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苟全先生文集 續集
苟全先生文集 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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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2018-03-13 19: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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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범백년(范栢年):남송(南宋) 때 양주자사(梁州刺史)로 명제(明帝)를 알현했을 때 명제(明帝)

 

“그대의 집이 어디인가?”라고 묻자 범백년(范栢年)

 

“저의 집은 염천(廉泉)과 양수(讓水)사이입니다.”라고 한 말에서 염량간(廉讓間)이란 말이 나왔다.

 

2) 이교():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이교() 위에서 태공망의 병서(兵書)를 받았다는

 

흙을 쌓아서 세운 다리.

 

3) 권래(權來):1562(명종17)~1617(광해군9) 자는 낙이(樂而), 호는 석천(石泉) 본관은 안동(安東).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손자로, 아버지는 권동미(權東美)이다.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냈다.

 

4)적인걸(狄仁傑):630~700. ()나라의 문신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에게 발탁되어 재상에 올랐다.

 

683년에 고종이 죽자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인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넷째 아들인 예종(睿宗)을 제위에 앉혔다가, 690년에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주()로 바꾸고 무씨(武氏)왕조를 건립했다.

 

그는 무후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 영주자사(寧州刺史), 강남순무사(江南巡撫使), 예주자사(豫州刺史),

 

지부시랑(地部侍郞)을 역임하고, 재상이 됐다.

 

698년 무후가 조카인 무승사(武承嗣)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자,

 

무후를 설득하여 중종(中宗)을 다시 불러들여 태자로 세우게 했다.

 

이 때문에 후대에 당나라를 다시 일으킨 인물로 평가를 받았으나,

 

한편으로 당나라를 무너뜨린 무후(武后)의 재상이 되어 섬기면서 적극적으로 당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쓰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5)박태현(朴台賢) : 1560(世宗39)~1619(光海君11)본관은 밀양(密陽), 호조판서 박원호의 아들로 음직으로 과천현감,

 

전의현감,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한성판윤 이경엄을 사위로 두어 구전(苟全)공의 3 역면재 주우(柱宇)공의 妻 外祖父가 된다.

 

6) 한위(韓魏) :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를 말하는데,

 

이들은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지금 산서성(山西省) 부근에 있던 진()나라의 부호(富豪)들인 6가로(六家老) 중에서 굴지의 부자(富者)로 부귀한 집을 이른다.

 

7) 동화(東華) : 동화제군(東華帝君) 즉 동왕공(東王公)을 이르는데,

 

동왕공(東王公)은 신선(神仙)의 우두머리로 여자는 서왕모(西王母)라면 남자 신선은 동왕공(東王公)이라고

 

대칭되는 신선(神仙)으로 남자 신선들은 모두 그가 거느린다고 한다. 동부(東夫)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명암정(鳴岩亭) : 강릉시 대전동 서쪽 산기슭에 조선 중중 때의 권연(權璉)이 소요하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단층 팔작 정면 2, 측면 2칸 정자다. 명암정은 경포호의 상류로서 명천반석(鳴泉盤石)이 있으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9) 구충윤(具忠胤) : 1554(明宗9)~?)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능주(綾州), ()는 윤보(允甫),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인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의 아들이며 김언기(金彦璣)의 문인(門人)으로 별좌(別坐: 5품직)를 지냄.

 

10) 창힐(蒼頡) : 중국의 옛 전설에 나오는 황제(黃帝)의 신하로, 그는 동이족으로 새의 발자국을 보고 착상(着想)하여 맨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1) 불역열호(不亦悅乎) :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말로 논어(論語)11절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學而時習之,不亦說乎) 란 말에서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항상)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라고 하신 말에서 따 온 말이다. 여기서 학()이란 본받는다는 의미로 먼저 깨달은 선각자(先覺者)로부터 본받아서 선()을 밝게 알아서 그 본초(本初)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며, ()은 새가 날개 짓 하듯이 자주 나는 것을 익힌다는 의미며, ()은 열()의 의미이다. 즉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체화(體化)하면 심중(心中)에 희열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12) 와표(臥豹)=와호(臥虎) : 누워있는 표범이란 말로 관리(官吏)의 엄혹(嚴酷)함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기도 하며, 나아가 교만하고 횡포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하며, 혹은 사람의 용맹함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13) 이경엄(李景嚴) : 1579(宣祖12)~1652(孝宗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 아버지는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이며, 어머니는 윤문로(尹文老)의 딸이다.

