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苟全先生文集
苟全先生文集
제목 서(序)
작성자 관리자 [2017-12-23 15: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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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    구전선생문집

 

 

                                                        구전집 [苟全集]

1700년경 김중청(金中淸)의 문인인 남형회(南亨會)와 손자 양열(揚烈)이 유문을 모았다.이동표(李東標1654-1700)에게 정리를

부탁했지 그가 죽는 바람에 그때까지는 유문의 정리를 마치지 못했다.1740년경 5대 외손인 이광정(李光庭1674-1756)‚현손 이명

(玄孫 爾銘)‚5대손 태운(泰運)등이 유문을 교감하여6권으로 정리하고 연보(年譜)‚행장(行狀)‚ 별집(別集)을 덧붙였다.그러나 문집

(文集)에 1769년에 쓰여진 김정균(金鼎均)의 서문(序文)이 수록되어 있고 이 서문(序文)의 내용에 후손(後孫) 영택(榮宅)이 시문

(詩文)과 가장(家狀)‚연보(年譜)를 묶어서 책을 만들고 그에게 서문을 부탁했다.라는 기록(記錄)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이후에도 다

시 한번의 정리과정을 거친 것같다.문집의 간행은 1824년 김시찬(金是瓚)이 쓴 발문과 1826년 후손 김윤근(金胤根)이 쓴 발문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1800년대 초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같다.문집(文集)의 체제는 본집(本集)은 6권으

로 정리되었고‚6권 뒤에 연보(年譜)가 수록되어 있고‚별도로 부록(附錄)과 별집(別集)이 권차(卷次)없이 수록되어 있는 형식을 취

고 있다.별집(別集)은 조천록(朝天錄)으로 김중청(金中淸)이 천추겸 사은사 허균(千秋兼謝恩使 許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中國)에 다녀왔을 때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序文]  서문

 

                                                  서문(序文)

  1744년 이광정(李光庭:1674-1756)이 쓴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이다.

  전반부에는 김중청(金中淸)의 학문(學文)과 사승(師承)관계‚ 성품 등을

  적고 있고 후반부에는 문집의 편집을 주도한 사람과 과정 등을 기록하고 있다.

 

     原文(원문)

    苟全先生文集序(구전선생문집서)

