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苟全先生文集
苟全先生文集
제목 서장(書狀), 책(策), 서(書)
작성자 관리자 [2017-12-23 14: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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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卷之四]    구전선생문집권지사

 

[書狀    서장

 

 

                                 조천정예부청면연문(朝天呈禮部請免宴文)

  1614년 허균(許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中國)에 갔을 때

  중국 조정(中國朝政)의 예부(禮部)에서 연회(宴會)를 베풀자 그곳에 참가할 수 없는 사유

  국내(國內)가 喪中이기 때문에 연회(宴會) 참석을 중지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다.

 

     原文(원문)

    朝天呈禮部請免宴文 (조천정예부청면연문)

     卑職等。與進香陳慰陪臣。一時赴朝。而職等賷奉賀節箋文。係干吉慶。服色玄素。自與陳慰一行有間。

     비직등。여진향진위배신。일시부조。이직등재봉하절전문。계간길경。복색현소。자여진위일행유간

     至於欽賜上下馬宴等項。有所不可獨行者。下邦地里懸遠。聞訃最晩。陳慰等行。竢哀詔乃起。今始達於都下。

     지어흠사상하마연등항。유소불가독행자。하방지리현원。문부최만。진위등행。사애조내기。금시달어도하

     雖在襄事已過之後。實我下邦赴吊之初也。我寡君方懷疚遣吊。而職等顧乃揷花參宴。豈其安乎。况今陳慰陪臣等。

     수재양사이과지후。실아하방부적지초야。아과군방회구견적。이직등고내삽화참연。기기안호。황금진위배신등

     當免宴禮。均是一藩陪臣。而獨可晏然強叨公席耶。克葬之音。未及於寡君之耳。卽吉之禮。未行於寡君之身。

     당면연예。균시일번배신。이독가안연강도공석야。극장지음。미급어과군지이。즉길지례。미행어과군지신

     職等何敢先我寡君徑就吉筵。身忝樽俎。耳聆匀韶。厚竊恩寵。冒失典禮。以負我寡君事上至誠乎。

     직등하감선아과군경취길연。신첨준조。이령균소。후절은총。모실전례。이부아과군사상지성호

     伏願臺下特恕遠人情曲。許免例賜筵席。如何如何。

     복원대하특서원인정곡。허면례사연석。여하여하                                      

 

[朝天呈禮部請免宴文]     조천정예부청면연문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예부에다 글을 올려 연회 참석을 면제해 달라고 청원한 글

 

비직(卑職:자신의 직위를 낮춤) 등이 진향(進香), 진위(陳慰)하는 배신(陪臣)들과 같은 시기에 명나라 조정에 왔습니다만,

비직 등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 하는 전문(箋文)을 받들고 왔기에 길사(吉事)와 경사(慶事)에 관계되어 의복의 색깔도

검은 색이거나 흰색이 저절로 진위사 일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께서 하사하는 상마연(上馬宴)과 하마연(下馬宴)등의 항목에 이르러서도 혼자서만 행할 수 없는 바가 있으니,

조선(朝鮮)은 지역적으로 아주 멀리 떨아져 있어 가장 늦게야 부음(訃音)을 듣게 되므로,

진위 등의 사신이 애조(哀詔)를 기다렸다가 출발하므로 이제야 바로서 북경에 도달한 것입니다.

비록 장례를 치른 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 조선의 입장으로는 조문(弔問) 온 초기가 됩니다.

우리 과군(寡君)께서는 바야흐로 거상(居喪)중에 있는 마음으로 조문하러 보냈는데,

신 등이 돌이켜보면 머리에 꽃을 꽂고 연회에 참석을 해야 하니 어떻게 그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거구나 지금 진위 배신(陳慰陪臣)에게는 연례 참석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 당연 합니다.

똑같은 제후국(諸侯國)의 배신인데 비직 등만 유독 편안한 마음으로 외람되이 공석(公席)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장례를 잘 치렀다는 소식이 과군의 귀에 이르지 않는 한 상복을 벗는 의식은 과군 자신이 행하지 못함니다.

그런데 비직 등이 어찌 감히 우라 과군보다 먼저 길연(吉宴)에 앞질러 나아가 몸소 술과 고기를 먹으며 귀로는 풍악을 듣고

후하게 은총을 도둑질하며 모람되게 전례(典禮)를 실수하여 우리 과군의 명나라를 섬기는 지극한 정성을 져버릴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데,

예부[대하(臺下)]에서 특별히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정곡(情曲)을 용서하여 으례 하사하는 연회 석상의 참석을

면제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배신(陪臣:제후(諸侯)의 대부(大夫)가 천자(天子)에 대하여 자신을 이르는 말.]

[전문(箋文:한문 문체(文體)의 이름. 나라에 길흉(吉凶)의 일이 있을 때,신하가 임금에게 써 올리는 4,6체의 글.]

[상마연(上馬宴:어떤 임무를 위하여 또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기 위하여 길을 떠라는 사람에게 떠나기 전에 베푸는 잔치,]

[하마연(下馬宴:사신이 임지에 도착하면 환영하는 의미에서 베푸는 찬치.말에서 내리자 차리는 잔치라는 뜻임.]

[애조(哀詔:명나라 황실(皇室)의 상사(喪事)를 알리는 조서.]

[과(寡君:자기 나라 임금을 낮추어 이르는 말.]

[거상(居喪:상중에 있음을 말함.] 

 

                                           재정예부문(再呈禮部文)

  1614. 중국 조정에서 마련한 연회(宴會)에 참가할 수 없음을 다시 알리는 글이다.

  이 글에는 중국의 외국 사신(外國使臣)에 대한 접대 절차와 사신(使臣)으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지키려는 우리 사신(使臣)들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原文(원문)

   再呈禮部文 (재정예부문)

    職等將免宴一事。曾已呈禀于郞中大人。尙無皁白。又敢冒陳其情折于執事。惟執事垂察焉。竊照本國事大朝如父母。

    직등장면연일사。증이정품우랑중대인。상무조백。우감모진기정절우집사。유집사수찰언。절조본국사대조여부모

    極其誠敬。靡所不至。故皇上不以外藩視之。慶吊惟時。許同內服。我寡君有朝夕之務。不能自行。

    극기성경。미소부지。고황상불이외번시지。경적유시。허동내복。아과군유조석지무。불능자행

    使一二陪臣齎擎表箋。替達葵悃于下執事。卑職等實代寡君以行事者也。職等於四月二十一日。以千秋節价起程。

    사일이배신재경표전。체달규곤우하집사。비직등실대과군이행사자야。직등어사월이십일일。이천추절개기정

    陳慰進香二陪臣。乃趁哀詔頒到。以五月十八日踵發。匍匐之行。晨夜兼程。與職等同時騈達于京師。

    진위진향이배신。내진애조반도。이오월십팔일종발。포복지행。신야겸정。여직등동시병달우경사

    則雖是襄事已過之後。固我寡君赴吊之初也。或主於凶。或主於吉。服色玄素。自不能不間於彼此。而方玆遣吊之時。

    칙수시양사이과지후。고아과군부적지초야。혹주어흉。혹주어길。복색현소。자불능불간어피차。이방자견적지시

    寡君之心。一於哀而靡他。寡君之哀。卽我陪臣等之哀也。哀中之吉。奉賀者獨當於斯須。而吉外之哀。

    과군지심。일어애이미타。과군지애。즉아배신등지애야。애중지길。봉하자독당어사수。이길외지애

    無論進慰與奉賀  同一寡君之心  則方其賀也。吉在於職等  而由今言之。均是寡君之哀耳。於他則免宴。於職等不免。

    무론진위여봉하  동일과군지심  칙방기하야。길재어직등  이유금언지。균시과군지애이。어타칙면연。어직등불면

    是二寡君也。若進慰者前。奉賀者後。則旣已參差。猶之可也。今也不然。一時而至。同日而見朝。十一日旣賀。

    시이과군야。약진위자전。봉하자후。칙기이참차。유지가야。금야불연。일시이지。동일이견조。십일일기하

    十九日方祭。吊者賀者。同在一。則其何以秦越分也。設令寡君躬造而行禮。則或歌或哭。只循其事之吉凶。

    십구일방제。적자하자。동재일관。칙기하이진월분야。설령과군궁조이행례。칙혹가혹곡。지순기사지길흉

    而不循其心之哀戚乎  哀苟在心  不敢以宴也明矣  寡君之所不敢。而職等敢爲之乎。皆我寡君之臣。而一參焉一免焉

    이불순기심지애척호  애구재심  불감이연야명의  과군지소불감。이직등감위지호。개아과군지신。이일참언일면

    恐無以歸報寡君也。所謂宴者。豈尋常飮酒食肉之比例。爲戴花瓊筵。樂具入奏。榮極樂而後已。於我心安乎。

    공무이귀보과군야。소위연자。기심상음주식육지비례。위대화경연。악구입주。궁영극악이후이。어아심안호

    如曰係于慶事。不可不宴云。則有一說。襄事或後於千秋。而當其令節。奉箋來賀。則亦委於慶而必宴於葬前乎。

    여왈계우경사。불가불연운。칙유일설。양사혹후어천추。이당기령절。봉전래하。칙역위어경이필연어장전호

    無是理也萬萬。寡君之奉詔最後。寡君之吊祭在今。則寡君之於是日。實與未葬時同。以是而揆。職等之宴。

    무시리야만만。과군지봉조최후。과군지적제재금。칙과군지어시일。실여미장시동。이시이규。직등지연

    免而後爲禮。不免則失矣。夫禮情而已理而已。情之所安。理亦順焉。職等雖在褊外。亦甞硏禮。

    면이후위례。불면칙실의。부례정이이리이이。정지소안。리역순언。직등수재편외。역상연례

    豈敢以情所不安理所不順者。俛首而受之。甘心於自失。厚貽知禮者之捧腹耶。此職等所以區區仰籲不憚煩者也。

    기감이정소불안리소불순자。면수이수지。감심어자실。후이지예자지봉복야。차직등소이구구앙유불탄번자야

    願執事轉告堂司。曲賜施行。使與進慰陪臣。偕免領宴。惟此之望。不勝幸甚。

    원집사전고당사。곡사시행。사여진위배신。해면령연。유차지망。불승행심。       

 

 [再呈禮部文]     재정예부문     다시 예부에 올린 글

 

비직(卑職) 등이 연회 참석을 면제해 달라는 한 건의의 일로 앞서 이미 낭중 대인(郎中大人)에게 글을 올려 보고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이렇다 저렇다 할 회답이 없기에 또 다시 감히 모람되게 그 실정과 곡절을 집사(執事)에게 전달하오니 집사께서

살펴주소서 가만히 본국(本國)에서 명나라를 섬기는 것을 가늠해 보면 부모(父母) 섬기는 것과 같아 그 정성과 공경을

극도로 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께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제후국으로 보지 않으시고 경하(慶賀)와 조문(弔問)을 때맞추어 하며 명나라 내국의

제후처럼 대우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과군께서는 조석(朝夕)으로 보살펴야 할 업무가 있어 스스로 떠날 수 없어 한 두 명의 배신(陪臣)을 시켜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받들어 싸 가지고 와서 해바라기 같은 정성을 집사에게 대신 진달 합니다.

비직 등은 사실 과군을 대신하여 일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비직 등이 지난 4월 21일에 천추절(千秋節)사신으로 출발하였으며 진위(陳慰), 진향(進香) 두 배신도 바로 애조(哀詔)가

반포되자 5월 18일에 뒤따라 출발하여 허둥지둥 밤낮으로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서 비직 등과 같은 날짜에 북경에 함께

도달하였으니 비록 장례는 이미 지난 뒤라 하더라도 진실로 우리 과군에게는 조문하러 보낸 초기입니다.

갈혹 흉례(凶禮)를 주관하거나 길례(吉禮)를 주관하는데 있어서 옷의 색깔은 검거나 흰 것이 저절로 피차(彼此)사이에

차이가 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조문 사신을 파견할 때에 과군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픔 뿐이고 다른 마음은 없었으니 과군의 슬픔은

바로 우리 배신들의 슬픔입니다.

슬픔 가운데서의 길례는 하례(賀禮)를 받드는 자가 혼자서 잠깐 동안 당하는 것이겠지만 길례 밖의 슬픔은 진향사,진위사와

봉하사를 논할 것 없이 과군의 마음과 동일 합니다.

그러니 바야흐로 하례하는 데는 길례가 비직 등에게 적용이 되였으나 지금부터 말한다면 균일하게 과군의 슬픔을

따라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다른 편에는 연회 참석을 면제해 주면서 비직 등에게는 면제하여 주지 않는다면 이는 과군이 두 분이나 되는 샘입니다.

만약 진향, 진위사가 먼저오고 봉하사가 나중에 왔다면 이미 들쑥날쑥하여 그렇게 하여도 되겠지만 지금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같은 시기에 이르렀고 같은 날짜에 조회에 참여하였으며 11일에 이미 하례하였고 19일에 바야흐로 제사(祭祀)를 올리며

조문하는 사람과 하례하는 사람이 함께 같은 관(館)에 있었으니 어떻게 진(秦)나라와 월(越)나라처럼 구분을 지우겠습니까?

설령 과군으로 하여금 몸소 와서 의식을 행하는 경우라도 더러는 노래를 부르고 더러는 곡(哭)을 하는 것이 단지 그 일의

길흉(吉凶)만을 따르고 그 마음의 슬픔을 따르지 않으셨겠습니까?

슬픔은 진실로 마음에 있는 것이니 감히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군깨서도 감히 못하는 바인데 비직 등이 감히 하겠습니까?

모두가 우리 과군의 신하인데 한쪽에서는 참석하게 하고 한쪽은 면제해 준다면 아마도 과군에게 돌아가 보고하지 못할듯합니다

이른바 연회라는 것이 어찌 심상하게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으례 머리에 꽃을 꽂게 하는 등 화려하게 자리를 꾸미고 풍악을 갖추어 들어와서 영화와 즐거움을 극도로 한 뒤에 그만 두는

것이니 우리 마음에 편안 하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경사(慶事)에 관계된 것이여서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한다면,  역시 할 말이 있습니다.

장례가 혹시 천추절 뒤에 있어서 영절(令節:명절(名節)에 전문(箋文)을 받들고 와서 하례한다면 경사라고 핑계대면서

기필코 장례 전에 연회에 참석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이치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과군께서 애조(哀詔)를 받은 것이 맨 나중이였고 과군께서 조문하고 치제한 것은 지금이였으니 과군에게 있어서의 이날은

실제로 장례하지 않은 때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헤아려 보면 비직 등에게 연회 참석을 면제한 뒤에야 예의가 갖추어지는 것이며 면제하지 않는다면 실례가 됩니다.

대체로 예는 인정일 뿐이며 이치일 뿐이니 인정이 편안한 곳에 이치 또한 따르기 마련입니다.

비직 등이 비록 외진 먼 나라에 있기는 하지만 일찍이 예의를 연구하였는데 어떻게 감히 인정의 불안(不安)한 바와 이치의

불순(不順)한 것을 머리를 구부려 받들겠으며 자신의 실수를 마음에 달갑게 여겨 예의를 아는 이들이 배를 쥐고 비웃어 댈

꺼리를 두둑이 물려주겠습니까?

이는 비직 등이 구구하게 우러러 호소하면서 번거로움을 꺼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원하건데 집사께서는 당사(堂司:부서의 장관)에게 다시 보고하여 시행하는 분부를 굽혀 내리시어 비직으로 하여금

진향,진위 배신들과 같이 함께 성대한 연회의 참석을 면제하여 주시기를 이렇게 바라오니 그렇게 해 주시면

매우 다행스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표문(表文:소회(所懷)를 진술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 대개 경하(慶賀) 때에 올림.]

 

                              회게구유격탄(回揭丘遊擊坦)

  1614. 사행(使行) 중 의주에서 구유격(丘遊擊)에게 보낸 답서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주는 등의 관심을 가져 준 것에 감사하는 글이다.

