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인물김문의 인물들
김문의 인물들
제목 安東金氏를 빛낸 先祖
작성자 관리자 [2017-10-30 1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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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를 빛낸 분들

 

1. 중등교과서에 기술된 인물과 내용

 

병자호란

후금의 태종(太宗; 재위16261643)은 내몽고 지방을 정복하여 국호를청()으로 고치고(1636), 황제가 된 다음

조선에 대하여 형제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고칠 것을 요구하여 왔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 태종은 스스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침입해 왔다

인조는 가족을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서울과 강화도가 함락되고 남한산성도 포위되었다

남한산성에서 항쟁한 45일간

주화파(主和派) 최명길(崔鳴吉;15861647)과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 尙憲;15701652) 등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강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듬해 정월에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고 청군은 물러가게 하였다.

이 때 소현세자(昭顯世子;16121645)와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이 볼모로 청에 가게 되고

척화파 김상헌등도 잡혀가게 되었는데

홍익한(洪翼漢;158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  

윤집(尹集;16061637) 등 삼학사는 끝내 청에 굴복하지 않고 의로운 죽음을 당하였다.

(*신석호지음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 162163)

 

세도정치

양대 간에 탕평책을 실시하고 왕권이 강화되어 사색(四色) 당쟁은 다소 누그러졌으나

1762(영조38)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후부터 시파(時派)벽파(辟派)라 하는 새로운 당파가 생겼다

시파는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파로서 대개 남인과 일부 소론이 이에 속하고

벽파는 영조를 충동하여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이 이에 속한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시파가 세력을 얻어 남인이 많이 등용되었으나

정조가 죽고 순조(純祖 ; 재위 18001834)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벽파가 정권을 잡고 시파를 숙청하는 동시에 시파와 관계 있는 천주교를 탄압했으며

1802(순조2)에 김조순(金祖淳;1765 1831)의 딸을 왕비로 삼은 후부터 김조순과 그 일족이 정권을 독점하여 

외척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나타나게 되었다.

순조가 죽고 그 손자 헌종(憲宗 ; 재위18341849)이 즉위한 뒤

헌종의 모후(母后)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 조씨가 섭정하여 한 때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았으나

안동김씨는 김조근(金祖根)의 딸을 왕비로 삼아 풍양 조씨로부터 정권을 빼앗았으며

헌종이 죽은 후 철종(哲宗; 재위 18491863)을 맞이하여 즉위케 하는 동시에 김문근(金汶根; 18011863)의 딸을 왕비로 삼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19세기 전반 60여 년간 계속되었다.

 

풍자시인

김삿갓, 정수동 같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2년 발행 교육인적자원부저작 고등학교 국사 324)

 

갑신정변

임오군란(1882) ,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고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에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화당이 형성되어 두 세력 사이에는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개화당의 중심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이었다

이들은 일본을 왕래하면서 그들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도 개혁을 추진하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침 홍영식이 우정국 총판으로 임명되자, 이들은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甲申政變(1884)이라고 한다.

그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 내용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제도를 개혁하여 근대국가로 발전하려는 거이었다

그러나 개혁운동은 청군이 개입함으로써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당 인물들이 일을 너무 급하게 진행시켜 준비가 소흘했으며

개화당의 개혁 정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이해가 깊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국사하권 74)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쓰인 개화의 내용

대개 開化라 하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온갖 일과 사물이 가장 바람직한 경지에 이름을 말함이니

그러한 고로 개화하는 경지는 한정하기가 불능한 것이다. 인민 재력의 분수도 그 등급이 높고 낮음이 있으나

인민의 습성과 나라의 규모를 따라서 그 차이도 역시 나오나니, 이는 개화하는 방도도 하나가 아닌 연유이어니와

개화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하고 하지 않음에 있을 따름이다

오륜의 행실을 돈독히 하여 사람의 도리를 안즉 이는 행실의 개화이며

사람이 학술을 궁구하여 만물의 이치를 밝힌즉 이는 학술의 개화이며

국가의 정치를 정대히 하여 백성이 태평한 즐거움이 있는 것은 정치의 개화 이며

법률을 공평히 하여 백성이 억울한 일이 없는 것은 법률의 개화이며

기계의 제도를 편리케 하여 사람이 씀을 이롭게 하는 것은 기계의 개화이며

물품의 제도를 정밀히 하여 사람의 삶을 두터이 하고

거친 일이 없게 하는 것은 물품의 개화이니

이러한 여러 조목의 개화를 합한 연후에 개화가 다 갖추어진 것이라고 비로소 말할지라.

 

1884 124일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한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

개화당은 청에 대한 조공 허례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地租法의 개혁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내각 중심의 정치 실시 등의 조항을 담은 14개조의 정강을 발표하고 근대적 국가 수립을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갑신정변은 역사적인 큰 의의를 지닌다. 정치면에서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굳히려 하였으며

전제 군주 체제를 입헌 군주 체제로 개혁하여 근대적 국민 국가를 세우려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재정의 일원화와 지조법의 개혁 등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봉건적 신분 제도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우리 나라 근대화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법문사 출판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56-57)

 

청산리 대첩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 집결하여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1920). 청산리 대첩은 한민족의 독립전쟁과정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였으며

우리 겨레에게 용기와 함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다.

(*1997년 교육부 저작 중학교 국사 하권 137)

 

3·1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의 방식을 지양하고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30여 개의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1920년에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이 승리한 봉오동 전투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군과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하여 거둔 청산리 대첩이 가장 두드러졌다.

(*2002년 발행 교육인적자원부저작 고등학교 국사 347)

 

김좌진 장군에 대해

김좌진 장군 기념관 건너편 갈산 중고에 90칸짜리 집이 있었다(김좌진의 증조부 살다).

3세 때 父사망. 첫째(경진)가 양자로 나가고 김좌진이 호주되다.

13세 결혼

14세 무관학교 입학 16세 졸업(서울에서)

16세 때 300석을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노비문서 불태움.

호명학교 세우고 개화교육시킴.

호명학교 자리에 1960년대에 갈산중고등학교가 세워짐.

19세 때 서울로 이사 가다. 부잣집에서 군자금 마련해 나오다가 일본 관헌에 쫓김.

계월씨 집 벽장에서 3개월 숨어살다가 나오다. 당시 뱃속아기 2달만임.