     外高祖苟全先生  私淑陶山之門人 盖甞往來嘯臯,月川,寒岡三先生之門  一時之論先生者  謂經學精邃

     외고조구전선생  사숙도산지문인 개상왕래소고,  월천,  한강삼선생지문  일시지론선생자  위경학정수

     傳鉢於川翁  文章奧健  承楷於臯老  而禮學純粹則襲訓於泗水也  當時愚伏 旅軒.沙溪.石潭.踈庵.溪巖諸賢

     전발어천옹  문장오건  승해어고로  이예학순수칙습훈어사수야  당시우복 여헌.사계.석담.소암.계암제현

     無不推先生爲畏友   則先生之見重於一時可知也   獨其立身最晩   當昏朝棼濁之際   平日之所出入遊從者

     무불추선생위외우   칙선생지견중어일시가지야   독기입신최만   당혼조분탁지제   평일지소출입유종자

     率多趍附時議   左右怵迫   動以禍福   而終不能易先生之所守   孤立於頹波激浪之中   而毅然不自失焉

     솔다추부시의   좌우출박   동이화복   이종불능역선생지소수    고립어퇴파격랑지중  이의연불자실

     之在當時  庶幾其不緇不磷者  而不知者或病其不能高蹈遠引  此則先生非不能也   不得已也   當是時

     지재당시  서기기불치불린자  이불지자혹병기불능고도원인  차칙선생비불능야   부득이야   당시시

     親年老矣   不暇度時之不可   而日望其榮養焉   不啻如歐陽生之父母   以先生之純孝   其果拂親意乎

     친년노의   불가도시지불가   이일망기영양언   불시여구양생지부모   이선생지순효   기과불친의호    

     故先生之仕也   常不樂於在朝   而只欲覔小縣爲養而止耳   嗟呼   先生之解新安龜也   從容白大人公

     고선생지사야   상불락어재조   이지욕멱소형위양이지이   차호   선생지해신안구야   종용백대인공

     欲尋其遂初而不可得  則顧二子曰君親之間  不得自由  要爲吾所可爲者而已  其意亦可悲矣  先生抱負甚大

     욕심기수초이불가득  칙고이자왈군친지간  부득자유  요위오소가위자이이  기의역가비의  선생포부심대

     雅有經濟之志  其寓南陽里  自稱草廬子 盖有意於躬耕之翁  及其扼於時  不得行其所學  而亦不能以意去就

     아유경제지지  기우남양리  자칭초려자 개유의어궁경지옹   급기액어시   부득행기소학  이역불능이의거취

     則又以苟全名焉    先生之才之學    一無所試也    然觀先生之治新安    可知其施之無不宜

     칙우이구전명언    선생지재지학    일무소시야    연관선생지치신안    가지기시지무불의

     而愚伏先生常恨經席不得與先生同登   則其學之宜於致君又可見也   不暇淺弊小孫一二譚也   先生之沒

     이우복선생상한경석부득여선생동등   칙기학지의어치군우가견야   불가천폐소손일이담야   선생지몰

     縣人享先生于槃泉精舍 而先生之門人塔窩南公亨會與先生孫生員公揚烈 裒先生遺文爲十餘卷 而未及繕寫爲凈藁

     현인향선생우반천정사 이선생지문인탑와남공형회여선생손생원공양열 부선생유문위십여권 이미급선사위정고

     甞以校讐之役 託之懶隱李學士東標  功未及而李公不幸  今光庭亦老矣  與先生玄孫進士爾銘五代孫生員泰運諸人

     상이교수지역 탁지라은이학사동표  공미급이이공불행  금광정역노의  여선생현손진사이명오대손생원태운제인

     重加勘正 附以諸公道述先生者  爲文集六卷  更蒐巾衍所藏古記及先生日錄 究其言行始終  爲行狀年譜附諸其下

     중가감정 부이제공도술선생자  위문집육권  경수건연소장고기급선생일록 구기언행시종  위행장년보부제기하

     而又叙其編摩顚末如右  書之卷首   上之二十年甲子日南至  平原李光庭謹書          

     이우서기편마전말여우  서지권수   상지이십년갑자일남지  평원이광정근서           

 

 

구전선생문집서문(苟全先生文集序文)

 

외고조(外高祖) 구전선생(苟全先生)이 퇴계 문인[도산문인:陶山門人]에게 사숙(私叔) 하며,

일찍이 소고,박승임(嘯皐朴承任), 월천,조 목(月川趙 穆), 한강,정 구(寒岡鄭 逑) 세 분 선생에게 왕래하였으므로,

한때 선생을 평론하는 이들이 경학(經學)의 정수(精髓)는 월천에게서 전해 받았고,

문장(文章)의 오건(奧健)함은 소고(嘯皐) 에게서 본받았고,

예학(禮學)의 순수(純粹)함은 한강(寒岡) 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말하였으며,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1563(명종18)~1633(인조11)인조 때의 성리학자.자 경임(景任)호 우복(愚伏)시호 문장(文莊),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명종9)~1637(인조15)조선 중기의 문신 자 덕회(德晦)호 여헌(旅軒)시호 문관(文康),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1548(명종3)~1631(인조9)조선중기의 학자,문신 자 희원(希元)호 사계(沙溪)시호 문원(文元),

석담(石潭:이윤우(李潤雨)1569(선조2)~1634(인조12)조선시대의 문신,자 무백(茂伯)호 석담(石潭)

소암(疎庵:임숙영(任叔英)1576(선조9)~1623(인조1) 자 무숙(茂叔)호 소암(疎庵)