 

그는 구전(苟全)선생과는 동방 급제한 친구이자 사돈 간으로 3남인 역면재 주우(柱宇)공의 장인이다. 1610(光海君2)에 현감으로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624(仁祖2) 배천군수, 사옹원정(司饔院正), 1647년연천군(延川君)으로 있으면서, 사간원으로부터 수령으로 천거한 자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49(孝宗즉위년)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4) 차천로(車天輅) : 1556(明宗11)∼1615(光海君7).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귤실(橘室)·청묘거사(淸妙居士). 송도(松都) 출신. 아버지는 차식(車軾)이며, 어머니는 이계천(李繼天)의 딸이다. 1577(宣祖1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지냈고, 1583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6년 정자(正字), 1589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또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다.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1601년 교리가 되어 교정청(校正廳)의 관직을 겸임했고, 광해군 때 봉상시첨정을 지냈다. 한호(韓濩)·권필(權韠)·김현성(金玄成)과 더불어 서격사한(書檄詞翰)이라 한다. 아버지 식, 아우 운로(雲輅)와 함께 세인(世人)으로부터 ‘3(三蘇)’라 불렸다. 그는 가사(歌辭)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15) 이준(李埈) : 1560(明宗15)~1635(仁祖13) 본관 흥양(興陽), 字 숙평(叔平), 號 창석(蒼石), 서계(酉溪),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32세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正字)로 출사(出仕)했으나 관직 생활보다는 학자(學者)로서 우복 정경세(鄭經世)와 여헌 장현광(張顯光)과 교유했다. 사후(死後)에 이조판서,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옥성(玉城)서원에 제향(祭享)됐다.

 

16) 임숙영(任叔英) : 1576(宣祖9)∼1623(仁祖1).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1601(宣祖34) 진사가 되고 1611(光海君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됐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아 파직되어 광주(廣州)에서 은둔했다가 인조반정후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17) 금개(琴愷) :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언강(彦康), 호는 망월헌(望月軒). 아버지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어머니는 횡성조씨 조대춘(趙大春)의 딸이다. 조목(趙穆)의 문인, 160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감찰, 예조정랑, 금산군수, 봉사직장, 군기시첨정, 사헌부장령, 사간원헌납, 사헌부지평, 여주목사를 역임하고 광해조의 혼탁함에 예안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18) 박선장(朴善長) : 1555(明宗10)∼1616(光海君8).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 아버지는 북평사(北評事) 박전(朴全)이며, 어머니는 웅천주씨(熊川朱氏)이다. 4세 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10세 때 어머니를 따라 경상도 영천(榮川:지금의 榮州)의 외가에 내려와 그의 사부이자 장인이기도 한 남몽오(南夢鰲)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05(宣祖38) 51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성리학에 힘썼다. 1608년 예안현감(禮安縣監), 1614(光海君6) 경상도사(慶尙都事) 등을 역임했다. 수서집(水西集)이 있다.

 

19) 장제원(張悌元) : 1556(明宗11)∼1621(光海君13).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중순(仲順), 호는 심곡(深谷).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 임란 때 김해(金垓)의 막하에서 정제장(整齊將)이 되고 진휼어사(賑恤御使)의 천거로 도진관(都賑官)이 되어 토지 구획 정리, 권농과 구휼에 힘썼다. 만년에는 선산에 정사를 짓고 경전을 연구했다. 뒤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됐다.

 

20) 김주우(金柱宇) : 1598(宣祖31)∼1644(仁祖22).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역면재(易眠齋). 아버지는 승지 김중청(金中淸)이며, 어머니는 이영승(李永承)의 딸이다. 연천군 이경엄(李景嚴)의 사위이다. 1624년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정언(正言), 지평(持平)이 됐다. 1632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있을 때, 온 집안이 큰 변을 만나 그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됐다. 서예에 명망이 있어 13세에 촉석루의 액()을 썼으며, 1625년에 왕명으로 동궁의 대병(大屛)에 사잠(四箴)을 썼다. 인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치색으로 좌절됐다

 

21) 적설(赤舌) : 붉은 혓바닥이란 말이지만 소인(小人)들이 군자(君子)를 참해(讒害)하는 혓바닥은 불과 같아서 성곽이라도 태워버린다는 적설소성(赤舌燒城)이란 말에서 나왔는데, 참언(讒言)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이다.