 

     原文(원문)

    回揭丘遊擊坦 (회게구유격탄)

     曾因詳君飽聞大爺聲華。仰之如高山。擬過營下。謹以姓名爲贄而退。不意今者先辱華尺。寵有招命。

     증인상군포문대야성화。앙지여고산。의과영하。근이성명위지이퇴。불의금자선욕화척。총유초명

     標題先生閣下等語。因自屈其姓名。終之瀷首。有若知分有宿者然。顧我賤价。何以獲此。才躡中土。遽瞻斗標。

     표제선생각하등어。인자굴기성명。종지이돈수。유약지분유숙자연。고아천개。하이획차。재섭중토。거첨두

     得齒席末。穩承英誨。豈非慕德者之大幸。但卑職之於大爺。似與許君有異。旣往無一日之雅。此是第一相接地頭。

     득치석말。온승영회。기비모덕자지대행。단비직지어대야。사여허군유이。기왕무일일지아。차시제일상접지두

     則公禮未行之前。經用私服。猥參尊席。非惟賤分未安。無亦有損於彼此體面耶。拙見如是。竦仄。

     칙공례미행지전。경용사복。외참존석。비유천분미안。무역유손어피차체면야。졸견여시。송。   

 

 

 [回揭丘遊擊坦]     회게구유격탄     구 유격 탄에게 회답하다

 

일찍이 허군(許君)을 대야(大爺)의 명성을 실컫 글었기에 우뚝한 산처럼 우러르다가 주둔하고 있는 군영 아래로 지나갈 듯

하기에 조심스럽게 성명(姓名)을  예물로 올리고 물러나려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지금 빛나는 편지를 욕되게 먼저 보내시고

초대하는 명까지 은총을 베풀면서 선생 각하(先生閣下)란 등의 말을 표제(標題)로 하고 그로인해 스스로의 성명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린[돈수(頓首)]다는 것으로 끝을 맺어 마치 평소 친밀한 교분이 있는 분 처럼 하셨습니다.

돌아보건데 본인은 미천한 사신으로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겠습니까?

겨우 중국의 영토를 밟으면서 문득 북두칠성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겼으니 죄석의 맨 끝에라도 끼어서 안온하게 영명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어찌 덕있는 이를 사모하는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비직(卑職)이 대야에게 있어서 허균과는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이미 지난날에 하루의 교제도 없었고 이번이 바로 첫번째로 서로 접견하는 입장이니 공적인 의식을 행하기 전에 앞질러서

사복(私服) 차림으로 외람되게 높은 좌석에 참여하는 것은 미천한 신분에 편치 못할 뿐만 아니고 피차(彼此)간의 체면에도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옹졸한 견해가 이와 같으니 송구스럽습니다.

 

[대야(大爺:지위가 높은 무관을 높혀서 부르는 존칭.]

 

                                   요동여구유격서(遼東與丘遊擊書)

  1614. 구유격(丘遊擊)에게 보낸 편지로 두폭(二幅)의 시(詩)를 보내 준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시(詩) 몇 수를 답례(答禮)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遼東與丘遊擊書(요동여구유격서)

     向於江寺。獲接淸眄。樽酒之。翰墨之勤。無一不出於悃愊。賤价於此。豈平生夢寐及耶。欣幸一心。久而愈劇。

     향어강사。획접청면。준주지관。한묵지근。무일불출어곤핍。천개어차。기평생몽매급야。흔행일심。구이유

     蒙惠二幅詩什  非但情性所形  又是格律最高  足想邊上折衝之勞  可爲海外傳誦之雅。旅舘圭復。未甞不私自聳敬也。

     몽혜이폭시십  비단정성소형  우시격률최고  족상변상절충지로  가위해외전송지아。려관규부。미상불사자용경야

     某拙於吟弄  固不敢從事酬唱  而跋涉長途  尙或有感發之時  玆用百祥長奠六州等韻  成若干篇  題付歸便  奉呈門下。

     모졸어음롱  고불감종사수창  이발섭장도  상혹유감발지시  자용백상장전육주등운  성약간편  제부귀편  봉정문하

     幸老爺一賜穢眼。命覆。統惟辱照。 

     행노야일사예안。천명복부。통유욕조。                                                         

 

  [遼東與丘遊擊書]     요동여구유격서     요동에서 구 유격에게 준 글

 

지난번 강사(江寺)에서 청조한 모습을 접견하게 되였는데 정겹게 마신 술이며 힘써 지은 문장이 정성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미천한 사신이 이런 곳에서 러찌 평생 꿈속에서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기쁘고 다행하게 여기는 한마음은 오래되어도 더욱 대단합니다.

은혜롭게 주신 두 폭(幅)의 시편(詩篇)은 성정(性情)을 드러낸 것일 뿐만 아니고 또한 이는 격률(格律)이 가장 높아

변방에서의 절충(折衝)하는 수고로움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며 해외(海外)에 전해지고 칭송한 우아함이 있기에 여관에서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일찍이 개인적으로 공경심이 솟아나지 않을 수 옶습니다.

본인은 맑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고 밝은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는데는 솜씨가 없어 진실로 감히 시를 지어 주고받는 데는

마음을 다하여 일삼지 못하겠지만 먼길을 떠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간혹 감정이 발로되는 때가 있으면 이에

백상(百祥),장전(長奠), 육주(六州,등의 운(韻)을 활용하여 약간 편을 지어 돌아가는 인편에 써서 부쳐 문하(文下)에 바치오니,

노야(老爺:대야(大爺)께서 한번 비루한 안목에 대하여 빨리 피지를 만들어 장독 뚜껑을 만들도록 명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보두 욕되게 살피소서.

 

[절충(折衝:처들어오는 적의 예봉을 꺽음.]

 

                                여양교학상무상서(與楊翹鶴祥武祥書)

  1614.사행(使行)중 요동에서 명륜당(明倫堂)이라고 쓰인 현판을 탁본(拓本)하게

  해준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면서 답례로 설화지(雪花紙) 20편을 보낸다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與楊翹鶴祥武祥書 (여양교학상무상서)

     蒙許朱文公筆迹明倫堂三大字模榻一事。專仰諸大人高義。敢將雪花紙二十片奉呈門下。幸寵諒遠人敬慕先賢之誠。

     몽허주문공필적명륜당삼대자모탑일사。전앙제대인고의。감장설화지이십편봉정문하。행총량원인경모선현지성

     必踐君子重壓千金之諾。如何如何。三扇聊表寸忱。並希領照。                                     

     필천군자중압천금지낙。여하여하。삼선료표촌침。병희령조。                         

 

  [與楊翹鶴祥武祥書]     여양교학상무상서     양교, 학상, 무상에게 주는 글

 

주문공(朱文公:주희(朱熹)의 필적(筆跡)인 명륜당(明倫堂) 세 대자(大字)를 탑본(榻本)하도록 허락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여러 대인(大人)의 높은 의리를 우러르며 감히 설화지(雪花紙) 20편(片)을 바치오니 문하(門下)의 사랑으로 먼 나라의

사람들이 선현(先賢)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이해하시고 군자(君子)의 천금(千金)의 무게로 누르는 허락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세 개의 부채로 조그마한 정성을 표하오니 모두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여하무작서(與河懋灼書)

  1614. 하무작(河懋灼)에게 보낸 편지다.

  선물로 華帖帶와 문구류를 준 그에게 감사하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與河懋灼書 ( 여하무작서)

     不佞塊坐守拙。未敢奉尺書以謝前日之枉。只自赧鬱而已。不期今者忽擎華帖。帶以情饋。俱是文房寶玩。

     불녕괴좌수졸。미감봉척서이사전일지왕。지자난울이이。불기금자홀경화첩。대이정궤。구시문방보완

     海外最難得者。十襲東歸。詑諸朋遊。傳之子孫。感戢何極。五枝霜毫,一束雪藤。草草奉謝。家有豚犬。

     해외최난득자。십습동귀。이제붕유。전지자손。감집하극。오지상호,일속설등。초초봉사。가유돈견

     方學爲李學士,張東海之藝。敢將眞草各二幅幷呈案下。猥穢淸眼。統惟照亮。          

     방학위리학사,장동해지예。감장진초각이폭병정안하。외예청안。통유조량   

 

 [與河懋灼書]     여하무작서     하무작에게 준 글

 

불녕(不佞)이 홀로 앉아 옹졸한 처세술을 분복으로 알고 그대로 지키면서 감히 간단한 편지라도 올려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지 못하여 단지 스스로 부끄럽고 답답할 뿐입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지금 갑자기 훌륭한 편지를 받게 되고  정겨운 선물까지 함께 보내셨는데 모두가 문방(文房)의

보완(寶玩)으로 해외(海外)에서도 구하기 가장 어려운 물품 10벌이니 조선으로 돌아가 여러 친구들에게 으시대며 자손에게

전해 주게 될 터이니 그 감격스러움을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상호(霜毫) 5지(枝)와 설등(雪藤) 1속(束)을 허둥지둥하며 받들어 사례 드립니다.

집안에 우둔한 자식이 바야흐로 이학사(李學士)와 장동해(張東海)의 글씨를 배우고 있기에 감히 진초(眞草) 각 두 폭(幅)을

아울러 안하(案下)에 드리오니 외람되게 청초한 안목을 더럽힐 듯 합니다.

모두 살피시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위창해서원정순상계(爲昌海書院呈巡相啓)

 1616. 창해서원의 건립을 위해 주변 군현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계문이다.

 

     原文(원문) 

    爲昌海書院呈巡相啓 (위창해서원정순상계)

    主一方治務多端。所急先者興敎。邑十室忠信必有。寧獨緩於育成。肆將經始儒宮。敢先控告巡閤。

    주일방치무다단。소급선자흥교。읍십실충신필유。녕독완어육성。사장경시유궁。감선공고순합

    竊以朋友講習而相資。羲易著象。百工居肆而成事。魯叟有言。故居麗澤之有規。豈讀書肄業之無所。

    절이붕우강습이상자。희역저상。백공거사이성사。로수유언。고군거려택지유규。기독서이업지무소

    廣設庠塾於家黨。周制斯宏。各置書院於鄕閭。宋規尤大。惟我國素稱鄒魯文獻。而崇儒豈若漢唐假仁。

    광설상숙어가당。주제사굉。각치서원어향려。송규우대。유아국소칭추로문헌。이숭유기약한당가인

    內外學校之齋。宗師至聖亞聖而率育多士。大小州郡縣之境。不論無廟有廟而咸建書堂。無方不爲絃歌。

    내외학교지재。종사지성아성이솔육다사。대소주군현지경。불론무묘유묘이함건서당。무방불위현가

    有地皆興禮樂。獨此方二十里小縣。尙欠僅八九間精廬。灑掃應理正心。雖聖學可講於黌序。束縛馳驟拘名課法。

    유지개흥예악。독차방이십리소현。상흠근팔구간정려。쇄소응대궁리정심。수성학가강어횡서。속박치취구명과법

    奈實效難責於虛文。逐隊隨行。只皆旅進而旅退。專精做業。誰復如切而如磋。固居人之所嗟。亦隣邑之攸

    내실효난책어허문。축대수행。지개려진이여퇴。전정주업。수부여절이여차。고거인지소차。역린읍지유치

    生等寡聞之陋。下愚不移。取糟粕十載辛勤。始幸有志於爲學。與草木一澌盡。終懼無期於立名。

    생등과문지루。하우불이。취조박십재신근。시행유지어위학。여초목일장시진。종구무기어입명

    知皇天所以與我者非輕。常念士當希賢賢當希聖。見井不能及泉則爲棄。自謂業必要成成必要精。

    지황천소이여아자비경。상념사당희현현당희성。견정불능급천칙위기。자위업필요성성필요정

    方將責勵而求前。肯頹靡而自畫。悶難追易逝之日月。慨未了無限底工夫。斯惕念而喟歎。冀宅靜而鍛鍊。

    방장책려이구전。거긍퇴미이자화。민난추역서지일월。개미료무한저공부。사척념이위탄。기댁정이단련

    頃丁辛卯之歲。乃卜藏修之區。山屛澗帶南北東西。端宜敞開堂室。雲窓月几秋冬春夏。可以怡養心神。

    경정신묘지세。내복장수지구。산병간대남북동서。단의창개당실。운창월궤추동춘하。가이이양심신

    是爲爰得我居。方且經營厥搆。不幸海冦之有變。敗我已定之謀。仍値文星之晦光。久抱未遑之恨。年十周而長夜。

    시위원득아거。방차경영궐구。불행해구지유변。패아이정지모。잉치문성지회광。구포미황지한。년십주이장야

    常懼文將喪天。河一淸於今朝。更喜道未墜地。敢掃龜吉之舊壑。遂謀鳩工於是秋。第緣干戈困頓之殘生。

    상구문장상천。하일청어금조。경희도미추지。감소구길지구학。수모구공어시추。제연간과곤돈지잔생

    罔有土木營築之瑣力。麻絲粟米。僅出若干於奉上之餘。力役貨財。未給一分於擧贏之始。無人可使令者。

    망유토목영축지쇄력。마사속미。근출약간어봉상지여。역역화재。미급일분어거영지시。무인가사령자

    念厥終誰守護之。心勞無可奈何。計拙恐未能遂。伏惟相國閤下。望隆梁棟。名振紳簪。出入禁闥夙夜在公。

    념궐종수수호지。심로무가내하。계졸공미능수。복유상국합하。망륭량동。명진신잠。출입금달숙야재공

    補十年之闕衮。專制方面仁恕爲政。作一路之福星。粤自來棠陰。期致化覃嶺表。調兵給食。不獨盡心於備邊。

    보십년지궐곤。전제방면인서위정。작일로지복성。월자래게당음。기치화담령표。조병급식。불독진심어비변

    重道右文。抑先軫念於興學。立訓長俾告童蒙之求我。月有課程。諸郡重新鄕校之頹荒。士爭舞。是誠知所先務

    중도우문。억선진념어흥학。입훈장비고동몽지구아。월유과정。래제군중신향교지퇴황。사쟁고무。시성지소선무

    可謂作自新民。苟微懷不達於此時。寔小子自絶於仁化。己巳成則成物。君子豈獨自有餘乎。我欲立而立人。

    가위작자신민。구미회불달어차시。식소자자절어인화。기사성칙성물。군자기독자유여호。아욕입이입인

    仁者必與衆同善也。固將欲蒙士有造。寧不樂此事之成。捐俸錢大脩士居。旣有先賢之成法。推餘力特賜扶助。

    인자필여중동선야。고장욕몽사유조。영불악차사지성。연봉전대수사거。기유선현지성법。추여력특사부조

    敢望相公之洪私。於戱。宋室南遷。帝駕北滯。中原一片。盡入戰爭之。天下萬民。方坐塗炭之域。

    감망상공지홍사。어희。송실남천。제가북체。중원일편。진입전쟁지장。천하만민。방좌도탄지역

    是時所當討者軍實興起。宜不暇於斯文。然惟晦庵先生。乃建白鹿書院。必有煩民力且費用。固無疑沮之心。

    시시소당토자군실흥기。의불가어사문。연유회암선생。내건백록서원。필유번민력차비용。고무의저지심

    至於奏朝家以處措靡所不極其備。豈不以培士氣扶國脉。有急於鍊武而修戎。創學舍育人材。殊異乎私供而浪費。

    지어주조가이처조미소불극기비。기불이배사기부국맥。유급어련무이수융。창학사육인재。수이호사공이랑비

    玆往哲之至意。豈後賢之不思。伏望無或諉時之虞。克念成人之美。環下邑有都府之四屬縣。特命一日役之來攻。

    자왕철지지의。기후현지불사。복망무혹위시지우。극념성인지미。환하읍유도부지사속현。특명일일역지래공

    沿東海峙列郡之幾斛塩。無惜九牛毛之拔去。倘有僕隷之可屬。其亦銘心而是圖。則三年不成。誰歎道傍之舍。

    연동해치열군지기곡염。무석구우모지발거。당유복례지가속。기역명심이시도。칙삼년불성。수탄도방지사

    一方於變。將興稷下之風。敢不益加鞭辟之功。少答陶甄之澤。成材他日。無愧秀彦於蘓州。見用當時。

    일방어변。장흥직하지풍。감불익가편벽지공。소답도견지택。성재타일。무괴수언어어주。견용당시

    庶爲豪傑於周后。聽納乎否。惶懼惟深。                                                                     

    서위호걸어주후。청납호부。황구유심。                                                        


[爲昌海書院呈巡相啓]     위창해서원정순상계     창해서원을 위하여 순상에게 올린 계사

 

[창해서원은 뒤에 문암서원(文巖書院)으로 편액(扁額)이 내려졌다.]

[문암서원(文巖書院:경상도 봉화(奉化)에 있던 서원. 조선 광해군(光海君) 3년,1611년에 건립되고,

숙종(肅宗)20,1694년에 사액(賜額)되였는데, 이황(李滉)을 주벽(主壁)으로 조목(趙穆)을 배향(配享) 하였음.]

 

한 지역을 주장하여 다스리면서 업무가 매우 많지만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은 교육을 일으키는 것이니,

집이 열 채 가량 되는 적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인재가 있다고 하겠으니 어떻게 유독 인재

육성하는 일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곧 유궁(儒宮:서원(書院)을 지으려고 계획하고 감히 순상합하(巡相閤下:순찰사(巡察使) 에게 먼저 고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데 붕우(朋友0)가 학문을 강습(講習)하면서 서로 의뢰한다는 사실은 역경[희역(羲易)]의 괘상(卦象)에

나타나 있고 모든 공인(工人)들은 가게에서 생활하며 일을 완성한다고 한 것은 노(魯)나라 공자(孔子)가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기거하면서 도와가며 학문을 닦는 규정이 있는데 어찌 글을 읽고 학업을 익히는 장소가 없겠습니까?

