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淸休齋文集(揚烈)
淸休齋文集(揚烈)
제목 淸休齋先生文集附錄(청휴재선생문집부록)
작성자 관리자 [2018-01-08 17: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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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休齋先生文集附錄(청휴재선생문집부록)


 


贈遺諸篇(증유제편)남겨 받은 여러 편


 


奉別克紹(봉별극소) 李鍝


극소(克紹:淸休齋 金揚烈)를 떠나 보내며, 이우


 


此日黌堂成摻別 차일횡당성섬별 이날 학당(성균관)에서 손잡고 헤어져


羨君先我着鞭歸 선군선아착편귀 그대 부러워하며 난 먼저 채찍질하며 돌아왔네.


祇緣行路羊腸險 지연행로양장험 다만 인연의 행로는 구절양장처럼 험한데


進退隋時是所希 진퇴수시시소희 수시로 진퇴를 하니 이는 드문 바일세.


 


謝少室洞主老兄見訪(사소실동주노형견방)吳善餘新溪


소실동(少室洞)주인인 노형 방문을 사례함. 신계 오선여


 


萬事無心兩眼昏 만사무심양안혼 만사가 무심하니 두 눈도 흐려져


不知芳草遍郊原 부지방초편교원 들판에 널린 방초도 알아보지 못하네.


豈料山雨孤村夕 개료산우고촌석 산비 내리는 외진 산촌 저녁을 어찌 헤아려서


更接仙翁笑語溫 갱접선옹소어온 신선 같은 늙은이 따뜻한 말로 웃으며 마주하네.


 


病弟平日不識風雲月露之句如有吟詠處則以言不以詩感兄枉見搜括枯腸謹呈一首納卒受車計也幸拊掌而敎之


병제평일불식풍운월로지구여유음영처칙이언불이시감형왕견수괄고장근정일수납졸수차계야행부장이교지


 


병든 아우가 평소에는 풍운월로(風雲月老:세도인심(世道人心)에 도움 되는 것이 없고,한갓 음풍영월(吟風詠月)한 시문(詩文)을 이름.)란 구절도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음영(吟詠)한 처지라서, 말로는 시감(詩感)이 안 납니다. ()께서 왕림하여 보시고 문장에 재주가 없으니[枯腸:굶주린 창자.]찾아 묶어주십시오. 삼가 한 수()를 드리오니 받아주시면 마침내 수레로 받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손뼉을 치며[拊掌] 다행이겠습니다.


 


次贈金克紹(차증김극소)權坵次山


김극소(金克紹)에게 차운(次韻)하여 줌. 차산 권구


 


丈夫人間世 장부인간세 대장부가 인간 세상에서


聚散不足悲 취산부족비 모으고 흩음이 부족해서 슬프네.


應知他日會 응지타일회 응당 다른 날 모임을 아나니


懽情又此時 환정우차시 그때 또 기꺼운 정 나누세.


 


送金進士克紹南歸(송김진사극소남귀)李榮世日休亭


남쪽으로 돌아가는 극소(克紹)김진사를 보내며, 일휴정 이영세


 


天涯俱遠客 천애구원객 온 세상 함께 가자던 먼데서 온 손님


歸去不同時 귀거부동시 고향 돌아가는 때는 같지 않네.


洛水多秋鴈 낙수다추안 낙동강에는 가을 기러기들이 많아


惟應數寄詩 유응수기시 삼가 몇 편의 시는 응당 부쳐주겠지.


 


晩退金進士叔主次韻五絶 李元弼汾溪


(만퇴김진사숙주차운오절) 분계 이원필


만퇴(晩退)김진사 아저씨의 운에 차운(次韻) 5구절


 


卜築溪堂閱幾霜 복축계당열기상 가려 지은 물가 집은 서리처럼 차게 지내


昔年蒼髮已成黃 석년창발이성황 옛날의 검은 머리카락 이미 누렇게 변했네.


山間風月三間屋 산간풍월삼간옥 산간의 세 칸 모옥에서 풍월 읊으며


剩見圖書架一堂 잉견도서가일당 게다가 서가에 책들로 방 가득 차있네.


 


 


 


右生涯淡白之意(우생애담백지의)


위는 생애(生涯)가 담백(淡白)함을 의미함.


 


千莖衰髮白如霜 천경쇠발백여상 천 줄기의 쇠약한 머리 털 서리처럼 희니


莫惜秋山樹葉黃 막석추산수엽황 가을 산 나무에 단풍 든다 애석해하지 마오.


樂善從來稱景茂 락선종래칭경무 선을 즐겨 종래에는 크고 무성하다 칭하니


世間人幾有斯堂 세간인기유사당 세상 사람들은 어찌 이런 집이 있냐고 하네.


 


右爲善自樂之意(우위선자락지의)


위는 선()을 행하며 자락(自樂)한다는 뜻.


 


同苦糟糠八十霜 동고조강팔십상 80년을 조강지처와 동고동락하니


幾將鍊法服松黃 기장련법복송황 연단법은 아마도 송화 가루 복용 같네.


琴瑟偕老多餘慶 금슬해로다여경 금슬 좋게 해로하니 남은 경사 많이 있고


膝下雲仍已滿堂 슬하운잉이만당 슬하가 구름처럼 이미 집안 가득 찼네.


 


右偕老多慶之意(우해로다경지의)


위는 해로(偕老)하며 경사가 많다는 뜻.


 


殘馬行裝踏曉霜 잔마행장답효상 늙은 말에 행장을 꾸려 새벽 서리 밟아 와


承顔座上兩眉黃 승안좌상양미황 좌상을 뵈오니 양 미간이 누렇네.


筵前綵舞岡陵祝 연전채무강릉축수연 자리 앞 색동 춤 높 낮은 언덕 축수하고


萬壽杯觴怡北堂 만수배상이북당 만수를 비는 잔들 어머니가 기뻐하네.


 


右一家獻祝之意(우일가헌축지의)


위는 일가(一家)가 축하드린다는 뜻.


 


皓首婆娑欺雪霜 호수파사기설상 흰 머리의 할매 할배 눈서리 맞은 양 속이고


芳樽瀲灩瀉鵝黃 방준렴염사아황 향내 나는 술독은 넘쳐나서 노란 술을 쏟네.


陪歡此日知爲幸 배환차일지위행 수행하며 모시고 즐긴 이날 행복함을 알았고


勝事留題景茂堂 승사유제경무당 훌륭한 일로 남긴 제목은 경무당이라 하네.


 


右陪遊盡歡之意(우배유진환지의)


위는 귀인을 모시고 놀면서 매우 기뻤다는 뜻.


又別韻(우별운) 또 다른 운()


 


好趁良辰設舞筵 호진양신설무연 좋음을 따라 좋은 날 춤추는 수연을 벌려서


蒼顔白髮儼如仙 창안백발엄여선 늙어 여윈 얼굴에 백발은 엄연한 신선 같네.


人間此會看曾未 인간차회간증미 사람으로서 이런 모임 일찍이 본적 없어서


欲倩龍眠上畵傳 욕청용면상화전 잠드시면 아름다운 모습 그려 전하고 싶네.


 


右且陳未盡之意(우차진미진지의)


위는 또 미진함을 풀어 놓았다는 뜻.


 


歲舍著雍攝提格孟冬旣望後三日表弟金至一氏爲兩親設壽酌祇會內外族十餘人鶴髮婆娑彩舞蹁躚極意陪歡達曙而罷此實一家


세사저옹섭제격맹동기망후삼일표제김지일씨위양친설수작기회내외족십여인학발파사채무편선극의배환달서이파차실일가


稀覯之盛事也頌禱不已之餘主翁叔主寄示短律一絶敬捧披讀不勝感賀之至忘拙舒情敢步瓊韻演爲五絶以寓區區景慕之懷云爾


희구지성사야송도부이지여주옹숙주기시단률일절경봉피독부승감하지지망졸서정감보경운연위오절이우구구경모지회운이


 


때는 무인(戊寅:저옹,섭제격=1698)년 음력 10[孟冬]19[旣望後3]외종제(外從弟)인 김지일(金至一)씨가 양친(兩親)을 위하여 수작연(壽酌筵)을 베풀었다. 마침내 내외족(內外族) 10여 사람이 모여서 흰 머리[鶴髮]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앞에서 색동옷 입고 춤추고,(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며 뜻을 다하여 어른을 모시고 기뻐하다가 날이 새서야 마쳤[]. 이는 실로 한 집안에서 구경하기 드문 성대한 일이었다. 송축(頌祝)을 빌 뿐만 아니라 더구나 주옹(主翁)이신 아저씨[叔主]께서 단율(短律) 한 마디를 보내서 보여 주셨기에 공경히 받들어 뜯어 읽어보니 하례(賀禮)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졸렬함도 잊고 감정을 펼쳐서 감히 좋은 운()에 다섯 마디를 이어서 통하게 하여, 구구(區區)하게 경모(景慕:우러러 사모함.)의 생각을 말한 것을 부칩니다.


 


少室幽軒(소실유헌)南亨會


 


萬料外得奉賢胤兼承佳作兩章仍悉靜中淸趨萬勝慰悅感翫實切于中弟一晉之計雖未卜早晏而擬於未熱前動着盖


만료외득봉현윤겸승가작양장잉실정중청추만승위열감완실절우중제일진지계수미복조안이의어미열전동착개


爲社廟而尙未趁就則兒女之情雖不勉副不足歸於不慈兄可恕之耶只相思之苦兄與我同然恐或不得相副於將來故


위사묘이상미진취칙아녀지정수불면부불족귀어불자형가서지야지상사지고형여아동연공혹부득상부어장래고


姑呈拙句以謝俯領如何柳綠花紅四月天淸和端合過前川先賢道趣徒深想衰病猶難學少年敢用先賢之韻而反於先


고정졸구이사부령여하유록화홍사월천청화단합과전천선현도취도심상쇠병유난학소년감용선현지운이반어선


賢所修亦可愧惕


현소수역가괴척


 


少室幽軒(소실유헌)南亨會


소실(少室)유헌(幽軒)에게 탑와 남형회


 


밖에서 얻은 모든 자료들과 아드님[賢胤:남의 아들에 대한 경칭.똑똑하고 훌륭한 자손.영식.]께서 받들어 온 훌륭한 작품 두 장()을 받으니 실로 고요한 중에 맑음을 쫓아서 반드시 어떤 위로 보다 나아서 기쁜 마음에 완상(翫賞)을 하니 실로 간절하던 중에 저는 한 발 나아갈 계획입니다. 비록 가리진 않았어도 이르건 늦건 조만간[早晏]에 덥지 않을 때 헤아려서 그 전에 움직일 것입니다. 사묘(社廟)를 위해 덮어씌우면 거의 쫒아가지 못하게 되므로 아녀자의 정()으로 비록 힘쓰지 않아서 알맞은 것도 부족하게 돌아간다면 사랑하지 않는 형()이 용서나 하시겠습니까? 다만 서로 생각하는 고민이야 형이나 저나 같을 것이므로 혹시 장래에라도 서로 부차적인 것을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해서 잠시 드리는 졸구(拙句)라도 고개 숙여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은 봄철인 4월 초하루[淸和] 날이 어떻겠습니까? 실마리가 과거 앞 내의 선현(先賢)들께서 도()를 향해 다다름을 생도들이 깊이 생각한 것과 맞습니다. 쇠약해서 병들고 오히려 학문은 어려운 소년이 감히 선현(先賢)의 운()을 사용함은 반대로 선현(先賢)들의 닦은 바라서 또한 부끄럽고 두려울 만합니다.


 


淸休齋尊几下(청휴재존궤하)李東標懶隱


 


頃晉仙庄忽卒太甚不得從容承誨迨今耿耿伏承兩度下札伏感無已仍伏審閒中體候萬相區區無任下忱侍生親傍僅


경진선장홀졸태심부득종용승회태금경경복승양도하찰복감무이잉복심한중체후만상구구무임하침시생친방근


遺而此地景像愁慘之中酬應益煩顚沛可知柰何柰何下敎事前日面陳縷縷非有一毫飾讓而亦蒙恕諒至勤胤兄涉險


유이차지경상수참지중수응익번전패가지내하내하하교사전일면진루루비유일호식양이역몽서량지근윤형섭험


虛枉愧罪之至不敢自安於心耳盛事得與在執役之列實是生一生之幸況世誼情分何敢不盡心於此而自視萬萬不


허왕괴죄지지불감자안어심이성사득여재집역지열실시생일생지행황세의정분하감불진심어차이자시만만불


似終不敢强副盛敎伏望不以爲罪而少加察焉則他日獲見於當世秉筆之士敢不樂爲之先而道盛德幽光耶惟增慚懼


사종불감강부성교복망불이위죄이소가찰언칙타일획견어당세병필지사감불락위지선이도성덕유광야유증참구


竢罪竢罪謹不備


사죄사죄근줄비


 


淸休齋尊几下(청휴재존궤하)李東標懶隱


청휴재(淸休齋)어른께 올림. 이 동표 나은


 


경진(頃晉)선장(仙庄)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슬픔이)극심하여 조용히 가르침 미침을 얻지 못했습니다. 지금 불안하게도[耿耿:빛나는 모양.잠이 오지 않는모양.]두 번이나 서찰을 보내 주셔서 살필 감동이 없을 지경입니다. 삼가 한가한 중에 체후(體候:그 기거(기거)의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말.) 강녕하시고 두루두루 살피시는지 구구(區區:변변치 못한 마음.제 각각.부지런한 모양.사랑함.작은 모양.득의(得意)한 모양.)히 여쭙니다. 하릴없는[無任:쓸모가 없음.맡은 일에 견디지 못함.참고 견딜 수 없음.] [侍生]에게 친히 곁에서 정성을 내려주셨는데 이제 겨우 보내드리는 이 지경이라 형상이 몹시 비참한[愁慘]중에 응답함[酬應:술잔을 되돌려서 권함.]이 더욱 번거롭고 당황하여 허둥거림[顚沛:위급 존망의 경우 발이 걸려 넘어짐.좌절함.짧은 시간.]을 알 수 있는데야 어떻게,어찌해야 합니까? 하교(下敎)하신 일은 전날 뵙고서 자세히 길게 이어가며[縷縷]벌려 놓았듯이 일호(一毫)라도 겉으로만 사양하는 채 함[飾襄]이 있어서가 아니라 역시 몽매함이니 사정을 살피셔서 용서해 주십시오. 지극히 부지런한 윤형(胤兄)께서 위험을 무릅쓰고[涉險]거짓으로 굽힌 부끄러운 죄(虛枉愧罪)에 이르렀는데, 감히 마음이 편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훌륭하고 성대한 일[盛事]에 집사[執役:귀인을 가까이 모시고 사무를 보는 사람.국민이 공역(公役)을 치름.]의 반열을 얻어서 같이 있다는 것은 실로 송사리와 같은 시생[]일생(一生)의 행운일 것입니다. 하물며 세의(世誼:대대로 사귀는 정의.世交.)의 정분(情分)이 있는데 어찌 감히 이에 진심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보건대 절대로[萬萬:결코. 1. 많은 수.썩 뛰어남.] 끝과 같지 않거나 감히 알맞게 힘쓰지 않는다면 많은 가르침의 처분을 삼가 바랍니다. 하지 않는 죄()는 작아도 보태서 살핀 즉 훗날 지금을 얻어 본 붓을 잡은 선비[秉筆之士]에게 감히 즐거움을 주지 못하게 될 것이 먼저고 도()의 높고 훌륭한 덕[盛德]에 그윽한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하니 부끄럽고 두려움만 더한 것 같아서 죄를 기다립니다. 죄를 기다립니다. 삼가 다 갖추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先祖送別之章仰蒙錄示愴感兼極於此益見分誼之不爲小而只恐此等事言之者