 

22) 시우(時雨) : 때맞추어 오는 비란 뜻으로 교화(敎化)가 널리 미침을 이르는 말.

 

23) 이언영(李彦英) :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좌랑 이등림(李鄧林)의 아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 1603(선조36)에 문과에 장원급제, 1614(광해6)에 항의(抗議)상소를 한 정온(鄭蘊)을 구하려다가 삭탈관직 전귀방리 됐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사유(師儒)의 부름이 있었다. 관직은 좌부승지에 이르렀으며, 타고난 천품이 고결하고 기우(氣宇)가 엄정했다. 충효는 천성적으로 타고났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학문이 순수하면서 올발랐다.

 

24) 이윤우(李潤雨) : 1569(宣祖2)~1634(仁祖1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06(선조3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사관으로서 정인홍의 비위 사실을 직필했다가 탄핵을 받아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고, 인조반정으로 폐고(廢錮)에서 기용되어 응교(應敎)와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담양부사,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정사(靖社) 원종훈(原從勳)에 책록(策錄)됐다.

 

25) 도여유(都汝兪) : 1574(宣祖7)~1640(仁祖18),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중(諧仲), 호는 서재(鋤齋), 정구(鄭逑)의 문인, 이괄(李适)의 난 때는 향군(鄕軍)을 창의(倡義)했으며, 향리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을 했다. 사후(死後)에 아들 도신수(都愼修)와 함께 대구 용호서원(龍湖書院)에 제향(祭享)됐다.

 

26) 이육(李堉) : 1572(宣祖5)~1637(仁祖15) 본관 전주(全州) 자 사후(士厚), 호 심원당(心遠堂),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의 문인, 두 차례의 과거에 실패하자 벼슬의 뜻을 접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한강(寒岡)의 예학(禮學)을 물려받아 한강의 언행록을 펴내고, 저서로 심원당집이 있다.

 

27) 최항경(崔恒慶) 1560(明宗15)∼1638(仁祖16).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부친은 성균진사(成均進士) 최정(崔淨)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권유에 의해 성주(星州)에 머무르며, 정구(鄭逑)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605(宣祖38)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입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다. 1678(肅宗4)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고, 1735(英祖11) 두 아들 최은(), 최인(崔轔)과 함께 오암서원(鰲巖書院)에 봉향(奉享)됐다.

 

28) 창해서원(昌海書院)=문암서원(文巖書院)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 있었던 서원. 1616(光海君8)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이황(李滉)과 조목(趙穆)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4(肅宗20) ‘文巖(문암)’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29) 사마(司馬) : 중국 주나라 때 삼공(三公)의 하나로 군사와 운수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었고, 백제 때에 둔 외관직 벼슬. 조선 초기에 둔 무관직 벼슬로 훈련관의 종4품 벼슬.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小科)를 이르는 말로 생진과(生進科), 감시(監試)라고도 한다.

 

30) 금원정(琴元貞) : 1472(成宗3)~1557(宣祖10) 본관은 봉화(奉化), ()는 정숙(正叔), ()는 농수(聾叟. 1501(연산7)에 진사하고 1515(중종10)에 영해훈도를 역임. 중종14년에 현량(賢良)에 추천되었고 기묘사화 이후는 초야에서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길렀다. 농수집(聾叟集)이 전한다.

 

31) 권극명((權克明) : 1587(선조20)~?) 본관은 안동(安東), ()는 회보(晦甫), 호는 성암(醒庵) 사공(士恭)의 아들. 백부인 동강(東江) 사온(四溫)에게 배움. 1610(光海君2)년 생진(生進) 입격, 1612(仁祖2)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냈고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났다.

 

32) 산양적(山陽笛) : ()나라 상수(向秀)가 산양(山陽)의 옛집을 지날 때 이웃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듣고서 회구(懷舊)의 마음이 들어서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인용한 것임.

