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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2017-12-23 15: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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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刊辭]   발간사

 

 

[苟全先生文集] 구전선생문집을 국역(國譯) 중간(重刊)하면서         김 우현 (金 玗顯)

 

구전선조(苟全先祖)의 글월은 한마디로 도문(道文)이라고 선대의 학자들은 평(評) 했다.구전 선조가 부경별장첩 후서에 쓰시길 고지의이 금지언야(古之意而 今之言也:오늘날의 말은 옛날의 뜻인즉)유금지언득고지의칙금언유야(由今之言得古之意則今言由古也:옛사람의 뜻을 오늘날의 말로 얻게 되는 것이니 오늘의 말이 옛말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라고 하신 바와 같이 옛과 오늘이 한문과 한글처럼 간극(間隙)이 있는 게 아니라 옛 것을 오늘에 살려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이 옛거울 혹은 미래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서 바르게 살아가란 뜻이기에 옛거울인 구전선조의 문집을 국역해낸 의의는 세대간의 문화 단절을 메우고 미래를 살아갈 시금석(試金石)으로 삼기 위함에 있다.선조(先祖)께서는 조선조(朝鮮朝) 중기(中紀)의 문신(文臣)이자 학자(學子)이시며 후학(後學)을 가르치신 훌륭한 선생님이셨다.주자학(朱子學)이 퇴계(退溪)선생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면 퇴계학을 오롯이 체득(體得)하신 분으로서 학맥(學脈)을 이으신 분이 바로 구전(苟全)선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구전 선조께서는 퇴계선생을 경모(景慕)하시어 퇴계선생의 제자들이신,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월천(月川:조목(趙穆),한강(寒岡:정구(鄭逑) 세 분 선생께 학문의 정수(精髓)를 이어받으셨다.원전(原典) 문집서문(文集序文)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경학(經學)의 정수(精髓)는 조월천 선생께서 전해 받았고 문장(文章)의 오건(奧健)함은 박소고 선생에게서 본받았으며 예학(禮學)의 순수함은 정한강 선생에게서 물려 받으셨다.는 말과 같이한 분 스승보다는 세 분 스승의 장(長)기만 취하셔서 하나로 이루셨으니 퇴계 선생의 법통(法統)을 바로 이으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나의 14대조(代祖)이신 구전선조께서는 안동김문(安東金門) 태사공(太師公)의 후예로 보백당(寶白堂:계행(係行)의 현손(玄孫)으로서 1566년(명종21년) 12월 20일 봉화현(奉化縣) 만퇴리(晩退里)에서 고(考)이신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이신 몽호(夢虎)선조와 반남박씨(潘南朴氏)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1629년(인조7년)6월 13일에 6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선조의 휘(諱)는 중청(中淸)이시며 어려서(8세)부터 외종조부이신 박소고 선생에게서 글을 배우셨으며 14세때부터는 월천서당(月川書堂)에 가서 수업하셨다.원래 학문의 연마와 경학(經學) 전수(傳授)에 끗이 있으셨는데 부모님의 강권에 못이겨 늦게야 과거(1610 광해군2년)인 42세때)에 급제하셔서 사헌부간찰(司憲府監察),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예조정랑겸 지제교(禮曹正郞兼知製敎),천추사겸 사은사 거장관(千秋使兼謝恩使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오셨으며 세자시강원 문학필선(文學弼善),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경상우도시관(慶尙右道試官),신안현감(新安縣監:현재의성주)분승정원승지(分承政院承旨),영남선유사(嶺南宣諭使),호소사(號召使)를 역임하셨고 자급(資級)은 봉조하(奉朝賀)로 통정대부(通政大夫:正三品당상관(堂上官) 품계(品階) 셨으며 사후에 반천정사(槃泉精舍:후에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祭享)하셨는데 조선 말기에 대원군에 의한 서원 철폐로 말미암아 아직까지도 서원이 복원(復院)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잔손(孱孫)된 입장에서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선조의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환로(宦路) 역시 평탄치 못하셨으며 인간적으로도 앞서 보낸 아내와 사위 및 자식들로 인해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는 없겠다.