계암(溪巖:김   영(金   坽)1577(선조10)~1641(인조19) 자 자준(子峻) 호계암(溪巖) 시호 문정(文貞) 등,

제현이 선생을 추앙하여 존경하는 벗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선생이 그 시대에 정중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지 그의 입신 출세가 매우 늦은 편이였으며,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으로 혼탁한 무렵을 당하여

평소에 드나들며 종유(從遊)하던 자들이 거의 당시의 여론을 따르며 아부하는 이가 많아 좌우에서 겁을 주며

핍팍하고 화복(禍福)을 가지고 움직여 보려고 하였지만  끝내 선생의 지조를 바꿀 수 없었으며,

무너져 내리는 세파(世波)의 격열한 물결 속에서 외로이 서서 의연(毅然)하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선생이 당시에 있어서는 거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던 분이였다. 

그러나 선생을 모르는 이들은 간혹 먼 곳으로 떠나가 은거(隱居)하지 않았음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는 선생이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고 어쩔 수가 없어서였다.

이때를 당하여 어버이의 연세가 많아 시기적으로 불가하다는 상황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그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봉양하기를 날마다 바라기를

구양생(歐陽生) 의 부모(父母)와 같았을 뿐만이 아니였으니,

선생의 순수한 효성으로서 과연 어버이의 뜻을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선생이 벼슬살이를 하면서 어제나 조정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고 단지 조그마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였다.

아아!! 선생이 성주목사(星州牧使)의 인수(印綬)를 풀면서 조용히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고

그의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야인(野人)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숙망(宿望)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의 두 자제를 돌아보며 임금과 어버이 사이에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하였으니,

그의 뜻 역시 서글프다고 하겠다.

선생의 포부(抱負)는 대단히 크고 본래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하려는 뜻이 있었지만,

그가 <예안(禮安)>의 남양리(南陽里)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초려자(草廬子)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몸소 경작하는 늙은라는데 뜻을 두어서 이다.

그러나 그가 당시에 제재를 당하여 그가 학문한 바를 시행할 수 없었고 또한 뜻대로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은퇴할 수 없었기에 또,

구차하게 온전하다[苟全]는 것으로 호(號)를 지었던 것이니,

선생의 재능과 학문을 한번도 시험할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성주를 다스렸을 때를 관찰하면,

그 시행한 일들이 적절하지 않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복 선생이 늘 경석(經席)에 선생과 함께 오를 수 없었음을 한스럽게 여겼으니,

그의 학문은 임금을 성취시키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 재주와 학문이 얕아 

보잘 것 없는 외손(外孫)의 한 두 마디 말로는 표현할 겨를이 없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고을의 사람들이 선생을 반천정사(槃泉精舍)에서 제향(祭享) 하였으며,

선생의 문인(門人)인 탑와(塔窩) 남공 형회(南公亨會)가 선생의 손자 생원공(生員公) 양열(揚烈)과

선생의 유문(遺文)을 모아 10여 권(卷)을 만들었으나,

미처 정서(精書)하여 정고(淨稿:정서된 원고)를 만들지 못하고 교정[矯訂]하는 역사(役事)를

나은(懶隱) 이학사 동표(李學士東標)에게 부탁하였는데,

그일이 끝나기도 전에 이공(李公)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광정(光庭)도 늙었기에 선생의 현손(玄孫) 진사 이명(爾銘)과 5대손 생원(生員) 태운(泰運) 등 여러 사람과,

다시 감정(勘正:헤아려 바로잡음)을 더하고 제공(諸公)이 선생에 대하여

도술(道述) 한 내용을 덧붙여 문집(文集) 여섯 권을 만들고,

다시 명주로 바른 상자[포상:巾箱]에 간직해 둔 고기(古記) 및 선생 일록(日錄)을 수집하고,

그 언행(言行)의 시종(始終)을 추적하여 행장(行狀) 과 연보(年譜)를 만들어 그아래에다 붙이고,

또 그것을 편집하여 감수한 전말(顚末)을 위와 같이 책 머리에다 쓴다.