 

*하루는 항일 유격대의 대원들이 사직동 들판에서 비밀회담. 한인밀정의 제보에 의해 30여명의 일본 헌병들이 포위

유동열. 백린 김동삼등과 항복하는 척하고 손을 들고 산에서 내려갔다

헌병 한 놈이 김좌진을 포승줄로 묶으려 하는 찰라 걷어차고 총을 빼앗아 헌병 한놈을 사살하고 사직동의 민가를 향해 도망 →

담을 뛰어넘어 들어간 집이 김두한의 산실. 황실의 상궁으로 있다가 퇴역한 申氏댁

신씨의 외동딸 朴桂淑이 별채에서 책을 읽는 중 김좌진 뛰어 들어오다

다락방의 책장 치우고 안내. 들어가자 자물쇠로 잠가 놓다

호루라기 소리. 대문 걷어참. 박계숙은 마루에 나가 발자국 지우고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다짜고짜 박계숙의 공부방으로 뛰어듦. 다락방의 책장 문을 열어 보라고 을러댐. 자물쇠에 열쇠가 끼어드는 금속성

이때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해” 박계숙의 대담한 기지로 잡히지 않았다.

두한 두옥 써놓고 고향에 와서 본부인 등 가족과 이별.

1889. 11. 24 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남.

1930 1. 24. 고려공산당 박상실(주중 청년협회 회원)에 피살

중동철도선 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발동기 수리 중 고려공산당청년회의 金一星의 감언이설에 빠진 朴尙實의 흉탄에 맞다.

1930. 1. 29 한족 총연합회에서 사회장.(흑룡강 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 *부인 해주 오씨가 정축년 봄 해림에 가서 백골을 운구해와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에 안장.

1940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충남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에 이장.

 

2. 韓國史新論(李基白著)에 기술된 안동김씨

 

병자호란

仁祖14(1636) 丙子胡亂. 왕자와 비빈은 강화도로 피난. 南漢山城. 三田渡(松坡) 청태종 진영. 城下의 盟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 왕자가 인질로 가고

3學士는 잡혀가 죽음을 당하고, 金尙憲도 뒤에 잡혀가서 오랜 獄中生活을 하였다.

(257)

 

세도정치

純祖(18001834) 11세 즉위. 金祖淳이 國舅. 憲宗(18341849)의 母后가 趙萬永의 딸

조만영의 아우 趙寅永이 領議政. 哲宗(18491863)의妃가 金汶根의 딸. 金興根 金左根 金炳國등이 領議政이되었다.

(296)

 

평민문학의 융성

鄭芝潤(鄭壽銅) 金笠(金炳淵) 등과 같은 풍자시인의 존재도

(310)

 

甲申政變

청군 1500명 서울 주둔, 일본군 140. 일본공사 竹添進一郞.

高宗21(1884) 1017(양력 12 4)에 단행.

金玉均의 手記인 『甲申日錄』에는 대원군 陪還, 門閥을 폐지하여 人民 平等의 權을 제정해서 국민의 身分上의 平等을 이룩하도록 규정.

財政을 戶曹로 단일화. 地租法 改革하여 국가의 收入擴大. 冗官(용관)을 革罷하고 官制를 改革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개혁이 공포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331)

 

乙未義兵

乙未事變(고종32,1895년 日本公使 三浦梧樓등이 閔妃를 살해)과 乙未改革(태양력채용, 종두규칙,

서울에 소학교 설치, 우체사무, 斷髮令)등에 대한 반일 분위기 속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남. 『頭可斷 髮不斷』

대표적인 인물이 柳麟錫, 李昭應, 李春永, 金福漢 등이었다.

(350)

 

民族産業의 受難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金融機關은 건양 원년(1896)에 金宗漢 등이 설립한 朝鮮銀行이었다.

(386)

 

3. 진단학회 한국사 등에 기술된 안동김씨

 

고려의 민족 재통일기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고, 후 백제와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 2002년발행 고등학교 국사 73)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갔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는 향촌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공신들에게는 역분전을 지급하여 새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 200년발행 고등학교 국사74)

 

이번에는 백제측이 자못 공세로 나와, 남으로 康州(강주,진주)를 습취하고 (天受11,928), 북으로 烏於谷(오어곡

일명 부곡 今의흥)을 공발(攻拔)하여 羅都(라도)로 통하는 죽령로를 차단하고(928), 

이듬해(천수12,929) 또 의성부(今의성이니 오어곡 북쪽)를 공격하여 성주 홍술(洪術)을 전사케 하니

여태조는 듣고 통곡하면서 『吾失左右手矣』라고 하였다 한다

익 천수13(930)에는 견훤(甄萱) 自將 大擧(자장 대거)하여 역시 죽령로의 요충으로 의성의 직북(直北)인 

古昌郡(今안동)을 공취하려 하여 그 부근인 甁山(병산,안동읍북10)下에서 여태조의 군과 교전하다가 대패를 입고 말았는데

이 패전으로 인하여 견훤이 의도한 죽령로차단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태조는 이 勝捷(승첩)을 매우 기뻐하여 戰功(전공)이 있는 

城主(성주) 金宣平(김선평)을 大匡(대광,2), 

權行(권행)과 張吉(장길)을 大相(대상,4)에拜()하고,군을승격하여安東府(안동부)라고 하였다.

(천수13,930)(*1976년진단학회발행 한국사 중세편47)

 

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대동보 수편 201)

벽상공신(naver백과사전에서)이라는 호칭은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면서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이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는데, 여기서 벽상공신이 유래했다.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명종이 무신난의 주동자(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3)들에게 내린 예외에는 없다.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홍유(洪儒:殷悅),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김선궁(金宣弓), 이총언(李忿言),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윤신달(尹莘達), 최준옹(崔俊邕), 문다성(文多省), 이능희(李能希), 이도(李棹), 허선문(許宣文), 

구존유(具存裕), 원극유(元克猷), 금용식(琴容式), 김훤술(金萱術), 한란(韓蘭), 강여청(姜餘淸), 손긍훈(孫兢訓), 방계홍(房係弘),

나총례(羅聰禮), 이희목(李希穆), 염형명(廉邢明), 최필달(崔必達), 김홍술(金弘述), 김락(金樂) 등이다.

 

안동부는 후삼국시대부터 在地勢力(재지세력)이 강하였다

三太師(삼태사)가 고려에 귀순하면서부터 3성은 안동의 향직을 세습하면서 士族(사족)과 吏族(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들의 자제가운데 일부가 上京從仕(상경종사)하여 在京官人(재경관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삼태사의 경우는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자신들이 고려에 귀순하여 공신 호를 받고도 그대로 출신지에 눌러 앉아 본읍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향직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수건지음 『영남사림파의 형성』52)

 

김계행 (金係行 14311517,세종 13∼중종 12)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다.

