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苟全先生文集 續集
苟全先生文集 續集
제목 苟全先生 文集 續集
작성자 관리자 [2018-03-14 18: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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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全先生 文集 續集 (구전선생 문집 속집)

 

(김중청)   金 世顯

 

발간사(發刊辭)  (김 보현)


이미 20년 전에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 국역본(國譯本)이 출간(出刊)되고 나서 지금에야 속집(續集)을 간행하게 되어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원래의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은 원형이정(元亨利貞) 4()의 방대한 목판본(木版本)인데 이 속집(續集)은 처음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을 편집(編輯)할 당시에는 원집(原集)에 수록(收錄)이 안 되고 유고(遺稿) 형태로 남아 있었던 134쪽의 필사본(筆寫本)인데,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모든 도서(圖書)를 국학진흥원에 기탁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여 그것을 토대로 이번에 국역(國譯)을 하게 된 것입니다.주지(周知)하시다시피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선조(先祖)께서는 안동김문(安東金門)의 보백당(寶白堂)선조의 청백정신(淸白精神)을 이어받으신 조선조(朝鮮朝)중엽(中葉)의 문신(文臣)이자 퇴계(退溪)선생과 월천(月川)선생의 도맥(道脈)을 잇는 도학(道學)을 전수하신 학자이자 수많은 문인(門人)들을 길러낸 교육자(敎育者)로서 후대 사람들이 구전(苟全)선생의 글을 도문(道文)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祭享)된 불천위(不遷位)십니다.구전(苟全)선조(先祖)께서는 양친(兩親)을 극진히 봉양하는 효()를 바탕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백의(白衣)로 창의(倡義)하여 봉화의진(奉化義陣)의 참모(參謀)로 장서(掌書)를 맡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의병장(義兵將)으로 의병(義兵)들을 이끌고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시는 등 몸소 충의(忠義)를 구현(具現)하신 기록들이 이 속집(續集)에 많이 남아있습니다.이 속집(續集)을 볼 때 구전(苟全)선조(先祖)께서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약(柔弱)한 유자(儒者)에 머물지 않으시고 충효(忠孝)를 직접 몸으로 실현하신 지행겸병(知行兼倂)의 학문을 닦으셨으며,구전(苟全)선조(先祖)의 문장(文章)들 역시 탈속(脫俗)된 웅혼(雄渾)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속집(續集)이라고 하여 본집(本集)보다 함량 미달의 글들을 묶은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구전(苟全)선조께서는 만년(晩年)에 광해조(光海朝)때 출사(出仕)를 하신 관계로 가령 월과(月課)로 지은 작품들은 충군(忠君)의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원문집(原文集)을 편찬(編纂)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임금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미화한 글들은 의도적으로 빼서 속집(續集)으로 엮어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의 국역(國譯)에 이어서 강원일록(講院日錄)과 이번의 속집(續集)국역(國譯)을 통해서 구전(苟全)선조(先祖)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구전(苟全)선조(先祖)의 굉심(宏深)한 학덕(學德)의 편린(片鱗)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한 발 더 다가선 느낌이고, 아울러 후손(後孫)들에게도 문화전수(文化傳授)차원에서도 이번 국역(國譯)의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말미(末尾)에 부록(附錄)으로 어버이를 위한 7차례의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지은 시()들과 모친을 위해 지은 한글 가사(歌詞)들도 덧붙였으니 국문학사적(國學史的)으로도 임란(壬亂)직후의 어문학(語文學)연구에 가치가 있는 자료(資料)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끝으로 이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속집(續集)을 국역(國譯)해 준 족제(族弟) 세현(世顯)군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하면서 이 속집(續集)의 발간(發刊)으로 보다 더 동파족친(同派族親)들 간의 돈목(敦睦)과 함께 더욱 숭조(崇祖)의 념()을 키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무술(戊戌:2018)년 원단(元旦)에 송파(松坡)에서 생원공파종회(生員公派宗會) 회장(會長) 15세손 보현() 근지(謹識).