 

영조(英祖)20년(1744) 南至[남지:동짓달]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은 삼가 쓰다.

 

[사숙(私叔:직접 가르침을 안 받았으나 그 사람의 덕을 사모하고 본받아서 도(道)나 학문을 닦음.]

[구양생(歐陽生:한(漢)나라 천승(千乘)사람.자 는 화백(和伯)임.]

[경석(經席: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자리.]

[행장(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에 지낸 일을 적은 글.]

[연보(年譜:한평생 지낸 일을 연도에 따라서 간단하게 적은 글.]

[도술(道述:말로 도설(道設)하거나 시술(記述)함.]

 

 

                                             [後序] 후서

     1769년 김정균(金鼎均)이 쓴 문집의 후서(後序)이다.

    김중청(金中淸)의 후손 김영택(金榮宅)이 시문(詩文)과 가장(家狀)‚ 연보(年譜)를

    묶어서 책(冊)을 만들고 그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한 것이다.

 

 

     原文(원문)

    後序(후서)

    文章載道之器    離於道則文雖善 君子不取也    國朝儒林之盛    嶺南甲於八路    古之學士大夫輒推爲鄒魯

    문장재도지기    이어도칙문수선 군자불취야    국조유림지성    영남갑어팔로    고지학사대부첩추위추노

    盖以名賢輩出  倡明道學 不專以文章見稱也   永嘉  嶺之大州 我金又永之望族也  麗朝以來   固已詩禮著聞

    개이명현배출  창명도학 불전이문장견칭야   영가  영지대주 아김우영지망족야  려조이래   고이시예저문

    迄于國初   寶白堂先生始大顯焉   先生卽寒暄金文敬道義之友   而蚤闡嵬科   文學冠一世   官至玉署薇垣長

    흘우국초   보백당선생시대현언   선생즉한훤김문경도의지우   이조천외과   문학관일세   관지옥서미원장

    言論風節   至今爲鄕邦之矜式  俎豆以尸祝之  先生之後五傳而爲苟全公諱中淸  自少擩染家訓  學有淵源

    언론풍절   지금위향방지긍식  조두이시축지  선생지후오전이위구전공휘중청  자소유염가훈  학유연원

    長則從游於鄭寒岡,趙月川,朴嘯臯之門   盡得性理典禮之奧  壬辰島夷之亂 以白衣討賊 旋登萬曆庚戌第

    장칙종유어정한강,  조월천,  박소고지문   진득성리전예지오  임진도이지란 이백의토적 선등만력경술제

    踐歷㙜閣  仍値昏朝否運  自屛田野 間甞一充行臺赴京  而歸卽除銀臺  亦不就 竟卒於鄕廬 噫公生長文獻之家

    천력대각 잉치혼조부운  자병전야 간상일충행대부경  이귀즉제은대  역불취 경졸어향려 희공생장문헌지가  

    又得賢師友以爲依歸 立朝數十年  歷敭內外  其經禮講討之說 出處事爲之實  必多有不朽之傳  而歲月寢遠

    우득현사우이위의귀 입조수십년  역양내외  기경예강토지설 출처사위지실  필다유불후지전  이세월침원

    家乘散佚 平生著述什不存一二 吁可惜哉 然其爲文 眞正平實 根據理義 不沾沾爲作者家法 而繩墨自中於閩洛

    가승산일 평생저술십불존일이우가석재  연기위문 진정평실 근거이의 불점점위작자가법 이승묵자중어민락

    詩亦忠厚感發 往往不失三百篇宗旨 觀於倡義時疏檄及朝天日錄 猶可識全鼎之一臠矣 况乎晩年樹立 卓然不撓

    시역충후감발 왕왕부실삼백편종지 관어창의시소격급조천일록 유가식전정지일련의 황호만년수립 탁연불요 

    自號曰苟全者 不待諸葛公梁甫之吟 而想見其平日所存 則玆豈非有得於傳受而然歟 吾先祖文忠公與公爲族兄弟

    자호왈구전자 부득제갈공양보지음 이상견기평일소존 칙자기비유득어전수이연여 오선조문충공여공위족형제

    輓公詩有曰同宗何幸有公賢   私淑陶山學月川   斯一言亦足爲公重也   公之後孫榮宅等   裒輯公若干詩文

    만공시유왈동종하행유공현   사숙도산학월천   사일언역족위공중야   공지후손영택등   부집공약간시문

    附以年譜家狀  編爲一書 以余爲文忠之後  徵弁卷之文  顧此眇末何敢爲役  而義有不可辭者  謹畧叙本末而歸之

    부이연보가장  편위일서 이여위문충지후  징변권지문  고차묘말하감위역  이의유불가사자  근략서본말이귀지 

    後之覽公集者  一言蔽曰載道之文  則亦可謂知公也夫

    후지람공집자  일언폐왈재도지문  칙역가위지공야부

                        崇禎三己丑陽月下澣  文忠公後孫通政大夫前行成均舘大司成鼎均序 