선조송별지장앙몽록시창감겸극어차익견분의지불위소이지공차등사언지자


輕則適足爲累而不足以張大亦非所以重其事也如何如何


경칙적족위루이부족이장대역비소이중기사야여하여하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선조(先祖)의 송별한 시장[赴京別章]을 보여 주셔서 우러러 읽어보게 되어 마음 아픈 느낌과 함께 이에 더 적극적으로 보게 됐습니다. 세의(世誼)를 나누고자함은 작은 것이 아닐지라도 단지 이런 일들을 말하는 사람들의 경솔함이 두려우므로 발맞춤에 누()가 될 것이고 크게 벌리기에는 부족할 것이며 또한 그 일을 무겁게 여기지 않는 까닭이 되는데 어찌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祭文(제문)


 


祭文(제문) 侍敎生 金國柱


 


嗚呼痛哉惟靈豈弟之姿溫醇之質詳於事物睦于宗族早登蓮榜擬展驥足才優命蹇志業蹉跎晩卜幽居于披山阿何以


오호통재유령개제지자온순지질상어사물목우종족조등연방의전기족재우명건지업차타만복유거우피산아하이


爲號少室山人自樂圖書閒養精神進後學敎誨諄諄三尊得二五福享三富貴何有潛隱是甘顧余小子夙趨門下過蒙


위호소실산인자락도서한양정신진후학교회순순삼존득이오복향삼부귀하유잠은시감고여소자숙추문하과몽


眷恤無隱於我重忝苽葛私幸叵量去歲孟冬再候龐床終宵盡日謦欬彌切那知一辭遽至永訣佳城旣卜先壟之側三世


권휼무은어아중첨고갈사행파량거세맹동재후방상종소진일경해미절나지일사거지영결가성기복선롱지측삼세


一麓萬歲千秋追惟往昔涕淚橫流敢將微誠庸薦菲薄不昧斯存庶幾歆格


일록만세천추추유왕석체루횡류감장미성용천비박불매사존서기흠격


 


祭文(제문) 侍敎生 金國柱(김국주)


제문(祭文) 모시고 가르침 받았던 학생 김국주


 


아아! 마음이 아픕니다. 삼가 생각하니 영령께서는 화락하게 즐기시[豈弟:마음이 즐겁고 편안한 모양]는 모습에 온화하고 순박한 자질로 사물에 상세하고, 종족(宗族)간에 화목하셨습니다. 일찍이 연방(蓮傍:아마도 사마시를 지칭하는 듯 함.)에 오르셨습니다. 헤아려 보니까 뛰어난 재능[驥足]을 펼칠 수 있는 우수한 재주를 가졌지만 운명은 절름발이로 뜻과 사업은 불운하여 뜻을 얻지 못하[蹉跎:발을 헛디뎌 넘어짐.기회를 잃음.생활이 뜻대로 되지 않음.]시고 만년에는 저 산 언덕에 세상을 피해 외딴 곳에[幽居]집을 짓고 사시면서, 어째서 호()를 소실산인(少室山人)이라 하셨습니까? 책들과 자락(自樂)하시고, 한가히 정신을 함양하시며, 후학(後學)들에게 권해서 나아가게[]성실하고 곡진하게[諄諄]잘 가르쳐서 지난 잘못을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 3(三尊:존중해야할 세 가지.)가운데 두 가지는 얻으셨고, 5(五福:,,康寧,攸好德,考終命의 다섯 가지 福이나.長壽,,,康寧,多男을 이르기도 하며 혹은 長壽,富裕,無病,息災,道德을 이르기도 함.)중에서 세 가지는 누리시면서 부귀(富貴)는 어째서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 벼슬 않고 은둔[潛隱]하셔서 즐기셨습니까? 돌아보니 저 소자(小子)는 일찍이 문하(門下)에서 쫒으며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돌아보고 구휼해 주시길 제게는 숨기심이 없으셨습니다. 게다가 욕되게 과갈지친(瓜葛之親)의 인척(姻戚)이 되게 하셔서 사적으로는 다행이었습니다. 마침내 헤아리니 지난해 음력 10월 거듭 큰 책상[龐床]에 문후를 여쭸지만 밤낮 종일토록 기침소리[謦欬] 끊어진지 오래 됐지 않습니까? 한 말만 알았어도 어찌 영원한 이별[永訣]에야 이르렀겠습니까? 무덤[佳城]은 이미 선조(先祖)들의 산소 곁에 삼대(三代)가 한 산록에 천추만세(千秋萬歲)토록 따르게 점찍어 두셨습니다. 삼가 지난 옛일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옆으로 줄줄 흘러내립니다. 감히 작은 성의라도 써서 검소하나마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菲薄]드리고자 하오니 환한[不昧] 영령께서는 이에 거의 있을 것이오니 흠향(歆饗)하옵소서.


 


行狀(행장)


 


公諱揚烈字克紹淸休齋其號也金氏始祖諱宣平以古昌城主佐高麗太祖討甄萱有大功封太師廟食古昌古昌今安東子孫遂籍焉


공휘양렬자극소청휴재기호야김씨시조휘선평이고창성주좌고려태조토견훤유대공봉태사묘식고창고창금안동자손수적언


由太師以來世襲圭組爲我東望族入本朝有諱係行大司憲贈吏曹判書諡定獻公以淸德邃學名于世世稱寶白堂先生是爲公七世


유태사이래세습규조위아동망족입본조유휘계행대사헌증이조판서시정헌공이청덕수학명우세세칭보백당선생시위공칠세


祖也曾祖諱夢虎僉知中樞府事祖諱中淸文科承旨私淑於陶山之門嘗往來於朴嘯皐趙月川鄭寒岡先生之門講明經學爲世名儒


조야증조휘몽호첨지중추부사조휘중청문과승지사숙어도산지문상왕래어박소고조월천정한강선생지문강명경학위세명유


卽苟全先生考諱柱旻生員號拙修齋娶月城孫氏興慶之女後娶聞韶金氏主簿濂之女以仁廟甲子某月某日擧公于鳳城之晩退里


즉구전선생고휘주민생원호졸수재취월성손씨흥경지녀후취문소김씨주부렴지녀이인묘갑자모월모일거공우봉성지만퇴리


第公生稟絶異文藝夙就且抱經濟之志常眷眷於壽國活民孝宗辛卯中生員試蔚有時望咸以遠大期之鑿枘於時慨然有隱居求道之


제공생품절이문예숙취차포경제지지상권권어수국활민효종신묘중생원시울유시망함이원대기지착예어시개연유은거구도지


志卜築于紫洞槃泉之間自號少室山人又扁其所居之齋曰淸休故世人謂之淸休齋先生收拾先世文字蒐成一秩左右常目而自警嘗


지복축우자동반천지간자호소실산인우편기소거지재왈청휴고세인위지청휴재선생수습선세문자수성일질좌우상목이자경상


著論語講說以牖後學又著鬼神說以昭陰陽屈伸之妙疏增鄕校額外講生丕振興學敦敎之風當世巨匠如南窩亨會金虛舟汝煜


저논어강설이유후학우저귀신설이소음양굴신지묘소증향교액외강생비진흥학돈교지풍당세거장여남와형회김허주여욱


琴三棄堂是養朴鳳隱燉李活齋榘李孤山惟樟李懶隱東標相與論文辨疑以廣知見年踰耆矻矻靡懈以勵後進爲已任受誨者


금삼기당시양박봉은돈이활재구이고산유장이나은동표상여론문변의이광지견년유기골골미해이려후진위이임수회자


多有聞達之士其於尋常吟咏泊然無累類多憂國戀君之意以小學一書謂修身之大法作詩而訓其子孫曰小學一書合敎兒兄親愛


다유문달지사기어심상음영박연무루류다우국연군지의이소학일서위수신지대법작시이훈기자손왈소학일서합교아형친애


敬擴良知爲賢爲聖皆由此遵墨遵繩是所期垂老又作詩述志曰身衰心益壯時否道猶亨夕死吾何恨要須踐是形斯可見反躬守約


경확양지위현위성개유차준묵준승시소기수로우작시술지왈신쇠심익장시부도유형석사오하한요수천시형사가견반궁수약


之實矣肅宗癸未五月二十九日以疾考終于寢享年八十用其年八月七日葬于縣南太子山可息洞向午之原從先兆也配李氏僉樞


지실의숙종계미오월이십구일이질고종우침향년팔십용기년팔월칠일장우현남태자산가식동향오지원종선조야배이씨첨추


榮遠女有閨範宗黨咸稱焉卒于某年月日與公同窆子至謙至一宣敎郞至謙男爾鈗爾金圭爾金光側出男爾爾鐵夫人金氏


영원녀유규범종당함칭언졸우모년월일여공동폄자지겸지일선교랑지겸남이윤이김규이김광측출남이이철부인김씨


以烈行旌其閭爾銓至一男爾爾鈒爾爾鎬爾金南爾鉀曾玄以下不盡錄公生長家庭染有素兼以天資高明不由師承深造


이열행정기려이전지일남이이삽이이호이김남이갑증현이하불진록공생장가정염유소겸이천자고명부유사승심조


獨詣沈潛闡繹老而彌篤巋然爲嶠南之名碩於戱休哉公之遺徽彪然爲吾宗之耿光而鶴鎭生也晩未遂覿德之願爲平生恨公之後孫


독예침잠천역노이미독규연위교남지명석어희휴재공지유휘표연위오종지경광이학진생야만미수적덕지원위평생한공지후손


肅鎭掇拾詩文之散佚於士友間者集爲一규又述遺事一通使子昌漢屢舍繭重乞余文爲狀余樂聞而不揆癃力疾而撰次如右用俟


숙진철습시문지산일어사우간자집위일규우술유사일통사자창한누사견중걸여문위장여락문이불규륭력질이찬차여우용사


知言君子


지언군자


 


隆熙四年庚戌端陽日宗後學崇祿大夫行兵曹判書兼弘文館大學士侍講院日講官鶴鎭謹述


융희사년경술단양일종후학숭록대부행병조판서겸홍문관대학사시강원일강관학진근술


行狀(행장) 김학진(金鶴鎭)


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


 


()의 이름은 양열(揚烈)이고,()는 극소(克紹)며 청휴재(淸休齋)는 그의 호()이다.김씨(金氏)로 시조(始祖)의 이름은 선평(宣平)인데,고창(古昌)성주(城主)로 고려 태조(太祖:王建)를 도와서 견훤(甄萱)을 토벌한 큰 공이 있어서 태사(太師)에 봉()해 지시고, 고창(古昌)을 식읍으로 한 사당이 있는데, 고창(古昌)은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자손들의 일컬음을 이루게 됐다 .태사공(太師公:始祖)이래로 인물이 높은 사람이 쓰는 규장(圭璋)과 인끈을 메는 조수(組綏)들이 세습(世襲)되어 우리나라에서는 명망 있는 집안[望族]이 됐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계행(係行)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시고, 시호(諡號)는 정헌공(定獻公원문의 誤植.)이며, 청렴결백한 덕()으로 학문으로 떨친 이름이 세세(世世)토록 깊어서 보백당선생(寶白堂先生)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 분이 바로 공() 7세조(世祖)이시다. 증조(曾祖)부의 이름은 몽호(夢虎)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다. ()부의 이름은 중청(中淸)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해서 승지(承旨)를 역임하셨는데 도산(陶山)의 문하[李退溪선생]를 사숙(私淑:고인(古人)에 대하여 속으로 그 덕을 사모하고,직접적인 가르침이 없어도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자기의 학문이나 도를 닦는 일.)하여 맛보려고 박소고(朴嘯皐=朴承任), 조월천(趙月川=趙穆), 정한강(鄭寒岡=鄭逑) 세 선생의 문하 (門下)에 왕래하며 경학(經學)에 밝고 강()을 잘해서 세상 사람들이 명유(名儒)라고 하는 즉 구전선생(苟全先生)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주민(柱旻)으로 생원(生員)을 했고, ()를 졸수재(拙修齋)라 했으며,월성손씨(月城=慶州孫氏)인 흥경(興慶)의 여식에게 장가들고, 후에는 문소김씨(聞韶=義城金氏)의 주부(主簿) ()의 여식에게 다시 장가가셨다. 인조(仁祖) 갑자(甲子:1624)년 모월 모일 봉성(鳳城)의 만퇴리(晩退里) 집에서 태어나셨다. ()은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게 남달라서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셨으며, 또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고 항상 나라를 잘 다스려서 장구(長久)하도록 하고[壽國] 백성들을 살리기를 항상 마음속에 두며 잊지 않으셨다.[眷眷] 효종(孝宗) 신묘(辛卯:1651,先生28세 때.)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여 당시에는 인망(人望)이 무성하게 모두들 원대(遠大)해지길 기대했었는데, 시대상황이 모든 것이 맞지 않는 조예(鑿枘:모난 구멍에 둥근 장부.)로 슬퍼 탄식하며[慨然: 뜻을 떨쳐 일으키는 모양.] 은거(隱居: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한 곳에서 지냄.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음.)하며 구도(求道)의 뜻을 가지고 자동(紫洞)과 반천(槃泉)사이에 좋은 곳을 가려 집을 짓고[卜築]는 스스로 소실산인(少室山人)이란 호()를 짓고, 또 거처하는 집의 현판이 청휴재(淸休齋)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청휴재(淸休齋)선생(先生)이라고 부른다. 선대(先代=先世)의 글들을 주워 모아 정리하여[收拾] 고르고 뽑아서 한 질()을 완성시켜서 좌우(左右)에 두고 보시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이나 언동(言動)을 경계하여 조심하셨다.[自警] 일찍이 논어강설(論語講說)을 지으셔서 후학(後學)들을 인도하셨고, 또 귀신설(鬼神說)을 지어서  음양(陰陽) 굴신(屈伸)의 오묘함을 밝히셨다. 향교(鄕校)의 액외강생(額外講生)을 늘려 달라는 상소를 올려서 학교를 크게 떨쳐 일으키게 하여 가르침을 돈독히 하는 학풍을 만드셨다. 그 당시의 거장(巨匠:위대한 학자나 예술가.)들 예를 들면 탑와()남형회(南亨會), 허주(虛舟)김여욱(金汝煜), 삼기당(三棄堂)금시양(琴是養), 봉은(鳳隱)박돈(朴燉), 활재(活齋)이구(李榘), 고산(孤山)이유장(李惟樟), 나은(懶隱)이동표(李東標)등과 더불어 글을 논()하고,의문을 판별하여 지식을 넓히셨다. 연세가 70~80 노인을 넘으셔서 골골(矻矻:부지런한 모양.조심하는 모양. 피로한 모양.)하심을 보이셨지만 게으름을 물리치시고 후진(後進)들을 위해서 자신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위한 공부를 장려()하셔서,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맡아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나라를 걱정하고[憂國]임금을 사모하는[戀君]뜻으로 소학(小學)한 권이면 수신(修身)하는 커다란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자손들을 훈계하는 시(:讀小學)를 짓기를‘소학일서합교아[小學一書合敎兒:소학 한 권이면 애들 가르치기에 합당하고],형친애경확량지[兄親愛敬擴良知:형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면 어진 지혜가 넓어지며], 위현위성개유차[爲賢爲聖皆由此:성현이 됨은 다 여기서 말미암나니],준승준묵시사기[遵墨遵繩是所期:법도 준수함도 여기서 기약하는 바이네.]’라고 했다. 영남[嶠南]의 이름난 석학[名碩]으로 홀로 우뚝 솟았었으나[巋然] 기울어져 그쳐버렸도다! ()이 남기신 아름다움을 밝혀서 깨우쳐줌은 우리 종현(宗賢)들의 밝은 빛[耿光:성덕.]이자 나 학진(鶴鎭)의 삶이기에 늙어서도 덕()을 만나보길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여 평생의 한()이 되었었는데, ()의 후손(後孫)인 숙진(肅鎭)씨가 친구 선비들 간에 흩어져서 일부가 빠져 없어진[散佚] 시문(詩文)들을 주워 모아[掇拾] 하나의 책권으로 편집했다. 그리고는 아들인 창한(昌漢)을 시켜서 유사(遺事: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업.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사후까지 남긴 사업.잊혀 진 일.)한 통을 지어[]주도록 집에 여러 번 와서 누에고치 실 뽑듯이 베풀어달라고 거듭 애걸하기에 내 글은 행장(行狀)이 되고, 내 듣기를 좋아하여 헤아리지도 못하고 파리한 칠 팔십 늙은이가 있는 힘을 다해 빨리 위와 같이 지었으니 말을 아는 군자가 쓰길 기다린다.