집(家)에는 상(庠:학교)을 당(黨)에는 숙(塾:글방)을 널리 설치했던 것은 주(周)나라의 교율 제도가 굉장했던 것이고,

향(鄕)과 여(閭)에다 각기 서원(書院)을 설치한 것은 송(宋)나라의 규모가 더욱 컸습니다.

우리아라는 본래 추로(鄒魯)의 문헌(文獻)이 갖추어져서 유교를 숭상한다고 일컬어졌으니 어찌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인정(仁政)을 가장하여 내관(內館),외관(外館)과 학교(學校)의 재(齋)를 설치했던 것과 같겠습니까?

지성(至聖:孔子)과 아성[亞聖: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을 종사(宗師)로 하며 많은 선비를 거느리고

교육을 시키므로 크고 작은 주군현(州郡縣)의 지역에 문묘(文廟)가 있고 없고를 논하지 아니하고 모두 서당(書堂)을 건립하여

어느 지역이나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는 등 학문에 힘쓰지 않음이 없고 어느 것이나 모두 예악(禮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지역만은 20리쯤 되는 작은 고을에 아직까지 8,9간(間)의 정려(精廬)가 없습니다.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답하고 잡견하는 데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와 성학(聖學:성인의 진솔한 학문.)

이라도 횡(黌:글방)과 서(序)에서 강론 할 수는 있습니다만 달음박질치듯 하는 진도에 속박(束縛)되고 형식적인 과정과 규칙에

구애되니 실질적인 성과를 허황된 문자만을 익힌 데서 책인을 지우기 어려운 대야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하는데로 따라서 행하게 되니 단지 모두가 아무런 식견도 지조도 없이 함께 나아가도 함께 물러나는데,

오로지 정밀하게 학업에 힘쓰기를 누가 다시 절차탁마 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은 진실로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한탄하는 바이며 또한 이웃 고을에 대하여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생(生)들은 문견이 적고 비루하며 하등의 우준(愚蠢)으로 습관에 따라 이동되지 않는 자질로 고된 일을 맡아 부지런히 힘쓰며

찌꺼기를 취하여다 비로소 다행스럽게 학문하는데 뜻을 두기는 하였지만 초목(草木)과 같이 사라질 신세로 마침내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할 기약이 없음을 두렵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일고 항상 선비는 의당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의당

성인(聖人)이 되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우물을 파다가 샘에 이를 수 없게 되면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생걱하기를 학업은 반드시 성취를 요하며 성취는 반드시 정밀을 요합니다.

바야흐로 곧장 독려를 하면서 전진하기를 구해야 하는데 어찌 퇴폐하는 것을 기꺼이 여기면서 스스로 계획을 하겠습니까?

쉽게 흘러가는 세월을 따라가기 어려움을 민망하게 여기며 한없는 공부를 마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이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탄식하며 조용한 집에서 단련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난 신묘년(辛卯年 선조24, 1591)에야 공부할 만한 구역을 골라 정했는데 남북으로는 산이 병풍처럼 둘려있고,

동서로는 시냇물이 띠처럼 흐르고 있으니 당실(堂室)을 넓게 지어 구름으로 창을 내고 달빛으로 괘(几)를 삼아,

봄,여름,가을,겨울철마다 심신(心身)을 편안히 기를 수 있을 것이기에 이곳에다 나의 거처를 얻었다고 여기고 바야흐로

집을 지으려고 경영하다가 불행하게도 왜적이 침입하는 변고가 있게 되어 이미 정해졌던 나의 계획이 무너져 버리고 그로인해

문창성(文昌星)이 빛을 감추었기에 오래도록 겨를하지 못한 한을 품은 지 햇수로는 10년 동안 긴 암흑이 계속 되었으므로,

항상 문운(文運)이 장차 상실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은하수가 새로 맑아져 다시금 유교가 땅에 떨어지지 않았음을 기쁘게 여기며 감히 길지(吉地)라고

점을 쳐두었던 옛 골짜기를 청소하고 마침내 이해 가을 목수를 모아 집을 짓기로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고 난 곤궁한 남은 생명들이 토목 역사를 할 만한 힘마저 없고 마직물이며 곡식도 겨우 부모(父母)를

봉양하고 남은 데서 약간을 덜어내게 되었으므로 역사에 드는 재물은 한푼도 처음부터 사치스러운데는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심부름을 시킬만한 사람도 옶으니 그 마지막을 생각하며 누가 그곳을 지키며 보호 하겠습니까?

걱정이 되지만 어떻게 할 수 없고 계책이 졸렬하니 아마도 완수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상국합하(相國閤下)께서는 인망(人望)이 기둥과 대들보보다 높고 명성은 고관들 가운데 떨치며 대궐에 드나들면서 밤낮으로

공소(公所)에서 10년 동안 임금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한 지역을 오로지 하여 통제하면서는 인애(仁愛)와 용서로 행정을 펴서

한 지방의 복성(福星)이 되셨습니다.

순찰 임무를 띠고 오셔서 팥배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교화가 영남의 외곽 지역까지 미치기를 기약하고 군사조발과 식량수등 

변방 방어 대비에만 유독 마음을 다할 뿐만이 아니였으며 유교를 소중히 여기고 문학을 숭상하여 먼저 학교를 일으키는데

대하여 걱정하고 훈장(訓長)을 세워 그로 하여금 어린아이들이 배울곳이 있음을 알게 하여 달마다 과정(課程)을 두게 하고,

여러 군(郡)의 무너지고 황폐해진 향교(鄕校)를 중수하여 새롭게 하니 선비들이 다투어 고무(鼓舞)되였는데 이는 참으로

먼저 힘쓸 바를 안 것이니 백성을 가까이 하는 데서 진작이 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은미한 회포를 이런 시기에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소자(小子)가 스스로 인화(仁化)에서 단절되고 맙니다.

자신이 이미 성취되였으면 사물을 성취시켜야 하는 법인데 군자(君子)가 어찌 혼자서만 스스로 여유를 갖갰습니까?

내가 서려고 하면 남을 먼저 세워야 하니 인자(仁者)는 반드시 여러 사람과 함께 선행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장차 몽매한 선비를 성취시키려고 하면서 어찌 이 일을 이루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녹봉에서 얼마를 떼어내 선비들이 공부하는 곳을 크게 수리하도록 하는 선현(先賢)들이 만들어 놓은 법이 이미 있으니,

남은 재력을 미루어 특별히 부조(扶助)를 내려주시는 상공(相公)의 넓으신 아량을 감히 바랍니다.

아아!

송(宋)나라 조정이 양자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길 적에 황제가 탄 수레는 북쪽에 머물러 있던 형편으로 중국 전체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고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바야흐로 도탄(塗炭)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당연히 토의되어야 할 바는 군사를 실제로 흥기(興起)시키는 것이며 사문(斯文:유교(儒敎)에 대해서는

언급할 겨를이 없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회암선생(晦庵先生:주희(朱熹)은 바로 백록서원(白鹿書院)을 건립하였으니 반드시 백성의 재력을 번거롭게하고

또 비용을 들였지만 진실로 의심하거나 저지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 아뢰어 조처하는데 이르러서는 그 준비를 극대화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그것이 어찌 선비의 기백을 북돋우고

국가의 면맥을 부지하는 것이 무사들을 훈련시켜 군대를 가다듬는 것보다 시급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사(學舍)를 창건하여 인재를 양육하는 것은 사사로이 제공하고 낭비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이는 지난날 철인(哲人)들의 지극한 뜻을 반영한 것이니 어찌 후세의 현인(賢人)들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데,

혹시라도 시기적으로 걱정스러움을 핑계대지 마시고 남의 아름다움을 성취시키는 일을 잘 생각하셔서 하읍(下邑)에 둘려있는 

네 고을의 딸린 도부(都府:고회(都會)에다 특별히 1일간 와서 부역을 하도록 명하시고 동해(東海) 연안에 대치하여 있는 

여러 군의 몇 곡(斛)쯤 되는 소금을 어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정도의 작은 분량이라도 내놓게 하고 혹시라도 노복[복례(僕隷)]

으로 소속시킬 만한 대상이 있을 경우 그것을 명심(銘心)하여 도모한다면 길가에 짓는 집은 3년이 되어도 완성이 않된다고

누가 탄식 하겠습니까?

한 지역이 놀랍게 변화하여 장차 직하(稷下)의 기풍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더욱 채칙질해서 공부를 더하여 조금이라도 인재를 양성하는 은택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재목감이 이루어진 훗날에는 뛰어난 선비들이 소주(蘇州)의 학자들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당시에 기용이 된다면 거의

주(周)나라 때의 호걸(豪傑)처럼 될 터이니,

이 건의를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않으시렵니까?

두려운 마음 대단합니다.

 

[정려(精廬:학문을 닦거나 책을 읽는 곳. 학사(學舍), 학교(學校), 서재(書齋), 정사(精舍).]

[직하(稷下:제(齊)나라의 성하(城下).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치현(臨淄縣)의 북쪽.

          제나라 선왕(宣王)이 학자를 잘 대우하였으므로 한때 많은 학자가 이곳에 모였었음.]

 

[]   책

 

 

                                                             문강목(問綱目)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爲治之道)으로의 강(綱)과 목(目)이라는 문제에 대해 쓴 대책문이다.

  강(綱)과 목(目)을 본(本과) 말(末)로 설명하고 있다.

  군주(君主)의 마음을 바르게 세우는 것을 정치를 행하는 기본으로 삼고 이를 모든 정사(政事)에

  적용 시킨다면 선왕(先王)의 훌륭한 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原文(원문)

    問綱目 (문강목)

    對。於戱。聖人新作。萬物咸覩。轉移之機。式在今日。而執事先生特擧爲治之道。以綱目爲問目。下詢承學。

    대。어희。성인신작。만물함도。전이지기。식재금일。이집사선생특거위치지도。이강목위문목。하순승학

    噫愚豈賢於執事者哉。其所計議。亦豈有補於聖明之治者哉。然而受人之徽言則有之矣。朱夫子曰天下之事。

    희우기현어집사자재。기소계의。역기유보어성명지치자재。연이수인지휘언칙유지의。주부자왈천하지사

    有本有末。正其本則事無不擧而治無不臻。愚請衍義而爲之說曰。凡爲天下國家有大道。綱與目而已。

    유본유말。정기본칙사무불거이치무불진。우청연의이위지설왈。범위천하국가유대도。강여목이이

    盖根柢於一心而爲萬事之體。經緯乎百度而爲一心之用。斯乃綱目之所以爲綱目。而以之而出治。以之而致治

    개근저어일심이위만사지체。경위호백도이위일심지용。사내강목지소이위강목。이이지이출치。이지이치치

    顧不重且大歟。是以古之爲治者。未甞不正其綱。亦未甞不張其目。體立於一心而用著於百度。如絲有紀而若裘領。

    고불중차대여。시이고지위치자。미상불정기강。역미상불장기목。체립어일심이용저어백도。여사유기이약구설령

    有是哉綱目之有關於國家也。苟或一擧一廢。而未免偏廢之失。雖曰兼有而竟蔑兼有之效。

    유시재강목지유관어국가야。구혹일거일폐。이미면편폐지실。수왈겸유이경멸겸유지효

    則是皆綱其所綱目其所目耳。豈帝王之所謂綱所謂目哉。而况綱旣解弛。目隨以墜。委靡頹墮。莫或自振者。

    칙시개강기소강목기소목이。기제왕지소위강소위목재。이황강기해이。목수이추。위미퇴타。막혹자진자

    雖欲爲治。其可得乎。嗚呼。事有本末。勢有緩急。知所先後。可以更張。爲人君者。苟能先正其心。以立出治之本。

    수욕위치。기가득호。오호。사유본말。세유완급。지소선후。가이경장。위인군자。구능선정기심。이입출치지본

    措諸政事。以廣致治之用。則綱之所擧。目無不張。不患治之不興也。噫正心術以立綱。先正之言。豈欺我哉。

    조제정사。이광치치지용。칙강지소거。목무불장。불환치지불흥야。희정심술이립강。선정지언。기기아재

    若稽大猷。放勳欽明。重華協帝。而峻德敦叙。正釐績煕。惟綱與目。惟帝時克。三革互尙。損益隨時。曰忠曰質。

    약계대유。방훈흠명。중화협제。이준덕돈서。정리적희。유강여목。유제시극。삼혁호상。손익수시。왈충왈질

    政淳俗美。目之所張。綱可知矣。規模於漢。法令乎唐。而綱失其綱。目非其目。則其正其張。愚未知信。禮樂爲紀。

    정순속미。목지소장。강가지의。규모어한。법령호당。이강실기강。목비기목。칙기정기장。우미지신。예악위기

    宋實從周  綱目兼擧  果有可稱  而正心出治  槩乎未聞。則無惑乎治不古若也。噫夷之有君。不如夏亡。而天醜其德。

    송실종주  강목겸거  과유가칭  이정심출치  개호미문。칙무혹호치불고약야。희이지유군。불여하망。이천추기덕

    旋致滅亡  則愚不欲擧夷狄之道  加之先王之上也  禮義我邦  文物今周。立經陳紀。吾學三代。漢綱旣正。唐目亦張。

    선치멸망  칙우불욕거이적지도  가지선왕지상야  예의아방  문물금주。입경진기。오학삼대。한강기정。당목역장

    基鞏盤石。治駕姚姒。於千萬年。其亦無疆。而不幸干戈有變。一敗塗地。倫攸斁。百弊鱗生。其陵夷之勢。

    기공반석。치가요사。어천만년。기역무강。이불행간과유변。일패도지。이륜유두。백폐린생。기릉이지세

    衰亂之兆。反有甚於趙宋。所可道也。言之痛也。嗚呼。纘文有武。繼堯戴舜。孝著善述。功期將多。撥亂興衰。

    쇠란지조。반유심어조송。소가도야。언지통야。오호。찬문유무。계요대순。효저선술。공기장다。발란흥쇠

    無遺策。更張改紀。千載一時。則政化惟新。衆目所拭。而抑未知所先者何事。所後者何事。其綱與目。

    산무유책。경장개기。천재일시。칙정화유신。중목소식。이억미지소선자하사。소후자하사。기강여목

    果唐虞乎果三代乎。賤生何知。欲質亦久。如執事。宜如何奮然宜如何講定也。敢因己能之問。而試罄愚者之慮。

    과당우호과삼대호。천생하지。욕질역구。여집사。의여하분연의여하강정야。감인기능지문。이시경우자지려

    曰進賢退邪。莫急於今日。而愚以爲未急。輕徭薄賦。莫急於今日。而愚以爲未急。脩內攘外。莫急於今日。

    왈진현퇴사。막급어금일。이우이위미급。경요박부。막급어금일。이우이위미급。수내양외。막급어금일

    而愚以爲未急。弭灾恤民。莫急於今日。而愚以爲未急。愚之所急。又有大於此者。人主一心。實萬化之根本也。

    이우이위미급。미재휼민。막급어금일。이우이위미급。우지소급。우유대어차자。인주일심。실만화지근본야

    心得其正。然後乃可以進賢退邪。乃可以輕徭薄賦。彼修內攘外。弭灾恤民。特措置中一二事耳。噫雍煕於變。

    심득기정。연후내가이진현퇴사。내가이경요박부。피수내양외。미재휼민。특조치중일이사이。희옹희어변

    莫盛於堯舜。而實源於允恭濬哲之心。則精一執中之法。豈聖明之所可緩乎。誠能以堯舜之心。傳堯舜之法。

    막성어요순。이실원어윤공준철지심。칙정일집중지법。기성명지소가완호。성능이요순지심。전요순지법

    先澄萬化之源。以立萬事之本。則三綱振而九法叙。禮樂興而刑政擧。治道畢張。國勢日。尙何綱之不正。

    선징만화지원。이입만사지본。칙삼강진이구법서。예악흥이형정거。치도필장。국세일。상하강지불정

    亦何目之不擧哉。朱晦庵所謂以心術爲綱。以政事爲目者。亶其然乎。嗚呼。立治之綱。雖在於正心。格君之非。

    역하목지불거재。주회암소위이심술위강。이정사위목자。단기연호。오호。입치지강。수재어정심。격군지비

    責有所歸。愚未知今日之大人。果能盡格君之責否乎。噫無人乎我王之側則已矣已矣。如其有知。何不自勉。

    책유소귀。우미지금일지대인。과능진격군지책부호。희무인호아왕지측칙이의이의。여기유지。하불자면

    愚非識務之傑。而僭有陳列。有若能言者然。狂則狂矣。執事他日未必不爲格君之大人。則亦惟留念於萬一。謹對。

    우비식무지걸。이참유진열。유약능언자연。광칙광의。집사타일미필불위격군지대인。칙역유유념어만일。근대

                                                                                                                       

 

 [問綱目]     강령과 조목에 대한 질문

 

대답합니다.