 

33) 권태일(權泰一)=權守之 : 1569(宣祖2)∼1631(仁祖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字는 수지(守之), 號는 장곡(藏谷). 아버지는 내시교관 권춘계(權春桂)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이다. 큰아버지인 집의(執義) 권춘란(權春蘭)에게 입양됐다. 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599(宣祖3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 검열·승정원주서·시강원설서·정언·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고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홍문관수찬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이조정랑을 거쳐 영덕현령으로 4년간을 재임하면서 큰 치적을 올린 공으로 왕으로부터 옷감을 하사받았다. 이어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요양한 뒤 사성으로 복직했다. 그 뒤 풍기군수를 거쳐 동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썼다. 다시 호조참의·좌부승지를 거친 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죽주부윤(竹州府尹)으로 나갔다. 1623(仁祖1)에 좌승지로 들어왔으나 곧 전주부윤으로 나갔다. 그 뒤 병조참의·충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 지방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듬해에 대사간을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그 뒤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장곡집(藏谷集)이 있다.

 

34) 격장() : ()은 행주소탕지장(行舟所蕩之)이란 말에서 물가에서 배를 밀거나 언덕에 배를 댈 때, 혹은 물이 얕은 곳에서 배를 미는데 쓰는 긴 장대로 상앗대라고도 한다.

 

35) 소고선생(嘯皐先生)=박승임(朴承任) : 1517(中宗12)∼1586(宣祖1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이황(李滉)의 문인, 1540(中宗35)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후 수찬, 이조좌랑, 정언(正言), 예조정랑, 직강(直講), 사예(司藝), 풍기군수, 군자감정(軍資監正), 판교(判校), 병조참의, 동부승지, 진주목사, 1569(宣祖2)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황해도관찰사, 좌승지, 도승지, 경주부윤, 도승지, 강화부유수·여주목사, 춘천부사,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으로 있다가 창원부사로 좌천된 뒤 중앙에 소환됐다가 병사해서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祭享)됐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 소고문집(嘯皐文集)등이 있다.

 

36) 김득연(金得硏) : 1555(明宗10)∼1637(仁祖1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정(汝精), 호는 갈봉(葛峯). 1602(宣祖35) 생진양시(生進兩試)에 입격하였으나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예안(禮安)에 살면서 학문과 시작(詩作)에 전념했다.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주둔한 명군(明軍)의 군량미 보급에 힘썼고,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부하 장수들과 교유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그들로부터 추앙받았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듣고 비분강개,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는 갈봉유고가 있다.

 

37) 신지제(申之悌) : 1562(明宗17)∼1624(仁祖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경상도 의성 출신. 증창례원판결사 신한(申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신응규(申應奎)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신몽득(申夢得)이며,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박민수(朴敏樹)의 딸이다. 1589(宣祖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正言)·예조좌랑, 이듬해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했다. 1613(光海君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 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 시 임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했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사후에 장대서원(藏待書院)배향됐다.

 

38) 배한용(裴漢龍) : 1554(명종9: 甲寅)~? 본관 성주(星州), 장사랑(將仕郞) 배중윤(裵仲胤)의 아들, () 희량(希亮), 1591(宣祖24: 辛卯)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입격(入格),

 

39) 임고서원(臨皐書院)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서원. 1553(明宗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 등 향내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54년에 ‘임고’라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宣祖36)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이듬해에 다시 사액됐다. 1643(仁祖21)에 장현광(張顯光)1787(正祖11)에 황보 인(皇甫仁)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高宗8)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됐다가 1965년에 복원됐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존영각·강당·포사(庖舍)·유사실(有司室) 등이 있다. 사우인 문충사(文忠祠)에는 정몽주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존영각(尊影閣)에는 영정(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40) 반구정(伴鷗亭) : 안동시 정자동 옹정골 귀래정의 동쪽에 있는 정자. 안동 임청각(安東臨淸閣)을 지은 이명(李洺)의 여섯 째 아들 이굉(李肱)1560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이굉(李肱)은 자가 계임(季任), 호가 반구옹(伴鷗翁)으로 1531(中宗26)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보로 예빈시별제(禮賓寺別提)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풍광이 수려한 이곳에 반구정을 짖고 유유자적했다.

 

41) 이명(李蓂) : 원문에는 이협(李莢)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명(李蓂)이기에 정정해 둔다. 1496(燕山君2)∼1572(宣祖5),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요서(堯瑞),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528(中宗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 예문관검열, 봉교, 전적, 병조·예조의 좌랑, 사헌부지평, 호조정랑, 교리(敎理)·응교(應敎)·집의(執義), 직제학·동부승지·우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1549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 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이조호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57년 좌참찬이 되어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했다. 1559년 좌찬성, 1564년 우의정이 됐다. 이듬해 나이 70이 되어 사직할 것을 청하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66년 좌의정이 되었다가 선조 즉위 초 나이가 많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됐다.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됐다.