 


융희(隆熙)4년인 경술(庚戌:1910)년 음력55[端陽日]에 종친(宗親)이며 후학(後學)인 숭록대부(崇祿大夫:1품계)()병조판서(兵曹判書)()홍문관(弘文館)대학사(大學士)시강원(侍講院)일강관(日講官)인 학진(鶴鎭)은 삼가 기술한다.


 


墓碣銘(묘갈명) 幷序(병서)


 


淸休齋先生金公諱揚烈字克紹安東人之金出自高麗太師諱宣平爲吾東巨閥入本朝諱係行大司諫贈吏曹判號寶白堂


청휴재선생김공휘양열자극소안동인지김출자고려태사휘선평위오동거벌입본조휘계행대사간증이조판호보백당


間一世敎授諱世殷移居鳳城生進士諱廷憲從遊陶山號訥巖子僉樞諱夢虎子諱中淸文承旨號苟全師事趙月川先生又


간일세교수휘세은이거봉성생진사휘정헌종유도산호눌암자첨추휘몽호자휘중청문승지호구전사사조월천선생우


往來嘯皐寒岡門下以德行文章稱六子長柱旻生員號拙修齋娶慶州孫氏興慶女聞韶金氏主簿濂女以皇明天啓甲子生


왕래소고한강문하이덕행문장칭육자장주민생원호졸수재취경주손씨흥경녀문소김씨주부염녀이황명천계갑자생


公天資異凡文藝絶倫少嘗以經濟自許孝宗辛卯中司馬時譽籍蔚期以大受未幾而龍飛鼎湖十年薪膽之義將成一場脫


공천자이범문예절륜소상이경제자허효종신묘중사마시예적울기이대수미기이용비정호십년신담지의장성일장탈


空公卽決意晦藏有詩曰我是山林客何憂廊廟憂不憂猶下淚鬢髮日成秋命其山曰少室齋曰淸休蒐輯彛訓切要者以資


공공즉결의회장유시왈아시산림객하우랑묘우불우유하루빈발일성추명기산왈소실재왈청휴수집이훈절요자이자


警省箸論語講說及鬼神說多暗合乎古人奧旨一心嗜學夙夜靡懈又好讀小學朱書嘗疏請增鄕校額外儒生誘掖有方多


경성저논어강설급귀신설다암합호고인오지일심기학숙야미해우호독소학주서상소청증향교액외유생유액유방다


所成就與南窩李活齋金虛舟李孤山李懶隱諸公託交忘年時於花朝月夕約會山林閒曠處講討名理商確古今陶陶然


소성취여남와이활재김허주이고산이나은제공탁교망년시어화조월석약회산림한광처강토명리상확고금도도연


其樂也晩年吟一絶曰身衰心益壯時否道猶亨夕死吾何恨要須踐是形識者謂公風泉之感出於義諦非一時之偶爾也


기락야만년음일절왈신쇠심익장시부도유형석사오하한요수천시형식자위공풍천지감출어의체비일시지우이야


肅宗癸未五月二十九日卒享年八十葬太紫山可息洞先人兆配永川李氏僉樞榮遠女墓同原異封男至謙至一宣敎郞


숙종계미오월이십구일졸향년팔십장태자산가식동선인조배영천이씨첨추영원녀묘동원이봉남지겸지일선교랑


至謙男爾鈗爾爾金圭爾金光餘男爾爾鐵妻金氏以烈旌爾銓至一男爾爾鈒爾鎬爾金南爾鉀以下不錄


지겸남이윤이이김규이김광여남이이철처김씨이열정이전지일남이이삽이호이김남이갑이하불록


嗚呼公以高才美質染家庭講磨師友其成德固自有異乎人者而其深藏巖穴甘心窮餓初亦非潔身果忘之倫也盖相時


오호공이고재미질염가정강마사우기성덕고자유이호인자이기심장암혈감심궁아초역비결신과망지륜야개상시


度義旣不能爲祖士雅之擊楫渡江則無寧託跡於栗里淸風獨保晉氏甲子者豈非高人一等處耶遺文若干篇金海士聲根


도의기불능위조사아지격즙도강칙무녕탁적어율리청풍독보진씨갑자자개비고인일등처야유문약간편김해사성근


以宗後生序之曰其芹曝之誠尊周之義可謂合乎滄洲之趣後之人鑒於此足矣公九世孫肅鎭具遺事苦請余顯詩辭不


이종후생서지왈기근폭지성존주지의가위합호창주지취후지인감어차족의공구세손숙진구유사고청여현시사불


獲畧加撰次係以銘銘曰業自有傳窮亦無悔泣望神州天日久志士行藏視義攸在聊樂少室水釣山採閒中官守敎學不


획략가찬차계이명명왈업자유전궁역무회읍망신주천일구지사행장시의유재료락소실수조산채한중관수교학불


怠美錦尙絅源泉放海一方欽風迄二百載刻此貞珉永世以待通訓大夫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


태미금상경원천방해일방흠풍흘이백재각차정민영세이대통훈대부홍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


 


관동학교수 진성 이만근찬(官東學敎授眞城李晩謹撰)


 


墓碣銘(묘갈명)幷序(병서)


묘갈(墓碣)의 명문(銘文) 서문과 함께


 


청휴재(淸休齋)선생(先生)인 김공(金公)의 이름은 양열(揚烈)이고, ()는 극소(克紹)며 안동(安東)김씨(金氏)로 고려(高麗)태사(太師)로부터 비롯됐는데, 이름은 선평(宣平)으로 우리 동방의 거대한 문벌(門閥)이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는 계행(係行)이란 분이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시고, ()는 보백당(寶白堂)이시고, 일세(一世)를 건너서 교수(敎授)를 하신 이름이 세은(世殷)이란 분이 봉성(鳳城)으로 옮겨 사셨고[移居], 진사(進士)인 정헌(廷憲)공을 낳으셨는데, 이분은 도산(陶山)의 퇴계(退溪)문하(門下)에 종유(從遊:학덕이 있는 사람을 쫒아서 배움.따라서 놂)하셨는데 호()가 눌암(訥巖)이고, 그 아들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신 몽호(夢虎)이며, 또 그 아들이 중청(中淸)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해서 승지(承旨)를 역임하셨는데, ()가 구전(苟全)이다. 조월천(趙月川=趙穆)선생께 배우시고 또 소고(嘯皐=朴承任), 한강(寒岡=鄭逑)선생의 문하를 왕래(往來)하면서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을 칭송받았다. 6명의 아들 중 장남인 주민(柱旻)은 생원(生員)을 했고, ()를 졸수재(拙修齋)라 했으며, 경주손씨(慶州=月城孫氏)인 흥경(興慶)의 여식에게 장가들고, 후에는 문소김씨(聞韶=義城金氏)의 주부(主簿) ()의 여식에게 다시 장가가셨다. 황명(皇明) 천계(天啓:明나라 희종(熹宗:1621~1627)의 년호(年號).)갑자(甲子:1624)년에 공()이 태어나셨는데, ()은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게 남달라서 문예(文藝)가 월등히 뛰어났으며[絶倫], 어려서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맛보고 스스로 할 만 한 일이라고[自許:자부함.]여기셨다. 효종(孝宗)신묘(辛卯:1651,先生28세 때.)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서 당시에는 영예로움으로 왁자해서 오래지 않아서 곧[未幾]큰일을 맡아[大受]큰 뜻을 얻어 흥기(興起)하여[龍飛]정신(鼎臣:3.)이 되길 무성하게 기대했는데, 강호에서 10년간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한 의()로 장차 한 번의 시험으로 이루려 했으나 애를 써도 일이 성취되지 못하는 일로[脫空]여기고는 공()은 곧바로 자신의 재지(才智)를 숨기고 남에게 알리지 않고 어리석은 체 하기로[晦藏]마음을 정[決意]하셨다.()에서 이르길


‘아시산림객(我是山林客: 나는야 본래 산림 객인데),


하우랑묘우(何憂廊廟憂: 뭣 때문에 조정 일을 근심하는가?),


불우유하루(不憂猶下淚: 걱정 안 해도 오히려 눈물 흘러내려서,),


빈발일성추(鬢髮日成秋:  머리카락만 날로 가을 서리 내리네.)’라고 했다.


그 산 이름을 소실(少室)이라 붙이고,[]을 이르길 청휴재(淸休齋)라고 불렀다. (선대(先代)의 글들을)수집(蒐輯)하여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교훈[彛訓]으로 매우 중요한 것[切要]들로 경계하며 반성하는 자료로 삼으셨다. 논어강설(論語講說)과 귀신설(鬼神說)을 지으셨는데, 두 분이 지은 것이 우연히도 일치함[暗合]이 많아서인가? 고인(古人)들의 심오한 뜻과 한 마음(一心)이기에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嗜學] 조석(朝夕)으로 게으름을 흩으셨다. 또 소학(小學)과 주자서(朱子書)들을 읽기를 좋아하시고, 일찍이 상소(上疏)를 올려서 향교(鄕校)의 액외유생(額外儒生)을 늘려 달라고 청()하여 유생(儒生)들을 인도하여 도와[誘掖]서 도()에 합당한 방법[有方]으로 성취(成就)된 바가 많았다. 탑와()남형회(南亨會), 활재(活齋)이구(李榘), 허주(虛舟)김여욱(金汝煜), 고산(孤山)이유장(李惟樟), 나은(懶隱)이동표(李東標)등의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교제를 부탁하며 나이를 잊으시니[忘年]화조월석(花朝月夕:꽃 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봄 아침과 가을 저녁.음력 2월 보름의 화조(花朝) 8월 한가위의 월석(月夕)을 이르기도 함.)때면 산림(山林)의 한적하게 빈 곳에서 회합을 약속하여[約會] 명분과 이론을 강()을 하고 토론을 하며 고금(古今)을 확실히 헤아리고 요요(陶陶:화락(和樂)하는 모양.서로 수행(修行)하는 모양.)연하게 즐기셨다. 만년(晩年)에 한 절귀(絶句)를 읊으셨는데,


‘신쇠심익장[身衰心益壯: 몸은 쇠약해져도 마음만은 더욱 굳세져],


시부도유형[時否道猶亨: 때는 못 만났어도 도()에는 오히려 형통하고],


석사오하한[夕死吾何恨: (아침에 도를 들었으니)저녁에 죽은들 내 무슨 한이 되랴?],


요수천시형[要須踐是形: 반드시 이런 형태를 실천해 감이 요구되네.]’라고


읊은 것을 보면 식자(識者: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공()이 자연인 풍천(風泉)의 느낌에서 의()를 살핀데서 나온 것으로 일시(一時)적인 뜻밖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숙종(肅宗)계미(癸未,1703) 529일 돌아가시니 향년 80이고, 태자산(太紫山) 가식동(可息洞) 선조들의 산소 곁에 장사지냈다. 배필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인 영원(榮遠)의 여식으로 묘()는 같은 언덕에 다른 봉분(封墳)이다. 아들은 지겸(至謙)과 지일(至一)이 있는데, 선교랑(宣敎郞)인 지겸(至謙)의 아들은 이윤(爾鈗), 이환(), 이규(爾金圭), 이광(爾金光)이 있고, 측실에서 낳은 아들인 이횡(), 이철(爾鐵)이 있는데 이철(爾鐵)의 부인인 김씨(金氏)는 열녀(烈女)로 정려(旌閭)했으며, 이전(爾銓)이 있고, 지일(至一)의 아들로는 이복(), 이삽(爾鈒), 이방(), 이영(爾金永), 이호(爾鎬), 이남(爾金南), 이갑(爾鉀)이 있고 이하 증손(曾孫)이나 현손(玄孫)들은 다 적을 수 없다. 아아! ()은 뛰어난 재능[高才]에 좋은 성질[美質]로 가정(家庭)에서 물들고 적셔져서 사우(師友)들과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강론하고 연마하여[講磨]그 덕()을 이루셨으니 진실로 스스로 다름이 있지 않았겠는가?  사람으로서 그가 속세를 떠나 깊이 감추어진[深藏]은거(隱居)한 암혈지사(巖穴之士)로서 궁아(窮餓:어렵고 주림.)를 항상 뜻대로 생각하고 만족하며[甘心]처음처럼 행동을 깨끗이 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潔身]한 것이지 과연 인륜(人倫)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대개 시절을 따르며 의()를 헤아리는데 이미 조상을 위하는 일을 할 수 없었겠는가?  선비의 우아함으로 노를 저어 강을 건넌 즉 오히려[無寧]도연명의 고향인 율리(栗里)에 몸의 종적(蹤迹)을 부치고[시문(詩文)을 읊으면서], 청아한 풍격(風格)으로 진()나라 죽림7(竹林七賢)들 처럼 홀로 보전한 갑자(甲子)생이여! 어찌 고사(高士:뜻이 높고 지조가 굳은 사람.품행이 고상한 사람.재야(在野)의 은군자(隱君子).)로서의 일등(一等) 처신이 아니겠는가? 생전에 써 놓으신 글들 약간 편()과 종친(宗親)으로 후학(後學)인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서문(序文)에 이르길‘그 봄철의 따뜻한 햇볕과 맛난 미나리를 임금께 바치고자[芹曝]한 정성과 존주(尊周:淸나라를 배척하고 明나라를 높임.)하는 의리는 가위(可謂) 입술의 아래 위가 꼭 맞는 것[]처럼 딱 맞지 않는가? 푸른 물가의 시골 은자(隱者)의 취향(趣向)이다.’란 말에서 후인(後人)들도 여기에 비춰보면 족할 것이다. ()9세손(世孫)인 숙진(肅鎭)씨가 유사(遺事)를 구비해 와서 내게 매우 요청()하기에 드러난 시사(詩辭)를 얻지 못했음에도 간략히 다음과 같이 명()을 덧붙여 짓는다.