1431(세종13)安東府西 山縣南 佛頂村에서 比安현감이었던 三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갑자년(1444) 10(14)에 현감공이 비안임소로 떠나매, 배행하여 그 곳 향교에서 수업하였다.

31세에 동당초시(제술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수하였다. 32세에 성주향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미 출가해서 國師가 된 學祖大師가 長姪(兄 係權의 長子)이었는데 하루는 성주에 왔다

숙부를 만나서 “숙부님께서 오랜 세월 과거에 고생하시온데 만약 벼슬 하실 뜻만 있으시면 힘써 드리겠읍니다

”라고 말씀 드리니 선생은 “너로 인해서 벼슬을 얻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겠느냐?

고 하니 두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41(성종원년) 4월 佔畢齋 김선생과 더불어 주역과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4세에 충주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480(성종 11,更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에

사헌부 감찰·고령현감(高靈縣監)·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임금과 친척 되는 신하들의 잘못을 논박했으나

훈구파(動舊派)에 의하여 시정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68(무오)에 筍堤(순제) 宅畔(택반)에다가 작은 정사를 짓고 편액을 붙여 『寶白堂』이라 이름 하였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때 두 번 투옥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도 투옥되었다.

선생은 일찍 詩에서 “우리 집엔 보물이란 없나니,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고 하였거늘 

보백당은 아마 이런 뜻에서 취해진 것일 것이다.

정축(1517, 중종12) 12월 遺戒에, 자질 및 종손 삼당공 영()을 불러 앉히고

『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청백을 가전하고 공근을 세수하며 효우로 돈목하라)을 부탁했다.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1990 김흥진 발행 국역보백당실기) (*안동김씨대동보 수편 215)

 

김중청(金中淸 ; 15671629,명종22∼인조7)

號는 苟全(구전)이다. 계보는 三近→係行→克禮→世殷→廷憲→夢虎→中 淸이다

소고 박승임, 월천 조목, 한강 정구에게 서 학문을 닦았다

1610(광해군2)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161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사간원의 정언으로 있으면서 대의를 지켰다

대북들이 왕후를 폐할려고 광분했다

대북파의 정인홍이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을 탄핵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대의를 위해 이를 거절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621년 승지로 선유사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봉화의 반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안동김씨대동보 81)

 

김주우(金柱宇) 1598(선조 31, 무술) 1644(인조 22, 갑신)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역면재(易眠齋). 봉화(奉化) 출생.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후손. 승지(承旨) 중청(中淸)의 자

외조는 영양(永陽) 이영승(李永承).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12(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4(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받았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형조정랑(刑曹正郞)충청도사(忠淸都事) 등을 역임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도파천(江都播遷)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京城判官)을 역임했으며,

서예에 뛰어나 13세에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의 누액(樓額)을 썼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그 재질의 뛰어남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무르고 말았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仁祖實錄奉化郡誌)

 

병자호란

청태종은 1636 121 10만 대군을 심양에 친정의 길을 떠남.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 14일에는 청군이 개성을 통과하였음을 알게 되자 원임대신인 尹昉과 金尙容을 시켜 廟社의 神主를 받들고 

세자비 姜씨, 元孫, 2자 봉림대군, 3자 인평대군을 陪護하여 강화도로 避兵케 하였으며

인조도 그날 밤에 강화도로 떠나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통로가 차단되어 성내로 돌아 왔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동중추부사 이경직과 적진에 나아가서 주육으로 犒軍(호군)하며 지연시키는 동안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수구문으로 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214). 성중의 군사는 13000, 식량14300, () 220여 甕()이 있었으니 겨우 50여일을 견딜 만한 분량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2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혹한과 기아에서 40여일을 버티었다.

예조판서 金尙憲, 이조판서 鄭蘊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媾和論(구화론) 쪽으로 기울어졌다.

강화도에서는 일시에 쇄도하는 청군과 일전을 할 겨를도 없이 正月22일에 함락되고

빈궁 세자이하 200여명이 청군에 잡혀 南漢山城下로 호송되었다

陷城의 기세가 보이자 前右議政 金尙容, 前工曹判書 李尙吉등은 放火自殺하였다.

(진단학회 한국사 근세후기편 104)

 

김상헌의 시

1640(인조18)淸에서 明을 치고자 파병을 요청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청나라로 잡혀가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제 돌아올 기약 없이 하직의 노래로 마음을 달래며 이 시를 읊었을 것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2002 7월 풍산읍 소산동 입구에 위의 시비를 세웠다.

 

김상헌과 최명길

鳴吉初疑尙憲有釣之心.而至削枚卜.及其同囚.見其死生迫頭.而確乎不拔.遂信其義而服其心.

명길초의상헌유조지심.이지삭매복.급기동수.견기사생박두.이확호부발.수신기의이복기심.

尙憲初亦以鳴吉與秦檜無異.及見其以死自守.不爲撓屈.亦知其心.本非爲虜.兩家各相敬重.

상헌초역이명길여진회무이.급견기이사자수.부위요굴.역지기심.본비위로.양가각상경중.

尙憲詩曰. 從尋兩世好.頓釋百年疑.鳴吉詩曰.君心如石終難轉.吾道如環信所隨.

상헌시왈종심양세호.돈석백년의.명길시왈.군심여석종난전.오도여환신소수.

 

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이름을 낚으려는<釣名>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매복(정승의 薦)에서 깎아 버리기까지 하였는데

이때 같이 수금(囚禁)되어 있으면서

죽음이 눈앞에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의젓한 그를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마음속으로 탄복하였다

상헌도 또한 처음에는 명길을 <옛날 남송의 진회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뜻이 오랑캐를 위함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집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다

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양대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푼다.> 라고 하였고 

명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

經은 정상적이요, 權은 임시의 權道이다.

예를 들면,

嫂叔間에 손을 잡지 않는 것은 경이나 嫂가 물에 빠졌을 때에는 손을 잡아 건져내는 것은 권이다.

척화는 경이요, 강화는 권이라 하였다.

*국역연려실기술VI권에서

 

김상용(金尙容)

병자호란시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으로 폭사. 13세의 손자 壽全과 從人 安善承도 같이 죽다.

遺衣로 양주 석실 서윤공의 묘가 있는 우측산록에 장사지냄. 사위 張維(우의정)가 신도비 찬하다.