苟全先生文集 續集 解題   백천(白川) 김 세현(金 世顯)

 

. 序言

이 책은 조선조(朝鮮朝)중기(中期)의 문신(文臣)이며 학자(學者)이자 교육자(敎育者)이셨던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선생(先生)의 저술(著述)들과 기타 관련 자료(資料)들을 묶어서 국역(國譯)한 책인데,원본(原本)은 국학진흥원에 기탁된 가로 21Cm에 세로 30Cm13410 20 21책의 필사본(筆寫本)과 어버이를 위한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그 때 수창(酬唱)했던 시()들과 함께 구전(苟全)선생께서 계모(繼母)를 위해 지으신 한글 가사(歌詞)가 실린 수연회록(壽宴會錄)을 부록(附錄)으로 실었다.

 

. 家系

선생의 휘()는 중청(中淸)이고,()는 이화(而和)며 호()가 구전(苟全)이다. ()은 김()이고,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라말려초(羅末麗初)에 고창성주(古昌城主)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셔서 삼중대광태사아부(三重大匡太師亞父)인 휘()선평(宣平)을 상조(上祖)로 하여 조선조 성종(成宗) 때 명신(名臣)인 보백당(寶白堂)()계행(係行)이 선생의 5대조(代祖)이고,고조(高祖)의 휘()는 극예(克禮)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증조(曾祖)의 휘()는 세은(世殷)으로 영해교수(寧海敎授)였고,()의 휘()는 정헌(廷憲)으로 호()가 눌암(訥巖)인데 진사(進士)로 퇴계(退溪)선생의 문인(門人)이며,()의 휘()는 몽호(夢虎)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는 나주박씨(羅州朴氏)로 충의위(忠義衛)승인(承仁)의 따님으로 선생께서 처음에 글을 배우신 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선생이 외종조부가 된다.

 

. 간추린 생애(生涯)

선생은 1566(丙寅:明宗21)1220일 봉화 만퇴리(晩退里)에서 태어 나셔서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소고(嘯皐)박승임(朴承任)선생께 수학(修學)을 하고 그 뒤 월천(月川)조목(趙穆)선생이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부임해 오시자 관아(官衙)에 나아가 배우길 시작하여 월천(月川)선생이 퇴임 후에는 월천서당(月川書堂)에 가서 수업을 하다가 월천(月川)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셨는데, 그 당시의 학자(學者)들은 이미 의문점이 있으면 제일 먼저 선생께 질정(質正)을 했다고 한다. 그 뒤 한강(寒岡)정구(鄭逑)선생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해 와서 심경(心經)을 강독(講讀)하자 선생도 생도(生徒)로 나아가서 한강(寒岡)선생께 배움을 청했다.

그래서 나중에 선생을 평론하는 이들이 말하길“경학(經學)의 정수(精髓)는 월천(月川)에게서 전수받았고,문장(文章)의 오건(奧建)함은 소고(嘯皐)선생에게서 전수 받았고, 예학(禮學)의 순수(純粹)함은 한강(寒岡)에게서 전수받았다.”고 하여 동방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퇴계(退溪)선생의 고족(高足)인 세 분 선생께 훈습(薰習)을 해서 영남(嶺南)에서는 선생의 학행(學行)을 앞설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 뒤 우복(愚伏)경경세(鄭經世)는 구전(苟全)선생과 함께 경연(經筵)에 오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며,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도 구전(苟全)선생의 예학(禮學)을 높이 평가(評價)한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이 속집(續集)에 실린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이나 관례(冠禮)에 관한 기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학(禮學)의 조예(造詣)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선생은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충효(忠孝)를 기본으로 한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자기(自己)수양(修養)과 실천(實踐)궁행(躬行)을 하여 임진왜란 때는 백의(白衣)로 분연히 창의(倡義)하여 유종개(柳宗介)공과 봉화의진(奉化義陣)을 결성하여 왜적(倭敵)을 토벌하다가 선생께서 근친(覲親)을 간 사이에 노루재에서 해로(海路)를 통해서 죽령(竹嶺) 길을 열려는 왜군(倭軍)의 주력군(主力軍)에게 의명(義兵) 6백 명이 몰살(沒殺)을 당하고, 의병(義兵)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선생께서 임흘(任屹)공을 대장으로 다시 의진(義陣)을 재결성하여 문경 전투나 경주 전투에 까지 참전하고는 임란(壬亂)이 끝나서 집에 돌아와서는 전공(戰功)을 세운 일을 일체 말하지 않고 나중에 훈공(勳功)도 사양하셨으니 선생께서는 선비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으로 치부하신 까닭이다. 그런 기본 의식 구조가 이 속집(續集)의 서()에 잘 나타나 있다.선생께서는 당초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반천(槃泉)에 강학소(講學所)를 짓고는 생도(生徒)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며 학문(學問)연마(硏磨)에 정진(精進)하고 있었는데, ()이신 첨지공(僉知公)의 강권(强勸)으로 늦은 나이인 45세에 명경과(明經科)2등으로 급제(及第)하여 한성부(漢城府)참군(參軍:7),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6),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예조정랑(禮曹正郞:5),지제교(知製敎)를 겸하고,천추사(千秋使) :허균(許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오고,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5),필선(弼善:4),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경상우도(慶尙右道)시관(試官), 신안현감(新安=星州縣監),분승정원(分承政院)승지(承旨:3),선유사(宣諭使)를 역임하고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의병장으로 도성(都城)에 들어가서 읊은 시()가 이 속집(續集)에 실려 있다.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상중(喪中)이라 기병(起兵)을 못하고 1629(己巳:仁祖7)613일 내성(乃城)우사(寓舍)에서 64세의 일기로 서거(逝去)하셨다.그 뒤 사림(士林)들이 1669(己酉:顯宗10)에 반천정사(槃泉精舍)를 지어 제향(祭享)하다가 1831(辛卯:純祖31)반천서원(槃泉書院)으로 승호(陞號)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어 아직 복원(復院)되지 못하고 있다.