 


()에 이르길


業自有傳 업자유전 사업은 스스로 전해짐이 있었고,


窮亦無悔 궁역무회 궁함 또한 후회 없네.


泣望神州 읍망신주 신주(神州:서울. 신선이 사는 곳.)바라보며 울어도


天日久천일구내 태양은 오래 흐리네.


志士行藏 지사행장 뜻있는 선비가 행적을 감추고


視義攸在 시의유재 의()를 보면 닦아가고 있었네.


聊樂少室 료락소실 소실(少室)에서 즐거움 의지하며


水釣山採 수조산채 물에선 낚시질, 산에선 산나물 뜯었네.


閒中官守 한중관수 한가한 중에도 직무상의 책임 지켜서


敎學不怠 교학불태 학문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네.


美錦尙絅 미금상경 아름다운 비단은 바라고 끌어당기지만


源泉放海 원천방해 샘물은 바다로 흘러 보내네.


一方欽風 일방흠풍 한 편의 공경하는 풍습이


迄二百載 흘이백재 2백년을 이르렀네.


刻此貞珉 각차정민 이를 단단한 옥돌에 새겨서


永世以待 영세이대 영원토록 기다리네.


 


통훈대부(通訓大夫)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지제교(知製敎)()경연(經筵)시독관(侍讀官)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동학교수(東學敎授)인 진성(眞城) 이만규(李晩)가 삼가 지음.


 


()발문


 


此淸休齋先生金公遺稿也公以聰明特達之才抱耿介貞固之志生於南陽古宅承襲乎家世淵源之傳文詞淸贍行誼修潔


차청휴재선생김공유고야공이총명특달지재포경개정고지지생어남양고택승습호가세연원지전문사청섬행의수결


嘗以經濟自許而又切風泉之思也寧陵初元補國子華聞藹蔚朝野咸推展布蘊蓄此其兆也弓劒遽遺在莒之恥無以可雪


상이경제자허이우절풍천지사야영릉초원보국자화문애울조야함추전포온축차기조야궁검거유재거지치무이가설


則遂乃退藏故山安貧求道以小學朱書爲究竟之地與南窩琴三棄金素履李活齋諸賢志氣相感道義交資秉拂黌塾訓


칙수내퇴장고산안빈구도이소학주서위구경지지여남와금삼기김소이이활재제현지기상감도의교자병불횡숙훈


迪後進成就甚多有時逍遙吟賞於佳山韻水之間而批風抹月爲閒談戀君憂國是眞相也則公八十年始終大致可謂聞


적후진성취심다유시소요음상어가산운수지간이비풍말월위한담연군우국시진상야칙공팔십년시종대치가위문


金華柴桑二子之風者歟其平日著述宜多可傳諸後者而後承零替全沒收拾于今數百年之久遺範餘敎之在於人者亦因


김화시상이자지풍자여기평일저술의다가전제후자이후승영체전몰수습우금수백년지구유범여교지재어인자역인


以沈寂有識興歎迺者九世孫肅鎭甫苦心裒萃詩文雜著僅爲一冊屢訪不佞於廣德窮谷責以陶陰之役編末之語晩生蔑


이침적유식흥탄내자구세손숙진보고심부췌시문잡저근위일책루방불녕어광덕궁곡책이도음지역편말지어만생멸


學分所不敢而揆諸十世孔李之誼亦不敢終辭謹略敍先生德學風標之不可泯者兼美肅鎭之知且仁云爾


학분소불감이규제십세공이지의역불감종사근략서선생덕학풍표지불가민자겸미숙진지지차인운이


 


병진류화절 진성 이중업 근서(丙辰流火節眞城李中業謹書)


 


()발문


 


이것은 청휴재(淸休齋)선생(先生)인 김공(金公)의 유고(遺稿)이다. ()은 총명(聰明)함이 특별히 뛰어난[特達]재사(才士)로 한 결 같이 굳게 지조를 지키며 덕()이 크고[耿介]정도(正道)를 굳게 지키는[貞固]뜻을 품으셨습니다. 남양(南陽)의 고택(古宅)에서 태어나셔서 이어 받은[承襲]바가 바로 가계(家系)와 문벌(門閥)[家世]을 연원([淵源:根本)으로 한 문사(文詞:말이 멋지게 잘 표현된 문장.)와 청아(淸雅)하고 충분한 일[淸贍]들로 올바르고 방정(方正)한 품행[行誼]을 닦아서 깨끗이 함[修潔]이 전해져서 일찍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을 할 만하다고 자부하셨다. 또한 자연과 벗하는 풍천(風泉)의 생각도 끊으셨다. 영릉(寧陵:孝宗)초에 원래 나라를 보좌하는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로 빛낼 사람이라고 조야(朝野)에 무성하게 소문이 나서 학문적 소양이 높다[蘊蓄]고 말들[展布]을 했었다. 이처럼 그를 점쳤었다.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고는 거읍(莒邑)에 있는 치욕을 설욕할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물러나 숨어서[退藏] 일부러 산에서 도()를 구()하려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소학(小學)과 주자(朱子)의 책들을 샅샅이 연구하여 궁구(窮究)하는 경지에 이르셨다. 탑와() 남형회(南亨會), 삼기당(三棄堂) 금시양(琴是養), 김소리(金素履), 활재(活齋)이구(李榘)등의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뜻을 서로 교감하며, 도의(道義)로서 서로 도우며 사귀셨다. 횡당(黌堂:학교.)과 서당을 바로잡고 도와서 후진(後進)들을 훈계하고 인도하여[訓迪] 성취(成就)시킴이 매우 켰다. 시간이 있으면 소요(逍遙)하시며 좋은 산수(山水) 사이에서 시운(詩韻)을 읊조리며 완상하셨고, 풍월(風月)을 굴리고 쓰다듬으시며, 한담(閒談)을 나누시면서도 연군(戀君)과 나라를 걱정하는 이것이 바로 실상의 참된 모습[眞相]이셨다. 그런 즉 공() 80여년을 시종(始終) 한결같이 크게 이루어 가위(可謂) ()화수(華首:백발노인)에게 물으면 유채상(劉柴桑)과 도연명(陶淵明)의 두 사람의 풍()이었을 것이다. 평상시에 그는 저술(著述)한 것이 의당 많아서 여러 후인(後人)들에게 많이 전해졌겠지만 가계를 이어가는 후사(後嗣)가 영락(零落:시듦.죽음.살림이 보잘 것 없게 됨.쓸쓸함.]하여 수습(收拾)해 놓은 것들이 다 묻혀졌고, 또 지금 수백 년이나 오래되어 고인(古人)이 남기신 모범(模範)과 여타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역시 속에 감추어 겉으로 나타내지 않아 고요해진[沈寂]까닭에 식자(識者)들로 하여금 탄식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이에 비로소 9세손(世孫)인 숙진(肅鎭)씨가 고심(苦心)끝에 시문(詩文)과 잡저(雜著)들을 모으고 거두어서 겨우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재주 없는 나를[不佞:자기의 겸사.]여러 차례 방문하여 깊은 골짜기에 넓고 큰 덕으로 퇴계(退溪)선생의 도산(陶山)서원 그늘의 역할로 책 끝의 말을 써 달라고 졸랐다. [晩生]는 학문이 어두워서 나누어준 바를 감당할 수 없으나 헤아려보니 모두 10()로 공이(孔李:孔子와 老子.後漢의 孔融과 李膺.)의 교분이 있고 또 맺는 말[終辭]을 감당하지 못하고 삼가 선생(先生)의 덕()과 학문(學問)을 줄거리만 간략히 서술하여 인품(人品)이나 성정(性情)의 표지(標識)[風標]가 뒤섞여서 잘 보이지 않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좋아하는 숙진(肅鎭)씨의 지식 또한 인()이기에 이리 말한다.


 


병진(丙辰:1916)년 음력 7(流火節)에 진성(眞城) 이중업(李中業)은 삼가 쓰다.


 


後敍(후서)


 


士之不偶於世而終老林樊者苟能志高而節亢行修而學贍則雖其謨猷事功不著於一時言語文章沈湮於後代而尙論者不以是病之


사지불우어세이종로임번자구능지고이절항행수이학섬칙수기모유사공불저어일시언어문장침인어후대이상론자불이시병지


余讀淸休齋先生金公遺文竊有感焉公自少日負材器讀書治文有需世致用之志旣而登上庠前道且兆矣時則寧陵初元也薪膽之義


여독청휴재선생김공유문절유감언공자소일부재기독서치문유수세치용지지기이등상상전도차조의시칙영릉초원야신담지의


切於宵公之所寤寐焉者惟挽河洗都之望耳及弓劒遺而大義寢晦則少室槃泉卽公高蹈究竟地也其言志之作有曰我是山林客何


절어소공지소오매언자유만하세도지망이급궁검유이대의침회칙소실반천즉공고도구경지야기언지지작유왈아시산림객하


憂廊廟憂不憂猶下淚鬢髮日成秋夫所謂廊廟憂者何憂也淚下鬢成秋者又何故也百歲之下猶可以想仰而揮涕也雖然公之遺外累


우랑묘우부우유하루빈발일성추부소위랑묘우자하우야루하빈성추자우하고야백세지하유가이상앙이휘체야수연공지유외루


而敦儒術蔚然爲後生矜式者實林居晦養之力有以致之抑亦非儒門之幸也耶顧巾篋之藏歷世散逸九世孫肅鎭極意蒐輯將加鋟印


이돈유술울연위후생긍식자실임거회양지력유이치지억역비유문지행야야고건협지장력세산일구세손숙진극의수집장가침인


而以編第不裒聱蹟寢泯爲深恨余惟公以苟全拙修爲祖禰以琴三棄南窩李懶隱諸賢爲心契其所以揉染講磨成就德義者豈後世


이이편제부부오적침민위심한여유공이구전졸수위조니이금삼기남와이나은제현위심계기소이유염강마성취덕의자개후세


學之所可議擬哉是則就遺文之見存者而攷之猶可以得其本末矣若夫經綸之未展功化之不普固山林家本相耳又何歉焉肅鎭氏


학지소가의의재시칙취유문지견존자이고지유가이득기본말의약부경륜지미전공화지부보고산림가본상이우하겸언숙진씨


賢而有文篤於闡先以相翊爲契家後承謬屬以刪訂之役繼綴一語如此云歲


현이유문독어천선이상익위계가후승류속이산정지역계철일어여차운세


 


임술황화절 영가 권상익 근서(壬戌黃華節永嘉權相翊謹書)


 


後敍(후서) 후서


 


선비가 세상에서 짝이 없이 산림 울타리 속에서 만년을 보내[終老]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뜻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절개도 높아서 닦음을 행하고 학문이 넉넉한 즉 비록 그 꾀로 한 일은 오히려 일시에 공()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언어(言語)문장(文章)이 후대(後代)에 가라앉아 빠졌어도 고인의 언어 행적 등을 논[尙論]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는 병()이 된다. 내가 청휴재(淸休齋)선생(先生) 김공(金公)의 유문(遺文:생전에 써 놓은 글.)을 읽고 가만히 느낌이 있었다. ()은 어려서부터 재능과 기량[材器]을 지고 책을 읽고[讀書]문장을 다스림이[治文]있어서, 세상에 쓰이는 쓸모가 있는 필요한 것을 모아서 준비할[致用] 뜻이 이미 있어서 성균관[上庠]에 올라가서 앞 길 또한 점칠 수 있었다. 때는 즉 효종[寧陵]원년[初元:실은 孝宗2년임.]이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의()로 임금이 정사(政事)에 부지런[宵衣: 미명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후에 저녁밥을 먹음.]하도록 공()은 자나 깨나[寤寐] 새기고 있었던 바 였었다. 생각해 보면 강물을 끌어 당겨서 도성을 씻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활과 칼이 잊혀지고 대의(大義)가 잠들어 어두워지게 되자[寢晦] 소실(少室), 반천(槃泉)은 즉 공()이 세속을 떠나서 몸을 깨끗이 보전하려 은거한[高蹈]곳으로 샅샅이 연구한[究竟]곳이다. 그 뜻을 말한 것으로 짓기를‘아시산림객(我是山林客:나는야 본래 산림 객인데),하우랑묘우(何憂廊廟憂:뭣 때문에 조정 일을 근심하는가?),불우유하루(不憂猶下淚:걱정 안 해도 오히려 눈물 흘러내려서,),빈발일성추(鬢髮日成秋:머리카락만 날로 가을 서리 내리네)’라고 했다. 무릇 소위(所謂) 낭묘(廊廟)를 걱정하는 사람이 무슨 근심이 있는가? 이고 눈물 흘러내림은 머리카락에 가을 서리가 내린 사람이 또 무슨 까닭인가? 이다. 백년 후에라도 우러러 생각할 수 있어서 오히려 눈물을 뿌리게 한다. 비록 그러나 공()의 유작(遺作)외에 얽힌 것으로 유도(儒道=儒術)를 도탑고 흥성하게 하여 후생(後生)들이 존경하여 모범으로 삼는[矜式]사람이 되어서 실로 산림(山林)에 은거하여 숨기고 기른 힘으로 이르게 하셨으니 이 또한 유문(儒門)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니 포백을 넣는 상자[巾篋]에 감춰져서 세대가 지나서[歷世] 흩어져서 일부가 빠진 것[散逸] 9세손(世孫)인 숙진(肅鎭)씨가 적극적인 뜻으로 수집(蒐輯:자료를 찾아 모아서 편집함.)하여 장차 인쇄를 위해 판각(板刻)한다기에 책 차례에 뭇소리를 붙이지 않으면 사적이 꺼지고 마는 것이라 깊은 한()이 된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보니 공()은 구전(苟全)과 졸수재(拙修齋)()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해서, 삼기당(三棄堂) 금시양(琴是養), 탑와() 남형회(南亨會215), 나은(懶隱) 이동표(李東標216))등의 제현(諸賢)들과 겉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깊이 약속한[心契] 까닭에 한데 뒤섞여 물들어서 학술을 배우기 위해 강론하고 연마[講磨]하여 덕()과 의()를 성취한 사람들인데, 어찌 후세(後世)의 학식이 적은 사람이 헤아려서 평의 할 수 있으랴?! 이는 즉 현존하는 유문(遺文)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고해 보면 오히려 그 본말(本末)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무릇 경륜(經綸)을 펼치지 못해서 공()으로 화()함이 넓지 않은 것이 참으로 사림가(士林家)의 본바탕 일 뿐인데 또 어찌 하겠는가? 숙진(肅鎭217)씨가 현명하게도 선조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에 두터운 글이 있어서 상익(相翊)은 계()를 맺었던 집안의 후예로서 오류 등속의 자구(字句)나 문장을 깎고 다듬어서 바로 잡는[刪訂]역할을 맡겼기에 이와 같이 말한 한 마디 말을 이어서 짓는[].