아아!

성인(聖人)이 새로 일어남에 만물이 모두 보게 되니 전보다 다른 방향으로 옮겨볼 기회가 바로 오늘날에 달렸있습니다.

그런데 집사선생(執事先生)이 특별히 정치하는 도리를 거론하며 강령과 조목을 질문 제목으로 삼아 학문을 계승하는

자에게 물으셨으니 아! 어리석은 제가 어찌 집사보다 현명 하겠으며 그 계획하고 의론하는 것 역시 어찌 성명(聖明)의

정치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말은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부자(朱夫子:주희(朱熹)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근본이 있고 곁가지가 있으니 그 근본이 올바르면 일은 거행되지 않음이

없고 정치는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어리석은 제가 뜻을 부연하여 말씀 드리기를 청원합니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큰 도리가 있으니 강령과 조목이 있은 뿐입니다.

그래서 강령은 대체로 한 마음의 근본이면서 만 가지 일의 본체가 되며 조목은 온갖 제도의 날줄과 씨줄 역할로 한 마음의

작용이 되니 이것이 바로 강목이 강령과 조목이 되는 까닭이며 그것으로서 정치를 창출하며 그것으로서 이상 정치를

이루게 되니 돌아보건데 귀중하고 거대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날에 청치를 하는이는 일찍이 그 강령을 자로잡지 않은 이가없고 또한 일찍이 그 조목을 펼치지 않은이가없습니다

그래서 본체가 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작용한 모든 제도가 드러남이 마치 실에는 실마리가 있는 것 같고 갓옷에는 옷깃이

나란히 있는 것과 같으니 강령과 조목이 국가에 관계가 있음이 이와 같습니다.

진실로 간혹 하나는 거행이 되고 하나는 폐기되면 치우치게 폐기된 실수를 모면하지 못하니 아무리 겸손해서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마침내는 겸해서 소유한 효과가 없어지는데 이는 모두 그 강령으로 삼을 대상을 강령으로 여기며 그 조목으로 삼을

대상을 조목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것이 어찌제왕(帝王)의 이른 바 강령이며 이른 바 조목이겠습니까?

더구나 강령이 이미 풀어지고 느슨해지면 조목은 따라서 추락되는 겠입니다.

쇠약하고 퇴폐하여 혹시 스스로진작할 수 없는 자가 아무리 다스리려고 한들 다스려 질 수 있겠습니까?

아아!! 일에는 근본과 곁가지가 있으며 형세에는 늦추어야 할 것과 서둘러야 할 것이 있으니 어떤 것을 먼저하고

어떤 것을 나중에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 잘못된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인군(人君)이 된 자가 진실로 먼저 그 마음을 바로잡아 정치를 창출할 근본을 세우고 모든 정사(政事)를 가져다 이상정치를

넓히도록 활용한다면 강령을 들어올리는 곳에 조목이 펼쳐지지 않음이 없을 터이니 정치가 진작되지 않음을 걱정할것이없습다.

아! 심술(心術)을 올바르게 하여 강령을 세워야 한다는 선정(先正)의 말씀이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큰 계책을 상고할 것 같으면 요(堯)임금의 덕은 자신을 조신하고 이치에 벍으며 ,순(舜)임금의 덕은 요임금의 덕에 걸맞아

큰 덕을 밝히는 것이며 구족(九族)에 후하게 베푸는 것이며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며 모든 업적을 빛나게 하는 것은 오직 강령과

조목이니 오직 요임금만이 이를 잘 하셨습니다.

하(夏),은(殷),주(周) 세 나라가 바뀌면서 서로 숭상하며 때를 따라 덜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충성[충(忠)]과

존질[질(質)]이였으며 정치는 순박하고 풍속은 아름다워 조목이 펼쳐진 데서 강령은 알 수 있는 것이니,

한(漢)나라의 규모(規模)와 당(唐)나라의 법령(法令)입니다.

하지만 강령이 그 강령의 역할을 상실하고 조목이 그 조목의 본질이 아니라면 그 바로잡고 그 펼치는데 대하여는 재난을 막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급한 오늘날 어리석은 자가 믿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악(禮樂)을 법도로 삼은 것은 송(宋)나라가 실제로 주(周)나라를 따랐는데 강령과 조목을 겸해서 거행하였다고 과연 일컬을

만한 것은 있지만 마음을 바르게 하여 정치를 창출했다는 것은 대체로 듣지 못하였으니 정치가 옛날 같지 않았다는

의혹이 없었겠습니까?

아! 오랑캐에게 임금이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으나 하늘이 그 덕을 더럽게 여겨 곧 멸망하게 하였고,

어리석은 자는 이적(夷狄)의 방법을 거론하여 성왕(先王)의 위에다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의(禮義)는 우리나라의 문물(文物)인데 지금은 두루 경(經)이 세워지고 기(紀)가 베풀어져 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의

정치와 교화를 배우려 하면서 한(漢)나라의 미비한 강령은 이미 바로 잡았고 ,당(唐)나라의 미비한 조목은 역시 펼쳐져 기반의

튼튼하기가 반석(盤石)같고 다스리는 기준도 순임금과 우임금으로 하여 천만년토록 한이 없게 하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전쟁의 변고가 있어 한번 패하자 여지없이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되어 사란이 지켜야 할 인륜 도덕도 무너지고 온갖 폐단이

겹겹이 생겨나 그점차로 쇠퇴해진 형세와 쇠약하고 어지러워진 조짐은 도리오 조씨(趙氏)의 송(宋)나라 보다 심하여

말할 바가 있어도 말을 하려면 가슴이 아픔니다.

아아!  문왕(文王)을 이은 무왕(武王)은 요임금을 계승하고 순임금을 떠받들어 효도는 선대(先代)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데서

드러나고 공은 뛰어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난리를 헤치거 쇠퇴함을 일으키는 계책은 빈틈이 없으니 잘못된 제도를 바꾸고 기강을 고쳐야 할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시기이기에 정치와 교화를 새롭게 하리라는 기대도 여러 사람은 눈을 닦으며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기는 합니다만 우선하는 것이 어떤 일이며 나중 하는 것이 어떤 일입니까?

그리고 그강령과 조목이 과연 요임금과 순임금 같으며 과연 삼대와 같습니까?

미천한 생(生)이 무었을 알겠습니까마는 질정(質正)하고 싶은 지가 또한 오래 되였습니다.

더구나 집사(執事) 같으면 어떻게 하여야 적합하겠으며 강정(講定)하기를 어떻게 하여야 적합하겠습니까?

감히 묻기를 너무 잘하는 것으로 인해서 시험삼아 어리석은 자의 생각을 모두 털어 놓으려 합니다.

현명한 이를 진출기키고 간사한 자를 물러나게 하는 것은 오늘날 보다 더 시금함이 없습니다만 어리석은 자는 시급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어리석은 자가 시급하게 여기는 것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실제로 모든 교화의 금본입니다.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은 연후에야 그제야 현명한 이를 지출시키고 간사한 자는 물리차며 그래야만 요역도 가볍게 하며

부세도 박하게 할 수 있으니 저 내치(內治)를 가다듬어 외적을 물리치며 재이(災異)를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것들은,

특별히 조치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한 두 가지 일일뿐 입니다.

아!  변화하여 화목을 이루는 것이 요임금,숨임금 때보다 더 융성함이 없지만 실제적인 근원은 참으로 공경하고 뛰어나게

명철한 마음에서이니 마음이 정밀하고 전일하여 중도(中道)를 잡는 법을 성명(聖明)께서 어떻게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요임금과 숨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요임금과 순임금의 법을 전하려면 먼저 모든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여,

모든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삼강(三綱)은 진작이 되고 구법(九法)은 펴지며 예악(禮樂)은 진흥이 되고 형정(刑政)은 거행이 되어

다스리는 도리는 모두 펼쳐지고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강하게 될 터인데 오히려 어떤 강령인들 바르지 않겠으며

또한 어떨 조목인들 거행되지 않겠습니까?

주희암이 이른 바 심술(心術)로서 강령을 삼고 정사(政事)로서 조목을 삼는 다고 한 것이 진실로 그런 것입니다.

아아!  정치의 강령을 세우는 것이 비록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어라석은 자가 모르기는 합니다만 오늘날 대인(大人)이 과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 우리 임금의 곁에 인재가 없다면 그만이고 그만이겠으나 만일 그것을 알고 있다면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는 시무(時務)를 아는 걸출한 사람도 아닙니다만 참람되게 열거하여 진달하는 것이 마치 말을 잘하는 사람인체 하니

미치광이 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었습니다.

집사가 뒷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인이 되지 않는다고는 기필하지 못할 터이니 역시 만에 하나라도 유념(留念)해 주십시오

삼가 대답합니다.

 

[구법(九法:구주(九疇). 주시대(周時代)에 대사마(大司馬)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준수(遵守)해야 할 아홉가지 법칙.

         곧, 제기봉국(制畿封國),설의변위(設儀辨位),진현흥공(進賢興功),건목입감(建牧立監),제군힐금(制軍詰禁),

              시공분직(施貢分職),간계향민(簡稽鄕民),균수평칙(均守平則),비소사대(比小四大).]

 

[]  

 

                        상월천선생서(上月川先生書)

  1597. 스승인 趙穆에게 보낸 편지로‚ 조용히 선생을 모시고

  선현(先賢)들이 소요하던 곳을 둘러보려 하였는데

  여러 어른들이 함께 자리하는 바람에 원래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上月川先生書(상월천선생서)

     伏奉下書。審氣體不調。驚慮。今日淸吟之會。非有他意。竊欲陪杖屨。從容遊詠於先正逍遙之地。仍奉籃輿。

     복봉하서。심기체불조。경려。금일청음지회。비유타의。절욕배장구。종용유영어선정소요지지。잉봉남여

     暫稅于賤生之棲。以爲中淸平生莫大之幸。而忽此來使。出於料慮之表。無任悵缺。諸尊丈已將臨席。勢難進退。

     잠세우천생지서。이위중청평생막대지행。이홀차래사。출어요려지표。무임창결。제존장이장임석。세난진퇴

     而中淸有何興味於徒山徒水間耶。伏惟下察。                                                          

     이중청유하흥미어도산도수간야。복유하찰。                                   

 

[上月川先生書]  정유(丁酉)     월천선생에게 올리는 글

 

 삼가 하서(下書:웃어른이 보낸 글월)를 받고서야 기체(氣體)가 불편하신 줄 일게 되어 놀랍고 염려가 됩니다.

오늘 청아하게글을 읊는 모인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옵고 가만히 성생님을 모시고 선정(先正:퇴계선생)께서,

소풍하시던 곳에서 조용히 글을 읊으며 노닐다가 남여(濫輿:작은 가마)로 선생님을 잠시 천생(賤生)의 처소로 모시는 것이

중청(中淸)에게는 평생토록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하인이 올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섭섭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여러 존장(尊丈)께서는 이미 곧 좌석에 나오셨을 터인데 형세로 보아 그대로 진행하기도 물리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청이 한갓 산수(山水)의 경치만 구경하는 것이 무슨 흥미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데 살펴주소서.

  

                 답한강선생서(答寒岡先生書)

   한강정구(寒岡鄭逑에게 보낸 답지이다.

   죄를 입어 파면 당했을 때의 자신의 심정과 상황‚

   그 후의 경과 등을 기록하고 있다

 

     原文(원문)

    答寒岡先生書(답한강선생서)

    日者因縣人歸上簡。想今已獲關聽矣。伏承下書。仍審浴還體履神相萬福。別紙下敎。竊伏感戢。無以仰喩。

    일자인현인귀상간。상금이획관청의。복승하서。잉심욕환체리신상만복。별지하교。절복감집。무이앙유

    中淸被參之初。怯於霜威。謬慮以爲査命方下。未敢自必其無罪。虛實其覈。輕重其處。固在於黜陟我者。

    중청피참지초。겁어상위。류려이위사명방하。미감자필기무죄。허실기핵。경중기처。고재어출척아자

    當是時只爲待罪人。非如去就由己者之比。悻悻解却印符。委置空縣而歸。恐爲失中又失。姑呈覲由。退伏家鄕。

    당시시지위대죄인。비여거취유기자지비。행행해각인부。위치공현이귀。공위실중우실。고정근유。퇴복가향

    旣査之後。謂有罪罪之則服其罪。否則呈病自免如例。亦或從容。以公以私。未爲不宜矣。及到家。還其下人。

    기사지후。위유죄죄지칙복기죄。부칙정병자면여례。역혹종용。이공이사。미위불의의。급도가。환기하인

    則乃曰印符在此。不敢退去。我而渠亦。卒未免三四人之留。已是未安之甚。而覈啓之稽延至閱兩箇月。

    칙내왈인부재차。불감퇴거이거역강。졸미면삼사인지류。이시미안지심。이핵계지계연지열량개월

    又得洛下書。因該曹啓禀。有因任之命。而以未査還止云。自聞此言。尤極驚悚。於是思之則雖服棄官之律。

    우득락하서。인해조계품。유인임지명。이이미사환지운。자문차언。우극경송。어시사지칙수복기관지율

    不如及今圖免之爲愈也。故再三冒懇于舊使。獲蒙啓處。畢竟贓與擅棄之典。未必不並議於一身。而得一前字於新邑。

    불여급금도면지위유야。고재삼모간우구사。획몽계처。필경장여천기지전。미필불병의어일신。이득일전자어신읍

    已印符之當還。豈非中淸不幸中至幸耶。此時齒舌固不可一一動念。而印符之至今未還。果已未妥於自家心。

    이결인부지당환。기비중청불행중지행야。차시치설고불가일일동념。이인부지지금미환。과이미타어자가심

    豈無外間之紛紜。然實非昏然不覺。亦非貪戀一縣官者也。而正坐慮事生踈。欲周未周。私意起而反惑之耳。

    기무외간지분운。연실비혼연불각。역비탐연일현관자야。이정좌려사생소。욕주미주。사의기이반혹지이

    彼傍觀者其肯爲我恕否。不獨江右爲然。此間亦有云者。李友之示。特出於相愛之情。而地遠便稀。其亦晩矣。

    피방관자기긍위아서부。불독강우위연。차간역유운자。이우지시。특출어상애지정。이지원편희。기역만의

    今則旣在啓罷之中。而鄕所公兄尙靳捧去。深可恠也。自餘多少。只在早晩門下進拜之日。姑此不備。

    금칙기재계파지중。이향소공형상근봉거。심가괴야。자여다소。지재조만문하진배지일。고차불비

                                                                                                                        

 

  [答寒岡先生書]   답한강선생서      한강선생에게 올린 답글 

 

며칠 전에 고을 사람들이 돌아가는 편에 편지를 올렸는데 지금쯤은 이미 받아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삼가 하서(下書)를 받고서야 온천에서 돌아오셨음을 알았으며 체후(體候)도 신의 도움으로 만복(萬福)하십니까?

별지(別紙)로 가르침을 주셨는데 삼가 감격스러움을 우러러 비유할 수 없습니다.

중청(中淸)은 대간의 탄핵을 받을 대상에 끼인 초기에 서릿발같은 위엄에 질려 잘못생각하기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바야흐로

떨어졌으며 또 스스로 죄가 없다는 것도 감히 기필하지 못할 입장이니 허우ㅏ와 진실을 조사하여 경중(輕重)으로 조처하는 것은

나를 출척(黜陟)하는데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단지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같이 되여 거취(去就)를 자가 소신 대로 하는 사람의 행동과 비견 되지 않을 정도로

발끈 화를 내어 인부(印符)를 풀어 빈 고을에다 버려두고 동아와 버렸으니 아마도 실수한 가운데 또 실수를 한 듯합니다.