 

. 編制 內容

속집(續集)의 편제(編制)를 보면 맨 앞에 목차(目次)와 서문(序文)도 없이 표제(表題)에 적힌 것과 같이 권지(卷之)1에 시() 121()가 실려 있고, 대신 지은 상소문(上疏文)인 백운동유생소(白雲洞儒生疏)가 있고, 책문(策文)으로 문전폐(問錢幣)에 대한 대책문(對策文)이 있고, ()5편인데, 상좌감사서(上左監司書), 상순찰서(上巡察書), 정주쉬한필구문(呈主倅韓必久文), 여의병대장임흘서(與義兵大將任屹書), 여신예안순부지제서(與申禮安順夫之悌書)가 실려 있고, 잡저(雜著)로 해구불하설(海鷗不下說)이 실려 있으며, 기문(記文)에는 과제(課題)로 지은 춘대기(春臺記)가 실려 있다. 그리고 표문(表文)으로는 의당중서사인고계보사사종유표(擬唐中書舍人高季甫謝賜鍾乳表)가 실려 있고, 권지2에는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과 관례(冠禮)가 실려 있다.부록(附錄)에는 구전(苟全)선생께서 어버이를 위한 수연(壽宴)을 베풀었을 때 참석한 사람들과 또 그 때 수창(酬唱)했던 시()들도 있고, 또 특이하게도 계모(繼母)를 위하여 한글 가사(歌詞)까지 지어서 읊고 난 기록들이 잡기장(雜記帳) 식으로 그대로 남아 있어서 국문학사적(國文學史的)으로도 큰 연구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임란(壬亂)직후,아니 임란(壬亂) 이전의 한글 사용 정도와 그 당시의 음운(音韻)체계는 물론 표기(表記)방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한글 가사(歌詞)들이 실려 있는데, 이미 그 당시에 이미 반치음들이 다 사라졌고, 근대의 용어들과 흡사하게 한글이 사용 됐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 그 내용(內容)들을 살펴보면 시()들은 원집(原集)과 마찬가지로 일상(日常)의 견물(見物)과 만시(輓詩) 및 교유(交友) 관계나 차운(次韻)한 시()들이 대부분이다.여기에 실린 시()들은 출사(出仕)하기 이전과 이후(以後)의 시()들이 확연히 구분되는데,그 구사하는 시어(詩語)들이나 사물을 대하는 눈높이가 확연히 다름을 보이며, 특히 만년(晩年)에 지은 시()들은 완전 탈속(脫俗)한 도풍(道風)마저 풍긴다.()의 작법(作法)에 있어서도 5언시(言詩)7()율시(律詩)의 경계가 없이 요즘 식의 정형화(定型化)된 글자 맞추기 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유 분망하게 의미 전달과 기본 운율(韻律)에 충실하여 노래하고 있는 점이 구전(苟全)선조의 시풍(詩風)으로서,()를 노래하면 거의 같은 의식(意識)세계로 빠져 들어 공감(共感)이 빨라서 감정(感情)이입(移入)이 잘 되는 점이 특색이다.즉 기본 운율(韻律)은 완벽하게 지키면서 내용면에 있어서도 평이(平易)한 단어로 매우 적절한 용어 시어(詩語)들을 구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에는 시()335()실려 있고,이 속집(續集)에도 121()가 실려 있어서 무려 450여수()의 시작(詩作)을 하셨으니 구전(苟全)선생은 요즘으로 말하면 시인(詩人)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양적(量的)으로 보아도 다작(多作)을 하셨으며,그 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고아(古雅)한 정신세계를 잘 표출하고 있어서 매우 높은 풍격(風格)을 보이고 있다.이는 시()를 모르는 범인(凡人)들이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를 않고 저절로 감흥(感興)이 일어나며, 뭔가 모를 시원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이 속집(續集)에 실린 시()들의 주제(主題)별로 살펴보면 주로 자연(自然)을 노래하거나 견물(見物)들에 대해서 읊거나 벗들과의 수작(酬酌)이 많고,흥시(卽興詩)와 같은 우음(偶吟)이나 만시(輓詩)들도 많다.