임술(壬戌: 1922)년 음력 9[黃華節]에 안동[永嘉] 권상익(權相翊)은 삼가 쓰다.


 


拙修齋遺帖(졸수재유첩)


 


寄兒揚烈(기아양렬)草房寺(초방사)


 


數日來未諳做況如何況且孫兒遠離渠父母一刻不能忘須愛護百分兼誨不倦且勿使之雜遊於僧堂


수일래미암주황여하황차손아원리거부모일각부능망수애호백분겸회부권차물사지잡유어승당


以貽衆衲之憤怨如何如何是望千萬大邱婚事已送委此處則大決而未知彼家何以爲之也餘不旣


이이중납지분원여하여하시망천만대구혼사이송위차처칙대결이미지피가하이위지야여불기


 


寄兒揚烈(기아양렬)草房寺(초방사)


 


아들 양열(揚烈)에게 부침초방사(草房寺)수일(數日) 동안 글을 외우고 짓지 않는다니 항차 어떻게 하느냐? 하물며 또 손자[孫兒]도 멀리 떠나니 제 부모는 잠시[一刻]도 잊지를 못하는 구나. 반드시 백번 애호(愛護:사랑하고 보호함.)와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데,또 법당[僧堂]에서 온갖 놀이[雜戱: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 스님들의 분노와 원망을 끼칠 터인데 어떻게 할 것이냐? 어째야 되느냐? 그저 천만 다행이기만 바랄 뿐이다. 대구(大邱) 혼사(婚事)는 이미 사람을 시켜서 맡겼으니 이곳에서는 큰 결정만 하면 되는데, 그 쪽 집에서는 어떻게 할지 알 수 없구나. 나머진 다함이 없다.


 


兒輩付(아배부)


 


栖院做鍊果合於意乎居處亦如何戀戀汝輩外更無他友耶李白詩抄借於何人耶四柱等皆錄在篇末而未得搜見可恨


서원주련과합어의호거처역여하련련여배외갱무타우야이백시초차어하인야사주등개록재편말이미득수견가한


 


兒輩付(아배부) 애들에게 부침.


 


()에 머물면서 글 짓는 연습은 과연 뜻 데로 되느냐? 거처(居處:몸가짐.자리 잡고 살거나 묵는 일.)는 어떠하냐? 그리움을 못 이겨 애만 태우는[戀戀] 구나. 너희들 외에도 또 다른 친구들은 없느냐? 이태백(李太白)의 시초(詩抄)는 어떤 사람에게서 빌렸느냐? 사주(四柱)등이 책 편 말미(末尾)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한스럽구나.


 


揚成兩兒寄示(양성양아기시)


 


一旬不得見思之苦苦未能忘也卽者寒齋做況何如科期迫頭時不可失汝等深體父意百分勤刻無自暴棄是望雖然此


일순부득견사지고고미능망야즉자한재주황하여과기박두시불가실여등심체부의백분근각무자포기시망수연차


乃餘事也朋友交遊之間言語動止無或自失爲人所重則老我之望專在此也汝等旣盡於如許工夫前所謂餘事者亦豈


내여사야붕우교유지간언어동지무혹자실위인소중칙노아지망전재차야여등기진어여허공부전소위여사자역개


爲餘事而止書紳書紳製草卽卽送來極可


위여사이지서신서신제초즉즉송래극가


 


揚成兩兒寄示(양성양아기시) 양렬(揚烈) 성렬(成烈)두 아들에게 부쳐 보임.


 


열흘이 되도록 (너희들 소식을) 얻어 보지 못하니 마음이 괴롭고 괴로워서 잊을 수가 없구나. 요즘 한재(寒齋)에서의 글짓기는 어떠하냐? 과거(科擧)시기가 임박[迫頭]했는데, 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너희들은 아비의 뜻을 백번 깊이 체득해서 각별히 부지런히 해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비록 그래도 이는 여사(餘事:딴 일.여가에 하는 일.여력으로 하는 일.)로 여기거라. 붕우(朋友)들과 교유(交遊:서로 사귀어 놂..친구.)하는 사이에 언어(言語)나 행동거지가 혹시라도 자실(自失:몸에 위험이나 해를 받는 일.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멍하게 정신 나간 상태.얼빠진 상태.맥 빠진 상태.)함이 없어야 사람이 되는 중()요한 바인 즉 늙은 나의 바람이다. 이는 오로지 여기에 있다. 너희들이 이미 허락한 공부에 매진하고 있으니 앞에서의 소위 여사(餘事)라는 것은 역시 어찌 여사(餘事)가 될 것이며, 그리고 보내주는 글은 신사(紳士:교양 있고 덕망이 높은 사람.벼슬아치. 남자의 미칭.)의 글일 것이고 신사(紳士)가 지은 초()안일 것인 즉 즉시 보내오면 매우 좋을 것이다.


 


正草紙五張送去今日則不製耶忌祀雖無汝等可以行之有餘閒則明昏下來亦可若無暇則不必出入與汝兄相議爲之


정초지오장송거금일칙부제야기사수무여등가이행지유여한칙명혼하래역가약무가칙불필출입여여형상의위지


且白紙汝持去之餘儲盡數送去無一張留存後日何以爲之耶今日所製考出則卽送如何


차백지여지거지여저진수송거무일장유존후일하이위지야금일소제고출칙즉송여하


 


정초(正草:과시(科試)에 쓰이는 종이.) 5장을 보내 갔는데도 오늘까지도 짓지 않았느냐?  기제사(忌祭祀)는 비록 너희들이 없어도 지낼 수 있으니 한가한 여유가 있으면 내일 저녁에 내려오면 또한 좋겠지만 만약 여가가 없으면 출입(出入)할 필요가 없을 테니 네 형()과 상의(相議)해서 하도록 하고 또 백지(白紙)를 네가 가지고 갔는데 나머지는 저축했다가 한 장도 남김없이 모두 보내오면 후일(後日)에 어떻게 하겠지? 오늘 생각해서 지은 것이 나왔으면 즉시 보내줌이 어떻겠느냐?


 


寄二兒(기이아)草房寺(초방사)


 


近來安未做業幾許須百倍勤讀毋貽人笑且氣況亦不可不保愼攝爲妙佐飯久


근래안미주업기허수백배근독무이인소차기황역불가부보신섭위묘좌반구


未備送素食必苦爲慮幸得少許一笥送去可恨泡太一斗亦送作泡一嘗如何


미비송소식필고위려행득소허일사송거가한포태일두역송작포일상여하


 


寄二兒(기이아) 草房寺(초방사) 둘째에게 부침.초방사(草房寺)


 


근래(近來)에 안부가 없었는데, 글짓기 공부는 얼마나[幾許] 되어 가느냐? 반드시 백배(百倍)나 더 부지런히 독서(讀書)를 해서 남의 웃음꺼리를 끼쳐선 안 될 것이다. ()운은 항차 또한 보전하지 않으면 안 되니,몸을 삼가고 잘 조리하는 것[愼攝]이 묘책일 것이다. 오래지 않은 생선 자반[佐飯]을 준비해 보낸다. (스님처럼)고기나 생선이 없는 맛없는 식사는[素食] 반드시 괴로울 것이니 생각하면 다행이다. 얼마 안 되는 적은 분량[少許]을 얻어서 한 상자만 보내 주니 한스럽다. 두부콩 한 말을 역시 보내니 두부를 만들어서 한 번 맛봄이 어떻겠느냐?


 


兒輩答寄(아배답기)


 


無事讀書可慰旬題必考諸韓詩而冊子無之何以爲之耶朴上庠家無乃儲藏乎城主可興之行則送人可興還來後決定


무사독서가위순제필고제한시이책자무지하이위지야박상상가무내저장호성주가흥지행칙송인가흥환래후결정


云云而早晩時不可必也大槪惟盡其在我之事以待之何必容私念於其間哉工程之闕是亦可慮而自由爲難柰何柰何


운운이조만시불가필야대개유진기재아지사이대지하필용사념어기간재공정지궐시역가려이자유위난내하내하


東賦諸冊拜封中而其數則六卷山堂一卷正草紙二幅無匣筆二柄亦送院底下人事無異越犬之吠雪付之一笑而已柰何


동부제책배봉중이기수칙육권산당일권정초지이폭무갑필이병역송원저하인사무이월견지폐설부지일소이이내하


 


兒輩答寄(아배답기) 애들 답에 부침.


 


무사히 독서(讀書)한다니 위안이 된다. 순제(旬製:성균관에서 10일마다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승문원의 관리들에게 10일마다 보이던 이문(吏文)의 시험.)는 반드시 모든 한시(韓詩)를 참고해야 하는데, 책자가 없어서 어떻게 하겠느냐? ()진사[上庠:태학 즉 성균관.]네 집에 모아서 소장한 것이 없을까나? 성주(城主:여기서는 현감을 지칭함.)가 가흥(可興:현재 경북 영주시 가흥동)으로 갔기 때문에 가흥(可興)으로 사람을 보냈더니 돌아온 후에 결정한다고 말을 한다니 조만간의 시간은 불가피 할 것 같구나. 대개 생각해 보면 그가 있을때 다했어야되는데, 내 일로 기다리게 하다가 하필 그 동안에 사사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해서야?! 공정(工程)이 비면 이 또한 걱정스럽고, 자유(自由)로이 하기도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하나? 어째야만 하느냐? 동부(東賦)와 여러 책들[諸冊]을 보자기에 싸서 봉해 보냈는데, 그 숫자가 6권인데, 산당(山堂) 1, 정초지(正草紙)두 폭이다. 무갑필(無匣筆:뚜껑 없는 붓.)두 자루는 또한 원()의 아랫사람들[底下]께 인사(人事)로 보내는 것이니 다른 게 없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세상(世上)넓은 줄 모르고 헛소리 한다[越犬吠雪]고 한 번 웃을 뿐인데 어쩌겠느냐?


 


寄書(기서)


 


所製賦雖未入等何不送來耶傳送疑草三度昨已受之而文字中斤正處果自知其非而能有所改日就無病地頭耶不然


소제부수미입등하불송래야전송의초삼도작이수지이문자중근정처과자지기비이능유소개일취무병지두야부연


則無益雖多奚爲且文字如煎如炒無湧出之味可恨昨送草紙不合中草故搜得用餘紙小許送去耳糧一斗亦去院中事


칙무익수다해위차문자여전여초무용출지미가한작송초지부합중초고수득용여지소허송거이량일두역거원중사


昨緣雨水位必不齊何以爲之耶


작연우수위필부제하이위지야


 


寄書(기서) 부친 편지.


 


지은 부()가 비록 등위(等位)에는 들지 못했다고 어찌 보내오지 않는 것이냐? 전해 보낸 의초(疑草)세 차례[三度]의 것은 어제 이미 받았는데, [文字]중에 근정처(斤正處)란 말이 있는데, 스스로 알아서 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고친 바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냐? 나날이 자라나고 발전하고[日就月將], ()없다고 제 자리[地頭]에 있느냐? 아니면 무익(無益)하다고 비록 많은 것을 어찌 해보려고 해도 또 문장[文字]이 볶거나 졸이듯[如煎如炒]하고 솟구쳐 나오는[湧出]맛이 없는 게 한()스럽다. 어제 보낸 초지(草紙:글을 초()잡는데 쓰는 종이.)가 맞지 않는 중초(中草)이므로 찾아서 얻으면[搜得] 사용하고,  나머지 종이는 적더라도 보내 주기를 허락해 줄 뿐이다. 양곡[]한 말을 또 보낸다. 서원()의 일은 어제 계속 비가 온 수위(水位)때문에 반드시 가지런하지 않으니 어찌 해야 할 것이냐?


 


答付(답부)


 


無事製述其喜可言但策之可觀處在於中頭及設救弊而文字太拙且略更無湧出之氣恨


무사제술기희가언단책지가관처재어중두급설구폐이문자태졸차략갱무용출지기한


之奈何須着力爲之如何巾服送去製草送付若無人易傳則婢一今者可而招進付送之矣


지내하수착력위지여하건복송거제초송부약무인역전칙비일금자가이초진부송지의


 


答付(답부) 답신.


 


무사히 글을 짓고 있다는 그 말은 (나를)기쁘게 한다만 책문() 중에 가관(可觀:볼 만 함.볼 가치가 있음.꼴답지 않아 비웃을 만 함.)인 곳이 있었는데,‘중두(中頭)’나‘설구폐(設救弊)’라는 것은 문자(文字)가 너무 졸렬하고 간략하며, 또한 용출(湧出)의 기()운이 없는 것이 한이 되지만 어쩌겠느냐?. 반드시 힘을 붙여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건복(巾服:두건과 겉옷.)을 보내 주니,()안으로 지은 것을 부쳐 다오.만약 사람이 없어서 전해 주기가 쉽지 않으면 여종[]인 일금(一今)이를 부르면 갈 수 있을 테니 그 편에 부쳐서 보내다오.