 

42) 주세붕(周世鵬) : 1495(燕山君1)∼1554(明宗9).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1522(中宗17)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 정자·수찬,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사간원헌납, 승문원교리를 거쳐 1541년 풍기군수가 되어 이듬해 순흥 죽계에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의 사당인 회헌사를 설립했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다. 1545(明宗즉위) 성균관사성,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대사성·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사후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과 소수서원에 배향됐다. 시호는 문민이다.

 

43) 소수서원(紹修書院) :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 사적 제55. 1541(中宗36)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고, 1543년 유생 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여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어 노비와 토지, 책 등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됐다. 1633(仁祖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했다.

 

44) 경상좌도(慶尙左道) : 1407(太宗7) 군사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서 낙동강 서쪽을 경상우도, 그 동쪽을 경상좌도라 했다. 1519(中宗14) 좌·우도에 각기 감사를 두었다가 같은 해 11월 다시 1개 도로 환원하고, 다만 수사(水使)·병사(兵使) 등 군사상 직제만 좌·우도로 나누었다. 1592(宣祖2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다시 좌·우도로 나누어 좌도감영은 경주에, 우도감영은 상주에 두었다. 이 당시의 감사(監司)는 학봉 김성일(金誠一)이었다. 1593(宣祖26) 좌·우도를 다시 하나로 합쳐 감영을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두었다. 이후 1595(宣祖 28) 땅이 넓어 다스리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다시 좌·우도로 나누었으며, 1596(宣祖29)에 다시 하나로 합하여 달성(達城)에 감영을 설치했다. 경상좌도는 왕성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 지역의 좌측을 뜻하며, 울산·양산·연일·동래·청송·예천·풍기·밀양·칠곡·경산·청도·영양 등 37개 군현이 여기에 속했다.

 

45) 관문(關文) : () 또는 관자(關子)라고도 하며, 그를 모아놓은 것을 관첩(關帖)이라 한다. 원래 동등한 관청 상호간에 주고받는 공문서였지만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으로 보내는 양식으로도 사용했다.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으로 올리는 문서는 관문양식을 쓰지 않고 첩정(牒呈)을 썼다. 관문(關文)의 내용은 주로 두 관청 사이의 현안을 묻고 내용을 서로 통하기 위한 것이다.

 

46) 순찰사(巡察使) : 조선시대 재상(宰相)으로서 왕명을 받아 군무(軍務)를 통찰하던 사신(使臣). 1품을 도체찰사, 1품을 체찰사, 2품을 도순찰사, 2품을 순찰사라고 하여 직위에 따라 호칭이 달랐다. 1456(世祖2) 7월에 체찰사를 혁파하고 직질에 관계없이 순찰사로 통일하였는데, 이것은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나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자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특명사신의 명호를 순찰사로 단일화했던 것 같다. 그러나 1488(成宗19) 9월에 명호에 차등이 없는 것은 사리와 체면에 불편하다고 하여 다시 구제(舊制)로 돌아가 체찰사·순찰사의 호를 부활했다. 1555(明宗10)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례에 따라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도순찰사로, 조광원(曺光遠)을 경상도도순찰사로 임명하고 그 밑에 좌우방어사(左右防禦使)를 두기도 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겨 의정(議政)을 도체찰사, 1품 이하를 도순찰사, 2품을 순찰사, 3품을 찰리사(察理使)라고 했다.

 

47) 차사원(差使員) : 조선시대 각종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임시로 차출, 임명되는 관원(官員). 3품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임명됐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경우와 각도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경우의 두 종류가 있는데, 중앙에서 파견하는 경우는 이조(吏曹)가 중앙관료들 중에서 선임했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경우는 관찰사가 수령이나 변장(邊將) 혹은 찰방(察訪)들 중에서 보냈다.

 

48) 육예(六藝) : 선비들이 배워야할 6가지 기예(技藝)로서 주례(주례)에서는 예(), (), (), (), (), ()라고 했고, 사기(史記)에는 역(), (), (), 춘추(春秋), (), ()6가지를 6예라고 했으며, 6()6()라고도 했다. 여기서는 주례(周禮)의 사()를 말한다.