판서 김수증이 종손이며, 대제학 김창협과 영의정 김창집이 종증손임.

 

당쟁(黨爭)

(1) 동서분당(선조8, 1575)

이조전랑(吏曹銓郞)자리를 둘러싸고 김효원(金孝元, 신진세력인 소장파의 한 사람으로 

그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다)과 심의겸沈義謙, 명종비 심씨의 동생으로 기성세력인 노장파의 한 사람으로 

서울 서쪽 정동에 있었다)사이에 틈이 생겨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졌다

동인에는 이황, 조식의 문인이, 서인에는 이이, 성혼의 문인이 많다.

(2) 남북 분당(선조24, 1591)

정철의 세자 世子建儲(책봉문제 ; 선조24년 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인빈 김씨가 신성군을 낳자

좌의정 정철이 세자로 정할 것을 주장하니

이산해는 ‘신성군을 해치는 것’이라고 인빈 김씨에게 고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동년 윤3월 강계로 유배되었다)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동인이 재집권한 후

정철의 처벌문제로 온건파인 남인(우성전, 유성룡,이원익)과 강경파인 북인(이발, 이산해, 이이첨)으로 분열됨.

(3) 소북의 분열

남북분당후 북인이 집권하던 중 선조의 후계문제를 둘러싼 세자책봉문제로 공해군(공빈 김씨의 제2서자)의 

지지파인 대북과 영창대군(인목대비의 소생)의 지지파인 소북으로 분열됨 →

광해군 즉위로 대북파 집권(1608)

(4) 인조반정과 서인의 집권

광해군의 즉위로 집권한 대북파가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재비를 서궁에 유폐하자

서인 이귀, 김자점, 김유 등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능양군)을 세움. 서인이 대북을 숙청함.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 사이에서 1남 소현세자 2남 봉림대군(효종) 3남인평대군 4남 용성대군을 낳았다

인렬왕후가 42세로 죽자 3년 뒤인 1638년에 44세인 인조는 15세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조씨)를 맞이했다

그러나 26(1639)때에 인조가 죽자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되었다

10년 뒤인 1659년에 효종이 죽고, 1674년에는 손자인 현종마저 죽었다

증손자 숙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14년을 더 살았다

아들, 손자, 증손자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는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으로 격상되었다

그 때마다 그녀의 복상 문제가 당쟁의 화두가 되었다. 문제는 효종을 장남으로 대우하느냐, 차남으로 대우하느냐 이었다.

(*박영규 지음 조선의 왕실과 외척 328)

(5)1차 예론

효종이 죽자 어머니인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1,효종을 次子로 봄)과 

남인 윤휴의 3년설(2, 효종이 차자이지만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봄) 대립→ 서인 승리

(6)2차 예론

효종비 인선대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서인의 대공설(9개월)과 남인의 기년설이 충돌 →

남인 승리(1674).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과격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분당됨

(7)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숙종6(1680)→서인 집권

2차 예론으로 집권한 남인 허적(許積)의 유악(帷幄;천막)남용사건을 계기로 

서인 김석주김익훈 등이 허견(許堅;허적의 아들)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여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함→ 

득세한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당

(8)소론 분당

경신 대출척후 서인중 김익훈(어영대장) 등이 남인을 처형하자,

이를 지지한던 송시열등 노장파의 노론과 반대하던 윤증(尹拯) 등 소장파의 소론으로 분당됨

(9)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201694)→남인집권

숙종이 장소의 소생 균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문제에 서인이 반대하다 물러나고, 남인은 지지하므로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이 제주도에서 사사되고 金壽興이 유배되었다가 사사되다.

김수흥의 아우 金壽恒도 기사환국때 진도에서 賜死되었다. 장소의를 희빈으로 삼고 민비를 폐함.

(10)갑술환국(甲戌換局;숙종20,1694)→소론집권

기사환국후 남인 영수 민암 등이 민비 복위를 꾀한 한중혁김춘택 등 서인의 숙청을 꾀하다[甲戌獄事임]. 

숙종의 반대로 남인들은 사사 또는 유배되고, 죽은 송시열, 김수항 등에게는 작위를 주었다.

이후 소론이 득세하여 노소(老少)의 쟁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남구만 등 소론이 집권, 민비가 복위됨

(11)신임사화(辛壬士禍; 경종 원년,1721)→소론집권

장희빈의 음모에 관대하던 소론이 물러나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이 집권 중에 숙종이 죽고 경종(장희빈의 소생)이 즉위,

다병무자하자 김창집 등이 왕제 연잉군(;후에 영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가 

노론4대신(金昌集,,李建命,趙泰采)이 죽음을 다하다.→소론 유봉휘 등이 집권

(12)이인좌의 난(李麟佐의 亂;영조4,1728)→노론득세

영조 즉위후, 이인좌 등 소론의 불평분자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등에게 평정되었다

(13)시파(時派)벽파(辟派)의 대립

탕평책의 실시로 당쟁이 완화되었으나

영조때 사도세자(思悼世子;莊獻世子;정조의 父)의 불행한 사건을 중심으로 노론소론남인 등 붕당에 세자의 동정파인 

시파와 반대파인 벽파로 나누어져 세도정치 시대에 서로 얽혀 대립하였다.

(1979년 성문각발행 정통핵심국사 298301쪽 참고)

 

김수흥 (金壽興 16261690,인조 4∼숙종 16)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기지, 호는 퇴우당(退憂堂). 1655(효종 6)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副校理)·도승지(都承旨)를 거치고

1666(현종 7) 호조판서로 있다가 동생 수항의 후임으로 우의정이 되었다

1674(현종 15) 영의정에 오르고,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복제문제로 남인들의 공격과 왕의 분노를 사서 사직당하고

현종이 죽자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숙종 6) 수항이 영의정으로 재 등용되자 그도 특명으로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박세채(朴世采) 등이 종실(宗室)인 항의 비행을 공박하고 종실로서 모역을 일으킨 정()·남의 옥사를 논하다가 귀양 가자

상소하여 그들을 구출하였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 세자 책봉 문제로 장기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

 

김수항 (金壽恒 16291689(인조 7∼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본관은 안동(安東). 