또 출사(出仕)하기 전에는 한껏 포부를 펼치셨다가 만년에는 벼슬에서 어떻게 물러나야 할지를 고심한 흔적이 시()들의 행간에 배어있다.예를 들면 이교취리도(橋取履圖)란 시에서 제왕사재자 탁부양유이 오호태공법 기년신소비(帝王師在玆 托付良有以 嗚呼太公法 幾年神所秘)(제왕의 스승이 여기에 있다고 잘 부탁함이 있었네.아아! 태공망의 병법서로구나! 여러 해를 신이 감춰둔 곳에 있었네)라고 비책(秘策)을 품고서 장량(張良)처럼 자신의 포부를 한껏 펼치길 열망하는가 하면 만년(晩年)에 지은 우음(偶吟)이란 시()古院三春晝漏遲,滿庭幽草翠均時,烏紗盡日閑無事,却向滄浪夢(고원삼춘주누지,만정유초취균시,오사진일한무사,각향창랑몽)(옛 서원의 봄날,낮 시간은 더디고,마당 가득 깊이 우거진 풀들 고를 때, 관복 입고 종일 일 없이 한가로워,푸른 물가로 가서 기한이 참을 꿈꾸네.)라며 지난(至難)한 사환(仕宦)의 길을 벗어나고픈 심경을 읊으셨으며, 최은()에게 차운(次韻)한 시()에는 政積不仁元有愧,毁來非實奈求全,世間萬事皆泡幻,笑把榮枯付碧天(정적부인원유괴, 훼래비실나구전, 세간만사개포환, 소파영고부벽천)(어질지 못한 정무가 쌓여 본래 부끄러워,사실 아닌 헐뜯음에 온전함을 구하리? 세상살이 만사가 다 물거품과 환형인 걸,영고성쇠 잡고 웃도록 하늘에 부탁하네.)라며 비방과 모함에 지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늘에 맡기고 싶다는 심경을 노래하며,그 뒤 신안(新安)제군(諸君)들에게 보인 시()에서는行藏此日還憎口,歸去平生奈玷躬,爰我諸君如恕我,忍敎霜鬢城中(행장차일환증구,귀거평생나점궁,원아제군여서아,인교상빈성중)(도를 행하다 물러난 이날 도리어 미움의 구설만 돌아오고,평생 귀거래사 읊으려 돌아가려 함이 어찌 내 자신의 잘못이랴? 한가한 날 제군들은 날 용서해 주고,참으라고 가르친 백발 성중에나 묶어두게나)라며 이상과 현실 정치의 괴리(乖離)에 고심하다가 선뜻 수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고운(古韻)에 차운한 시()에는客遊京洛久,夢入白雲催,世濁曾閑秩,時晴奈不才,爭如歸舊業,更自掃荒苔,奉老有餘力,晦翁書可開(객유경락구,몽입백운최,세탁증한질,시청내부재,쟁여귀구업,갱자소황태,봉로유여력,회옹서가개)(서울과 낙동강을 오래 유람한 과객이라 꿈에도 흰 구름을 재촉하는 꿈을 꾸네.세상이 혼탁하여 일찍이 한직 벼슬했는데 맑은 시절에 어찌 재주 없다 하는가? 다투어 옛날 업으로 돌아가서 다시 스스로의 거친 이끼 청소하고, 노인 봉양할 여력이 있으니 주자의 책이나 펼쳐 볼까 하노라.)끝내는 고향으로 가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본업인 학문(學問) 연구와 생도(生徒)들 가르치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다음으로 구전(苟全)선생의 글들을 살펴보면 역시 젊었을 때의 문장과 만년(晩年)의 원숙한 문장은 유려(流麗)한 면이나 거기에 담긴 내용과 언어 구사 면에 있어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바로 이 속집(續集)에는 그런 대비(對比)가 한 눈에 느껴진다. 이는 우선 실린 편수(篇數)가 적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내용을 보면 언제 지은 것인지 바로 알 수 있기에 감별(鑑別)이 쉬울 뿐이다.상소문(上疏文)인 백운동유생(白雲洞儒生)을 대신하여 지은 상소문인데 서원(書院)에 소속된 관노비(官奴婢)4명을 타역(他役)으로 돌리지 말고,그대로 존치시켜서 사액(賜額)을 내릴 때의 취지에 맞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그 근거 서류가 임란(壬亂)을 겪으면서 문서들을 땅에 묻어두었었는데,다 썩어서 인멸(湮滅)됐지만 죽계지(竹溪誌)에는 기록되어 있으므로 교육(敎育)진흥 차원에서 최소한 유생(儒生)들을 뒷바라지할 관노비 4명은 다른 잡역(雜役)에 동원시키지 말고 대대로 서원(書院)소속으로 해 달라는 내용의 상소(上疏)이다.