 

49) 액내생(額內生) : 향교의 원납교생(願納校生)들이다. 조선 전기에는 16세 이상의 교생을 액내생(額內生)이라 하여 정원 규정에 의하여 뽑고 16세 미만은 동몽(童蒙)이라 하여 정원에 상관없이 선발했으며, 교생(校生)은 신분에 따라 양반은 액내생(額內生, 정원 내 교생), 서얼(庶孼)과 평민은 액외생(額外生, 정원 외 교생)으로 분류하기도 했는데, 후기(後期)에는 이런 구별보다는 적령기(適齡期)의 어린 사람들을 액내생(額內生)으로 우선 배정하고, 그 나머지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액외생(額外生)으로 했음이 이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50) 김용(金涌) : 1557(明宗12)∼1620(光海君12).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김성일(金誠一)의 조카다. 1590(宣祖23) 증광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있다가 사직하고 1592(宣祖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봉화의진 좌부장,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에 추대되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 봉교, 전적, 정언, 헌납, 부수찬, 지평, 이조정랑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호종일기(扈從日記)를 썼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 세자필선(世子弼善), 집의(執義), 예천군수, 상주목사, 홍주목사, 여주목사를 역임했다.

 

51) 춘대(春臺) : 노자(老子) 20장에 나오는 말로 ‘사람들 화락한 모양이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煕煕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에서 봄경치가 한창 좋을 때 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마음이 넓어지고 즐거워진다는 뜻으로, 성세(盛世)를 비유한 것임.

 

52) 원학사충(猿鶴沙蟲) : ()나라 목왕(穆王)이 남정(南征)을 할 때, 전군(全軍)이 전사(戰死)하여 군자(君子)는 원학(猿鶴)이 되고 소인(小人)은 사충(沙蟲)으로 화()했다는 고사에서 전쟁에 나가 죽은 장병을 이르는 말.

 

53) 정관의 치(貞觀의 治) :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치세로 당 태종은 세금과 부역을 가볍게 하고 뛰어난 용인술(用人術)로 중국 왕조사에서 중국인들이 최고의 '현군(賢君)'으로 꼽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인 '정관의 치(貞觀之治)'는 중국의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되며, 그가 남긴 신하들과의 문답집인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역대 통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통치자의 교과서로 여겨졌다.

 

54) 노자안지(老者安之) : 이 말은 논어(論語) 공야장25장에 있는 말로 제자인 자로(子路)가 공자님의 뜻을 묻자 子曰 老者安之(노자안지) 朋友信之(붕우신지) 少者懷之(소자회지)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친구에게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다.) 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임.

 

55) 춘복(春服) 기수(沂水) :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가 모시고 앉아 있을 때, 공자 말하길 “내가 자네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다고 해서 (내 앞에서) 말하기를 어려워 말라. 평소에 자네들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들 말하는데, 만일 자네들을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가?” 라고 묻자 증점(曾點: 曾子의 부친)이 대답하길 曰 暮春者에 春服旣成이어든 冠者五六人과 童子六七人으로 浴乎沂하여 風乎舞雩하여 詠而歸호리이다. (“늦은 봄, 봄옷이 다 지어지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아이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호리라 (공자께서 ‘아!’ 하고 감탄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도 증점과 함께 하고 싶구나!)라는 말을 인용한 것임.

 

56) 음풍농월(吟風弄月) : 맑은 바람을 쐬며 노래를 읊고 밝은 달을 즐긴다는 뜻으로 풍월의 시를 짓거나 즐겨 읊조린다는 뜻.)

 

57) 광풍제월(光風霽月) : 원래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란 말에서 태평세월을 뜻하는 말이기도 한데, 이 말은 송()나라 때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의 인물 됨을 평()한 말에서 마음이 넓어서 자질구레한 데 에 거리끼지 않고 쾌활하며 쇄락(灑落)한 인품(人品)을 비유한 말에서 비롯된 말이다.)

 

58) 자양(紫陽) : 자양서원(紫陽書院) 혹은 주자(朱子)를 이르는 말로, 자양(紫陽)은 원래 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나라 때 주희(朱熹) 부자가 독서하던 서실(書室)을 나중에 서원(書院)으로 했는데, 주자(朱子)를 자양부자(紫陽夫子)라고 부른다.