우성 근친(覲親) 휴가를 상신하고 고향으로 물러가 엎드리고 있다가 조사가 끝난 뒤에 죄가 있다고 여겨 죄를 주면 그 죄를

인정하고 죄가 없다고 인정되면 병으로 자신이 사면(辭免) 상신 하기를 전례대로 하며 또한 조용히 공무(公務)나 사무(私務)를

처리하여도 적합하지 않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하여 그 하인을 되돌려 보내려하니 그의 말이 인부(印符)가 여기에 있으므로 감히 갈 수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내가 억지로 보내려하면 저 또한 억지로 가지 않겠다고 하여 마침내는 3,4명이 머물게 됨을 모면하지 못하게 되였으니

이는 벌써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를 아뢰는 일이 두어 달 동안이나 지연되였으며 또 서울에서 온 편지를 보았더니 해조(該曹)의 계품(啓稟)을

그대로 유임(留任)시키라는 명령이 있었고 조사하지 않은 부분은 도로 중지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이 말을 듣고 부터는 더욱 놀랍고 송구스러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하여 보니 비록 고을을 버려둔 형률(刑律)은 자복을 한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모면하기를 도모하는 것이

났겠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 세 번 그전 사자(使者)에게 모람되게 간청하여 계달할 곳은 알게 되였습니다만 필경에는 장(臟)과 고을을

멋대로 버려둔 법을 한몸에 아울러 논의하지 않는다고 기필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신안(新安) 고을에 대해서는 전임(前任)이라는 한 전(前)자를 얻게 되어 인부(印符)를 되돌려 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이미 결정하였으니 어찌 중청(中淸)에게는 불행한 가운데 지극한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때의 비방하는 말들은 어금니와 입술을 깨물어 진실로 하나하나 생각을 동요하게 할 수는 없었으나 인부를 지금까지 돌려

보내지 않으니 정말로 벌써 자신의 마음에도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어찌 외간(外間)의 떠들썩한 말들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사리에 어두워 깨닫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한 한고을의 수령 자리를 탐내고 연연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꼿꼿이 앉았노라니 일의 익숙하지 못함이 염려되며 두루 해보려고 하다가 두루 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오 미혹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 곁에서 구경하는 자들은 기꺼이 나를 용서하려고 하겠습니까?

유독 경상우도(慶尙右道)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곳에도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우(李友)가 보내 준 편지는 특별히 서로 아끼는 인정에서 나온 것인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인편이 드물어 그렇게 늦은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파면 하도록 계달하는 가움데 있고 향소(鄕所)의 공형(公兄)도 아직 받들고 가는 것을 아끼고 있으니 매우 이상하게

여길 만 합니다.

나머지 많고적은 일들은 단지 조만(早晩)간 문하(門下)에 진배(進拜)하는 날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이렇게 갖추지 못합니다.   

 

[출척(黜陟: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씀.] 

[공형(公兄:각 고을의 호장(戶長), 이방(吏房),수형리(首刑吏),의 세 관속(官屬). 삼공형(三公兄).]

 

                여정우복경임경세서(與鄭愚伏景任-經世書)

 정경세(鄭經世:1563-1633)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중청(金中淸)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모의 상중에 있었다.

  이때 출사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게 되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그에게 문의하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與鄭愚伏景任經世書(여정우복경임경세서)

    苫土殘喘。至今不死。乂値孔棘之變。尤痛切不能堪也。比日春陰。伏惟忠勤有相。台候萬福。哀賤之疾。經年沉痼。

    점토잔천。지금불사。예치공극지변。우통절불능감야。비일춘음。복유충근유상。태후만복。애천지질。경년침

    危死者數矣。近來日漸深重。待盡朝夕。當此之際。有起復之命。痛勢如許。跬步難移。憂窘悶蹙。罔知所措。

    위사자수의。근래일점심중。대진조석。당차지제。유기부지명。통세여허。규보난이。우군민축。망지소조

    今方爇艾試藥。如得少愈。則當力疾登途。而見效無期。尤用憫歎。仍竊仰禀。自古起復之人。

    금방설애시약。여득소유。칙당력질등도。이견효무기。우용민탄。잉절앙품。자고기부지인

    須身係安危爲國家重輕者。方膺是命。不然則或以扈從而赴行在。或因復讐而從金革。皆於君親之義。猶有可諉者。

    수신계안위위국가중경자。방응시명。불연칙혹이호종이부행재。혹인부수이종금혁。개어군친지의。유유가위자

    昔者魯公伯禽有爲而爲之。亦此意也。孔子曰不集人之親。亦不可奪親也。釋之者曰雖君有命而不忍違離喪次。

    석자노공백금유위이위지。역차의야。공자왈불집인지친。역불가탈친야。석지자왈수군유명이불인위리상차

    又曰今以三年之喪。從伯禽例以用兵甚非。自古奪情之擧。如是其重難。今日朝庭入啓起復之意。不以扈從爲言。

    우왈금이삼년지상。종백금례이용병심비。자고탈정지거。여시기중난。금일조정입계기부지의。불이호종위언

    旣無都堂擬議。又無兩司署經。禮曹依牒。銓曹只擧小官姓名。聯書入啓。有若年例叙用者然。許赴行朝與分朝。

    기무도당의의。우무량사서경。예조의첩。전조지거소관성명。연서입계。유약년례서용자연。허부행조여분조

    聽後調用云云。其與古制有異。欲進則旣非安危重臣。又非扈從復讐之例。吏曹旣曰調用則亦不無干進之嫌。

    청후조용운운。기여고제유이。욕진칙기비안위중신。우비호종부수지례。이조기왈조용칙역불무간진지혐

    欲俯循私義則當此主辱臣死之日。退伏私室。情義未安。何以則可得善處而無悔於公私耶。大槩哀病勢難得達于行在。

    욕부순사의칙당차주욕신사지일。퇴복사실。정의미안。하이칙가득선처이무회어공사야。대개애병세난득달우행재

    或云如不得赴朝。則當隨參于鄕義兵。此說如何。伏望特賜指敎。俾免終陷於非義。千萬幸甚。未能得親誨範。

    혹운여부득부조。칙당수참우향의병。차설여하。복망특사지교。비면종함어비의。천만행심。미능득친회범

    密罄所懷。引領旌纛。徒切拳拳。不備。                                                                    

    밀경소회。인령정독。도절권권。불비。                                                        

 

   [與鄭愚伏景任經世書]    여정우복경임경세서     정 우복 경임 경세에게 주는 글 

 

거적을 깔고 흙덩이를 베게로 삼는 상신(喪身)으로 오래가지 못할 남은 목숨이 지금까지 죽지 못하였다가,

또 다시 매우 급박한 변고[공극지변(孔棘之變:정묘호란]를 당하게 되였으니 더욱 통절(痛切)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구름이 계속 끼는 봄날씨에 삼가 생각하건데 충성을 다하는 재상(宰相)의 체후(體候)가 신(神)의 도움을 받아

만복(萬福) 하십니까?

슬픔 속에 있는 천한 몸의 병이 해를 넘길수록 고질(痼疾)이 되어 거의 죽게 된 적이 두오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는 날마다 점점 심해지고 위중해져 아침저녁으로 다하기를 기다리는데 이런 즈음에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있으니 아픈 증세는 이와 같아서 발걸음도 씨겨놓기가 어려워 걱정되고 괴로우며 번민하고 위축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한창 쑥을 태워 약으로 시험하고 있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낫게 되면 당연히 병을 참고서 길을 나서겠지만 효과를 볼

기약이 없으니 더욱 민망스럽고 탄식스럽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우러러 여쭙건데 옛날부터 기복하는 사람의 경우는 모름지기 자신의 안위(安危)에 관계가 되고 국가의

경중(輕重)이 걸려있는 자가 바야흐로 이 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간혹 호종(扈從)하는 일로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거나 더러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것으로서 모두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의리로 오히려 맡길만한 이가 있어서였으니 옛날 노(魯)나라 임금 백금(伯禽)이

그렇게 해여할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 또한 이런 뜻에서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어버이에 대한 복(服)입는 것을 빼앗지 못한다. 고 한 것 또한 어버이를 위해서 입는 복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인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비록 임금의 명령이 있다 하더라도 차마 상차(喪次:상주가 기거하는 곳)를

떠나지 못한다. 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지금 삼년상(喪)을 치르면서 백금의 정례를 따라 군대를 활용하는 것은 매우 그르다. 고 하였으니,

옛날부터 상복(喪服)을 벗고 벼슬에 나아가도록 하는 일은 이와 같이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입계(入啓)하여 기복하게 하는 뜻을 호종하는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미 도당(都堂:의정부(議政府)에서의 의의(擬議)가 없었고 또한 양사(兩司)의 서경(署經)도 없었는데 예조(禮曹)에서

전조(銓曹)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단지 소관(小官)의 성명을 거론하고 연서(聯書)하여 입계하기를 마치 연례(年例)하는

자인 것처럼 하고는 행조(行朝:임시로 설치한 조정)와 분조(分朝)로 달려가도록 허락을 들은 뒤에야 조정하여 기용한다고 하니,

그 옛날 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가려고 한다면 이미 국가의 안위가 관계되는 중신(重臣)도 아니며 또한 호종이나 원수를 갚는 사례도 아니고,

또 이조(吏曹)에서 이미 조정하여 기용한다고 말하였다면 역시 진출하려고 구한 혐의가 없지 않으며 굽혀서 사사로운 의리를

따르려고 한다면 이렇게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때를 당하여 자기 집에 물러나 엎드려 있다는 것은 

인정과 의리에 미안하니 어떻게 하면 잘 조처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후화가 없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상중(喪中)의 몸으로 병이들어 형세로 보아 행재소까지 도달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일 분조에 나아갈 수 없다면 시골의 의병(義兵)을 따라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 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삼가 바라건데 특별히 지시와 가르침을 내려 끝내 의롭지 않는데 빠지는 것을 모면하게 해주신다면 천만번 매우 다행이겠습다.

직접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없기에 가만히 마음속에 있는 말을 모두 털어놓으며 고개를 재상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으로 골리니 한갓 잊지 못하는 마음만 절실합니다. 

가 갖추지 못합니다.

 

[기복(起復: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 상중(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로 되어 있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해 상제의 몸으로 벼슬 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

[호종(扈從:임금의 거가(車駕)를 모시어 쫓음.]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멀리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곳.]

[의의(擬議:의정부나 육조(六曹)에서 중신(重臣)들이 모여 관서(官署)에서 보고한 사목(事目)이나임금이 의논하도록

                 명한 일에 대하여 그 가부를 의논 하는 일. 그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면 임금이 이것에 근거하여 재결 함.] 

[서경(署經:심사(審査)를 거쳐 동의(同意)한다는 뜻. 당하관(堂下官)을 처음 임명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이조(吏曹)에서

                 그 사람의 성명(姓名) 내외사조(內外四祖) 및 처사조(妻四祖)를 기록하여 사헌부(司憲部),사간원(司諫院) 에

                 대하여 그 가부(可否)에 관한 의견을 요구하고 사헌부,사간원은 수직자(受職者) 사조(四祖) 및 본인의

                 신상(身上)에 하자유무(하疵有無)를 조사하여 하자없음이 판명된 때에는 양사(兩司)의 관원이 서명하여

                 동의를 표하고 이로써 사령서(辭令書)를 발부함.]

[전조(銓曹:조선조 때 문관(文官),무관(武官)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일컬는 말.] 

[첩정(牒呈:첩보(牒報). 서면(恕免)으로서 상관에게 보고하는 것. 그 보고서.

[분조(分朝:임금의 조정밖에 따로 설치한 작은 조정. 조선조 때 선조(宣祖)가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했을 때,

                세자(世子)가 피난한 곳에 분조(分朝)를 설치하였는데 임금의 행조(行朝)를 원조정(元朝廷)이라 하였음.]

 

                                              재여정경임서(再與鄭景任書)

   정경세(鄭經世)에게 다시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앞 편지의 문의에 대해 정경세는 김중청(金中淸)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한 것같다.

   이 편지에서 김중청은 정경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현재 자신의 병세가 워낙 위중해서

   당장 나갈 수 없음을 말하고 아울러 출사할 때의 복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原文(원문)

    再與鄭景任書(재여정경임서)

    昨承台書  曲賜誨諭  以祛蒙蔽  感戢亡量  但此中所深慮者。病勢深重。恐顚仆道路。未能得達也。艾炙旣至累百炷。

    작승태서  곡사회유   이거몽폐   감집망량   단차중소심려자。병세심중。공전부도로。미능득달야。애자기지루백주

    待數四日調治  疼勢差  則當扶曳登途  而時無一分之效  憫切憫切。起復所着冠服則何者爲宜。古人或用黲袍皁帶。

    대수사일조치  동세차감   칙당부예등도   이시무일분지효   민절민절。기부소착관복칙하자위의。고인혹용참포조대

    或云墨衰治事。此則皆有職業治事者之所服也。今日孤之行。與此不侔。旣無朝謁隨班之禮。又無掌治之事。

    혹운묵쇠치사。차칙개유직업치사자지소복야。금일고지행。여차불모。기무조알수반지례。우무장치지사

    只詣駐蹕近地。俯伏外次而已。則雖不變服。似無所防。閔子腰絰而服事。孔子善之。况今無服事。而所着遽用黲墨。

    지예주필근지。부복외차이이。칙수불변복。사무소방。민자요질이복사。공자선지。황금무복사。이소착거용참묵

    亦似未安。愚意行中所服用麤布練中衣。笠則用賤人所着蔽陽子。杖亦不去。如何如何。伏聞廟堂方講覊縻之策。

    역사미안。우의행중소복용추포련중의。립칙용천인소착폐양자。장역불거。여하여하。복문묘당방강기미지책

    虜騎若因此退屯。而門庭警急之機。稍緩於當今。則衰病微官進退。尤無所係關。在道中詗  知的報。上踈陳情亦如何。

    로기약인차퇴둔。이문정경급지기。초완어당금。칙쇠병미관진퇴。우무소계관。재도중형   지적보。상소진정역여하

    且或因路梗勢拘。轉向分朝。則此亦出於朝廷命令。其亦無防於義理否耶。幷賜裁敎幸甚

    차혹인로경세구。전향분조。칙차역출어조정명령。기역무방어의리부야。병사재교행심

 

 [再與鄭景任書]    재여정경임서    다시 정 경임에게 주는 글 

 

어제 재상의 편지를 받았는데 곡진하게 가르침을 내려 주셔서 몽매하게 가려 있던 것을 없애도록 하셨으니 감격스러움은 

한량이 없습니다.

다만 이 가운데서 깊이 염려되는 것은 병세(病勢)가 대단히 위중하여 아마도 도로에서 넘어져 도달할 수 없을 듯합니다.

쑥으로 뜨는 일은 이미 수백 장[주(炷)]에 이르렀으며 몇날 몇일을 조섭(調攝)하고 치료하기를 기다렸다가 아픈 증세가

차도가 나고 줄어들면 당장 지팡이를 끌고라도 길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만 아직까지 한 푼의 효과도 없으니,

간절히 민망스럽습니다.

기복(起復) 때 착용할 관복(官服)은 어떤 것이 적합합니까?

옛날 사람은 더러 검푸른 색의 도포에다 검은 띠를 착용하였으며 거러는 검은 색의 최복(衰服)으로 업무를 처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직책과 맡은 업무가 있어서 일을 처리하는 자가 입는 것입니다.

오늘날 본인[고(孤)]이 떠나는데 있어서는 그들과 같지 않으니 이미 조정에 알현(謁見)하며 반열(班列)을 따르는 의식도 없고

또한 관장하여 다스릴 일도 없으며 단지 주필(駐蹕)하는 가까운 곳에 나아가 외차(外次:바깥에 있는 막차)에서 부복(俯伏)하여

있을 뿐이니 그렇다면 비록 상복(喪服)을 바꿔 입지 않는다 하더라도 방해될 것은 없는 듯합니다.

민자(閔子:공자의 제자인 민손(閔損))가 요질(腰絰)을 한채로 업무에 종사하자 공자가 그를 훌륭하게 여겼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종사할 업무도 없는데 착용하는 상복을 갑자기 검푸른 색이나 검은 색으로 한다는 것 역시 미안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다닐적에 입는 것은 거친 삼베로 누인 옷을 착용하고 삿갓은 천인(賤人)들이 착용하는 폐양자(蔽陽子)로

하며 지팡이 또한 버리지 않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들으니 묘당(廟堂)에서 바야흐로 얽매이는 계책을 강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의 기마(騎馬)가 만약 이로 인하여 주둔하는 장소를 물리고 문정(門庭)에 급박함을 경계하는 기미도 당장 조금 완화될 수

있다면 쇠약하고 병든 미미한 관원의 진출과 은퇴는 더욱 관계되는 바가 없으며 도중에 확실한 정보를 탐지하여 알게 되면

상소하여 진정하는 것 또한 어떻습니까?

그리고 또 혹시 길이 막히고 형세에 구애됨으로 인해서 길을 바꾸어 분조(分朝)로 향하게 되더라도 이것 또한 조정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니 그것 또한 의리에는 아무런 방해됨이 없겠습니까?

아울러 재단과 가르침을 내려 주시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주필(駐蹕:임금이 나들이 하는 도중에 거가(車駕)를 잠시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일.]

 

 

                   기의병시청남병암소서(起義兵時請南甁庵筱書)

    1592년 남소(南筱)에게 보낸 편지다.

