이 물려주겠습니까? 이는 비직 등이 구구하게 우러러 호소하면서 번거로움을 꺼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원하건데 집사께서는 당사(堂司:부서의 장관)에게 다시 보고하여 시행하는 분부를 굽혀 내리시어 비직으로 하여금 진향,진위 배신들과 같이 함께 성대한 연회의 참석을 면제하여 주시기를 이렇게 바라오니 그렇게 해 주시면 매우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표문(表文:소회(所懷)를 진술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대개 경하(慶賀) 때에 올림.]
[回揭丘遊擊坦] 회게구유격탄 구 유격 탄에게 회답하다
일찍이 허군(許君)을 대야(大爺)의 명성을 실컫 글었기에 우뚝한 산처럼 우러르다가 주둔하고 있는 군영 아래로 지나갈 듯 하기에 조심스럽게 성명(姓名)을 예물로 올리고 물러나려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지금 빛나는 편지를 욕되게 먼저 보내시고 초대하는 명까지 은총을 베풀면서 선생 각하(先生閣下)란 등의 말을 표제(標題)로 하고 그로인해 스스로의 성명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린[돈수(頓首)]다는 것으로 끝을 맺어 마치 평소 친밀한 교분이 있는 분 처럼 하셨습니다. 돌아보건데 본인은 미천한 사신으로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겠습니까? 겨우 중국의 영토를 밟으면서 문득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겼으니 죄석의 맨 끝에라도 끼어서 안온하게 영명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어찌 덕있는 이를 사모하는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비직(卑職)이 대야에게 있어서 허균과는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이미 지난날에 하루의 교제도 없었고 이번이 바로 첫번째로 서로 접견하는 입장이니 공적인 의식을 행하기 전에 앞질러서 사복(私服) 차림으로 외람되게 높은 좌석에 참여하는 것은 미천한 신분에 편치 못할 뿐만 아니고 피차(彼此)간의 체면에도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옹졸한 견해가 이와 같으니 송구스럽습니다.
[대야(大爺:지위가 높은 무관을 높혀서 부르는 존칭.]
[遼東與丘遊擊書] 요동여구유격서 요동에서 구 유격에게 준 글
지난번 강사(江寺)에서 청조한 모습을 접견하게 되였는데 정겹게 마신 술이며 힘써 지은 문장이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미천한 사신이 이런 곳에서 러찌 평생 꿈속에서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기쁘고 다행하게 여기는 한마음은 오래되어도 더욱 대단합니다. 은혜롭게 주신 두 폭(幅)의 시편(詩篇)은 성정(性情)을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고 또한 이는 격률(格律)이 가장 높아 변방에서의 절충(折衝)하는 수고로움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며 해외(海外)에 전해지고 칭송한 우아함이 있기에 여관에서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일찍이 개인적으로 공경심이 솟아나지 않을 수 옶습니다. 본인은 맑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고 밝은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는데는 솜씨가 없어 진실로 감히 시를 지어 주고받는 데는 마음을 다하여 일삼지 못하겠지만 먼길을 떠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간혹 감정이 발로되는 때가 있으면 이에 백상(百祥),장전(長奠), 육주(六州,등의 운(韻)을 활용하여 약간 편을 지어 돌아가는 인편에 써서 부쳐 문하(文下)에 바치오니, 노야(老爺:대야(大爺)께서 한번 비루한 안목에 대하여 빨리 피지를 만들어 장독 뚜껑을 만들도록 명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보두 욕되게 살피소서.
[절충(折衝:처들어오는 적의 예봉을 꺽음.]
[與楊翹鶴祥武祥書] 여양교학상무상서 양교, 학상, 무상에게 주는 글
주문공(朱文公:주희(朱熹)의 필적(筆跡)인 명륜당(明倫堂) 세 대자(大字)를 탑본(榻本)하도록 허락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여러 대인(大人)의 높은 의리를 우러르며 감히 설화지(雪花紙) 20편(片)을 바치오니 문하(門下)의 사랑으로 먼 나라의 사람들이 선현(先賢)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이해하시고 군자(君子)의 천금(千金)의 무게로 누르는 허락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세 개의 부채로 조그마한 정성을 표하오니 모두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與河懋灼書] 여하무작서 하무작에게 준 글
불녕(不佞)이 홀로 앉아 옹졸한 처세술을 분복으로 알고 그대로 지키면서 감히 간단한 편지라도 올려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지 못하여 단지 스스로 부끄럽고 답답할 뿐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지금 갑자기 훌륭한 편지를 받게 되고 정겨운 선물까지 함께 보내셨는데 모두가 문방(文房)의 보완(寶玩)으로 해외(海外)에서도 구하기 가장 어려운 물품 10벌이니 조선으로 돌아가 여러 친구들에게 으시대며 자손에게 전해 주게 될 터이니 그 감격스러움을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상호(霜毫) 5지(枝)와 설등(雪藤) 1속(束)을 허둥지둥하며 받들어 사례 드립니다. 집안에 우둔한 자식이 바야흐로 이학사(李學士)와 장동해(張東海)의 글씨를 배우고 있기에 감히 진초(眞草) 각 두 폭(幅)을 아울러 안하(案下)에 드리오니 외람되게 청초한 안목을 더럽힐 듯 합니다. 모두 살피시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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