1656(효종 7) 문과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정언·교리 등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우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들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1)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좌의정이 되어 윤휴·홍우원(洪宇遠)·조사기(趙嗣基) 등의 동궁(東宮)에 대한 불손한 언사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남황(南荒)에 유배되었고, 1680(숙종 6) 종실(宗室)인 정()·남의 모역이 발각되어 윤휴 등이 주살되고

그 일당인 남인(南人)이 모두 쫓겨나자 배소에서 불려 올라와 옥사를 다스리고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당쟁이 잠잠하고 조정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나

1689(숙종 15)에 기사사화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전서(篆書)를 잘 썼고 저서에는 《문곡집(文谷集, 28)》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김창협 (金昌協 16511708(효종 2∼숙종 34)

조선 중기 학자·문신.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본관은 안동(安東). 1669(현종 10) 진사에 뽑히고 

1682(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전적·병조좌랑·부교리 등을 거쳐 예조참의·대사간에 이르렀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 수항(壽恒)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아버지가 신원(伸寃)되고 호조참의·대제학·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학자로서는 송시열(宋時烈) 문하이므로 이이(李珥)의 계류(系流)이나 학설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를 절충했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했다.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농암집(農巖集)》 <잡지외편(雜識外篇)>에 있는 

여러 시인(詩人)에 대한 비평은 고문파 문장가로서탁월한 문학 비평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

저서에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

《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편저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 《문곡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김제겸 (金濟謙 16801722,숙종 6∼경종 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본관은 안동(安東). 1705(숙종 31) 진사(進士)가 되고

1710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고양군수(高陽郡守)·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다

1719년 문과에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1722(경종 2) 아버지 김창집(金昌集)이 건저(建儲) 4대신의 

한사람으로 사사(賜死)될 때 울산(蔚山)에 유배되었고, 뒤에 부령(富寧)으로 옮겨졌다가 사형되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죽은 3학사의 한사람으로 1725(영조 1) 좌찬성(佐贊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취고(竹醉藁)》가 있다. 시호는 충민(忠愍).

 

金氏의 勢道

金祖淳은 國舅로서 勢道를 잡게 되어 점차로 安東金氏의 一族으로 金祖淳의 위行列인 金履翼은 병조판서

金履度는 예조판서(뒤에 형조판서), 같은 行列인 金達淳은 右議政, 金汶淳은 이조판서,

金羲淳은 형조판서(뒤에 병이조판서)로 각각 전후하여 朝廷에 布列되었고,

지방에서도 金明淳이 함경감사(뒤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진단학회한국사 근세후기편 329)

 

김조순 (金祖淳 17651832(영조 41∼순조 32)

조선 후기 문신.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본관은 안동(安東). 

1785(정조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1802(순조 2) 딸이 순조의 비(妃;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품성이 좋아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어린 순조를 30년간 보좌하였으나 지나치게 너그러운 성격 탓에 소실인 기생 나합(羅閤)의 손에 국사가 농락되는 폐단을 낳았다.

그의 집권으로 철종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려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풍고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

 

김매순 (金邁淳 17661840(영조 52∼헌종 6)

조선 중기 학자·문신. 자는 덕수, 호는 대산(臺山). 

1795(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사인(舍人)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예조참판·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특히 문장에 뛰어나 홍석주(洪奭周)와 더불어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그가 지은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는 천고의 절조(絶調)라고 칭송받았다

저서에 《대산집(臺山集)》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등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청(文淸).

 

4. 完譯 梅泉野錄(黃玹著2005교문사 발행)에 기술된 안동김씨

 

壯金의 융성

金祖淳은 옛날부터 紫霞洞(자하동)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자하동은 경복궁의 북쪽과 창의문아래에 위치하고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으므로

여울과 숲이 감싸고 있어 시내에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이 동명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간혹 발음을 생략하여 ‘紫洞’으로 부르기도 하고, 혹은 급히 부를 때는 ‘壯洞'이라고도 한다

이때 김조순은 이미 國舅(국구)가 되어 조정에서 권세를 잡고 있었다

그는 장동에서 校洞으로 이사한 후 순조를 대신하여 국권을 장악하였고

삼대를 거쳐 國婚을 하였으므로 國朝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외척이 많아, 세칭 안동김씨를 ’壯金‘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김조순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근(逌根), 좌근(佐根)과 손자인 병기(炳冀)등이 교동에서 살고 있었다.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서 그의 아들 炳弼이 어리어, 그의 조카 炳學과 炳國이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典洞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권력이 金炳冀와 대등하였으므로 京城에서는 전동과 교동으로 칭했다

지금 시골에서도 전동교동시절에 부르던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완역매천야록 14)

 

壯洞 金氏 先祖

선조에 

仙源 金尙容(15611637,인조때의 문신), 

淸陰 金尙憲(15701652, 효종때의 학자), 

文谷 金壽恒(16291689,현종때의 문신), 

夢窩(몽와) 金昌集(16481722, 경종 때의 노론 4대신 중의 한 사람) 등은 덕망과 공훈으로 온 나라의 선망을 받았고

김조순도 문장과 국사에 숙련된 솜씨를 발휘하여 덕망 높은 분으로 칭송을 받았다.(완역매천야록14)

 

金興根

장동김씨 중에서 오직 김흥근이 헌종을 극간하다가 유배되었다.

철종사후 후사가 없었다. 철종은 일찍부터 熙에게 뜻을 두고 있었으므로 장동김씨들은 그를 옹립하려고 하였다

이에 김흥근은 , “흥선군이 있으니 이것은 두 임금이 있는 셈입니다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꼭 그만두지 않으려거든 홍선군을 옹립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 김병학은 흥선군과 약속하여 그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기로 하였으나 흥선군은 김병학을 배반하고 국혼을 

閔致祿의 딸에게 정하였다.

갑자년(1864)에도 김흥근은 조정에 말을 퍼뜨리기를, “옛날부터 사친은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즉시 그를 사제로 돌려보내어 한평생 부귀나 싫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대내외의 대권을 모두 잡은 대원군은 김씨 중에서도 김흥근을 가장 미워하여,

庄土와 田地 수십 마지기를 빼앗아 갔으며, 삼계동에 있던 별장마져도 빼앗아 갔다.

(완역 매천야록 15)

 

金炳冀

대원군이 집권 초에 어느 公會에서 당당한 기세로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시키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고 하는데 

여러분의 뜻은 어떻습니까?”하였다.

이에 많은 재상들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던 중 김병기기 분연히 머리를 들고 말하기를

“천리를 지척으로 압축하려고 하면 지척이 되고, 남대문도 3층으로 높이면 3층이 될 것입니다

지금 대감께서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태산은 태산인데 어찌 쉽게 평지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원군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저 혼자 잘난 척 하는군”하고 중얼거렸다.