 


寄揚烈書(기양열서)松峴寓所(송현우소)


 


踰嶺之日大雨不止想必中路阻水且多艱危又於二日入場後狂雨終日尤極用慮而今聞城中則不然云幸幸


유령지일대우불지상필중로조수차다간위우어이일입장후광우종일우극용려이금문성중칙부연운행행


製述之不如意不必介意惟以疾病爲憂而自聞此語以來寢食暫安來書中所言事事若是其秉戾不可說也柰


제술지부여의불필개의유이질병위우이자문차어이래침식잠안래서중소언사사약시기병려불가설야내


何柰何急走人馬帶以糧資而竊恐汝先妄作徒步至於傷勞耳


하내하급주인마대이량자이절공여선망작도보지어상로이


 


寄揚烈書(기양열서)松峴寓所(송현우소) 양열(揚烈)에게 부친 편지. 송현(松峴)우소(寓所)


 


[]를 넘어 가던 날 큰 비가 그치질 않아서 필시 중로(中路:길 가운데,즉 길을 가는 도중에 라는 말로 쓰임.)에서 물이 막혀서 많은 어려움과 위험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2일 날 입장(入場)한 뒤에도 폭우[狂雨]가 종일토록 너무 극심하게 내려서 걱정을 했었는데, 지금 들으니 성중(城中)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니 다행이고 다행스럽다. 시문(詩文)을 짓는 것[製述]이 여의(如意)치 않는다고 마음에 두어 생각[介意]하는 것은 불필요하단다‘삼가 생각하니 근심이 되어 질병(疾病)이 될까봐 자문(自問: 자기가 자기에게 물음.)해 본다.’는 이 말 이래로 침식(寢食)이 잠시 안정됐었었는데, 온 편지 중에 말한 바의 일이, 일이 만약 그렇다면 이는 어그러짐을 잡는[秉戾]것이라서 말함이 옳지 않은데 어쩌겠느냐?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급히 인마(人馬)로 량자(糧資:식량과 자금.)를 싣고 달려갈까 하다가 가만히 두려운 것은 네가 먼저 망령되게 지었는데,발로 걸어서[徒步:벼슬하지 않은 선비.]가면 상처에 이를까봐 심로(心勞:마음을 수고스럽게 함.마음의 시달림.]할 뿐이다.


 


寄揚烈書(기양열서)新恩行次辛卯


 


聞汝快捷驚喜欲狂第榜奇不得聞道說亦莫之詳酉谷乃城等處奔走探問卄九日來奇初一日午後始知其的然榜目


문여쾌첩경희욕광제방기부득문도설역막지상유곡내성등처분주탐문입구일래기초일일오후시지기적연방목


則迄未得見之僻境人事若是其壅塞可笑且歎朱姪之參亦可抃慶而今聞其奴自京晦日曉過昌坪不言而去痛憎莫甚


칙흘미득견지벽경인사약시기옹색가소차탄주질지삼역가변경이금문기노자경회일효과창평불언이거통증막심


且唱榜時凡事何以爲之慮慮不能忘思戀宇弟之懷到此尤極不覺淚下到門當在何日耶必限二三日先期通示後凡事


차창방시범사하이위지려려불능망사련우제지회도차우극불각루하도문당재하일야필한이삼일선기통시후범사


可以從容周旋毋忽毋忽回糧想必窘乏之而米則重難背運故正正木卅五尺一匹送之到忠州貿得則庶得優數矣榮墳


가이종용주선무홀무홀회량상필군핍지이미칙중난배운고정정목삽오척일필송지도충주무득칙서득우수의영분


祭需某處捧簡以來則最好而旣無相知卿相則何可得乎安東判官處鄭家稱念則似爲得矣而其能念及耶此去奴想於


제수모처봉간이래칙최호이기무상지경상칙하가득호안동판관처정가칭념칙사위득의이기능념급야차거노상어


中路相値故京中指揮之事不多及之朱姪處致賀之意傳布爲妙相面不久故姑不修書掛一不具


중노상치고경중지휘지사불다급지주질처치하지의전포위묘상면불구고고부수서괘일불구


 


寄揚烈書(기양열서)新恩行次辛卯  양열(揚烈)에게 부친 편지. 신은행차신묘(1651)


 


들으니 너의 재빠름[快捷]에 놀랍고 기뻐서 미치고 싶었다. 급제(及第)한 방()을 이상하게 얻지 못하다가 도설(道說:말함 설명함.)을 쫒아가서 들으려 했지만 역시 상세한 것이 없어서 유곡(酉谷:닭실 마을.)이나 내성(乃城;현재의 봉화읍.)등지를 분주히 탐문(探問:더듬어 찾아서 들음.)하니 29일에 왔는데,이상하게도 초()1일 오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하니 그 방목(榜目:급제한 사람들의 성명을 적은 책.)이 분명[的然]한 즉 벽경[僻地]의 인사(人事)여서 얻어 보지 못함에 이르렀던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그 옹색(壅塞:막힘.소견이 옹졸하고 답담함. 비좁음. 생활이 몹시 쪼들림.)함이 가소롭구나. 또한 탄식하겠구나. 주질(朱姪)의 셋째 또한 경사스러워 손뼉 치겠는데, 지금 들으니 그 종놈[]이 서울서 와사 그믐 날 새벽에 창평(昌坪)을 지나면서도 말을 않고 지나갔다니 마음 아프도록 밉기[痛憎]가 막심하구나. 창방(唱榜:급제자에게 증서를 줌.문무과는 홍패,생진과는 백패를 줌.)때의 범사(凡事:모든 일.)는 어떻게 하였는지 걱정했었는데,걱정할 것도 없이 되어 생각을 잊는다. [宇弟]을 그리는 회포는 집에 도착하면 더욱 극심해 질 것 같아서 저절로[不覺]눈물이 흘러내리는구나. ()에 당도해 있을 날이 언제이냐? 반드시 2~3일의 기한을 먼저 통보해서 알려준[通示]뒤에 모든 일[凡事]을 조용[從容:자연스럽고 태연한 모양.]히 주선(周旋)해야 옳으니, 소홀하지 말고 홀홀(忽忽:문득.갑작스럽게. 헤매는 모양. 잊어버리는 모양.)히 하지 말거라. 돌아오는 노자[回糧]는 생각해보니 필시 군핍(窘乏:곤궁함)할 것이니,쌀이면 무겁고 어렵더라도 등에 지고 운반해라. 그리고 정정목(正正木)35[]1()을 충주(忠州)에 가지고 와서 바꾼다면 여러 가지 우수한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분(榮墳:과거 급제자들이 조상 산소에 소분(掃墳)하는 일.)의 제수(祭需)는 모처(某處)에서 가려서 받들어서 오는 즉 가장 좋은 것은 이미 경상(卿相:재상.)들이 서로 알아서 없을 것인 즉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느냐? 안동(安東)판관(判官:5품직.)으로 있는 정가(鄭家)네서 칭념(稱念:잘 유념해 달라고 부탁함.)하는 즉 비슷한 것이라도 얻어야 할 텐데.그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 미치겠느냐? 이제 간 종[]과는 중로(中路)에서 서로 어긋났다고[相値]생각이 드니까 서울 안에서 지휘(指揮)해서 일이 많이 미치지 않도록 하여라. 주질(朱姪)한테도 치하(致賀:남의 경사를 하례함.축하함.)하러 가서 내 뜻을 널리 전하[傳布]는 것이 묘책일 것이다. 상면(相面)할 날이 멀지 않았으므로 애미[]의 편지는 쓰지 않고[不修] 하나만 걸어서 보낸다. 다 갖추지 않았다.


 


 


 


 


寄揚烈書(기양열서)


 


貴難去後迄無消息鬱鬱不可言竊念到門想在二三日間而與秋夕祭祀相値則何以爲


귀난거후흘무소식울울불가언절념도문상재이삼일간이여추석제사상치칙하이위


之耶急急送人然後可以議處而尙不通示疑憫度日朱家人馬今始上去可笑狀不宣


지야급급송인연후가이의처이상불통시의민도일주가인마금시상거가소장불선


 


寄揚烈書(기양열서)양열(揚烈)에게 부친 편지.


 


귀한 사람이 어렵게 간 후에도 소식(消息)이름이 없으니 기분이 언짢아 침울하여[鬱鬱]말을 할 수 없구나. 가만히 혼자 생각하니[竊念]급제해서 패를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왔을[到門]때를 생각해보면 2~3일 간 사이에 추석(秋夕) 제사(祭祀)와 상치(相値)되는 즉 어떻게 해야 하느냐? 빨리빨리 사람을 보낸 뒤에라야 관원의 과실에 대한 처분을 의논할[議處]수가 있어서 오리려 알려주지[通示:연통하여 보여줌.]않았다. 의심스럽고 불쌍한 것은 세월을 보내다가[度日] 주가(朱家)의 인마(人馬)가 지금 시작해서 간다니 가소롭구나. 편지에 다 적지 못한다.[不宣]


 


寄進士行次(기진사행차)


 


聞汝踰嶺尤極喜喜如有所得但汾川內査頓病苦婦氏往覲有日明當還來而未知其病少間與否方用疑慮倡夫才竹所用木


문여유영우극희희여유소득단분천내사돈병고부씨왕근유일명당환래이미지기병소간여부방용의려창부재죽소용목


未得五六升艱得好木卅尺式二匹送之今日宿于乃城明日宿于鄕校謁聖三日食後到門爲妙新靴送去着冠帶時着之可也


미득오륙승간득호목삽척식이필송지금일숙우내성명일숙우향교알성삼일식후도문위묘신화송거착관대시착지가야


 


寄進士行次(기진사행차) 진사(進士) 행차에 부침.


 


들으니 네가 재[]를 넘었다니 더욱 기쁘고 매우 기쁨을 얻은 바가 있었지만 다만 분천(汾川)의 안사돈[內査頓]의 병고(病苦)로 며느리[婦氏]가 근친(覲親:친정에 가서 부모를 뵙는 일.)을 가 있어서 날이 밝는 대로 돌아올 것이라서 아직 그 병()의 다소간의 차도 여부는 모르겠으나 의심스럽게 생각하는[疑慮] 마음이 쓰이는 구나. 창부(倡夫:광대)가 재주부리는 대나무에 소용되는 나무를 못 얻었다기에 5~6되를 주고 어렵게 얻었다. 호목(好木) 30[]씩 두 필()을 보내 주니, 오늘은 내성(乃城)에서 자고, 내일은 향교(鄕校)에서 자고 알성(謁聖:문묘에 배알함.)한 뒤,3일 날 식후(食後)에 도문(到門:급제 패를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 옴.)하는 것이 묘하겠다. 새 구두[新靴]를 보낼 테니 관대(冠帶)를 착용할 때 신으면 좋을 것이다.


 


答生員書(답생원서)草房寺(초방사)


 


連聞無恙做工良慰父所患永差月婢時無加減而第以人事稍勝多幸至堅糧米三斗備送佐飯艱得畧送柰何且錫兒昨


연문무양주공양위부소환영차월비시무가감이제이인사초승다행지견량미삼두비송좌반간득략송내하차석아작


送紙二張于此處未知何意渠之爲貴者紙而意外見此可怪何必乃爾天錫至謙兒名


송지이장우차처미지하의거지위귀자지이의외견차가괴하필내이천석지겸아명


 


答生員書(답생원서)草房寺(초방사)


생원(生員)편지에 답함. 초방사(草房寺)


 


별 탈 없이[無恙]글짓기 공부[做工]한다는 계속되는 소식에 좋은 위안이 된다만 아비의 걱정인 바는 달이 바뀌어도 영 여종[]이 있을 때와 더하고 못함[加減]이 없음이고, 집에서 인사(人事)는 점점 이겨가고 있으니 다행(多幸)이다.지견(至堅)이가 식량 쌀 3되를 준비했고,어렵게 얻은 생선 자반[佐飯]을 대강 보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또 석아(錫兒:형인 지겸(至謙)의 아명(兒名)가 어제 종이 두 장을 이곳에 보냈는데,무슨 의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의 하는 것이 귀한 사람이 쓰는 종이인데,의외(意外)를 보이기에 괴이하다. 하필이면 너에게 말이다. <천석(天錫)은 지겸(至謙)의 아명(兒名)>.


 


寄生員書(기생원서)


寄生員書(기생원서)생원(生員)께 부친 편지.


 


數日無便未認做況何似父已復常卄九日會趙朴皆有忌故城主亦欲退行初三日故依


수일무편미인주황하사부이부상입구일회조박개유기고성주역욕퇴행초삼일고의


其命退云節日迫頭汝果不得下來耶雖無所辨而汝若不參心似無聊更思之示破如何


기명퇴운절일박두여과부득하래야수무소변이여약불참심사무료갱사지시파여하


 


여러 날[數日]을 인편이 없어서 시문(詩文) 짓는 공부를 알지 못했는데, 항차 무엇과 견줄 수 있겠느냐? 아비는 이미 일상으로 돌아와서 29일 조(),()과 만났으나[]모두들 꺼려함이 있으므로 성주(城主)께얘기 했는데, 성주(城主)역시 물러나고 싶다고 해서 초() 3일에 간다고 하므로 그 명()에 의한 것은 물러난다고 말한다. 명절날[節日]이 박두(迫頭)했는데,너는 과연 내려옴을 얻지 못하였느냐? 비록 변론할 바는 없어도 만약 네가 불참(不參)하면 마음이 흡사 무료(無聊:근심이 있어서 아무 즐거움이 없음.의지할 곳이 없음.쓸쓸함.심심함.)해 질 것 같으니 다시 생각해서, 보고 찢는 것이 어떻겠느냐?


 


 


 


()


 


前後付下書不知其幾許多而太半遺失不肖之罪惡得自免幸存而未泯者成帖而置之以爲永世家傳之寶云爾


전후부하서부지기기허다이태반유실불초지죄악득자면행존이미민자성첩이치지이위영세가전지보운이


 


정유월일 고자 양렬 통읍 근지(丁酉月日孤子揚烈慟泣謹誌)


 


전후(前後)에 부친 웃어른이 주신 편지[下書]는 거의 알지 못할 정도로 많았[許多]었지만 태반(太半)이 유실(遺失)되었으니 불초(不肖)소자(小子)는 죄악(罪惡)을 얻음입니다. 이를 스스로 면()하고자 다행히 보존되어 있는 없어지지 않은 것들을 첩()을 만들어 두었으니 영원토록[永世] 집안에서 전()해지는 가보(家寶)로 여기길 바란다.


 


정유(丁酉:1657孝宗8)년 일 고자(孤子:아버지의 상중에 있는 사자(嗣子)양열(揚烈)은 매우 슬피 울면서[慟泣]삼가 적는다.