다음으로 책문(策文)은 전폐(錢幣)에 대해서 물은 것인데, 아마도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려고 왕()이 물은 것 같다. 조세를 모두 쌀[]로 거두다 보니 수송(輸送)이나 보관 과정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보다 편리하고 간편한 전폐(錢幣)를 사용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문(策文)에 대해 구전(苟全)선생은 고금(古今)의 전폐(錢幣)들에 대해서 해박(該博)하고 상세히 언급하면서 그 편리성은 인정하면서 시행(施行)여부는 오직 임금의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근본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함인데, 나라가 부강(富强)해 지려면 백성(百姓)들이 은풍(殷豊)해 져야 되고 국가 재정(財政)의 절용(節用)도 필요하다면서 통보(通寶)들처럼 돈이 부자들의 궤짝에 사장(死藏)되지 않도록 잘 유통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전폐(錢幣)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려면 미리 백성들에게 충분히 알려서 시행할 것을 대책으로 올린 글이다. ()5편이 실려 있는데, 먼저 좌감사(左監司)에게 올린 글은 구전(苟全) 선생께서 임란(壬亂)때 백두(白頭)로 창의(倡義)하셔서 이미 노루재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그 뒤 의진(義陣)을 재건(再建)했지만 병력(兵力) 지원 면이나 관군(官軍)과의 합동 작전에서 의병(義兵)들을 무시하고, 더욱이 군량(軍糧) 보급 면에서 애로가 많아서 그 당시 좌감사(左監司)였던 학봉 김성일(金誠一)께 올린 글이다. 이 글에는 원군(元軍)의 증파(增派)문제와 명령 계통도 병사(兵使)를 통해서 하라는 지시의 부당성도 지적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군량(軍糧) 지원 문제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얼마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현 실정의 어려움만 토로를 하고 있어서 알아서 처분해 달라는 투이다.다음으로 순찰사(巡察使)께 올린 글도 역시 의병(義兵)활동의 애로점을 밝히면서 특히 명나라 대군(大軍)이 오면 군량(軍糧)조달과 죽령로(竹嶺路)의 수송(輸送)대책에 대해서 봉화현(奉化縣)의 사정을 알리고 한꺼번에 수송을 하지 말고 천막이나 솥 같은 군수(軍需)물자(物資)는 어쩔 수 없더라도 콩과 쌀 같은 식량(食量)보급 물량은 절반으로 나눠주게 하고,수송(輸送)인력도 인근의 고을에서 지원을 받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또 한필구(韓必久)현감(縣監)에게 올리는 글은 조정(朝廷)에서 유생(儒生)들에게 활쏘기와 포() 쏘는 훈련을 해서 매월 그 실적을 보고하라고 한 데 대해서 그 부당성을 밝히고 감사(監司)께 보고하여 조정(朝廷)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해 달라는 글이다. 이를 말리는 근거로써 유생(儒生)들에게 유학(儒學)을 통한 충효(忠孝)정신으로 무장을 시켜야지 어린 유생(儒生)들에게 지엽 말단적인 활쏘기와 포 쏘기를 시켜서 일개 무부(武夫)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임란(壬亂)이나 이괄(李适)의 난 때 죽음을 불사하고 창의(倡義)했던 경험에 비추어 유생(儒生)들은 학문을 하는 것이 진정 나라를 지키는 첩경임을 남송(南宋)의 예를 들어서 역설하고 있다. 