   임진왜란시 의병을 일으킬 때 그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原文(원문)

    起義兵時請南甁庵筱書(기의병시청남병암소서)

   卽今季秋。伏惟尊况萬吉。某等謀事不密。遭變孔棘。驚慘之懷。欲陳無言。今者舊卒頗集。新附亦多。強夫猛士。

   즉금계추。복유존황만길。모등모사불밀。조변공극。경참지회。욕진무언。금자구졸파집。신부역다。강부맹사

   尙或有之。而一敗之後。將位猶虛。凡百執事。亦未齊整。有所謀議。誰與可否。早知尊君言議通達。忠憤激烈。

   상혹유지。이일패지후。장위유허。범백집사。역미제정。유소모의。수여가부。조지존군언의통달。충분격렬

   可與共濟大事。旣以文通。又以書邀。庶幾一賜顧臨。協同心力。以圖成王事。迨未許枉。僉望徒勤。

   가여공제대사。기이문통。우이서요。서기일사고림。협동심력。이도성왕사。태미허왕。첨망도근

   未知尊公有何縻繫。伏奉敎旨。十行溫言。無非奬勵忠義之意。再三圭復。不覺痛泣。尊其得見否。天朝亦旣援

   미지존공유하미계。복봉교지。십행온언。무비장려충의지의。재삼규부。불각통읍。존기득견부。천조역기원

   不以六月而停興。勞師萬里之外。而况我國臣民。寧可安坐一室而無意討賊也哉。幸乞速自夬决。毋或猶豫。

   불이육월이정흥。노사만리지외。이황아국신민。영가안좌일실이무의토적야재。행걸속자쾌결。무혹유예

   賁然一來。共謀措處。不勝萬望。                                                                           

   분연일래。공모조처。불승만망。                                                           

 

 [起義兵時請南甁庵筱書]   기의병시남병암소서    의병을 일으킬 때 남병암 소에게 청원하는 글

 

늦어가는 가을에 삼가 생각하건데 존공(尊公:상대방을 높여서 부름)의 근황이 만길(萬吉)하신지요?

모(某)등은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외적이 침입하는 변고를 만나 놀랍고 참혹한 회포는 진달하려 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제 그전의 병졸이 제법 모였고 새로 따르는 이들도 많아 강한 장부와 용맹스런 군사도 아직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패배한 뒤로 장수의 자리가 오히려 비어 있어 모든 집사(執事)들도 가지런히 정돈을 못하고 있으며,

모의(謨議)할 일이 있어도 누구와 더불어 가부(可否)를 정하갰습니까?

일찍이 존군(尊君:상대방의 존칭)은 언론과 논의가 통달하고 충성심과 의분이 격렬하므로 함께 큰 일을 성취시킬 수 있음을

알아 이미 글로 통하고 또 편지로 맞으러 하면서 한 번 왕림해 주셔서 마음과 힘을 한가지로 합하여,

왕사(王事:임금을 위한 나랏일)를 도모하여 이룩하기를 바랐었는데 지금까지 왕림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여러 사람의 소망은

한갓 애만 쓰는 격입니다.

모르기는 합니다만 존공께서 무엇에 얽매여서입니까?

삼가 교지(敎旨)를 받들어 보니 열 줄로 된 온화한 내용은 충성과 의리를 장려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읽다보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존공께서는 그것을 보셨습니까?

명나라에서도 이미 구원군을 내려주기를 6월로 그치지 않고 수고할 군사를 만리 밖에서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나라의 신민(臣民)으로서 어떻게 한 집안에 편안히 앉아서 적을 토벌하려는 의사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데 속히 스스로 흔쾌히 결정하시어 혹시라도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분연(憤然)히 한번 왕림하셔서 함께 모의하여

조처하시기를 몹시 바라는 마음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대장임탁이흘서(與大將任卓而屹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흘(任屹)에게 보낸 편지이다.

   장수(將帥)가 지녀야 할 덕목인 자애로움(仁)‚ 지혜로움(知)‚ 용맹함(勇)의

   세 가지 덕목과 성실함(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原文(원문)

   與大將任卓而屹書(여대장임탁이흘서)

   夫爲將之道。有三焉。又有一焉。三者何。仁也知也勇也。而一者何。誠而已矣。仁然後可鎰人心。

   부위장지도。유삼언。우유일언。삼자하。인야지야용야。이일자하。성이이의。인연후가이득인심。 

   知然後可以識事機。勇然後可以無畏懼。而誠然後可以行三者。無誠則無以行三者。仁不可以無知。

   지연후가이식사기。용연후가이무외구。이성연후가이행삼자。무성칙무이행삼자。인불가이무지

   知不可以無勇。勇亦不可耳行。則斯四者闕一不可。自古爲將之難。豈不以此也哉。

   지불가이무용。용역불가이독행。칙사사자궐일불가。자고위장지난。기불이차야재。 

   盖不得人心則士卒將不爲我用。不識事機則行師有必敗之患。有所畏懼則臨敵無突進之勢。

   개부득인심칙사졸장불위아용。불식사기칙행사유필패지환。유소외구칙림적무돌진지세。 

   士卒不爲用則可以出師乎。行師必致敗則可以赴敵乎。臨敵不突進則可以見捷乎。人皆知三者之必爲用。

   사졸불위용칙가이출사호。행사필치패칙가이부적호。임적불돌진칙가이견첩호。인개지삼자지필위용。 

   而不能仁而得人心。不能知而識事機。不能勇而無畏懼。是則無誠以主之也。苟或有其誠而無三者之用。

   이불능인이득인심。불능지이식사기。불능용이무외구。시칙무성이주지야。구혹유기성이무삼자지용

   抑亦徒誠而已。何謂誠。只是眞實無妄底道理也。旣眞實又無妄。使一毫私意不得干於物我之間。

   억역도성이이。하위성。지시진실무망저도리야。기진실우무망。사일호사의부득간어물아지간。 

   而應事接物之際。推心置人。勿有疑貳。虛中受言。無相阻碍。則可以取人之仁鎰人心。

   이응사접물지제。추심치인。물유의이。허중수언。무상조애。칙가이취인지인이득인심。 

   可以取人之知以識事機。可以取人之勇以無畏懼。何必用己之仁用己之知用己之勇以爲能哉。且所爲非一家己事。

   가이취인지지이식사기。가이취인지용이무외구。하필용기지인용기지지용기지용이위능재。차소위비일가기사。 

   而欲用己之仁己之知己之勇。亦私而已。雖自謂有是三者。而吾必謂之無也。旣無一以爲體。又無三以爲用。

   이욕용기지인기지지기지용。역사이이。수자위유시삼자。이오필위지무야。기무일이위체。우무삼이위용。 

   而欲事之成。其可得乎。今吾將爲國慷慨。甞膽苦志。當官軍渙散之日。倡募兵討賊之義。親君死國之誠

   이욕사지성。기가득호。금오장위국강개。상담고지。당관군환산지일。창모병토적지의。친군사국지성。 

   不其至乎。躬伍旅。直探虎穴。當賊騎長驅之鋒。無逗遛不進之心。突進無懼之勇。不其大乎。

   불기지호。궁솔오려。직탐호혈。당적기장구지봉。무두류부진지심。돌진무구지용。불기대호

   然而士卒無固結之心。行師有失機之歎。臨敵恥斷䤋 之捷。則其惟天不助順而然耶。抑以人不協謀而然耶。

   연이사졸무고결지심。행사유실기지탄。임적치단욱지첩。칙기유천불조순이연야。억이인불협모이연야

   盖爲士卒者。固非三代之民。而喜人怒獸。難可協一。其事勢也。亦不一向便易。而或夷或險。不得利乘。

   개위사졸자。고비삼대지민。이희인노수。난가협일。기사세야。역불일향편역。이혹이혹험。부득리승。 

   以之因循日月。蹉跎事功。至於師老而有自潰之狀。勢遅而無遂志之期。則爲將者將不獨任其咎。

   이지인순일월。차타사공。지어사로이유자궤지상。세지이무수지지기。칙위장자장불독임기구

   而在外之人其自外論之也。未必不以一陣之元帥爲之咎也。此則雖以吾將之衡鑑。苟在外論之。則亦不小有恕焉。

   이재외지인기자외론지야。미필불이일진지원수위지구야。차칙수이오장지형감。구재외론지。칙역불소유서언。 

   人以己爲咎而徒曰彼亦妄人也。已而不自爲之反躬惕省。思所以善措焉。則是亦病耳。聖賢豈爲之哉。

   인이기위구이도왈피역망인야。이이불자위지반궁척성。사소이선조언。칙시역병이。성현기위지재

   噫三代以下之將。誰能如此。生之所言。過則過矣。然武人爲之將。亦當以此相勉。今吾將以學孔之徒。

   희삼대이하지장。수능여차。생지소언。과칙과의。연무인위지장。역당이차상면。황금오장이학공지도。 

   帥學孔之徒爲之乎。一端憤慨之忱。發於至誠。而應酬之際。未免有一毫私意於其間。則不可謂四者之已至矣。

   수학공지도위지호。일단분개지침。발어지성。이응수지제。미면유일호사의어기간。칙불가위사자지이지의。 

   願吾將勿謂吾有至誠。而念己或有未誠。勿謂吾有大勇。而念己或有未勇。勿謂不必有仁。而思其所以爲仁。

   원오장물위오유지성。이념기혹유미성。물위오유대용。이념기혹유미용。물위불필유인。이사기소이위인

   勿謂不必有知。而思其所以爲知焉。苟能無形於物我。虛己而受人。則雖下愚亦皆爭獻其一得。取諸人以爲用。

   물위불필유지。이사기소이위지언。구능무형어물아。허기이수인。칙수하우역개쟁헌기일득。취제인이위용

   何患其未爲仁未爲知未爲勇也哉。如或聞人獻謨。有所異己。心輒以爲彼惟不思也。已而顧左言他。不欲入耳。

   하환기미위인미위지미위용야재。여혹문인헌모。유소이기。심첩이위피유불사야。이이고좌언타。불욕입이

   訑訑之色。見於顔面。則誰將畢思竭慮以裨補籌策之萬一乎。愚於吾將。素有知分。今爲同志。日夜在幕。

   이이지색。견어안면。칙수장필사갈려이비보주책지만일호。우어오장。소유지분。금위동지。일야재막

   其於吾將之言議措處。熟詳其長短焉。挾其己見。不能虛受。抑恐爲吾將之短處也。吾將乃明底人也。

   기어오장지언의조처。숙상기장단언。협기기견。불능허수。억공위오장지단처야。오장내명저인야

   寧不自知耶。不知則已。知之則幸速勉焉。先去是病。更加工夫。使本源之地虛明不昧。無所碍隔於物我。

  불자지야。불지칙이。지지칙행속면언。선거시병。경가공부。사본원지지허명불매。무소애격어물아。 

   則無事之不循理。無人之不我服。事功之成。將自此可占矣。前日所達合勢於金相公之說。非吾朝夕卒遽之慮。

   칙무사지불순리。무인지불아복。사공지성。장자차가점의。전일소달합세어금상공지설。비오조석졸거지려 

   而又非絲毫挾私之見也。生只見士卒之有潰狀。陣勢之無重勢。欲與彼相爲固結。因張聲勢。以遂吾敵愾之志。

   이우비사호협사지견야。생지견사졸지유궤상。진세지무중세。욕여피상위고결。인장성세。이수오적개지지

   以成我國家之事。而一二同志之議。亦吻爲諧合。故敢於座下道達微忱。庶幾相與可否。而吾將示以拒之之色。

   이성아국가지사。이일이동지지의。역문위해합。고감어좌하도달미침。서기상여가부。이오장시이거지지색

   少無聽量之意  故生遂捲舌以退  因自思曰我等此議  無乃有大不可底事耶  心常反復  尙未解惑焉  夫爲大事者。

   소무청량지의  고생수권설이퇴  인자사왈아등차의  무내유대불가저사야  심상반부  상미해혹언  부위대사자

   必有位德勢力。然後衆可服而事可諧。雖有其德而苟無其位其勢其力則不尊。人不信矣。雖有其位其勢其力。

   필유위덕세력。연후중가복이사가해。수유기덕이구무기위기세기력칙불존。인불신의。수유기위기세기력。 

   而苟無其德則不親  人不從矣  不從不可以成事  不信亦不可以成事  而世季人淆  俗情不古  雖或無其可信德

   이구무기덕칙불친  인불종의  불종불가이성사  불신역불가이성사  이세계인효  속정불고  수혹무기가신덕

   有位則可以施設。有勢則可以威畏。有力則可以壓服。愚未知吾將與金相於斯四者。孰有而孰無之耶。

   유위칙가이시설。유세칙가이위외。유력칙가이압복。우미지오장여금상어사사자。숙유이숙무지야。 

   以愚見之則吾將一或有之而三則無之。金相一或未足而三則有之。相與合德。以之協心。則位德勢力不患其不備。

   이우견지칙오장일혹유지이삼칙무지。김상일혹미족이삼칙유지。상여합덕。이지협심。칙위덕세력불환기불비。 

   而欲散之卒可以鎭服。告絶之糧可以繼給。成事之期。庶可指日而待也。且金相公何如人耶。

   이욕산지졸가이진복。고절지량가이계급。성사지기。서가지일이대야。차김상공하여인야

   素稱讀古書知義理人也。其於向背之際取舍之間。豈若庸庸鄙夫也哉。吾輩以爲有所未足者無他焉。

   소칭독고서지의리인야。기어향배지제취사지간。기약용용비부야재。오배이위유소미족자무타언。 

   只以不能承宣安集之命也爾。値國危難。聞君出狩。而不卽挺身殊死討賊。此果爲君子之所不滿也。而板蕩一路。

   지이불능승선안집지명야이。치국위난。문군출수。이불즉정신수사토적。차과위군자지소불만야。이판탕일로。 

   未有號令。人各私身。深竄爲務。於是而巡歷數邑。宣諭敎命。里而定有司。邑而定假將。招遁亡之守宰。

   미유호령。인각사신。심찬위무。어시이순력수읍。선유교명。리이정유사。읍이정가장。초둔망지수재。 

   募潰散之軍卒。防東守西。賊未犯近。則亦可謂有微勞也。然則爲議論者。或可謂功過相準。或可謂功微過大。

   모궤산지군졸。방동수서。적미범근。칙역가위유미로야。연칙위의론자。혹가위공과상준。혹가위공미과대。 

   而未可遽以失節論也。欲事之成而與此人同事。則我遽爲失其節耶。我遽爲無其功耶。爲人下則有之矣。

   이미가거이실절론야。욕사지성이여차인동사。칙아거위실기절야。아거위무기공야。위인하칙유지의

   有所損則吾未知也。事苟成也。則爲人下者。非所耻也。幸詳量訊諸同志。以定可否。如何如何。愚生此言。

   유소손칙오미지야。사구성야。칙위인하자。비소치야。행상량신제동지。이정가부。여하여하。우생차언。 

   實無毫私。而吾將若以謂作爲異論。沮撓於事。不惟不聽。又從而踈之。則非愚生所望也。合勢之說。雖或不採。

   실무호사。이오장약이위작위이론。저요어사。불유불청。우종이소지。칙비우생소망야。합세지설。수혹불채

   而誠仁知勇之語。願勿惡聞。千萬切望                                                                 

   이성인지용지어。원물악문。천만절망。                                                  

 

 [與大將任卓而屹書]    여대장임탁이흘서    대장 임 탁이 흘에게 주는 글 

 

대저 장수가 되는 도리는 세 가지가 있고 또 한 가지가 있으니 세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인애과 지혜와 용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정성일 뿐입니다.

인애로운 연후라야 인심(人心)을 얻을 수 있고,

지혜로운 연후라야 일의 기미를 알 수 있으며,

용맹스런 연후라야 두려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성스런 연후라야 이 세 가지를 행할 수 있으니 정성이 없으면 이 세 가지를 행할 수 없습니다.

인애로우면 지혜가 없을 수 없고,

지혜로우면 용맹이 없을 수 없으며,

용맹 또한 홀로 행해질 수 없으니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빠트리면 될 수가 없으니,

옛날부터 장수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인심을 얻지 못하면 사졸(士卒)을 장차 내가 활용을 못하며 일의 기미를 알지 못하면 군사 행진에 반드시 패배할 금심이

있게 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적에게 다달아 돌진하는 형세가 없게 됩니다.