 


後記(후기)


 


拙修齋府君諱柱旻卽苟全先生之子而於淸休公爲皇考文獻德行克世先徽而不幸遺集見逸今家傳作帖中有與淸休


졸수재부군휘주민즉구전선생지자이어청휴공위황고문헌덕행극세선휘이부행유집견일금가전작첩중유여청휴


公書數十度實淸休公嘗背糚而下方有手書小識盥手莊翫當日家庭期勉之重文學傳承之美於此而亦畧可見矣顧不


공서수십도실청휴공상배장이하방유수서소식관수장완당일가정기면지중문학전승지미어차이역략가견의고불


敢以諸家贈遺之例附入於淸休集中謹抄得十餘首別爲編錄如此俾後人有所證嚮云壬戌南至日十代孫肅鎭敬識


감이제가증유지예부입어청휴집중근초득십여수별위편록여차비후인유소증향운임술남지일십대손숙진경식


 


졸수재(拙修齋)부군(府君)의 휘()는 주민(柱旻)인 즉 구전(苟全)김중청선생(金中淸先生)의 아드님이자(구전(苟全)공은 청휴재공(淸休齋公)께는 할아버지[皇考]가 되신다. 문헌(文獻)과 덕행(德行)이 세상에 뛰어나셔서 선조를 아름답게 기렸는데,유집(遺集)이 다 없어짐을 보였다. 지금 집에서 첩()으로 만들어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서 수십 차례의 청휴재공(淸休齋公)에게 쓴 편지로 실제로 청휴재공(淸休齋公)이 일찍이 배접하고 장첩[背粧]을 해서 아래 쪽[下方]에 둔 손수 쓰신 편지[手書]이기에 앎이 적은 제가[小識] 손을 씻고[盥手],장경(莊敬)히 완미(翫味)를 하니 그 당시에 가정(家庭)에서 면려(勉勵)하기를 기대하고, 문학(文學)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함이 여기에 있기에 또한 간략하나마 볼만 하다 하겠다. 돌아보니 감히 제가(諸家)의 증유(贈遺)의 예를 따르지 못하다가 삼가 초록(抄錄)해서 얻은 10여 수()를 따로 청휴집(淸休集)안에 부록으로 넣어서 책 편에 수록했습니다. 이와 같이 후인(後人)이 보탠 것은 메아리로 증명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임술(壬戌,1922)년 동지 날[南至日]10대손(代孫)숙진(肅鎭)은 공경히 기록한다.拙修齋遺帖終(졸수재유첩종)


 


大正十二年十月九日出版許可大正十四年二月五日 內容變更許可大正十四年二月十一日印刷大正十四年二月二十五日發行


(1923 10 9일 출판허가.)(1925 25일 내용 변경 허가.)(1925 2 11일 인쇄)(1925 2 25일 발행.)


原著作者 淸休齋先生 金揚烈著作兼 發行者 奉化郡乃城面浦底里 金肅鎭印刷者 左同


(원저작자:청휴재 선생 김 양열)(저작겸 발행자:봉화군 내성면포저리 김숙진) (인쇄자:좌동.)


印刷所 奉化郡明湖面刀川里發行所左同

 


청휴재(淸休齋)김양열(金揚烈)()세계(世系)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신라말(新羅末)에 고창성주(古昌城主) 로서 고려(高麗) 태조(太祖:王建)를 도와서 견훤(甄萱)을 격파하여 그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훈책()되고,삼중(三重)대광(大匡)이 되고,태사아부(太師亞父)가 됐다.안동부(安東府)사묘(司廟)에서 향사(享祀)하며,


()는서후면(西后面)()태장리(台庄里)천등산(天燈山)좌록(左麓)자좌(子坐).


1世 습돈(習敦):공수부정(公須副正), 呂基,呂重.


2世 여기(呂基):호장(戶長)


3世 남수(南秀):호장정위(戶長正位)()안동조씨(安東曺氏),()호장정조(戶長正朝)석재(碩材)., .


4世 희():구휘(舊諱)():제술업(製述業)진사(進士),승사 랑(升仕郞)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혹은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혹은 경평궁(慶平宮)녹사(綠事),추증(追贈)판도판서(版圖判書)()안동권씨(安東權氏)()호장(戶長)공무(公茂),()병정(兵正)세형(世衡),증조(曾祖)권지호장(權知戶長)혹은 별장(別將)균량(均亮),외조(外祖)호장(戶長)김온(金溫)()안동(安東)., .


5세 자():승사랑(升仕郞)위위주부동정(衛尉注簿同正)()상락김씨(上洛金氏)()승사랑(升仕郞)도염령동정(都染令同正)윤간(允侃),()국학박사(國學博士)(),증조(曾祖)호장정위(戶長正位)여황(呂黃),외조(外祖)김오위별장동정(金五衛別將同正)김응부(金應孚)()안동(安東). 近重,處商,元水.


6世 근중(斤重):구휘(舊諱)():정의대부(正義大夫)판예빈시(判禮賓寺)치사(致仕)()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함창김씨(咸昌金氏)()추봉(追封)문하평리판전공시사(門下評理判典工寺事)혹은 추봉(追封)상호군(上護軍)(),()급제(及第)검교(檢校)예빈경(禮賓卿)극손(克孫)개휘(改諱)중정(中正),증조(曾祖)추봉(追封)국학좨주(國學祭酒)보문서(寶文署)학사(學士)상호군(上護軍)()구휘(舊諱)(),외조(外祖)좌우위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권계(權契)()안동(安東). 得雨,彦迪,之哲.


7世 득우(得雨):중현대부(中顯大夫)전농정(典農正)


()부서(府西)30()풍산북(豊山北)소유동(小有洞:逍遙)간좌(艮坐),유표(有表).()풍산군부인(豊山郡夫人)풍산유씨(豊山柳氏)()서운관정(書雲觀正)치사(致仕)()구휘(舊諱)(),()창평현령(昌平縣令)난옥(蘭玉),증조(曾祖)은사(恩賜)급제(及第)(),외조(外祖)흥위위보승산원(興衛尉保勝散員)임송연(林松衍)()보주(甫州=醴泉)


()서선수동(西先水洞)()오례산(五禮山)자좌(子坐)유표(有表).,女 權軫,孫仁裕.


8世 혁():구휘(舊諱)용장(用莊)통사랑(通仕郞)합문봉례랑(闔 門奉禮郞)()아옹(啞翁),려조(麗朝)공민왕(恭愍王)19년경술(庚戌)년에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과 같이 상소()를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해서 다음해[明年]에 신돈(辛旽)이 복주(伏誅)됐다.()안동권씨(安東權氏)()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감찰규정(監察糾正)희정(希正),()별장(別將)용일(用一),증조(曾祖)중문지후(中門祗侯)(),


()풍산서(豊山西)상리(上里)시묘동(侍墓洞) 자좌(子坐).유표(有表). 三近,三益,三友.


9世 삼근(三近):世宗 己亥(1419)생원(生員)선교랑(宣敎郞)비안 현감(比安縣監) 世祖 乙酉(1465) 8月 졸(),둘째아들 계행(係行)실기(實記)에는 봉화현(奉化縣)선생안(先生安)에 부군(府君)의 휘()가 기재되어 있다고 함.


()예천군(醴泉郡)20里 호명면(虎鳴面)직산동(稷山洞)간좌(艮坐:舊譜에는 卯坐.)유표(有表).()의인(宜人)상락김씨(上洛金氏)成宗 戊申(1488)12月 졸() ()삭녕감무(朔寧監務)(),


()부군(府君)조전(兆前)유표(有表). 係權,係行,女 申始生,孫得魯,潘呂生.


10세 계행(係行):()취사(取斯),()보백당(寶白堂),유집(遺集),世宗 辛亥(1431)26日生,정묘(丁卯1447)생원(生員),경자(庚子1480)문과(文科),사인(舍人),전랑(銓郞),전한(典翰),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무오(戊午1498)사화(士禍) 3번이나 체포되어 국문을 당했지만 결백을 지켜서 옥사(獄事)에는 엮이지 않음.정축(丁丑1517)1217日 졸()향년(享年) 87.哲宗 신해(辛亥1861)년에 대신들이 무오사화를 바로 잡으라고 주청해서 증()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兩館)대제학(大提學),시호(諡號)는 정헌(定獻:純行不爽曰 定,嚮忠內德曰 獻),()안동(安東)묵계서원(溪書院),


()안동(安東)풍북(豊北)직곡(稷谷)을좌(乙坐),유표(有表),()증정부인(贈貞夫人)이천서씨(利川徐氏)계유(癸酉1453)()()현감(縣監)(),()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증조(曾祖)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효손(孝孫),


()용궁내(龍宮內)무이(武夷)와부동(瓦釜洞)임좌(壬坐)유표(有表),후배(後配)증정부인(贈貞夫人)의령남씨(宜寧南氏)()지평(持平)상치(尙致),()호군(護軍)(),증조(曾祖)대제학(大提學)선성군(宣城君) 좌시(佐時),


()부군(府君)조후(兆後)유표(有表). 克仁,克義,克禮,克智,克信,女 朴訥,柳子溫,南漢.


11세 극례(克禮):()문서(文敍),世祖 갑신(甲申1464)(),임자(壬子1492)생원(生員),()대구배씨(大邱裵氏)()종언(從彦)


()봉화군(奉化郡)봉성면(鳳城面)반은동(盤隱洞)신좌(辛坐)합폄(合窆)유표(有表). 世殷,世準.


12세 세은(世殷):()은경(殷卿)영해교수(寧海敎授)中宗 계묘(癸卯1543)()()안동권씨(安東權氏)()주부(主簿)안성(安城),()상호군(上護軍)치중(致中),증조(曾祖)사직(司直)처섭(處燮),외조(外祖)훈련참군(訓練參軍)유봉수(柳鳳壽)()화산(花山)


()봉성면(鳳城面)만퇴리(晩退里)곤좌(坤坐)상하분(上下墳) 유표(有表). 廷憲,廷準,廷老,


13세 정헌(廷憲):()공도(公度)()눌암(訥巖),中宗 병자(丙子1516)()무오(戊午1558)진사(進士),()퇴계선생문(退溪先生門),계유(癸酉1573)122日 졸().(58)


()반음동(盤陰洞)정좌(丁坐)유표(有表),()봉성손씨(鳳城孫氏)후배(後配)야로송씨(冶爐宋氏)()()


()반음동(盤陰洞)신좌(辛坐). 夢虎,汝虎,山虎,女 黃振紀.


14세 몽호(夢虎):()문백(文伯)明宗 무신(戊申1548)58日 생()수계(壽階)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을축(乙丑1625)428日 졸() (享年78).


()만퇴리(晩退里)신좌(申坐).()숙부인(淑夫人)나주박씨(羅州朴氏)()충의위(忠義衛)승인(承仁),()진사(進士)증참판(贈參判)()(11),


()반은동(盤隱洞)신좌(辛坐),후배(後配) 봉성금씨(鳳城琴氏)()응만(應萬)


()동국(同局)술좌(戌座). 中淸,得淸,守淸,女 琴以古,朴瑜,都得兪.


15세 중청(中淸):()이화(而和)()구전(苟全),明宗 병인(丙寅1566)1220日생(),박소고(朴嘯皐)조월천(趙月川),정한강(鄭寒岡)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고,임진(1592)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공()이 있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말을 안해서 책훈(策勳)을 사양함.경술(庚戌1610)문과(文科),감찰(監察),전적(典籍),좌랑(佐郞),정랑(正郞),지제교(知製敎),갑인(甲寅1614)년 춘추사(春秋使)()사은사(謝恩使)서장관(書狀官)입명조(入明朝),문학(文學),통훈대부(通訓大夫)필선(弼善),경상우도시관(慶尙右道試官),신안(新安=星州)현감(縣監),


영남선유사(嶺南宣諭使),仁祖 정묘(丁卯1627)변무종사관(辨誣從事官)이 명()에 가는주문(奏文)을 윤색(潤色)해준 공()로로 분승정원(分承政院)승지(承旨),기사(己巳1629)613日 졸(),(64).()반천서원(槃泉書院)현재는 송록서원(松麓書院).유집(有集).


()안동군(安東郡)도산면(陶山面)태자동(太子洞)가식리(可息里)자좌(子坐),유표(有表),()숙부인(淑夫人)장수황씨(長水黃氏)기축(己丑1589)421日졸(),(21),()사과(司果)()익성공(翼成公)()의 후예.


()반은동(槃隱洞)자좌(子坐).후배(後配)숙부인(淑夫人)영천이씨(永川李氏)계묘(癸卯1603)126日졸().()봉사(奉事)영승(永承),()찰방(察訪)국량(國樑).


()부군(府君)조후(兆後) 柱旻,柱國,柱宇(易眠齋,文科),柱漢,柱美,女 李慕,朴昕,申碩望.


16세 주민(柱旻):()천지(天支)()졸수재(拙修齋),유고(有稿),宣祖 갑신(甲申1584)(),무오(戊午1618)생원(生員),정유(丁酉1657)127日졸()(享年74),()사복시정(司僕寺正)()월성손씨(月城=慶州孫氏),81日졸()(1)()진사(進士)흥경(興慶)후배(後配)의성김씨(義城金氏)219日졸()()주부(主簿)().


()가식동(可息洞)자좌(子坐),품자분(品字墳).유표(有表). 宗烈,承烈,崇烈,揚烈,女 琴益謙,權以鎰,金基善,裵海.


17세 양열(揚烈):()극소(克紹)()청휴재(淸休齋)유집(有集),仁祖 갑자(甲子1624)(),


신묘(辛卯1651)생원(生員),계미(癸未1703)529日 졸(),(享年80).


()가식동(可息洞)자좌(子坐),유표(有表).


()영천이씨(永川李氏)314日 졸(),()첨추(僉樞)영원(榮遠),()찰방(察訪)(),


()합폄(合窆). 至謙, 至一,


18지겸(至謙): 爾鈗(子鴻運,女 朴再植,李仁栽),


(子 盛運),


爾金圭(子 達運,靈運,益運,女 權一揆,申遇澈),


爾金光(子 休運,普運,致運,河運),


爾鈜,


爾鐵,


爾銓.


18지일(至一): (子 台運,女 琴命徽),


爾鈒(子 台運,承運,女 琴正夏,琴文郁),


(子 溟運),


爾金永(子 斗運,女 琴泳心,趙麒瑞),


爾鎬(子 弼運,女 余鼎燮,申遇濂),


爾金南(鵬運,溟運,濟運,涉運,女 具道一),


爾鉀(龍運,奎運,女 李壽天,金龍海)


吳始昌,洪百熙.


 


청휴재(淸休齋) () 재세시(在世時)의 시대적 배경


 


청휴재(淸休齋)공께서 살아계실 때 국내외(國內外)의 굵직한 사정을 간추려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봄으로써 왜 환로(宦路)의 길을 접고 사림(士林)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 1624(甲子,仁祖2)에 태어나셔서 네 살 때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고, 6살 때 황고(皇考)이신 구전(苟全)김중청(金中淸)공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집안이 큰 소용돌이에 감겼다가,13살 때는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졸수재(拙修齋)공은 박돈(朴燉)을 유진장(留陣將)으로 추대하여 자신은 참모(參謀)로 봉화유진(奉化留陣)을 결성하여 국가와 향토보전을 위해 힘쓰시니,그 부친이신 구전(苟全)선생께서 임진왜란 때 백의 창의(倡義)하셨던 것을 그대로 본받으셨다. 그래서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또 어느 집이나 마찬 가지지로 가정사(家庭事)는 소홀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의(倡義)를 한다는 것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희생을 모두 다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부친이신 졸수재(拙修齋)공의 보살핌으로 산사(山寺)에 가서 독서와 시문 짓기를 공부하시고, 21살에 맏아들 지겸(至謙)이 출생하고, 23살 때는 둘째 아들인 지일(至一)이 태어나는 기쁨도 맛보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28살 때인 1651(辛卯,孝宗2)에 식년(式年)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수학(修學)하게 된다.


