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序) | ||||||||
작성자 | 관리자 [2017-12-23 15:14: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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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文集] 구전선생문집
[序文] 서문
구전선생문집서문(苟全先生文集序文)
외고조(外高祖) 구전선생(苟全先生)이 퇴계 문인[도산문인:陶山門人]에게 사숙(私叔) 하며, 일찍이 소고,박승임(嘯皐朴承任), 월천,조 목(月川趙 穆), 한강,정 구(寒岡鄭 逑) 세 분 선생에게 왕래하였으므로, 한때 선생을 평론하는 이들이 경학(經學)의 정수(精髓)는 월천에게서 전해 받았고, 문장(文章)의 오건(奧健)함은 소고(嘯皐) 에게서 본받았고, 예학(禮學)의 순수(純粹)함은 한강(寒岡) 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말하였으며,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1563(명종18)~1633(인조11)인조 때의 성리학자.자 경임(景任)호 우복(愚伏)시호 문장(文莊),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1554(명종9)~1637(인조15)조선 중기의 문신 자 덕회(德晦)호 여헌(旅軒)시호 문관(文康),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1548(명종3)~1631(인조9)조선중기의 학자,문신 자 희원(希元)호 사계(沙溪)시호 문원(文元), 석담(石潭:이윤우(李潤雨)1569(선조2)~1634(인조12)조선시대의 문신,자 무백(茂伯)호 석담(石潭) 소암(疎庵:임숙영(任叔英)1576(선조9)~1623(인조1) 자 무숙(茂叔)호 소암(疎庵) 계암(溪巖:김 영(金 坽)1577(선조10)~1641(인조19) 자 자준(子峻) 호계암(溪巖) 시호 문정(文貞) 등, 제현이 선생을 추앙하여 존경하는 벗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선생이 그 시대에 정중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지 그의 입신 출세가 매우 늦은 편이였으며,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으로 혼탁한 무렵을 당하여 평소에 드나들며 종유(從遊)하던 자들이 거의 당시의 여론을 따르며 아부하는 이가 많아 좌우에서 겁을 주며 핍팍하고 화복(禍福)을 가지고 움직여 보려고 하였지만 끝내 선생의 지조를 바꿀 수 없었으며, 무너져 내리는 세파(世波)의 격열한 물결 속에서 외로이 서서 의연(毅然)하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선생이 당시에 있어서는 거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던 분이였다. 그러나 선생을 모르는 이들은 간혹 먼 곳으로 떠나가 은거(隱居)하지 않았음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는 선생이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고 어쩔 수가 없어서였다. 이때를 당하여 어버이의 연세가 많아 시기적으로 불가하다는 상황을 헤아릴 겨를도 없이 그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봉양하기를 날마다 바라기를 구양생(歐陽生) 의 부모(父母)와 같았을 뿐만이 아니였으니, 선생의 순수한 효성으로서 과연 어버이의 뜻을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선생이 벼슬살이를 하면서 어제나 조정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고 단지 조그마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였다. 아아!! 선생이 성주목사(星州牧使)의 인수(印綬)를 풀면서 조용히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고 그의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야인(野人)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숙망(宿望)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의 두 자제를 돌아보며 임금과 어버이 사이에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말하였으니, 그의 뜻 역시 서글프다고 하겠다. 선생의 포부(抱負)는 대단히 크고 본래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하려는 뜻이 있었지만, 그가 <예안(禮安)>의 남양리(南陽里)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초려자(草廬子)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몸소 경작하는 늙은라는데 뜻을 두어서 이다. 그러나 그가 당시에 제재를 당하여 그가 학문한 바를 시행할 수 없었고 또한 뜻대로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은퇴할 수 없었기에 또, 구차하게 온전하다[苟全]는 것으로 호(號)를 지었던 것이니, 선생의 재능과 학문을 한번도 시험할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이 성주를 다스렸을 때를 관찰하면, 그 시행한 일들이 적절하지 않음이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복 선생이 늘 경석(經席)에 선생과 함께 오를 수 없었음을 한스럽게 여겼으니, 그의 학문은 임금을 성취시키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어 재주와 학문이 얕아 보잘 것 없는 외손(外孫)의 한 두 마디 말로는 표현할 겨를이 없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고을의 사람들이 선생을 반천정사(槃泉精舍)에서 제향(祭享) 하였으며, 선생의 문인(門人)인 탑와(塔窩) 남공 형회(南公亨會)가 선생의 손자 생원공(生員公) 양열(揚烈)과 선생의 유문(遺文)을 모아 10여 권(卷)을 만들었으나, 미처 정서(精書)하여 정고(淨稿:정서된 원고)를 만들지 못하고 교정[矯訂]하는 역사(役事)를 나은(懶隱) 이학사 동표(李學士東標)에게 부탁하였는데, 그일이 끝나기도 전에 이공(李公)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광정(光庭)도 늙었기에 선생의 현손(玄孫) 진사 이명(爾銘)과 5대손 생원(生員) 태운(泰運) 등 여러 사람과, 다시 감정(勘正:헤아려 바로잡음)을 더하고 제공(諸公)이 선생에 대하여 도술(道述) 한 내용을 덧붙여 문집(文集) 여섯 권을 만들고, 다시 명주로 바른 상자[포상:巾箱]에 간직해 둔 고기(古記) 및 선생 일록(日錄)을 수집하고, 그 언행(言行)의 시종(始終)을 추적하여 행장(行狀) 과 연보(年譜)를 만들어 그아래에다 붙이고, 또 그것을 편집하여 감수한 전말(顚末)을 위와 같이 책 머리에다 쓴다.
