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淸休齋文集(揚烈)
淸休齋文集(揚烈)
제목 청휴재선생문집서(淸休齋先生文集序)
작성자 관리자 [2018-01-08 18: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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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휴재선생문집(淸休齋先生文集) 

金 揚烈 著  金 世顯 國譯  槃泉書院復院推進委員會

 

청휴재선생문집서(淸休齋先生文集序)

 

士不仕則隱仕於朝則江湖廟堂進退常憂如范文正公方可盡君民事業隱於山林則不忘魏闕永夜獨苦如朱夫子方能盡忠愛之

사부사칙은사어조칙강호묘당진퇴상우여범문정공방가진군민사업은어산림칙부망위궐영야독고여주부자방능진충애지

誠夫事業固有出處之不同而忠愛不以仕隱而有異也故林下有戀君之賢巖穴有憂世之淚苟非讀書養眞之士有得於學問之正

성부사업고유출처지부동이충애부이사은이유이야고임하유연군지현암혈유우세지루구비독서양진지사유득어학문지정

踐履之實者鮮有不安於獨善而果於忘世豈可易得哉嶠之南花山鳳城乃吾金之菟裘而在昔寧陵之世有若淸休齋先生隱居行

천이지실자선유부안어독선이과어망세개가역득재교지남화산봉성내오금지도구이재석영릉지세유약청휴재선생은거행

義於太白山中其言志之作有曰我是山林客何憂廊廟憂不憂猶下淚鬂髮日成秋此一詩足見其忠忱懇惻溢於言外也盖先生早

의어태백산중기언지지작유왈아시산림객하우랑묘우부우유하루빈발일성추차일시족견기충침간측일어언외야개선생조

登國子時望藹蔚未始不以君民事業自期而方神州陸沈之初朝家之十載腐心至有秋風直搗之句誠臣義士咸知上意之有在而

등국자시망애울미시부이군민사업자기이방신주륙침지초조가지십재부심지유추풍직도지구성신의사함지상의지유재이

奮然有風泉之思旣而王駕賓天先生亦落拓不遇棲遲巖穴蒼顔白髮已迫遲暮往往露其本相而不覺下淚若先生者雖無希文事

분연유풍천지사기이왕가빈천선생역락탁부우서지암혈창안백발이박지모왕왕로기본상이부각하루약선생자수무희문사

業而其芹曝之悃尊周之義可謂合乎滄洲之趣矣然其得之也有本先生天資高明學業夙就內而述寶白訥巖苟全三祖之緖餘

업이기근폭지곤존주지의가위합호창주지취의연기득지야유본선생천자고명학업숙취내이술보백눌암구전삼조지서여

外而資南窩李孤山李活齋諸公之講習成就德器有異衆人晩年尤喜朱書俯讀仰思爲日用體驗之功蹟其一生與與之忠盖從

외이자남와이고산이활재제공지강습성취덕기유이중인만년우희주서부독앙사위일용체험지공적기일생여여지충개종

學問中出來非慷慨勉强而得者也凡所著述咸主理趣華實備具意味淵永不但爲一身一家之謨訓而及門之士率多得其心而傳

학문중출래비강개면강이득자야범소저술함주리취화실비구의미연영부단위일신일가지모훈이급문지사솔다득기심이전

其緖者林下事業亦不寂廖矣豈不尤可敬歟九世孫肅鎭綴拾散稿繕寫成帙遠涉千里囑聲根以弁卷之文顧齟祖之誼未可以

기서자임하사업역부적료의개부우가경여구세손숙진철습산고선사성질원섭천리촉성근이변권지문고재동조지의미가이

老洫不文辭且嘗慕先生之志行學術而爲之高景者久矣遂略敍梗槪以歸之

노혁부문사차상모선생지지행학술이위지고경자구의수략서경개이귀지

 

輔國崇祿大夫行吏曹判書弘文館提學檢校直提學議政府參政原任奎章閣提學兼 侍講院日講官宗後學聲根謹序

보국숭록대부행이조판서홍문관제학검교직제학의정부참정원임규장각제학겸 시강원일강관종후학성근근서

 

 


청휴재선생문집서문(淸休齋先生文集序)


 