조정(朝廷)에서는 호란(胡亂)에 대비하여 국민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유생(儒生)들에게 이런 조치를 내린 모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두 호란(胡亂)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으니 역사적으로 볼 때 외교적으로 해결하면 됐을 것을 그 당시의 노론(老論) 조정과 인조(仁祖)의 판단 착오로 인한 지도자(指導者)의 중요성을 반추하게 된다.임흘(任屹)의병장(義兵將)에게 쓴 글은 구전(苟全)선생께서 봉화의진(奉化義陣)의 장서(掌書)로 있을 때 의병(義兵)대장(大將)과 두 부장(副將)간의 갈등 문제를 조율하는 내용인데, 자신의 보직(補職)을 빨리 변경해 줄 것과 일개 사병의 참소(讒訴)로 장수(將帥)들의 반목이 일어난 것이니 그 참소한 사람을 엄벌하고,화풀이 대상인 죄 없는 노비를 풀어줘서 좌우(左右)부장(副將)과의 관계를 빨리 회복해 달라는 내용이다.끝으로 신지제(申之悌) 예안(禮安) 현감(縣監)께 쓴 글도 역시 임란 의병(義兵)창의(倡義)시에 쓴 글로 봉화 의진(義陣)의 전공(戰功)을 기록해서 다시 보내 달라는 것에 대해서 봉화(奉化)의진(義陣)은 경상 좌도에서 가장 먼저 창의(倡義)했으며, 적을 벤 수급(首級)에 대해서 임흘(任屹)의병 대장과 이화() 우부장(右副將)과 김용(金湧) 좌부장(左副將)이 서로 크로스 체크하여 날인한 것으로 조금도 가감됨이 없다는 것으로 이미 매 전투 때마다 틀림없이 문서로 보고(報告)를 올렸으니 그것을 보라고 하는 내용이다.다음으로 잡저(雜著)라고 해구불하설(解鷗不下說)에 대해서 쓴 글이 실려 있는데,내용은 어느 바닷가에 갈매기와 노인이 매우 친하여 둘이 거의 같이 붙어서 지내다가 어느 날 갈매기가 하늘로 날아가 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놓은 글이다. 그 이유로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서로 간의 불신(不信)이 싹터서 내려앉지 않는다면서 원래 사람과 금수(禽獸)와의 구별이 있고, 또 갈매기는 제 본성대로 멀리 날아가는 것이 자유롭지,인간에게 매여서 지내는 구속감에서의 해방이라며 자유를 맛본 갈매기는 결코 돌아 올 수 없다는 논거이다.기문(記文)은 월과(月課)로 지은 춘대기(春臺記)인데 명문장(名文章)이다.춘대(春臺)란 태평 성대(盛大)란 말인데, 이 기문(記文)에서 구전(苟全)선생께서 실제로 춘당대(春塘臺)에 오르신 건지는 모르지만 분명 어떤 대()에 올랐는데,그 대()가 바로 유형적인 대()라기 보다는 태평 성대(盛大)라는 대()를 희구하면서 지은 글이다.역사적으로 인류가 인()에서 시작하여 3()5()와 요순(堯舜)시대에서부터 진()()대와 당()나라 정관(貞觀)의 치()라는 백성들의 의식(衣食)이 풍족했던 정치적인 성대(盛大)를 얘기하고 또 노자(老子)보다는 공자(孔子)의 유학(儒學)으로 지배되는 윤리 도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이 성대(盛大)라면서 공자(孔子)께서 안연(顔淵)과 증점(曾點)이 대화하면서 서로의 소망을 얘기할 때 증점(曾點)이 봄옷이 만들어지면 동자(童子)들을 데리고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沐浴)하고 바람 쐬고 싶다고 하자 공자(孔子)께서 허여(許與)하시는 장면이라든가 송()나라 때의 주자(朱子)와 염락(廉洛)의 학문을 동경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춘대(春臺)는 분명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대()를 다녀오신 기문(記文)이다.표문(表文)도 아마 월과(月課)로 지으신 것 같은데,()나라 어사(御使)였다가 중서성(中書省)사인(舍人)이 된 고계보(高季輔)가 당태종(唐太宗)에게 고언(苦言)의 상소(上疏)를 올리자 당태종(唐太宗)이 약석(藥石)같은 말이라며 귀중한 약석(藥石)인 종유석(鐘乳石)을 내려 준 고사(故事)에서 고계보(高季輔)의 입장에서 그에 대한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전문(表箋文)을 쓴 글이다.