영조(英祖)20년(1744) 南至[남지:동짓달]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은 삼가 쓰다.
[사숙(私叔:직접 가르침을 안 받았으나 그 사람의 덕을 사모하고 본받아서 도(道)나 학문을 닦음.] [구양생(歐陽生:한(漢)나라 천승(千乘)사람.자 는 화백(和伯)임.] [경석(經席: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는 자리.] [행장(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평생에 지낸 일을 적은 글.] [연보(年譜:한평생 지낸 일을 연도에 따라서 간단하게 적은 글.] [도술(道述:말로 도설(道設)하거나 시술(記述)함.]
[後序] 후서
문장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 그래서 도를 떠나면 문장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군자(君子)는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 조선조에서 유림(儒林)의 융성하기가 영남(嶺南)이 팔도(八道)에서 으뜸이였기에 옛날의 학사 대부(學士大夫)가 번번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추앙하였었다. 그것은 대체로 명현(名賢)이 배출(輩出)되어 도학(道學)을 제창(提唱)하고 밝혔기 때문이며, 오로지 분장만으로 칭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동[安東:영가(永嘉)옛 지명]은 영남의 큰 고을이고 우리 안동 김씨 또한 안동의 명망이 있는 집안 이다. 고려조(高麗祖)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시문(詩文)과 예절(禮節)로 알려져 조선조 초기에 이르러 보백당(寶白堂:김계행(金係行) 선생이 비로소 크게 드러났으니, 보백당선생은 바로 한훤당(寒喧堂:김굉필(金宏弼) 김 문경공(金文敬公)과 도덕과 의리를 강론한 친구인데 일찍이 과거에 합격 하였고, 문학(文學)은 한 세대에서 뛰어났으며, 벼슬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르렀는데, 언론(言論)과 풍절(風節)이 지금까지 향방(鄕邦)의 모범이 되었기에 제향(祭享)을 받들며, 존숭(尊崇:존경하고 숭배함) 하고 있다. 보백당의 5대 손으로 구전공(苟全公)이 태어났는데, 휘(諱: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자 앞에 붙임)는 중청(中淸)으로 어렸을 적부터 가훈(家訓)을 잘 지켜 학문을 하면서 연원(淵源:사물의 근본)이 있었고, 장성 하여서는 정한강(鄭寒岡)조월천(趙月川)박소고(朴嘯皐)의 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학덕있는 사람과 더불어 놂) 하여 성리(性理)와 전례(典禮)의 오묘함을 터득하였었다. 그리고 임진년(선조25년 1592) 섬 오랑캐의 나리에는 아무런 관직도 없는 백의(白衣)로 왜적을 토벌하셨으며, 곧바로 만력(萬曆: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경술년(庚戌年광해군2년1610)의 과거에 합격하여 대각(臺閣)을 역임하셨다. 그러다가 광해군(光海君) 난정의 비색(부새(否塞):운수가 꽉막힘.) 한 운수를 만나서는 스스로 초야[전야간(田野間)]로 물러났으며, 일찍이 한 차례 행대(行臺) 에 충원되어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고, 곧바로 은대(銀臺)에 임명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고 마침내 향려(鄕廬:시골집) 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아! 공이 문헌가(文獻家)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며, 또 현명한 스승과 친구를 얻어서 의귀(依歸)하였고, 조정에서 벼슬살이 한지 수십년 동안 내직(內職)과 외직(外職) 을 역임 하면서 그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을 강구하고 토론한 사람이 처세(處世) 하는 근본이 되는 일을 일삼아 한데 대해서 틀림없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야 할 글이 많이 있을 터인데,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가승(家乘:한 집안의 기록)이 흩어지고 유실되어 평생의 저술이 열에 한 두 권도 보존되지 못하였으니 아! 