                        숭정삼기축양월하한  문충공후손통정대부전행성균관대사성정균서 

 

[後序]  후서

 

문장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

그래서 도를 떠나면 문장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군자(君子)는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

조선조에서 유림(儒林)의 융성하기가 영남(嶺南)이 팔도(八道)에서 으뜸이였기에 옛날의

학사 대부(學士大夫)가 번번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추앙하였었다.

그것은 대체로 명현(名賢)이 배출(輩出)되어 도학(道學)을 제창(提唱)하고 밝혔기 때문이며,

오로지 분장만으로 칭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동[安東:영가(永嘉)옛 지명]은 영남의 큰 고을이고 우리 안동 김씨 또한 안동의 명망이 있는 집안 이다.

고려조(高麗祖)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시문(詩文)과 예절(禮節)로 알려져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보백당(寶白堂:김계행(金係行) 선생이 비로소 크게 드러났으니,

보백당선생은 바로 한훤당(寒喧堂:김굉필(金宏弼) 김 문경공(金文敬公)과 도덕과 의리를 강론한 친구인데

일찍이 과거에 합격 하였고,

문학(文學)은 한 세대에서 뛰어났으며,

벼슬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는데,

언론(言論)과 풍절(風節)이 지금까지 향방(鄕邦)의 모범이 되었기에 제향(祭享)을 받들며,

존숭(尊崇:존경하고 숭배함) 하고 있다.

보백당의 5대 손으로 구전공(苟全公)이 태어났는데,

휘(諱: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자 앞에 붙임)는 중청(中淸)으로 어렸을 적부터 가훈(家訓)을 잘 지켜 학문을 하면서

연원(淵源:사물의 근본)이 있었고,

장성 하여서는 정한강(鄭寒岡)조월천(趙月川)박소고(朴嘯皐)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학덕있는 사람과 더불어 놂)

하여 성리(性理)와 전례(典禮)의 오묘함을 터득하였었다.

그리고 임진년(선조25년 1592) 섬 오랑캐의 나리에는 아무런 관직도 없는 백의(白衣)로 왜적을 토벌하셨으며,

곧바로 만력(萬曆: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경술년(庚戌年광해군2년1610)의 과거에 합격하여 대각(臺閣)을 역임하셨다.

그러다가 광해군(光海君) 난정의 비색(부새(否塞):운수가 꽉막힘.) 한

운수를 만나서는 스스로 초야[전야간(田野間)]로 물러났으며,

일찍이 한 차례 행대(行臺) 에 충원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고,

곧바로 은대(銀臺)에 임명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고 마침내 향려(鄕廬:시골집) 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아! 공이 문헌가(文獻家)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며,

또 현명한 스승과 친구를 얻어서 의귀(依歸)하였고,

조정에서 벼슬살이 한지 수십년 동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 을 역임 하면서

그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을 강구하고 토론한 사람이 처세(處世) 하는 근본이 되는 일을  일삼아 한데 대해서

틀림없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야 할 글이 많이 있을 터인데,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가승(家乘:한 집안의 기록)이 흩어지고 유실되어 평생의 저술이 열에 한 두 권도 보존되지

못하였으니  아! 애석하게 여길 만하도다.