 

59) 염락(濂洛) : 염계(濂溪)에 있던 주돈이(周敦)와 낙양(洛陽)에 있던 정호(程顥: 明道), 정이( : 伊川)를 이르는 말로 여기에 관중(關中)에 있던 장재(張載)와 민중(閩中)에 있던 주희(朱熹) 등이 주창한 송학(宋學)을 염락관민지학(濂洛關閩之學)이라고 부른다.

 

60) 소강절(邵康節)=소옹(邵雍) : 소강절(邵康節) 또는 소요부(邵堯夫)라고도 한다. 성리학의 이상주의 학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역경(易經)을 공부하다가 수()가 모든 존재의 기본이라는 상수학 이론을 만들어서 우주의 통일성 밑바닥에 깔려 있는 원리는 인간의 마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그의 사상은 성리학파 이상론의 기본이 되었다. 그는 또 역사란 반복되는 주기의 순환으로 이루어진다는 불교사상을 유교철학에 도입해서 겁이라고 하는 주기를 그는 원()이라고 부르고 그 순환주기도 원래의 천문학적 기간을 줄여서 129,600년이라고 했다. 이 사상은 나중에 주희(朱熹)에 의해 관학 이론의 일부가 됐다.

 

61) 주돈이(周敦) : (1017)~(1073)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는 원공(元公)이다. 존칭하여 주자(周子)라고도 한다. 송나라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그에 의해 시작됐다고 한다. 그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그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 1033-1107)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가서 송나라 시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 주자전서(周子全書) 7권은 모두 그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

 

62) 종유(鐘乳) : ()나라 정관(貞觀) 17년에,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이자 요즘 청와대 정무비서관 격인 중서성(中書省) 사인(舍人) 고계보(高季輔)가 상소를 올려 정치의 득실을 진술하자, () 태종(太宗)은 특별히 종유(鐘乳) 한 제()를 주며 말하길 卿進藥石之言, 故以藥石相報(경이 약석(藥石)되는 말을 해 주었으니 고로 약석(藥石:鍾乳)로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고사(故事)에 견주어서 짓게 한 표문(表文).

 

63) 총마(驄馬) : 원래는 어사(御史)란 말이었으나 뒤에 사헌부(司憲府) 관원의 별칭이 됐다.

 

64) 애욕기생(愛欲其生) : 논어 안연(顔淵)10장의 말로 子張이 問崇德辨惑한대 子曰 主忠信하며 徙義崇德也니라. 愛之란 欲其生하고 惡之란 欲其死하나니 旣欲其生이요 又欲其死 是惑也니라. 誠不以富요 亦祗以異니라. (자장(子張: 顓孫師)이 덕()을 높이고 미혹을 분별함을 묻자 공자 曰 “충신(忠信)을 주장하며, ()에 옮김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죽기를 바라나니, 이미 살기를 바라고 또 죽기를 바라는 이것이 미혹이다. 진실로 부유하지도 못하고, 또한 다만 이상함만 취할 뿐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임.

 

65) 이수(二豎) : 병마(病魔)를 이르는 말로 진()나라 경공(景公)이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꿈에 병마(病魔)가 두 아이[]가 되어 나타났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66) 손괘(損卦) : 손괘(損卦) 5의 효사(爻辭)는 누군가 그를 도와 유익하게 하리라. 어떤 영검한 거북점도 이 길조(吉兆)를 틀린다고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니 크게 길()하리라.[或益之 十朋之龜 弗克違 元吉 象曰 六五元吉 自上祐也] 4에는 병을 치료하듯이 스스로 반성하여 자신의 결점을 고쳐라. 옳은 일은 빨리할수록 기쁨이 있고 허물이 없으리라. [損其疾 使有喜 无咎 象曰 損其疾 亦可喜也.] 2의 효사(爻辭)에는 다음에 중용(中庸)의 도()를 지켜 변함이 없으면 만사 순조로우리라. 함부로 앞으로 내달으면 흉()하리라. 이 경우에 자신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손실을 가져오지 않고 남에게 보탬을 주는 것이다.

 

이정 정흉 불손익지 상왈 구이이정 중이 위지야[利貞 征凶 弗損益之 象曰 九二利貞 中以 爲志也.]