종친을 높이며, 남인을 기용하며, 노론(태산)을 억제하겠다는 뜻이다.

대원군은 고집 센 김병기를 꺼려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그의 막강한 종족들이 두려워 오랫동안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김병기는 여주에 은거 했다.

대원군은 “아들을 낳으려면 김병기처럼 雄特한 아들을 낳고

그렇지 않으면 洪遠植 형제처럼 단아하고 준수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원식은 남인으로 그의 아우 健植과 함께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대원군은 그를 가장 사랑하였다.

 

김병기의 애국심

병인양요 때 김병기는 여주에 있었다. 한성이 소란하여 피난민이 사방에 만연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가족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國恩을 받고 살았으므로 社稷과 함께 존망을 같이해야 하니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그가 가족을 데리고 入京하자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은 매우 낙심하였다.

(완역매천야록32)

 

김병기 (金炳冀 18181875(순조 18∼고종 12)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1847(헌종 13) 문과에 급제

철종 때 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금위대장을 거쳐 이조·예조·형조·공조판서를 지내고

1862(철종 13)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나 대원군이 집정하자 광주유수(廣州留守) 등 한직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공조판서·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 )

 

金炳始와 金弘集의 公選

재상 김병시는 조금 공정하고, 김홍집은 조금 글을 잘하여 고종에게 예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고종이 統科를 치를 때는 이최응과 심순택을 고시관으로 임명하고

공정한 선발을 하고자 할 때는 김병시와 김홍집을 고시관으로 임명하였다.

(완역매천야록78)

 

閔泳翊의 及第

민영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가 居喪 중에 있을 때 명성황후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루가 급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恩門(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기의 主試官을 부를 때의 호칭)이 金炳德이 아니면 과거를 보지 않겠다

그것은 김병덕이 청백하다는 명망이 있어서 시험을 매우 공정하게 보기 때문 이었다.

그 후 김병덕을 주시관으로 임명하자 그는 어김없이 민영익을 뽑았다

이때 민영익은 또 그를 찾아가 新來(명관이 새로 급제한 사람집에 가서 배푸는 일종의 축하행사)를 불러 달라고 하자 

그의 명망은 일시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聖一(김병덕의 자)이 起哉(김병덕의 부친 김흥근의 자)보다 낫다고 하더니 더 못하다

”고 탄식하였다.

(완역매천야록91)

 

철종 왕비 김씨

왕후의 시호는 哲人王后이며, 김문근의 딸이다. 그는 현명하고 정숙하여 궁내에서 무두 추앙하였다.

그는 철종이 승하한 후로 웃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도 않았고,

글도 잘 알고 글씨도 단아하게 잘 썼지만 남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金炳德의 義氣

김병덕이 신사년(1881) 겨울에 평안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임오년(1882) 6월에 그의 아들 金祚均이 한성 본가에서 그의 가솔을 수레에 싣고 평양으로 갔었다

그것은 군란이 겨우 종식되자마자 다시 큰 난리가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병덕은 그를 꾸짖어,

“우리는 世臣大族으로서 한성이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먼저 피난을 하여 백성들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하면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시 한성으로 되돌려 보내자 김조균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매우 淸白한 감사였다.

(완역매천야록128)

 

梅泉野錄은 구한국 말기의 유명한 시인이요 節士인 매천 黃玹선생(18551910)이 기술한 韓末의 秘史이다

11세에 한시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으며, 고종2(1886)에는 생원시에 장원하였으나 시국이 혼란한 것을 개탄하여 향리에 은거,

서적 3,000여권을 쌓아두고 두문불출 독서로 세월을 보내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國恥를 통분하여

絶命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매천야록은 대원군의 집정(1864)부터 1910년 경술 합병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자신이 보고 들은 데로를 편년체로 기술한 책이다.

128쪽의 김병덕의 의기 까지도 안동김씨에 대한 기술이 누락된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후에도 이름이 자주

거론된 분들은 김병시김병덕김성근김매순김병기(金炳基)병국김가진김복한김종한 등이다.

 

김병학 (金炳學 18211879(순조 21∼고종 16))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 본관은 안동(安東). 

1853(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장령(掌令)·사간(司諫)을 거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서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안동김씨 일문들이 거의 제거되었으나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평소의 흥선대원군과의 친분으로 이조판서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찬수했고,

찬집소총재관(纂集所總裁官)으로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대전회통(大典會通)》을 각각 완성했다.

보수파의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가톨릭교의 탄압을 적극 주장했고,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체결을 적극 반대했다.

시호는 문헌(文獻).

 

김복한 (金福漢 18601924)

충남 홍성에서 태어님. 선원 김상용이 12대 조부이다.

조선 말기 문신·의병장.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1892(고종 29) 문과에 급제,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1894년 승지(承旨)에 오르고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이해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내종형인 이설 · 안병찬(安炳讚)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

이듬해 석방되었다. 대사성(大司成)·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 5(五賊)을 참수(斬首)하라고 상소하여 투옥되고뒤에 석방되었다

1906(광무 10)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홍주(洪州)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잡혀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국 5적의 참수를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1919 3월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가 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7 5 1일 충남 홍성 서부면 이호리 추양사에서 선생의 춘계제향 봉행되었다.

홍성군 금마면에는 金福漢 효자비 있다.

묘비에는 “朝鮮國 大司成 志山金先生 福漢之墓”라고 쓰여 있다.

 

김삿갓(金炳淵 ; 18071863)

1811(순조11) 평안북도 가산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켜서 청천강 이북의 8개 고을을 점령 했다

이때 선천부사 이었던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항복을 했다. 이의 손자가 김병연이다.

김병연은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열린 백일장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은 가산의 군수를 예찬하고 선천의 부사였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강하게 비판한 글을 작성하여 장원에 오른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듣고는 크게 자책하게 되고 24세가 되던 해에 가족들을 버리고 방랑을 시작한다.

하늘을 보기 부끄러운 죄인이라는 생각에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방랑 생활이 시작됐고

그의 별명이 방랑시인 김삿갓 혹은 김립이 된 것이다.

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서당의 푸대접에 화가 나서 지은 풍자시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房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방안에 모두 귀한 분들이네)

生生徒諸未十 생도제미십 (생도는 열 명도 못되고)

先先生乃不謁 선생내불알 (선생은 내다보지도 않는구나)

 

김가진 (金嘉鎭 18461922)

조선 말기 문신·독립운동가. 호는 동농.