그러나 그 문장이 진실되고 올바르며 평이하고 충실하여 도리와 의리에 근거하고

경박(輕薄)하지 않아 작자(作者)의 가법(家法)이 될 만하여 법도는 저절로 민락(閩洛) 에 맞고,

시(詩) 또한 충후(忠厚)한 마음에 감응 발로되어 가끔 삼백편의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주장이 되는

뜻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의 상소(上疏)와 격문(檄文) 및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기록[朝天日錄]을 관찰하면

오히려 온 솥의 고기 맛을 한 점의 고기로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더구나 만년(晩年)에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구전(苟全)이라 하였으니,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梁甫吟)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그 평소의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바를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여 받음에 얻은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金尙憲)에 이르기를,

일가에 어찌나 다행스럽게도 공과 같은 어진 이가 있었던가?

퇴걔선생을 사숙(私叔)하면서 월천에게 배윗네. 라고 하셨으니,

이 한 마디가 역시 공을 존중히 여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공의 후손 영택(營宅) 등이 공의 시문(詩文) 약간을 수집하고,

연보(年譜)를 부쳐 한 책을 편집하고는 나를 문충공의 후손이라고 하여 책의 서문을 써 주기를 요구하였다.

돌아보건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마는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삼가 간략하게 본말(本末)을 서술하여 돌려주는 바이다.

뒷날 공의 문집을 보는 자가 한 마디로 전체를 표현하여 말하기를,

도를 실은 문장이다.

라고 한다면,

역시 공을 안다고 말할 만 하갰다.

 

숭정(崇禎: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삼기축(三己丑1769,영조45) 10월[陽月] 하순[澣]

문충공(文忠公)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 성균관 대사성(前行成均館大司成)김 정균(金鼎均)은 서문을 쓰다.

 

[추로지향(鄒魯之鄕:추(鄒)나라는 맹자(孟子)의 출생지 이고, 노(魯)나라는 공자(孔子)의 출생지 이니

                즉 공자와 맹자의 고향 이란 뜻 예절과 학문이 왕성(旺盛)한 곳을 이름.]

[대각(臺閣: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털어 일컬음.]

[행대(行臺:삼사신(三使臣)의 하나인 종사관(從事官)의 별칭.]

[은대(銀臺:승정원(承政院)의별칭.]

[문헌가(文獻家:문물제도의 전거가 되는 집안]

[내직(內職: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水原)광주(廣州)개성(開城)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

[외직(外職:지방 각 관아의 관직.지방관.]

[민락(閩洛:송(宋)나라 때의 이학(理學)은 이정(二程:정호(程顥),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첯번째로 꼽는데,

  이 두 학파(學派)를 일컬음.]

[양보음(梁甫吟:한(漢)나라의 악부(樂府).사마상여가사(司馬相如歌辭)의 초조곡명(楚調曲名). 일설에서는 제갈량이

  지었다고도한다.양보는 태산(太山)아래에 있는 산 이름.사람이 죽으면 이산에 장사낸다는 내용을 읊고 있다.]

[문충공(文忠公:金尙憲)이 공(公)과는 족형제(族兄弟)가 되는데 공에 대한 만시(輓詩: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장사지낼 때에 비단 또는 종이에 적어서 기(旗)를 만들어 상여(喪與)뒤를 따름,만장(輓章)이라고도함.]

[사숙(私叔:경모(敬慕)하는 사람에게 직접배움 없이 단지 그 사람을 본받아 도(道)나 학문(學問)을 닦음.]

[연보(年譜(와가장(家狀:집안 선대 어른의 행적(行蹟)에 관한 사사 기록, 또는 집안 선대 어른의 행장(行狀)]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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