그 어른이 사셨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세계적으로 변혁이 시작되는 때였다.일본(日本)은 서양(西洋)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시도하고 중국에서는 후금(後金)세력이 강성해져 명(明)의 멸망이 가속화 되였다.한편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이고 영국,스페인, 포루투칼 등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국가들은 인도와 아메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 했다.국내에서는 광해군 때 서인, 남인 세력이 무너지고 대북(大北)파가 정권을 독점하다가 서인이 주축이 된 인조 반정이 되는 등 한창 붕당(朋黨)이 시작되어 서로 헐뜯는 시기에 관직에 나가셨고 또 임란과 정묘의 구 차례 전란(戰亂)을 겪으신 고난의 역정(歷程)이셨다.선조께서는 선생의 가르침대로 항상 내오(內奧)를 삼가[신기독야(愼其獨也)] 자기 수양에 힘쓰시는 한편 성현들의 학문을 연마하셨으며 후학들의 가르침 또한 게을리 하시지 않으셔서 문인들만도 백 여명이나 된다.관직(官職)에 나아가기전 27세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충의(忠義)를 몸소 실천하셨으며 효성이 지극하시고 관직에 나아가셔서도 군자지도를 행하셔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시고 휼민(恤民)에 힘쓰셨으며 학문적으로도 경전(經典)은 문론 제자(諸子)와 사기(史記)에 두루 통하셨고 정오(精奧)한 성리학(性理學)이나 예학(禮學)과 주역(周易)에도 두루 정진하셨던 바가 이 문집 곳곳에 베어있음을 알 수 있다.원래 구전선생 문집은 선조께서 돌아가신(1629년)후 백여년이 지난 뒤 지금으로부터 255년전인 1744년에 구전선조의 손자(孫子)이신 양열(揚烈) 선조(先祖)와 현손(玄孫)인 진사(進士) 이명(爾銘),5대손인 새원(生員) 태운(泰運)선조께서 시작하여 1844년에 8 궝 4 책 [원형이정4 책(元亨利貞四冊)의 순 한문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희소하게 보관되여 왔었다.그러나 요즈음 집안이 늘어나 문집이 집집마다 비치되지 못하고 또 한학의 소양(素養)이 부족한 현대인들로서는 조상의 뜻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게 되였다.그래서 문화 전수의 차원과 자손된 마땅한 도리로서 1996년에 반천유계(槃泉儒稧)의 발의로 한글로 번역해서 다시 간행하자는 뜻을 한데 모아 구전성생 문집 중간(重刊)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서 후손들의 성금을 모금하는 한편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원의 조명근(曺命根)선생께 국역을 부탁 드려서 몇 차례의 교정을 거쳐서 이 국역 중간본이 나오게 되였다.목판본 문집이 나오기까지 백여년이 걸린데 비하면 발의해서 만4년도 안되어 이 책이 나오게되니 새삼 감개무량해진다.우선은 손자된 도리를 만 분의 일이나마 한 것 같은 뿌듯함과 함께 선조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이 다음에 우리의 후손들이 더 완벽한 문집을 만들거나 영어로 번역해서 세계화시킬 수 있는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 중간(重刊)된 국역 문집을 통해 훼철(毁澈)된 반천서원(槃泉書院)이 복원되고 신 구세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희구하며 우리의 전통 문화를 전승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 마련에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요즈음 아무리 글로벌화한 시대라 해도 우리 것 우리 조상을 모르고는 세계화 할 수 없다고 믿는다.구전선조께서는 야송(冶宋)족보 서문에서 아아! 족보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따져보면 한 근본에서 일만 가닥으로 갈라진 것이고 아래에서 위로 따져보면 일만 가닥이 하나의 근본인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그 자신이 있다는 것만 알고 그 겨레가 한 가지(枝)에서 나뉘어져 있음을 알지 못한다.