1877(고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참서관(奎章閣參書官)이 되었다.

1880(고종 17)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과 장령(掌令)·사복시정(司僕寺正)·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부터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4년간 도쿄[東京(동경)]에서 주재하였으며,

1891(고종 28)부터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냈다.

1894(고종 31)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하였으며,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1896년 중추원 1등의관을 지냈다.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에는 1896 7월에 조직된 독립협회의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신구법(新舊法)을 절충하기 위해 설치한 교전소(校典所)의 지사원(知事員)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중추원의장·궁내부특진관(宮內部特進官)·충청도관찰사·규장각제학을 역임한 뒤,

1909년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계승 단체인 대한협회의 회장으로서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고,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총재 및 고문으로 추대되어 상하이[上海(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 3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하였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그 뒤 단원들이 체포되어 대동단이 해체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다.

한학과 서예로도 유명하다.

 

김가진에 대한 참고사항

1910,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조선의 유력인사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이 중에는 이완용이나 송병준처럼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작위를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적극적인 친일을 하진 않았어도 회유의 목적으로 고위관직을 지낸 사람에게 작위를 내린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려주는 작위를 넙죽 받고는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를 거부하거나 나중에 박탁당한 사람도 있었다

유길준은 작위를 거부한 경우였고, 김윤식은 작위를 받았지만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소극적인 저항을 하다가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행적을 뛰어넘는 애국심을 보여준 분도 계셨다.

동농 김가진은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 외교관으로 도쿄에 주재하고 이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거쳐 갑오개혁 이후와 

대한제국 시절, 두 차례에 걸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이런 고위직을 지낸 이력과 가문의 영향력 덕에 총독부는 김가진에게 남작 작위를 내린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히 살 수 있다. 하지만 김가진은 그 길을 거부한다.

사실 김가진도 처음에는 일본을 조선 근대화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였고

그가 경술국치 직전 가입했던 대한협회는 일제 침략에 대한 대응도 소극적이고 의병항쟁에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진회가 식민지화를 주장하자 대한협회는 이를 규탄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해산 당한다.

그 후 김가진은 칩거에 들어가지만 1919 3.1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도 독립투쟁에 적극 나선다

항일비밀결사였던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를 맡은 것이다

그리고 대동단은 김가진과 사돈 관계인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고 먼저 김가진이 아들 김의한과 그 부인 정정화를 데리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한다

의친왕의 망명 계획은 실패하고 말지만, 김가진의 망명만으로도 일제에게 주는 정치적 타격은 적지 않았다

작위를 받은 자의 망명은 일제 통치체제가 정당하지 않음과 함께 일제가 하층민이 모인 집단이라고 선전하던 임시정부에게는 

그만큼 큰 상징적 의미를 준 것이다.

일본은 김가진을 회유하여 다시 데려갈 목적으로 며느리 정정화의 종형 정필화를 상하이로 보냈다

하지만 정필화의 움직임은 당시 임정 경무국장으로 있던 백범 김구에게 적발당하여 이 계획은 실패한다.

1921, 임정이 노선갈등으로 내분이 일어나자

김가진은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여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만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문제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듬해 김가진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임정은 김가진의 장례를 성대히 치루면서 그의 뜻을 기렸다.

김가진은 죽었지만 그 애국심은 자손들에게 이어져 살아남았다

상하이로 함께 망명한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도 독립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특히 정정화는 상하이로 망명할 때는 친정아버지(정주영)가 준 돈 8백원을 가지고 서울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쳐 망명하였으며 

그 후에도 연통제를 통하여 국내로 잠입, 자금을 모금해 돌아오기도 하였다.

연통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김의한은 국무원 비서로 활동하고, 정정화는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조국에서 그들은 또 시련을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으로 김의한은 납북되었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위원으로 선임됐다가 사망 후 애국열사릉에 안장된다. 정정화는 부역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그리고 1982년에 이르러서야 그 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김의한은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하지만 김가진에 대한 훈장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독립투쟁을 하다가 변절한 사람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경우가 있음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작위를 받았다고는 하나 적극적인 친일을 한 적은 없고

더군다나 보장된 영화를 버리고 독립을 위해 망명을 하신 분이 독립유공자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성삼문도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후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후 단종복위운동에 나선 성삼문을 역사는 단종의 충신으로 기억하지, 세조에게 붙은 간신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작위를 버리고 애국의 길로 나선 김가진 역시 거기에 맞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터넷의 어떤 블로그에서)

 

김시현 (金始顯 18831965)

일제식민통치기에 독립운동으로 공헌, 국회의원 역임, 1951년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투옥.

서울 운경공원묘지에서 1996년 대전국립묘지로 옮김.

(*안동김씨대동보3 561)

 

김팔봉 (金八峰 19031985)⇒ 김기진

문학평론가·소설가·시인. 팔봉(八峰)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청원(淸原)출생.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1920년 일본 릿쿄[立敎(입교)]대학 영문학부 중퇴,

1923년부터 17년간 매일신보·시대일보(時代日報)·중외일보(中外日報) 등의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45년부터 5년간 출판사 <애지사(愛知社)>를 운영하였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1972년에는 한국펜클럽과 한국문인협회의 고문을 지냈다.

일본유학시절인 1922년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하였으며,

문예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의 동인이 되어 신경향의 문예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에는 귀국하여 《개벽(開闢)》 《클라르테운동의 세계화》라는 평론을 발표함으로써

현실변혁의식이 강한 프롤레타리아문학을 제창하였다.

1925년 민족주의문학에 대립하는 계급문학의 건설을 기치로 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결성하여 사회주의문학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온건파였던 그는 프로문학의 관념론에 갈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평론집 《통속소설소고(通俗小說小考, 1928)》와 《대중소설론(1929)》 등을 통하여 프로문학

구제책으로 예술대중화론을 폈다.

작품으로는 신경향적인 시 《애련모사(哀戀慕思, 1923)》《권태(1923)》 등과

수필 《떨어진 조각조각(1923), 소설 《붉은 쥐(1924)》《젊은이상주의자의 죽음(1925)》등이 있다.

또한 프로문학적 평론에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조선프로문예운동의 선구자(1929)》 외 다수가 있다.

 

김두한(金斗漢 ; 19181972)

서울에서 출생, 교동보통학교 졸업. 김좌진장군의 아들.

광복후 조선건국청년회 창립위원, 3대민의원(1954), 6대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의원직 사퇴.