역시 명문장(名文章)으로 논리(論理)가 정연하다. 대간(臺諫)의 임무를 다했을 뿐인데도 초월(楚越)의 공물(貢物)인 희귀한 약재(藥材)를 주셨으니 원기 백배하여 더욱 고언(苦言)을 드리겠다면서 주역(周易) 손괘(損卦)의 괘상(卦象)을 빗대어 제왕(帝王)의 자리인 5()가 유약(柔弱)한 음()이고, 신하의 자리인 2()가 강강(剛强)한 양()이 자리한 까닭이라면서 자신의 강강(强剛)함이 손()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문(表文)에 까지 주역(周易)적인 논리를 구사하신 점이 또한 구전(苟全)선생께서 주역(周易)에 해박하시다는 점을 대변하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속집(續集) 2에는 심의(深衣)제조법(製造法)과 관례(冠禮)가 수록되어 있는데,이는 구전(苟全)선생의 독창적인 기록이기 보다는 각종 예서(禮書)의 기록들을 재구성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門人)들이 공유(共有)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기록들은 한강(寒岡)문집이나 그 문인(門人)들의 문집(文集)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아마도 이것을 기록했을 때가 만력(萬曆) 경술(庚戌)11월로 밝히고 있으니 이때는 구전(苟全)선생께서 막 출사(出仕)를 한 해이기도 한데,심의(深衣)의 필요성이나 관례(冠禮)에 대한 정립(定立)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이 커져서 한강(寒岡)선생께 질정(質正)을 요구하여 올바른 것을 기록해 두셨을 것으로 짐작된다.각 문인(門人)들 마다 차이가 있는 점은 촌척(寸尺)과 침척(針尺)의 차이만 다를 뿐이고 나머지는 같다. 관례(冠禮)는 주자가례도(朱子家禮圖)를 그대로 해설해 놓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가옥 구조 실태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사당(祠堂)이 없는 집도 있는데,거기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왕가(王家)의 종묘(宗廟)를 기준으로 기술해 놓은 점이 비현실적이라 할 것이다.또 부록(附錄)으로 구전(苟全)선생께서 어버이를 위하여 7차례의 수연(壽宴)을 베풀면서 참석한 수연회록(壽宴會錄)을 실었는데,이 속에는 수병축사(壽屛祝詞)와 함께 계모(繼母)를 위한 한글 가사(歌詞)가 실려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 結語

이상과 같이 구전선생 문집 속집을 개관(槪觀)해 보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굉심(宏深)한 구전(苟全)선생의 학문적 깊이나 넓이를 만분의 일도 천착(穿鑿)을 하지 못했으니 그 부분은 후학(後學)들의 깊은 연구(硏究)를 기대할 따름입니다.아울러 조상(祖上)의 문집(文集)이라고 워낙 천학비재(淺學菲才)한 사람이 국역(國譯)을 한 관계로 오류(誤謬)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강호제현(江湖諸賢)들께서 많은 질정(叱正)을 해 주셔서 후일(後日)에도 바른 연구가 되길 바랍니다. 끝으로 이 속집(續集) 간행을 계기로 구전(苟全)선생에 대해 보다 학술적(學術的)인 폭 넓은 재조명(再照明)이 있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2018(戊戌)년 원단(元旦) 해헌고택(海軒古宅)에서 백천(白川) 김세현(金世顯)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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