사졸을 활용하지 못하게 되면 군사를 전쟁터로 내 보낼 수 있겠으며 군사의 행진에 반드시 패배를 이루게 된다면 적에게

달려갈 수 있겠으며 적에게 다달아 돌진하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활용이 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인애스러운데도 인심을 얻을 수 없고 지혜로운데도 일의 기미를 알 수 없으며 용맹스러운데도 두려움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은 정성으로서 주장함이 없어서 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정성은 있는데도 세 가지의 활용이 없는 것은 역시 한갓 정성만 있을 뿌이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정성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단지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미 진실된데다 또 망령된이 없어 하나의 털끝 만한 사사로운 뜻으로 하여금 사물과 나 사이에 간여할 수 없게 하여,

일에 대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즈음에 마음을 미루어 사람을 배치하되 의심을 두지 않으며 마음을 비우고 말을 받아들여

서로 막히거나 구애됨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인애를 가져다 인심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지혜를 가져다 일의 기미를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용맹을 가져다 두려움을 없앨 수 있으니 하필이면 자기의 인애를 활용하고 자신의 지혜를 활용하며

자신의 용맹을 활용하여야만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는 바가 한 집안이나 지기의 인이 아닌데도 자기의 인애와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용맹을 활용하려는 것 또한

사사로운 것일 뿐이니 아무리 스스로 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한 가지로서 본체를 삼지도 못하고 또한 세 가지로서 작용을 삼지도 못하면서 일을 성취시키려 하지만 그것이 성취 될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장수가 국가를 위하여 강개(慷慨)하며 국가의 원수를 갚으려고 쓸개를 맛보며 견디기 힘든 일을 참은 뜻은,

관군(官軍)이 흩어져 버린 때를 당하여 적을 토벌할 군사를 앞장서서 모은 의리와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여 죽을 각오로

한 정성이였으니 그것이 지극하지 않겠습니까?

몸소 군사를 통솔하여 곧장 적의 소굴을 탐지하였으며 적의 기마병(騎馬兵)이 길게 몰고 오는 예봉(銳鋒)과 맞닥트려,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을 생각이 없이 돌진하여 두려움이 없었던 용맹은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사졸(士卒)에게는 단단하게 결집된 마음이 없고 군사 행진에도 기회를 놓친 한탄이 있으며 적에게 다달아서는

적의 목을 베는 승리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것은 오직 하늘이 순리(順理)를 돕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모의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대체로 사졸이 된 자들은 진실로 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의 순박한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좋아하고 짐승에게는 화를 내므로 하나 같이 합쳐지기 어려운 것은 그 일의 형세인 것이며 또한 한결같이

편이(便易)한 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더러는 평탄하기도 하고 더러는 험악하기도 하여 유리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런 형세에서

그전 풍습대로 세월을 보내다가 일의 성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군사들도 노쇠하여 스스로 궤멸될 상황에 처해 있고 형세도 지체되어 뜻을 완수할 기약도 없는데 이르렀다면 장수된 자가

장차 그 허물을 홀로 책임지지 않겠으며 외부에 있는 사람도 외부에서 그것을 논할 것이니 한 진(陣)의 원수(元帥)라는 것으로

반드시 그를 책망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비록 우리 장수의 감식안(鑑識眼)으로도 외부에서 논하게 되면 역시 조금의 용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책망하였다는 것으로 한갓 저 사람도 망령된 사람이라고 말하기만 하면서 스스로 자신에게 돌려

두려워하고 반성하면서 잘 조처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병이 든 것입니다.

성현(聖賢)이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아! 삼대 이하의 장수로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생(생)]의 말한 바가 너무 지나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무인(武人)으로서는 그렇게 해야 하며 장수 또한 이것으로 서로 권면하여야 합당합니다.

더구나 지금의 우리 장수는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무리로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무리를 거느리고 그렇게 해야하겠습니까?

일단의 의분과 강개한 성심이 지성(至誠)에서 출발하였더라도 응답하는 즈음에 한 개의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이에 있게 됨을 모면하지 못했다면 앞서 말한 네 가지가 아주 지극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우리 장수께서는 나에게 지성이 있다고만 여기지 마시고 자신에게 혹시라도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는가 생각해 보시며

나에게 큰 용맹이 있다고만 여기지 마시고 자신에게 혹시라도 용맹스럽지 못함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인애로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그 인애를 해야하는 까닭을 생각하시며 지혜로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그 지혜롭게 해야할 바를 생각하십시요.

진실로 다른 사람과 나를 드러내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비워서 남의 말을 받아드리면 아무리 하등급의 어리석은 자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다투어 쓸만한 의견을 바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여다 활용하는데 그것이 인애롭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며 용맹스럽지 못함이 무슨 근심이 되겠습니까?

만일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바치는 계책을 듣고서 자신의 견해와 다른 바가 있다고 하여 마음속으로 번번이 저 사람의 생각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딴 곳을 돌아보며 다름 일을 말하여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으쓱거리는 빛이 얼굴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누가 장차 생각을 다 짜내어 계책(計策)의 만 분의 일이라도 보태겠습니까?

어리석지만 우리 장수에 대하여는 본래 알고 지낸 친분이 있었으며 지금은 동지(同志)가 되어 밤낮으로 막하(幕下)에 있으면서

우리 장수의 언론과 논의 그리고 조처에 대하여 그 장점과 담점을 익숙하게 압니다.

자신의 견해를 끼고서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마도 우리 장수의 단점인 듯합니다.

우리 장수는 바로 명철한 분입니다.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습니까?

모른다면 그만이겠으나 안다면 빨리 힘써주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병을 없애고 다시 공부를 더 하여 본원(本源)인 바탕으로 하여금 티없이 밝고 어둡지 않게 하여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장애가 되거나 막히는바가 없게 된다면 일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고 사람은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을

터이니 일의 성과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장차 여기서부터 점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 진달한 바 김상공(金相公)과 합세(合勢)하여야 한다고 한 말은 내가 아침이나 저녁에 갑작스럽게 생각한 것이

아니며 또한 털끝만큼이라도 개인적인 견해를 낀 것도 아닙니다.

본인[생(生)]은 단지 사졸의 궤멸하는 상태가 있는 것과 진(陣)을 친 형세가 중압감이 없는 것을 보고서 저 상공(相公)과 굳게

단결하고 펼쳐지는 명성과 위세로 인하여 우리의 임금을 위하여 원한을 풀려고 하는 적개심을 불러 뜻을 이룩하므로서

우리 국가의 일을 성취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두 명의 동지들 의논 역시 입술을 합친 것과 같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감히 좌하(座下)에 미미한 정성을 진달하면서

서로 함께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을 바랐습니다.

우리 장수께서 거절하는 빛을 보이면서 헤아려서 들어줄 뜻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마침내 말을  거두고 물러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들의 이 의논은 크게 불가한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라면서,

마음에 늘 반복해 보아도 아직까지 그 의혹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큰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지위(位)와 덕망(德),위세(勢)와 능력(力)을 갖춘 연후에야 여러 사람을 복종시킬

있으며 일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덕망은 있다하더라도 그 지위와 위세와 능력이 없으면 존경의 대상이 못되어 사람들이 신임하지 않으며 아무리

그 지위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그 덕망이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으며 사람들이 신임하지 않으면 역시 일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서 사람도 혼탁해지고 세속의 인정도 야박해져 비록 간혹 신임할 만한 덕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위만

있으면 베풀어 설비할 수 있고 위세만 있으면 위엄으로 두렵게 할 수 있으며 능력이 있으면 짓눌러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모르기는 합니다만 우리 장수와 김상공이 이 네가지에 대하여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고 누가 그것이 없습니까?

어리석은 견해로는 우리 장수는 그중 한 가지는 간혹 소유하고 있지만 세 가지는 없으며 김상공은 한 가지는 간혹 충분하지

못하지만 세 가지는 소유하고 있으니 서로 함께 덕망을 합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하나로 한다면 지위와 덕망과 위세와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 없으며 흩어지려고 하는 사졸을 진정시키고 복종하게 할 수 있고 다 떨어져간다고 보고된

식량도 계속해서 공급될 수 있을 터이니 일을 성취하는 기약은 거의 태양을 가리키며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김상공은 어떤 인물입니까?

본래부터 옛날 성현(聖賢)의 글을 읽어 의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그 따르고 등지는 즈음과 취하고 버리는 무렵에 어찌 용령하고 비루한 사나이와 같겠습니까?

우리 무리들의 생각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단지 백성들이 안정되게 모여 살도록 하는 명을 받들어

선포할 수 없을 뿐입니다.

국가가 위태롭고 어려운 때를 만나 임금이 피난한 사실을 듣고서 즉시 몸을 빼어 죽기를 각오하고 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정말로 군자(君子)가 불만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지역이 결단이 니서 호령(號令)도 있지 않아 사람들은 각기 개인의 일신만 깊이 숨기는 것을 임무로 삼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 고을을 낱낱이 순찰하면서 임금의 교명(敎命)을 선포하고 유시(諭示)하여 마을마다 유사(有司)를 정하고

고을마다 가장(假將)을 정해서 도망하여 숨어 버린 수령을 불러들이고 허물어져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동쪽을 방어하고

서쪽을 수비하게 함으로서 적이 가까이 까지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으면 역시 조그마한 공로는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는 공로와 허물이 서로 엇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더러는 공로는 적고 허물은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느닷없이 지조를 잃었다는 것으로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일을 성취시키려고 하면서 이 사람과 일을 함께 하면 자신도 갑자기 그 지조를 잃게 되며 자신도 갑자기 그 공로가 없어지게

됩니까?

자신의 지위가 다른 사람 아래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만 자신의 명예에 손상되는 바가 있다는 석 밖에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일이 진실로 성취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아래라는 것이 부끄럽게 여길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데 상세히 헤아려서 동지에게 물어보고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저[우생(愚生)]의 이 말은 실제로 털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는데 우리 장수께서 만약 다름 의론을 만들어 일을

저해하고 동요시킨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따라서 소원(疎遠)하게 여기는것은 제가 바라는 바가아닙니다.

형세를 합쳐야 한다는 말은비록 채택하지 않더라도,

정성과 인애와 지혜와 용맹에 관한 말은 듣기 싫어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답이참봉의보서(李參奉儀甫書)

   이의보(李儀甫) 글에 답(答)하는 편지이다.

   이 편지에 서술된 내용으로 추측해 보면 이의보의 편지 내용은

   그가 술을 먹고 실수를 했다는 것

   이 때문에 친구들에게 절교를 당했다는 것‚

    금주를 선언했다는 것 등이다.

    답지인 이 편지에서 김중청(金中淸)은 옛 사람들도

   한달 내내 법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고 하면서

   술을 먹고 실수한 것은 좋은 일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마음에 담아 두는 것보다는 술이 깨고 나서 마음과 몸을

   바로잡아 나머지 29일을 법도에 맞게 생활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原文(원문)

     答李參奉儀甫書 (답이참봉의보서)

     方欲致書。以謝前日之訪。而尊書先至。感慰則深。而還恨賤謝之不早也。酒後之戱。固非所謂樂放惡檢者。

     방욕치서。이사전일지방。이존서선지。감위칙심。이환한천사지불조야。주후지희。고비소위악방악검자。 

     而古之人於道。未免日月至焉。一月三十日中一日雖有此等事。鎖卄九日束在閑內。能不放出去。

     이고지인어도。미면일월지언。일월삼십일중일일수유차등사。성득입구일속재한내。능불방출거。 

     則未必不爲堯舜之道者。幸尊兄毋以昨者之失。留悔於肚裏。固持醒來心目。期於卄九日不放昏如何如何。

     칙미필불위요순지도자。행존형무이작자지실。유회어두리。고지성래심목。기어입구일불방혼여하여하。 

     斷酒之示。深恐未然也。抑恐不必爾也。况賤見以爲吾兄氣度。每入酒間。尤見恰好。外雖戱劇。而內守益堅。

     단주지시。심공미연야。억공불필이야。황천견이위오형기도。매입주간。우견흡호。외수희극。이내수익견

     則宜未爲害也。此則亡友金公達遠亦如是云矣。某頹靡無狀一土塊。自家身心。不知收拾。何暇救正人乎。

     칙의미위해야。차칙망우김공달원역여시운의。모퇴미무상일토괴。자가신심。부지수습。하가구정인호

     吾兄所謂見絶云者。必將毋友不如己耶。但有所憾於左右者。齋滿溪淸。簾惹山圓。素琴一張。古書千卷。

     오형소위견절운자。필장무우불여기야。단유소감어좌우자。재만계청。염야산원。소금일장。고서천권

     正是牙期朱蔡暢懷討論之時。而尊兄必以酒爲期。竟孤良宵之會。此則必待吾兄更占淸夕。辱聯賤枕。

     정시아기주채창회토론지시。이존형필이멱주위기。경고량소지회。차칙필대오형경점청석。욕연천침

     暢盡蘊鬱。然後始可有釋於其間矣。不備謹復                                                    

     창진온울。연후시가유석어기간의。불비근부。                                             

 

 [答李參奉儀甫書   답이참봉의보서    이 참봉 의보에게 답하는 글

 

바야흐로 편지를 전하여 며칠 전에 방문해 줌대 대하여 사례하려고 했었는데 존형(尊兄)의 편지가 먼저 이르렀으니

감격스럽고 위안이 됨은 깊습니다만 도리어 천(賤)한 존재가 사례를 일찍하지 못하였음이 한스럽습니다.

술을 마신 뒤의 농담은 진실로 이른바 방탕을 즐기고 검속을 싫어한다는 것이 아니고 옛날 사람도 도(道)의 경지에서

날로 또는 달로 그 경지를 지속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한 달 30일 가운데 하루쯤은 비록 이런 들류의 일이 있다 하더라도 29일 동안 성실하게 규범 내에서 단속하여 방출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처럼 되는 도리가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데 존형께서는 지난달의 실수를 마음속에 체류시켜 후퇴하지 말고 깨달은 뒤의 마음의 눈을 굳게 가지고

29일을 방탕하고 혼미하지 않기를 기약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술을 끊겠다는 의사 표시는 아마도 너무나 그렇지 않을 듯하며 또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더구나 천한 견해로는 오형(吾兄:상대편에 대한 경칭)의 기도(氣度)는 언제나 술을 마시는 무렵이면 더욱 좋은 것을 보게

된다고 여겼으니 겉으로는 비록 농담을 한다고 하더라도 안으로 지키기를 더욱 단단히 한다면 의당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친구 긴공달원(金公達遠)이도 이와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모(某)는 퇴폐하여 보잘 것 없는 하나의 흙덩이 같아 자신의 몸과 마음도 수습할 줄을 모르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바로 잡겠습니까?

오형(吾兄)이 이른바 절교를 당하였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앞으로는 자신만 못한 사람은 친구로 사귀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단지 좌우(左右:상대방에 대한 존칭)에게 유감스러운 바가 있었던 것은 서재(書齋)에는 맑은 시냇물 소리가 가득하고

발[렴(簾)]에는 둥그런 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흰 거문고 1장(張)과 옛날 책(冊) 1천 권이 소장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그리고 주자(朱子)와 채원정(蔡元定)처럼 회포를 풀며 토론해야 할 때인데,

존형(尊兄)께서는 반드시 술마시는 것으로 기약함으로서 마침내는 좋은 밤의 기회를 저버리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오형이 다시 좋은 밤을 가려 천한 사람의 거처에서 함께 묵으며 쌓였던 답답함을 모두 풀어버린

연후에야 비로서 그 사이에 응어리졌던 일들이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갖추지 못하고 삼가 회답합니다.

 

[백아와 종자기(伯牙,鍾子期:두 사람 모두 춘추시대(春秋時代)사람임.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들었는데,

                      종자기가 죽은 뒤 백아는 절망(絶望)한 나머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거문고 줄을 모두 끊어 버리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음.

[채원정(蔡元定:송(宋)나라 건양(建陽)사람,자(字)는 계통(季通),호(號)는 서산선생(西山先生) 주자와 친분이 두터움.] 

 

                           답인간목-의례적자위서모시복고사촬요장기당종하제

                          (答人間目-儀禮嫡子爲庶母緦服攷事撮要杖期當從何制 )

   서모(庶母)가 죽었을 때 적자(嫡子)는 삼개월 상복 시마(緦麻)을 입는다는 설에 대해

   자세한 전거를 찾아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례(儀禮)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서모(庶母)를 위해 시마(緦麻)를 입는다는 구절이 있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는 상장(喪杖)을 짚고 일년 상복을 입는다장기(杖期)로 되어 있다.