이 당시의 국내 정세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돌아왔으나 소현세자가 2개월 만에 사망하고, 세손(世孫)과 세자빈(世子嬪)은 이유 없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고, 봉림대군이 1644 927일에 세자(世子)로 책봉된다. 그리고 5년 뒤인1649(己丑)에 인조(仁祖)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었던 효종(孝宗)이 막 등극하여 김자점과 같은 친청파(親淸派)를 숙청하고, 배청파(背淸派)인 송시열, 유혁연, 원두표 등을 기용하여 북벌(北伐)을 계획하면서 1652년 어영청을 증강하는 등 군비(軍備)를 확충하느라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그해에 김자점의 옥사(獄事)가 있었고, 훗날 현종(顯宗)이 세자로 책봉되고 김우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곧 전쟁(戰爭)이 임박하다는 소문으로 차분히 공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아도 유럽에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30년 전쟁과,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영국에서는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서 신대륙으로의 대거 이주가 일어나고 프랑스에서는 루이14세의 절대 왕조체재를 굳혀가면서 세계무대는 신흥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화란의 헨드릭 하멜이1654 8 16일 제주도에 표류해 와서 정착하기도 했다. 한편 동양에서도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청()이 맹주로 들어섰지만 동진(東進)하면서 남하(南下)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의 지원을 요청하므로 1654(甲午) 72일 변급을 대장으로 조총수(鳥銃手) 100명과 지원병 50명으로 구성된 1차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나서서 전과(戰果)를 거두기도 했으며, 1658(戊戌,孝宗9)년에는 신유() 장군이 이끄는 조총수 200명으로 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일본 막부(幕府)와의 협상으로 1643(癸未) 1655(乙未)에 일본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교류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국내의 유림(儒林) 세계에도 특히 영남(嶺南)유림들 간에 퇴계변무소(退溪辨誣疏) 문제로 인해서 각 학파(學派)들 간에 골을 깊게 하는 일이 벌어진 그 여운이 남아 있는 시기(時期)이기도 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635(乙亥,仁祖13,先生12세 때)8월 경연(經筵)에서 영의정 윤방(尹昉)과 최명길이“퇴계(退溪)가 상중(喪中)에 서자(庶子)를 낳아 상동(喪童)이라 했다.”고 했다는 소문을 들은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의 제자들이 들고 일어나 박돈(朴燉)을 소두(疏頭) 122일 봉납한 사건인데, 그 과정에서 우복 정경세의 문인인 이환에게 소두를 맡으라고 했지만 발을 빼고, 또 여헌 장현광의 문인인 신홍망에게도 부탁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여헌,우복 학파대 월천, 학봉 학파간의 갈등으로 야기됐다. 그러자 최명길은 자변소(自辨疏)를 올려서 조목조목 반박한 사건이다. 물론 이 사건은 터무니없는 사실에, 정확한 사실 확인이 안 된 정보의 부재에서 일어난 헤프닝 일 수 있었지만 이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그 파장은 두고두고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서 청휴재(淸休齋)선생의 교류(交遊) 범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 34세 때인 1657(丁酉,孝宗8)에 선생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가학(家學)의 스승이셨던 졸수재(拙修齋)공이 돌아가시고, 치상(致喪)하느라 대과(大科)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해에 구전(苟全)선조께서도 참여하셨던 선조의 실록을 김육(金堉),채유후(蔡裕後)등이 다시 편수하는 수정실록청을 만들어 광해조(光海朝)때 기록된 것들을 대폭 수정(修正)하는 일이 벌어지고, 63세의 허목(許穆)을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지평(持平)에 제수한다. 유첩(遺帖)에서 보이는 애틋한 부정(父情)과 학문적으로 자식을 편지로 지도하시는 것들을 보건대 졸수재(拙修齋:柱旻)공은 넷째 아들인 청휴재(淸休齋)선생을 각별히 아끼신 것 같다. 또한 청휴재(淸休齋)선생께서도 그의 할아버지이신 구전(苟全)공 보다도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며 사랑했음이 오죽장기(烏竹杖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정신적 멘토였던 부친(父親)의 별세와 시대 상황이 출사(出仕)를 해도 오랑캐인 청()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무엇보다도 무모한 군비(軍備)확충으로 인한 서반(西班)들의 득세(得勢)와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목도했을 때 꿈꾸어 왔던 이상(理想)과 당면한 현실(現實)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드셨을 것이다. 효종(孝宗)조에는 나라의 주권(主權)을 살리고자 실리외교(實利外交)보다는 명분(名分)과 볼모의 수모를 씻으려고 북벌(北伐)을 위한 군비(軍備) 확충에 전력투구 했지만 재정적(財政的)인 어려움으로 번번이 중절(中折)되어 국가재정(國家財政)나 배성들의 살림살이는 극도로 어려워져 갔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니 1659(己亥)5월에 효종(孝宗) 41세로 돌아가고, 현종(顯宗)이 즉위하자 이번엔 쓸데 없는 예송(禮訟)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인조의 계비(繼妃)이자 효종(孝宗)의 생모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로 송시열,송준길과 같은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했으나 허목,윤휴와 같은 남인(南人)들은 정통 장자(長子)를 계승한 적장자를 근거로 3년 설을 주장했지만 결과는 서인(西人)들의 승리로,기년설로 굳어졌다. 이것이 1차 예송(禮訟)논쟁이고, 그 두 번째로는 공() 50세 되던 해인 1673(癸丑,顯宗14) 효종비(孝宗妃)인 인선왕후 장씨가 사망하자 그 시어머니인 인조(仁祖)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服喪)문제가 다시 거론 되어,서인(西人)들은 효종(孝宗)이 차남(次男)이므로 대공설(9개월)을 주장한 반면, 허목과 같은 남인(南人)들은 중전이자 큰 며느리임을 내세워 기년설(1)을 주장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결과 이번엔 장인인 김우명과 그 조카인 김석주의 의견을 따라 남인(南人)의 승리로 끝나서, 그나마 남인(南人)들이 중앙 정계에 발붙일 여지를 마련했지만 이런 예송(禮訟)의 여파는 중앙 정계뿐 만 아니라 지방 사림(士林)까지 뒤 흔들어 놓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유교 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의 이념 하에 주자학(朱子學) 이외는 전부 이단(異端)으로 몰아가는 세상인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어긋나거나 정통 적장자(嫡長子)상속과 제사권(祭祀權)을 근간으로 하는 윤리(倫理)질서에 어긋남은 왕실(王室)도 예외 없이 백성들은 기본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아닌 봉림대군인 효종(孝宗)을 세운 그 그림자가 대()를 이어가면서도 정통성과 명분론의 시비꺼리로 남아 소모전을 벌이고 있을 때 서구(西歐)에서는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1665)하고,열강은 식민지 개척에 몰두하게 된다. 현종(顯宗)때는 큰 전란(戰亂)은 없었지만 서인(西人)에서 노론(老論)으로 노론(老論)도 청류와 탁류로 갈라지는 등, 당쟁(黨爭)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사림(士林)들 간에도 각 학파(學派)들 간에도 자꾸만 간극이 벌어지는 내홍을 겪는 분위기에서 물론 출사(出仕)의 길도 지난(至難)했겠지만 설사 출사(出仕)를 했었어도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처신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청휴재(淸休齋)선생께서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당연히 은거(隱居)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또 그의 조부이신 구전(苟全)공의 문집(文集) 같은 것도 정리해야하고 정사(精舍)의 건립(建立)등 벼슬 길 보다는 집안 일이 더 급했을 수도 있다. 더구나 그런 일들을 맡아 하시던 졸수재(拙修齋)공이 돌아가셨으니 이를 주동해서 맡을 분은 아마도 숙부인 주우(柱宇)공일 테지만 주우(柱宇)공은 충청도로 이거(移居)한 상태라 그 실무(實務)는 바로 청휴재(淸休齋)공께서 구전(苟全) 문인(門人)들과 소통하면서 주도적으로 진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44세 때인 1668(戊申,顯宗9)에 갈천(葛川)에 도천유정(刀川柳亭)을 세우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하면서 은둔(隱遁)의 길을 걷게 되셨다. ()은 아들은 두 분이지만 손자(孫子)복은 많아서 41세에 맏손자인 이윤(爾鈗)이 태어나고, 44세 때 이복()이 태어났으며, 46세엔 이환(), 47세 땐 이삽(爾鈒), 50세엔 이방(), 53세 땐 이영(爾金永)과 이규(爾金圭), 56세엔 이호(爾鎬)와 이광(爾金光), 61세엔 이남(爾金南)이 태어나서 맏아들에게서 손자만 7, 둘째 아들에게서도 7명으로 손자(孫子)만 모두 14명이나 되고, 생전(生前)에 증손자(曾孫子)만도 7(鴻運,盛運,台運,承運,達運,斗運,弼運)을 보게 되며, 더욱이 부부가 80토록 해로(偕老)하여 매우 다복한 가정이었다. 자손들이 여럿이다 보면 먼저 가는 자손도 있기 마련이어서 맏며느리가 돌림병으로 죽어서 부실(副室)을 맞기도 했고, 66세 때 손자 이환()이 죽고, 75세 때 장남인 지겸(至謙)을 먼저 보내기도 하는 아픔도 겪으셨다. ()은 역시 산림객(山林客)임을 자처하시며, 액외생(額外生)들을 변명하는 상소(上疏)도 올리고, 묘포서설(猫捕鼠說)에서 객()의 설()로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말하‘석서(碩鼠)’에 빗대어‘나의 곡식을 먹고 대낮에도 제 멋대로 방자하게 굴며,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천벌[天誅]을 받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는 것만 보아도 철저한 비판의식을 가진 야인(野人)의 대표적인 사림(士林)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그 교유(交遊)범위가 당색(黨色)에 따라 제약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앞에서는 밝혔지만 이는 서울에서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얘기이고 시골에 은거(隱居)해서는 주로 조부인 구전(苟全)공의 문인(門人)들을 비롯해서 그의 제자들이나 혹은 그 당시의 소위 거장(巨匠)이라는 영남(嶺南)굴지(屈指)의 거유(巨儒)들과 간담을 토로하며,학문을 토론하고, 시문(詩文)을 읊으며 교감(交感)하셨음이 이 문집(文集)의 행간(行間)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은거(隱居)한 사림(士林)이 아니라 적극적인 문단(文壇) 활동을 하신 선비라 하겠다.이상 이 문집(文集)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청휴재(淸休齋)선생이 사시던 시대 배경(背景)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2012 3월 말일, 13대손 세현(世顯) 약술하다.


 


후기(後記)


사실 청휴재(淸休齋)부군(府君)은 구전선조(苟全先祖)의 그늘에 가려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는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이제 청휴재문집(淸休齋文集)을 국역(國譯)으로 출간(出刊)하게 되어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 이해의 폭을 넓히고, 조상(祖上)을 기리는 일을 했다는 문화전수(文化傳授)의 사명을 조금이나마 한 것 같아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청휴재(淸休齋)부군(府君)이 돌아 가신지도 310년이 되었고, 그 문집(文集)도 겨우 87년 전에 숙진(肅鎭)할아버지의 성력(誠力)으로 간행(刊行)되는 등 그동안 잔손(孱孫)들의 무지(無知)와 관심(關心)내지는 여력(餘力)이 없어서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만 어떻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은 있지만 이제 종후손(宗後孫)인 세현(世顯)군이 국역(國譯)을 마쳐서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으니 주손()된 입장에서 여간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한학(漢學)에 밝지를 못해서 그동안 속속들이 알지를 못하다가 이 국역본(國譯本)을 보고서, 청휴재(淸休齋)부군(府君)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고, 더구나 그 글들이 그야말로 탈속(脫俗)된 격()이 높은 글이란 점을 느꼈습니다. 보통 문장 실력이 없는 사람들의 글들은 괜히 난해(難解)한 단어 나열이 많고, 견강부회(牽强附會)나 미사려구(美辭麗句)의 수식어(修飾語)가 많고, 자기 합리화의 때 묻은 글들이 대부분인데 반해서 청휴재(淸休齋)부군(府君)의 문장들은 그냥 평이(平易)하고, 삶에 비춰 보았을 때 조금도 가식적이나 군더더기가 없이 진솔한 표현으로 솔직한 감정 이입(移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거장(巨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행장(行狀)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언급한 논어강설(論語講說)이나 귀신설(鬼神說) 같은 글들이 이 문집(文集)에는 실려 있지 않고 그냥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밖에도 상당히 많은 글들이 없어졌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행히도 고()이신 졸수재(拙修齋)부군(府君)의 편지들이 유첩(遺帖)에 실려 있어서 요즘에도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그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며, 인간적으로 부정(父情)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일이 문장(文章)수업 진도(進度)를 확인하시면서, 학문에 면려(勉勵)하도록 뒷바라지를 하신 것을 보면서 이를 그대로 본받아서 청휴재(淸休齋)부군(府君)도 그 아드님이신 지겸(至謙)공과 지일(至一)공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훈회(訓誨)를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대대로 내려온 훈육(訓育)이 전수되었기에 우리 안동(安東)김문(金門)이 대대로 문장(文章)과 행신(行身)이 타의 귀감(龜鑑)이 되어 왔고, 이 전통은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고상(高尙)한 정신(精神)으로 자손 교육(敎育)에 정성을 들이는 전통이 이어져 갈 때 비로소 훌륭한 자손들이 길러지고,그 훌륭한 자손들에 의해서 조상이 더욱 빛나고,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국역(國譯)된 청휴재문집(淸休齋文集) 발간(發刊)을 계기로 온 문중(門中)이 한 조상(祖上)의 갈래임을 재확인함으로써 대동 화합(和合)하는 매체(媒體)가 되고,후손들에게도 조상의 숭고(崇高)한 얼을 심어주는 교육적 자료가 되어 숭조(崇祖)의 념()을 더욱 깊게 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국역(國譯)과 상세한 주석을 달아 이해의 폭을 넓히게 해준 세현(世顯)군에게 깊이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며, 거듭 존조수족(尊祖收族)하는 장()이 되길 빕니다.


 


2012(壬辰)년 춘분 절(春分節) 12대손(代孫)일동(一東)근지(謹識).



印刷所 奉化郡明湖面刀川里發行所左同 

 

 



청휴재선생문집(淸休齋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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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5일 인쇄


2012 5 30일 발행


원저작자(原著作者) : 청휴재(淸休齋) 김 양열(金揚烈)


원발행자(原發行者) : 김 숙진(金肅鎭)


펴낸 이 : 김 일동(金一東)


옮긴 이 : 김 세현(金世顯)


펴낸 곳 : 반천서원 복원 추진위원회


경북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265


054) 67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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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賣品>


 


구전공14세손 김태동 옮겨 씀


 


(인쇄소 봉화군명호면도천리)  (발행소 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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