 

김충현 (金忠顯 1921.4.22006.11.19)

서예가. 호는 일중(一中). 서울 출생. 7세부터 중국 당나라의 안진경 서체를 익혔으며

뒤에 김용진에게 예서, 윤용구에게 행서를 배웠다. 1943년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48~61년 경동고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과 학교 서예교육의 저변 확대에 힘썼다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서울시 문화위원을 거쳐 1960~73년 국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1958년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창립하여 이사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회원들에게 서예를 지도하였다

1974년 한국서예가협회 이사장, 1975년 학교법인오산학원 이사장,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서예)이 되었으며,

1983년 인사동에 백악미술관을 건립해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중국 후한의 조전비서풍(曹全碑書風)의 예서를 즐겨 쓰며,

특히 한글 궁체 서예에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정읍사(1960)》가 있으며,

주요 기념 서예작품으로는

4·19의거탑묘비명(1961)》《권율도원수행주대첩비명(1969)

《이충무공한산도제승당비명(李忠武公閑山島制勝堂碑銘)

《백범김구선생묘비명》과 《사육신묘비명》 《소월시비》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리글씨 쓰는 법(1942)》《우리말 중등글씨체(1955)》《서예집성(1964)》《근역서보(槿域書譜, 1967)》 

《국한서예(1970)》 《한글서예(1978)》 등이 있다.

후학 양성과 서예 저변확대의 업적으로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1987년 보관문화훈장, 2004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김응현 (金膺顯 1927)

서예가. 서울 출생.

호는 여초(如初)·완여(頑如)·완도인(頑道人)·경안재(景顔齋)·무외헌(無外軒)·벽산려(碧山廬).

1951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 중국 국립고궁박물원 초청 방화단장,

1975년 국전 초대작가 등을 지냈다.

1976년 현대화랑 초대 서예개인전,

1978·1982년 동방화랑 초대 서예개인전,

1979년 구제서도연맹 초대개인전,

1986년 중앙일보사 초대 여초 김응현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갑골문(甲骨文)을 비롯하여 대전(大篆)·소전(小篆)·예서(隸書)·해서(楷書)·초서(草書)

고금 서체를 모두 통달했으며

특히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서체(書體)의 연구와 창출(創出)은 중국인들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다.

동방연서회장·한국전각학회 회장을 지냈다.

 

자랑스러운 안동김씨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 성주로서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광 태사의 벼슬에 이르렀다.

계행(係行)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을, 광해군 때 극효(克孝)는 정3품 도정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상용은 인조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임대신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 네가 만일 살거든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 수전[13]이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나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 하며 가지 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동생 상헌(尙憲)은 백부인 대효에게 출계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한편 안동김씨의 재 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의 손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수증(壽增)은 형조와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수흥(壽興)은 숙종때 영의정에 올랐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올라 [현종실록]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 때 영의정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과 도학으로 

창집(昌緝),·창립(昌立)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의 인맥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의 아들 제겸(濟謙)이 우부승에 이르렀고

손자 이소(履素)가 정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후 영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의 비(순원왕후)가 되자 영안부원군에 봉해져서 

철종 때의 안동김씨세도정치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 명순의 아들 홍근(弘根)은 헌종 때 공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형조판서에 올랐다.

홍근의 아우 흥근[興根]은 헌종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철종 때는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고종이 즉위하자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는 조근(祖根)이 영흥부원군에 봉해졌고

철종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에 오른 병기(炳冀)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거창부사 인순의 아들 수근(洙根)은 헌종 때 대사성과 이조 판서를 거쳐 선혜청 당상이 되고 병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후 

한성부 판윤에 이르렀으며, 수근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 때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조두순,·이유원 과 함께 [대전회통]을 완성 했다.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이 뛰어나서 홍석주와 함께 <여한 10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밖에 선천부사 익순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과 재치가 넘친 싯귀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에 와서는 개화혁명)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의 울분으로 자결한 석진(奭鎭),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흑룡강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살렸다.

 

 

조선조 문관품계(文官品階)

正一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종친이면 현록대부(縣祿大夫), 흥록대부(興祿大夫), 의빈이면 수록대부(綏祿大夫), 성록대부(成祿大夫).

從一品:숭록대부(崇祿大夫), 숭정대부(崇政大夫), 종친이면 의덕대부(宜德大夫), 소덕대부(昭德大夫),

의빈 이면 정덕대부(靖德大夫), 명덕대부(明德大夫).

正二品: 정헌대부(正憲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 종친이면 숭헌대부(崇憲大夫), 승헌대부(承憲大夫), 

의빈이면 봉헌대부(奉憲大夫), 통헌대부(通憲大夫).

從二品: 가의대부(嘉義大夫), 가정대부(嘉靖大夫), 가선대부(嘉善大夫),

종친이면 중의대부(中義大夫), 소의대부(昭義大夫),

의빈이면 자의대부(資義大夫), 순의대부(順義大夫).

正三品:통정대부(通政大夫),

종친이면 명선대부(明善大夫),

의빈이면 봉순대부(奉順大夫) (이상은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종친이면 창선대부(彰善大夫),

의빈이면 정순대부(正順大夫).

從三品: 중직대부(中直大夫), 중훈대부(中訓大夫)

종친이면 보신대부(保身大夫), 자신대부(資信大夫),

의빈이면 명신대부(明信大夫), 돈신대부(敦信大夫).

正四品: 봉정대부(奉正大夫), 봉렬대부(奉列大夫),

종친이면 선휘대부(宣徽大夫), 광휘대부(廣徽大夫).

從四品: 조산대부(朝散大夫), 조봉대부(朝奉大夫),

종친이면 봉성대부(奉成大夫), 광성대부(光成大夫).

正五品: 통덕랑(通德郞), 통선랑(通善郞),

종친이면 통직랑(通直郞), 병직랑(秉直郞).

從五品: 봉직랑(奉直郞), 봉훈랑(奉訓郞)

종친이면 근절랑(謹節郞), 신절랑(愼節郞).

正六品: 승의랑(承義郞), 승훈랑(承訓郞)

종친이면 종순랑(從順郞).

從六品: 선교랑(宣敎郞), 선무랑(宣務郞).

正七品: 무공랑(務功郞).

從七品: 계공랑(啓功郞).

正八品: 통사랑(通仕郞).

從八品: 승사랑(承仕郞).

正九品: 종사랑(從仕郞).

從九品: 장사랑(將仕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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