   대명률(大明律)의 장기(杖期)라는 것은 적자의 경우 생모가 죽은 후 삼년복을 입고 난

   이후라면 서모가 죽었을 때 일년복을 입는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原文(원문)

    答人間目 (답인간목)

     儀禮嫡子爲庶母緦服。攷事撮要杖期。當從何制。儀禮稱士爲庶母緦麻。傳謂之以名服也。家禮亦爲庶母緦麻。

     의례적자위서모시복。고사촬요장기。당종하제。의례칭사위서모시마。전위지이명복야。가례역위서모시마

     謂父妾之有子者。而大明禮與本國大典。皆直謂之杖期。則此必後世追爲之制。而今未聞服杖期。

     위부첩지유자자。이대명례여본국대전。개직위지장기。칙차필후세추위지제。이금미문복장기

     恐不如姑從儀禮家禮之爲無未安之嫌也  近世好禮純孝之人  或有爲庶母服期者  此必因大明律與大典而爲之也

     공불여고종의례가례지위무미안지혐야  근세호례순효지인  혹유위서모복기자  차필인대명율여대전이위지야。 

     然大明之制。爲庶母期杖。而爲所生母斬衰三年。必爲所生母斬衰三年而後。方爲庶母當服杖期。

     연대명지제。위서모기장。이위소생모참쇠삼년。필위소생모참쇠삼년이후。방위서모당복장기

     此在臨時酌量善處。俾無後悔。如何如何。                                                          

     차재림시작량선처。비무후회。여하여하。                                                  

 

 [答人間目]    답인간목    다른 사람의 문목에 답함

 

[答人間目-儀禮嫡子爲庶母緦服攷事撮要杖期當從何制]

  답인간목-의례적자위서모시복고사촬요장기당종하제 

의례에 적자가 서모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고사촬요에는 장기복을 입는다고 하니 어느 제도를 따라야 적합합니까? 

의례(儀禮)에 이르기를 사(士)가 서모(庶母)를 위하여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  하고,

전(傳)에는 명복(名服)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도 역시 서모를 위하여 시마복을 입는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첩(妾)으로 자식이 있는 경우 라고 하였는데,

대명례(大明禮)와 본국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모두 곧장 장기복(杖期服)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틀림없이 후세에서

추가한 제도이며 아직까지 장기복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우선 의례와 주자가례를 따라서 하는 것이

낫겠으며 그렇게 하여야 미안(未安)한 혐의가 없을 듯하다.

근세(近世)에 예(禮)를 좋아하고 효성이 순수한 사람이 간혹 서모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자가 있기도 한데

이는 반드시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명률의 제도에 서모를 위하여 장기복을 입으며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위해서 참최 삼년복(斬衰三年服)을 입는데,

반드시 낳아준 어머니를 위해서 참최삼년복을 입은 뒤라야 바야흐로 서모를 위하여 장기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때그때 참작하고 헤아려서 잘 처리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시마복(緦麻服:오복(五服)의 하나. 석달 동안 입는 상복(喪服).

[장기복(杖期服:복제(服制)의 한가지. 곧 상장(喪杖)을 짚고 자최(齊衰:굵은 베로 짓되 아래 가를 좁게 접어 꿰맨 상복)를

일년 동안 입는 복. 조부(祖父)가 생존하는데 조모(祖母)가 죽었을 경우와 가모(嫁母),출모(出母)서모(庶母)의 상 때 입음.]

[참최삼년복(斬衰三年服:오복(五服)의 하나.거친 삼베로 짓고 아랫단을 꿰매지않은 상복(喪服)외간상(外艱喪:부친상)에입음

  

                                여진휼종사관윤성인서(與賑恤從事官尹聖任書)

   영남(嶺南) 지역의 진휼종사관(賑恤從事官)으로 온 윤성임(尹聖任)에게 보낸 편지이다.

   위아래의 관리들이 모두 부패한 상황에서 윤성임같은 훌륭한 사람이 종사관으로 오게 된 것은

   영남 백성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면서 직무를 잘 수행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原文(원문)

     與賑恤從事官尹聖任書(여진휼종사관윤성인서)

     惶仄尊兄所管。乃我朱夫子所甞爲者。凡百施措。必欲不背於義理而無愧於古人。實嶺南幸也。第末世滋僞。

     황측존형소관。내아주부자소상위자。범백시조。필욕불배어의리이무괴어고인。실영남행야。제말세자위

     上下相賊。弊習已成。州郡應之。不以其實。自我責之。期得其實。如是之際。若或求以恤民而不免擾民。

     상하상적。폐습이성。주군응지。불이기실。자아책지。기득기실。여시지제。약혹구이휼민이불면요민

     則豈吾兄本心。而抑非知舊之所願聞也。惟在尊兄明其鑑平其衡。能有以抑揚。無少差過也耳。賦役煩重。

     칙기오형본심。이억비지구지소원문야。유재존형명기감평기형。능유이억양。무소차과야이。부역번중

     民物彫殘。無處不然。而先聲所曁。吏胥憚震。其於發奸。不患其不神。而彼吏胥輩只欲姑拔其足。

     민물조잔。무처불연。이선성소기。리서탄진。기어발간。불환기불신。이피리서배지욕고발기족

     不念兒上之火。或貽童羖之責。則此又高明所先却慮者也。奉化爲縣。土瘠民貧。自古所稱。値此凶年。

     불념아상지화。혹이동고지책。칙차우고명소선각려자야。봉화위현。토척민빈。자고소칭。치차흉년

     民盡流移。倉專未輸。其所輸皆稊稗之不可口者。况其私乎。若依他饒土。責出公私債。或過其實。

     민진류이。전미수。기소수개제패지불가구자。황기사호。약의타요토。책출공사채。혹과기실。 

     則只傷有司色吏而已。有司色吏之傷也。齊民恐將剝盡無餘。剝此殘縣之民。以救他邑。竟何益哉。幸特賜恕斟。

     칙지상유사색리이이。유사색리지상야。제민공장박진무여。박차잔현지민。이구타읍。경하익재。행특사서짐

     某雖無似。不敢欺左右也。                                                                                

     모수무사。불감기좌우야。                                                                       

 

 [與賑恤從事官尹聖任書  여진휼종사관윤성인서    진휼 종사관 윤성인에게 준 글

 

황공하게도 존형(尊兄)께서 관장하는 일은 바로 우리 주부자(朱夫子)가 일찍이 주관하던 것으로,

여러가지 일에 대한 시행과 조치를 반드시 의리에 위배되지 않고 옛날 사람들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려고 하니

실로 영남(嶺南)의 행운입니다.

다만 말세(末世)가 되어 거짓이 불어남으로 해서 상하(上下)가 서로 적(賊)을 대하듯이 하는 폐해가 있는 풍습이

벌써 이루어지고 주군(州郡)에서도 호응을 하여 사실대로 하지 아니하니 나 자신부터 책망을 하여야 그 실상을

얻어내기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즈음에 만약 혹시라도 불쌍한 주민을 구하여다가 주민을 소란스럽게 하는 격이 됨을 모면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존형의 본래 마음이겠습니까?

그것은 친구들이 듣기를 원하는 바도 아닙니다.

오직 존형께서 그 사물을 보는 안목을 밝히고 그 저울질하기를 공평하게 하여 억제하고 드날리기를 잘해서 조금의 차질이나

과오가 없도록 하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과중한 것과 주민들의 재력이 빼빼 말라서 쇠잔한 것은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리부터 알려진 명성이 이르는 곳에 이서(吏胥:아전)들이 모두 두려워하니 그 간교함을 적발하는데 귀신처럼 못할까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저 이서의 무리들은 단지 우선 그들의 발을 빼려고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염려하지도 않고 간혹 있을 수 없는 책임을

물려주기도 하니 이런 것 또한 고명(高明:상대방에 대한 경칭)께서 먼저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봉화(奉化)고을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옛날부터 일컬어진 바인데 이런 흉년을 만나 주민들이 모두

뿔뿔이 떠나버려 창고의 곡식도 전적으로 수송하지 못하며 그 수송한 것도 모두가 돌피[제패(稊稗)]여서 먹을 수 없는데

더구나 그들의 개인적인 것이겠습니까?

만약 다른 고을의 부요한 토질의 사례를 의거하여 공채(公債)나 사채(私債)를 내놓도록 책임을 지우면서 간혹 그 실제보다

지나치게 되면 단지 유사(有司)와 담당 서리가 다칠 뿐이지만 유사와 서리가 다칠 경우에는 모든 주민들이 장차 남김없이

모두 발라 가는 공포에 질려야 하니 이 쇠잔한 고을 백성들의 재물을 발라다가 다른 고을을 구원한들 마침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특별히 용서와 참작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모(某)가 비록 보잘 것 없기는 하지만 감히 좌우(左右)를 속이겠습니까? 

 

        답금언각경서(答琴彦覺憬書)

   금경(琴憬)에게 보낸 답서(答書)이다.

 

    原文(원문)

   答琴彦覺憬書 (답금언각경서)

    前書在案。繼此情翰。又非偶然而至。春來賤數。已知吉也。山梅綻玉。夢魂所繞。一塲觴詠。願也何負。不宣。

    전서재안。계차정한。우비우연이지。춘래천수。이지길야。산매탄옥。몽혼소요。일장상영。원야하부。불선  

 

 

 [答琴彦覺憬書]    답금언각경서     금언각 경에게 답하는 글

 

앞서 보낸 편지가 아직도 책상에 있는데 우연찮게도 이 정겨운 편지가 또 잇달으니,

봄이 오면서 천한 운수[천운(賤運:자신의 운명을 낮추어 부름)가 이미 길(吉)할 줄을 알겠오.

산매화가 옥같이 흰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꿈속에서도 그 경치에 둘려 있으니 한 번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詩)읊기를 바라는데 어찌 저버리겠오.

다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답용산동주박상사명륜서(答龍山洞主朴上舍明胤書)

    박명륜(朴明胤)에게 보낸 편지로 신위(神位)가 두 사람일 경우 상향제(常享祭)를 지낼 때

    제문(祭文)을 읽고 잔을 바치는 순서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글이다.

 

     原文(원문)

    答龍山洞主朴上舍明胤書(답용산동주박상사명륜서)

    伏承辱翰。仰悉秋來雅履有相。景行祠常享祭文。屬之非人。惶愧曷勝。某雖於兩先生實蹟。得以與聞於萬一。

    복승욕한。앙실추래아리유상。경행사상향제문。속지비인。황괴갈승。모수어량선생실적。득이여문어만일。 

    其如拙斲之莫能形容何。恐重貽秉論者之指笑也。且有不可不告者。某向參川谷書院享祀。

    기여졸착지막능형용하。공중이병론자지지소야。차유불가불고자。모향참천곡서원향사。 

    見伊川雲谷兩位各有祭文。就質于寒岡。則乃曰此是退溪先生所講定。凡祝文必於初獻後讀之。若以合享。

    견이천운곡양위각유제문。취질우한강。칙내왈차시퇴계선생소강정。범축문필어초헌후독지。약이합향。 

    合製其文。讀之於伊川位初獻之時。則爲雲谷致享之意。非但歉然。未獻一爵。徑祝於他位。實乖用祝之義。

    합제기문。독지어이천위초헌지시。칙위운곡치향지의。비단겸연。미헌일작。경축어타위。실괴용축지의

    又於雲谷位初獻。不可更讀其文。若以爲兩位前均獻初爵而讀之爲宜。則獻官及讀祝者。俯伏於何位跪於何位。

    우어운곡위초헌。불가경독기문。약이위양위전균헌초작이독지위의。칙헌관급독축자。부복어하위궤어하위。 

    以故依私廟各位各文之例。定爲此規矣。某聞而記之。欽歎我大賢酌定之意曰。此規雖聖人復起不可易也。

    이고의사묘각위각문지례。정위차규의。모문이기지。흠탄아대현작정지의왈。차규수성인부기불가역야

    近聞如晦齋退溪兩先生幷享處。皆以一祭文奉安。竊自滋惑。未知讀祝節文。何以講定而合製其文也。

    근문여회재퇴계양선생병향처。개이일제문봉안。절자자혹。미지독축절문。하이강정이합제기문야。 

    欲質而不敢者久矣。以此揆之。貴院苟欲兩尊。則似當各製而各讀。否則不必合製。而於栢潭祭文。

    욕질이불감자구의。이차규지。귀원구욕양존。칙사당각제이각독。부칙불필합제。이어백담제문。 

    只曰以某先生配而已。鄙意如此。故旣與金汝精甫面講。仍以退溪所定寒岡所傳。愚蒙所誌而謹守者。

    지왈이모선생배이이。비의여차。고기여김여정보면강。잉이퇴계소정한강소전。우몽소지이근수자。 

    歷陳而恭禀。幸尊兄量處如何。如或各文以祝。則晦谷先生祭文。可以求諸斯文大手。而金上舍以享期迫頭懇敎。

   진이공품。행존형량처여하。여혹각문이축。칙회곡선생제문。가이구제사문대수。이김상사이향기박두간교。 

    不敢苦辭。草呈蕪詞。固非合用。而亦恐吾兄再書責之。則以其不可用者。致勞遠伻。亦甚未安。故不免率爾。

    불감고사。초정무사。고비합용。이역공오형재서책지。칙이기불가용자。치로원팽。역심미안。고불면솔이

    其亦罪也。                                                                                                     

    기역죄야。                                                                                    

 

 [答龍山洞主朴上舍明胤書]    답용산동주박상사명륜서    용산서원 원장 박 상사 명륜에게 답하는 글

 

삼가 보내주신 편지를 욕되게도 받아 가을이 되면서 우아한 체후에 신의 도움이 있었음을 우러러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경행사(景行祠)의 상향제문(常享祭文)은 적합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촉하였으니 황공하고 부끄러운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모(某)가 비록 두 분 선생의 실적(實蹟)에 대해서 만분위 일정도 참여하여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졸렬한 솜씨로

잘 형용해 내지 못하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아마도 거듭 사필(史筆)을 잡은 분들에게 손가락질과 웃음거리를 물려줄 듯합니다.

그리고 또 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모(某)가 그전에 천곡서원(川谷書院)의 향사(享祀)에 참여하여

이천(伊川:정이를 말함)과 운곡(雲谷:주희를 말함) 두 위(位)에 각기제문(祭文)이 있으므로 한갈선생(寒岡先生)에게 나아가

질문하였더니 한강선생의 말씀이 이는 토계선생(退溪先生)이 강정(講定)한 것인데 무릇 축문(祝文)은 반드시 초헌(初獻)뒤에

읽도록 되어 있으니 만약 합해서 제향(祭享)한다고 하여 그 축문을 합쳐서 짓고 이천위(伊川位)에 초헌할 적에 읽는 다면

운곡을 위하여 제향하는 뜻에는 겸연쩍을 뿐만 아니라 운곡위(雲谷位)에는 한 잔의 술도 올리지 못하는데 다른 위(位)에는

축문을 읽게 되니 실로 축문을 쓰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운곡위의 초헌에 그 축문을 다시 읽을 수 없으니 만약 두 위(位) 앞에 첫 번째 술잔을 균일하게 올리고 축문 읽는 것을

적합하게 여긴다면 헌관(獻官) 및 축문 읽는 사람이 어느 위(位)에 부복(俯伏)해 있으며 어느 위(位)에 꿇어앉아 있겠는가?

이 때문에 사묘(私廟:사가(私家)의 사당(祠堂)의 각위(各位)에 각각 축문을 읽는 사례에 의거하여 이 규정을 정한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모(某)가 듣고 기록해 두었으며 우리 대현(大賢)께서 참작하여 정하신 뜻을 흠모하며 감탄하기를 이 규정은 비록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회재(晦齋), 퇴계(退溪) 두 선생을 병향(幷享)하는 곳에 모두 하나의 상향 제문으로 봉안(奉安)하였다고 하는데,

그윽히 스스로 의혹이 한층 더 합니다.

그리고 축문을 읽는 절문(節文)을 어떻게 강정(講定)하여 그 축문을 합하여 지었느지 모르겠기에 질정(質正)을 하려고

하면서도 감히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헤아려 보면 귀원(貴院)에서 진실로 두 위(位)를 높이려고 한다면 각각 지어서 각각 읽도록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며 그렇지 않으면 합해서 지을 필요가 없고 백담제문(栢潭祭文)에 단지 모선생 배향이라고만 할 뿐입니다.

비의(鄙意:자신의 뜻을 낮춤)가 이와 같기 떼문에 이미 김여정 보(金汝精甫)와 대면하여 강구하였으며 그래서 퇴계선생이

정한 것과 한강선생이전한 바와 어리석은 자가 기록하여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는 것을 낱낱이 진달하면서 삼가 알리오니

바라건데 존형께서 헤아려 처리하심이 어떨는지요?

만일 혹시라도 축문을 각기 따로 한다면 회곡선생(晦谷先生)의 제문은 사문(斯文)의 큰 학자의 솜씨를 구할 수 있는데,

김상사(金上舍)가 향사(享祀) 기일이 임박하다는 것으로 간청을 하기에 감히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변변치 못한 글을

초(草)하여 올렸으나 진실로 쓰기에는 합당하지 않았으며 또한 송구스럽게도 오형(吾兄)이 두 차례 편지로 책망하는 듯하기에

그 쓸 수 없는 글 때문에 하인을 먼 곳까지 수고롭게 하는 것 또한 너무 미안스럽게 여겼으므로,

느닷없이 쓰게 되었음을 모면하지 못하게 되였으니 그것도 죄입니다.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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