그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처신이 경솔하고 더럽고 천한 행동을 함부로 하며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 나눠진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족인(族人)을 박하게 하며 ---중략---이 몸은 진실로 한 기맥(氣脈)애서 나왔으니 이 몸으로 이 몸을 보면서 계승해야 할 바를 계승하기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좀 긴 인용이긴 하지만 진실로 옳으신 말씀이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자성(自省)의 가르침으로 들리기 때문이다.참으로 내 몸과 정신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요 이 몸 또한 후대의 수많은 후손들의 조상이 될 터인데 이를 의식한다면 우리의 처신을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느가? 국역(國譯)을 함에 있어서 염려했던 바는 한문 원전을 그대로 읽는 맛과 국역을 했을 때 언어 체계상 아무리 완벽한 번역이라 해도 그 의미 전달이 온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번역본을 보니 구전선조의 뜻이 요즘 현대인들과 훌륭히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혹시라도 그 속뜻을 음미해보라는 뜻에서 시(詩)나 잠명(箴銘) 만시등의 운문(韻文)에는 옆에 원문을 병기(倂記)해서 시의(詩意)를 음미하게 했으며 기타 산문들은 말미에 원전을 축소 영인해서 한데 묶어 놓았으니 한문 원전 해독이 가능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라며 그밖에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있는 부경별장(赴京別章)의 영인본 수록과 유계(儒稧)서문,서원 승원 실기, 문인록,왕조실록 중 구전 기록분 등을 함데 묶었다.원래 후손들이나 문인 후학들은 조상이나 스승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게 상례(常例)이지만 이 책에서는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폄(貶)하된 구전선조 관련 기록들을 가감 없이 수록하므로써 선조의 생존 당시에 고고한 성품과 처신으로 인해 심안(心眼)이 열리지 않은 반대파나 소인배들에게 얼마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였나를 미루어 짐작케 했다.이를 밝히지 않을 경우에는 후세의 사가(史家)들이 그당시의 정황은 차치(且置)한채 자칫 실록의 기록만을 절대시하여 예단(豫斷)할까봐 구전선조께서 무함(誣陷)당한 내용까지 함께 실었으니 혹시라도 이를 읽는 독자들이 한 쪽 면만을 보는 오류가 없도록 하려는 노파신에서이며 구전선조의 글월들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과연 구전선조가 그와 같은 소인배적 인물이였나 아니냐를 금방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원래 위인일수록 실록에는 모함 받은 기록이 많이 나온다.퇴계선생이나 이충무공 같으신 분들도 생전에 모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이 중간(重刊)에 국역 문집을 통해 한 가지에서 나온 많은 자손들인 우리 일족들의 뜻을 합하고 선조의 뜻을 잘 계승 발전시키는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국역중간을 했다는 그 자체의 의의를 넘어 보다 널리 반질(頒帙)되어 습독에 습독을 거듭해 선조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배우고 바로 익혀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도(道)란 가장 평범한 가운데 있는 것이니 바른 실천으로 후예들 뿐만아니라 모든 독자들도 요즈음의 문란한 강상(綱常)의 도(道)를 진작(振作)시켜 자손 만대로 구전선조의 도맥(道脈)을 이어나가 세계에서 가장 윤리 도덕으로 바로선 모범된 가문이 되도록 동파족친(同派族親)의 권면을 당부드리는 바이다.끝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일일이 거명은 못하지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충심으로 감사드리면서 간혹 번역상의 오류나 교정상의 오식이 있으면 제현(諸賢)들의 질정(叱正)을 바라면서 두서없이 장황한 중간사(重刊辭)에 가름한다.

 

 

서력기원 1999년(기묘년(己卯年) 3월 춘분에 구미당(九未堂)에서 15세손 우현(玗顯)은 삼가 풀어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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