애석하게 여길 만하도다. 그러나 그 문장이 진실되고 올바르며 평이하고 충실하여 도리와 의리에 근거하고 경박(輕薄)하지 않아 작자(作者)의 가법(家法)이 될 만하여 법도는 저절로 민락(閩洛) 에 맞고, 시(詩) 또한 충후(忠厚)한 마음에 감응 발로되어 가끔 삼백편의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주장이 되는 뜻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의 상소(上疏)와 격문(檄文) 및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기록[朝天日錄]을 관찰하면 오히려 온 솥의 고기 맛을 한 점의 고기로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더구나 만년(晩年)에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호(號)를 구전(苟全)이라 하였으니,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양보음(梁甫吟)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그 평소의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바를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여 받음에 얻은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金尙憲)에 이르기를, 일가에 어찌나 다행스럽게도 공과 같은 어진 이가 있었던가? 퇴걔선생을 사숙(私叔)하면서 월천에게 배윗네. 라고 하셨으니, 이 한 마디가 역시 공을 존중히 여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공의 후손 영택(營宅) 등이 공의 시문(詩文) 약간을 수집하고, 연보(年譜)를 부쳐 한 책을 편집하고는 나를 문충공의 후손이라고 하여 책의 서문을 써 주기를 요구하였다. 돌아보건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마는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삼가 간략하게 본말(本末)을 서술하여 돌려주는 바이다. 뒷날 공의 문집을 보는 자가 한 마디로 전체를 표현하여 말하기를, 도를 실은 문장이다. 라고 한다면, 역시 공을 안다고 말할 만 하갰다.
숭정(崇禎: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삼기축(三己丑1769,영조45) 10월[陽月] 하순[澣] 문충공(文忠公)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 성균관 대사성(前行成均館大司成)김 정균(金鼎均)은 서문을 쓰다.
[추로지향(鄒魯之鄕:추(鄒)나라는 맹자(孟子)의 출생지 이고, 노(魯)나라는 공자(孔子)의 출생지 이니 즉 공자와 맹자의 고향 이란 뜻 예절과 학문이 왕성(旺盛)한 곳을 이름.] [대각(臺閣: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털어 일컬음.] [행대(行臺:삼사신(三使臣)의 하나인 종사관(從事官)의 별칭.] [은대(銀臺:승정원(承政院)의별칭.] [문헌가(文獻家:문물제도의 전거가 되는 집안] [내직(內職:서울에 있는 각 관아의 관직 및 수원(水原)광주(廣州)개성(開城)의 유수(留守). 경관직(京官職)] [외직(外職:지방 각 관아의 관직.지방관.] [민락(閩洛:송(宋)나라 때의 이학(理學)은 이정(二程:정호(程顥),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첯번째로 꼽는데, 이 두 학파(學派)를 일컬음.] [양보음(梁甫吟:한(漢)나라의 악부(樂府).사마상여가사(司馬相如歌辭)의 초조곡명(楚調曲名). 일설에서는 제갈량이 지었다고도한다.양보는 태산(太山)아래에 있는 산 이름.사람이 죽으면 이산에 장사낸다는 내용을 읊고 있다.] [문충공(文忠公:金尙憲)이 공(公)과는 족형제(族兄弟)가 되는데 공에 대한 만시(輓詩: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장사지낼 때에 비단 또는 종이에 적어서 기(旗)를 만들어 상여(喪與)뒤를 따름,만장(輓章)이라고도함.] [사숙(私叔:경모(敬慕)하는 사람에게 직접배움 없이 단지 그 사람을 본받아 도(道)나 학문(學問)을 닦음.] [연보(年譜(와가장(家狀:집안 선대 어른의 행적(行蹟)에 관한 사사 기록, 또는 집안 선대 어른의 행장(行狀)]
<<14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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