선비[]는 출사(出仕)를 안했으면 은()거하다가, 조정(朝廷)에 벼슬을 하면 강호(江湖)에서 묘당(廟堂)으로 나아가고,물러나도 마치 범문정공(范文正公)처럼 항상 (나라를)걱정했다.또한 군왕(君王)과 백성을 다할 수 있는 사업으로 산림(山林)에 은거했으면서도 조정(朝廷)에서 긴긴 밤을 홀로 고민함을 잊지 않아 마치 주부자(朱夫子)처럼 오히려 진충(盡忠)애민(愛民)의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무릇 사업(事業)은 진실로 출처(出處)의 다름은 있을지라도 충애(忠愛)에는 벼슬[]하거나 은거[]하거나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며 연군(戀君)하는 현자(賢者)가 있고,속세를 떠나 깊은 산속에 은거하면서 국가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눈물 흘리는 선비도 있다. 진실로 독서(讀書)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성을 기르는[養眞]선비로써 학문에서의 바름을 얻어서 실제로 경험한 사람은 드물어 독선(獨善)에 불안함이 있는데, 세상을 잊은 결과로 어찌 쉽게 얻을 수 있으랴? 영남(嶺南)의 화산(花山:안동의 진산)봉성(鳳城)은 옛날부터 우리 김씨(金氏)의 토구(菟裘:새삼과 갖옷이란 말로 일가(一家)얼레들의 세거지(世居地)를 뜻하는 듯함.)인데,효종(孝宗=寧陵)때 청휴재(淸休齋)선생께서도 여기에 은거(隱居)하시며 태백산중(太白山中)에 행의(行義:의로운 행동을 함. 또는 도리에 맞는 행위)가 있으셨는데, 그 언지(言志:뜻을 진술함.)를 지어서 말씀하시기를,“나는야 산림객(山林客)인데 어찌 랑묘(廊廟:조정)의 근심이 있으랴?  근심 아닌 근심은 오직 빈발(鬢髮:귀밑털과 머리털)이 날로 가을 서리[白髮]를 이룸에 눈물짓노라.”라고 한 이 하나의 시()만 보아도 족히 그 충성스런 정성이 간절하고 지성스러움[懇惻]이 말 밖으로 넘친다. 대개 선생께서는 일찍이 성균관시[國子試]에 올라 당시의 인망(人望)이 무성[藹蔚]했으나 대과(大科)시도를 안 하여 군민(君民)의 사업을 스스로 기약하지 못하고,중국 명()나라가 침몰하자,처음에는 조정(朝廷) 10년을 부심(腐心)하면서 추풍(秋風)에 바로 찧는 글귀로 참 신하[誠臣]나 의사(義士)들처럼 분연(奮然)히 상감의 뜻이 있는 바를 다 알았지만 이미 풍천(風泉)의 생각이 있는데다가 왕[孝宗]이 돌아가시자 선생(先生)도 역시 불우(不遇)하게 쓸쓸히 영락하여[落拓] 암혈(巖穴)에 유유히 놀다가[棲遲] 늙어서 여윈 얼굴에 백발(白髮)이 이미 닥쳐서 점차 나이를 먹자 왕왕 그 본래의 모습을 노정시키며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셨다. 만약 선생(先生)께서 비록 글[]들이 드물고 사업(事業)이 없어도 그 봄철의 따뜻한 햇볕과 맛난 미나리를 임금께 바치고자[芹曝]한 정성과 존주(尊周:나라를 배척하고 나라를 높임.)하는 의리는 가위(可謂) 입술의 아래 위가 꼭 맞는 것[]처럼 딱 맞지 않는가? 푸른 물가의 시골 은자(隱者)의 뜻이 있어서 그것을 얻으셨음이다. 본래 선생께서는 천부적인 자질이 고명(高明)함에 있어서 학업(學業)에 일찍이 나아가셔서 내적으로는 보백당(寶白堂=金係行),눌암(訥巖=金廷憲),구전(苟全=金中淸)의 세분 선조(先祖)의 잔여[緖餘]이고, 바깥으로는 남탑와(=南亨會), 이고산(李孤山=李惟樟), 이활재(李活齋=李榘)등의 제공(諸公)들과 강습(講習)하며 덕기(德器)를 성취(成就)하여 보통 사람들과 다름이 있었다. 만년(晩年)에는 더욱 주자(朱子)의 서적(書籍)들을 좋아하여 굽어 읽고 우러러 사모하면서 일용(日用)으로 체험하는 공적(功蹟)을 쌓으셨으며 그 일생을 충()으로 여여(與與)하셨다. 대개 학문(學問)을 쫒는 중에 나오는 뜻을 잃지 않고 힘써서 얻은 분이시다. 무릇 저술(著述)하신 바는 모두 주리(主理)를 추창하여 형식과 실질을 구비(具備)하여 의미(意味)가 깊고 영원하다. 단지 일신(一身)이나 일가(一家)의 모범이 될 가르침[謨訓]만이 아니라 문하(門下)의 선비들에게 미쳐서 선비들 거느림을 많이 얻어서 그 마음과 그 실마리를 전하느라 은거(隱居)하셨으면서도 사업(事業) 역시 적료(寂廖)하지 않았다. 어찌 더욱 존경할 수 없겠는가?! 9세손(世孫) 숙진(肅鎭)이 흩어진 원고들을 수습하여 묶어서 정서(淨書)하여 책을 만들어서 천리(千里) 먼 걸음을 하여 나 성근(聲根)에게 변언(弁言:序文)의 글을 부탁하기에 돌이켜 보니 같은 조상[同祖]의 우의가 있는데다가 늙었다고 표현이 멋진 말[文辭]을 돌보지 않을 수 없고 또 일찍이 선생(先生)의 의지(意志)와 품행[志行]과 학술(學術)을 사모하여 높이 우러름을 오래도록 함이다. 드디어 개요(槪要)를 간략하게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1品階)(:品階 높지만 官職責 낮은 경우)이조판서(吏曹判書:2品官職)홍문관(弘文館)제학(提學:2品官)검교(檢校)직제학(直提學:3品職),의정부(議政府)참정(參政),원임(原任)규장각(奎章閣)제학(提學)()시강원(侍講院)일강관(日講官)이었던 일가[]후학(後學)성근(聲根)은 삼가 서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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