 

67) 잇댄 옆선 : 예기(禮記) 심의(深衣)에 나오는 말로 심의(深衣)를 만드는 방법의 일부이다. ()에는 치마 앞판의 외임(外衽)과 좌우에 대는 방임(旁衽)이 있는데 여기서는 방임(旁衽)을 말한다. ()은 본 폭 외에 덧대는 폭을 말하는데, 방임(旁衽)은 아래 폭을 넓게 함으로써 활동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대는 것으로, 모양은 아랫부분의 폭이 18치인 이등변삼각형이다. 심의(深衣)를 입고 가만히 서 있으면 방임(旁衽)이 본 폭 안으로 겹쳐 들어가 숨어 있게 되고 활동할 때에만 본 폭이 벌어짐에 따라 방임(旁衽)이 드러나게 되는데, 구변(鉤邊)은 서 있을 때 방임(旁衽)이 이처럼 겹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68) 서일(筮日), 서빈(筮賓) : 고대에는 관례를 행하기 며칠 전에 행사일자가 길()한지 여부를 점()을 쳤다. 장소는 묘문(廟門)에서 진행했는데 3번 점을 쳐서 길()하면 그날로 정하고, 불길하면 열흘 뒤에 날을 다시 점친다. 이는 모두 신성성(神性性)을 부여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신중히 진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관례(冠禮)가 당사자인 관자(冠者)에게는 개인적으로 성인(成人)이 되는 새 출발을 하는 날임과 동시에 가문(家門)에서도 대()를 이어나갈 소중한 구성원이 배출되는 날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보면 ‘계왕개래(繼往開來)’、‘승선계후(承先繼後)’의 구성원의 배출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69) () : 관례(冠禮)를 할 때 모든 집전(執典)을 주관하는 사람이다. 정빈(正賓)이라고도 한다.

 

70) 궐명(厥明) : 질명(質明)과 대칭되는 말로, 궐명(厥明)은 다음날 새벽을 이르며, 질명(質明)은 그보다 조금 뒤인 날이 밝을 무렵을 이른다.

 

71) 숙빈(宿賓) : (宿)은 나아간다는 뜻으로 관을 씌워 줄 정빈과 도우미 역할을 해줄 찬관자(贊冠者)의 집으로 특별히 나아가서 요청함으로써 신중하고 정중하게 예의를 다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72) () : 모든 축사의 말미는 ‘수고유기(壽考惟祺)’ ‘미수만년(眉壽萬年)’ ‘황구무강(無疆)’으로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 ‘경복(景福)’ ‘호복(胡福)’ ‘원천지경(爰天之慶)’으로 무한한 행운과 복을 누릴 것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73) 방호(房戶) : ()은 동쪽에 있는 방을 이르고, ()는 실()의 작은 문을 이른다. 옛날 행례하는 대청[]의 북쪽에는 중앙에 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동방(東房), 왼쪽에는 서방(西房)이 있었는데, 행례는 언제나 동방(東房)에서 했으므로 방()은 동쪽 방을 말하고 호()는 그 문을 이른다.

 

74) () : 거르지 않은 탁주를 ‘예()’라 하고 거른 청주를 ‘주()’라 한다. ()를 쓰는 의절(儀節)을 ‘례()’라고 하고 주()를 쓰는 의절을 ‘초()’라고 한다. ()는 또 잔을 받기만 하고 돌리지 않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시대의 선후(先後)로 볼 때 예()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이른 시기의 예절로 이른바 질()이고, ()를 쓰는 것이 나중 시기로 문()이라 할 수 있겠다. 관례(冠禮)에서는 빈()이 관자(冠者)에게 주는 것도, 주인이 빈()을 대접할 때도 모두 바탕과 원형을 숭상하는 의미에서 거르지 않은 탁주인 예()를 사용한다.

 

75) () : 이름은 태어나서 3개월이 되면 부친이나 조부가 부여하는 것이고 자()는 그 후 관례를 행할 때 주례자인 빈()이 부여하는 사회적 이름이다. 성인(成人)이 되어 사회활동을 할 때 연장자나 존자(尊者)는 이름을 직접 호칭할 수 있지만 그 외의 경우는 호명(呼名)은 실례가 되므로 일반적으로 자()로 호칭했다.

 

76) 협배(俠拜) : 부인이 남자에 대하여 절하는 예(), 남자가 한 번 절하면 부인은 재배(再拜)를 하고, 남자가 재배(再拜)를 하면 부인은 사배(四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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