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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의 인물들
제목 嶺南 奉化縣 文科及第者
작성자 관리자 [2017-10-30 17: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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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고을별 문과급제자/奉化縣

(文科) 15명 당상관 4

*琴柔

儀后 號淸遠亭 器局弘毅精明理學與別洞尹祥多論辨太祖朝文吏判知大邱構琴鶴樓撰嶺南地理誌按

湖南貪吏多聞風辭去佔畢齋金宗直題永同新館詩曰琴相淸風一代賢鳴琴遺閣碧溪邊

금유(琴柔)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청원정(淸遠亭)

조부는 조(). 아버지는 극해(克諧). 외조부는 이인실(李仁實)

태조(太祖) 5(1396) 문과급제. 태조 11년 사간원 좌정언. 병조좌랑. 세종 14년 좌사간.

우사간.형조 우참의. 세종 23년 첨지중추원사. 전라도관찰사. 세종 25년 대사성

*鄭文炯

道傳曾孫 號野叟 世宗朝進文領中樞謚良敬選淸白吏

정문경(鄭文烱) 1427(세종 9)1501(연산군 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道傳)의 증손으로, ()의 아들이다.

1447(세종 2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으로

궐내에서 다른 관리들과 더불어 기생을 불러들여 가무음주한 죄로 장형(杖刑)을 받았다.

1455(세조 1) 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2등에 녹훈되었다.

사간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郞廳)을 겸직,

이어 사인 재직시에 또 한번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한 죄로 장형을 받았다.

1464년 좌간의대부·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고, 이듬해 진주에 살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어머니 병환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1466년 함길도절도사·변정원(辨定院: 掌隷院)의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2(성종 3)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중추부지사·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행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89년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경상도순변사를 거쳐 1492년 우찬성, 1494년 공조판서로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 이어 우의정에 승진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나

이해 용렬하고 탐학한 재상이라는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체직, 영경연사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琴以詠  柔子 世宗朝文翰苑至校理

금이영(琴以詠)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봉화(奉化). 전라도관찰사 유()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사관이 되었고, 1447(세종 29)에 북부녹사(北部錄事)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52(단종 즉위) 예문관대교 재직중에 기생을 간음한 일로 사헌부로부터

“국상중에 간음하였다.”는 탄핵 뒤 변진에 입거되었고, 이듬해 자원부처(自願付處)되었다.

세조의 즉위와 함께 복직되어 승문원부교리·청주판관을 역임하였고,

1472(성종 3) 승문원교리로서 예종부묘사(睿宗祔廟事)에 집사로 참여하여

그 노고로 1계를 가자받았다.

*琴嵩 儀后 世宗朝進文大諫

금숭(琴嵩)

본관은 봉화(奉化). 아버지는 금숙(琴淑)

세종(世宗) 29(1447) 생원시 합격. 문종(文宗) 즉위년(1450) 문과급제.

세조때 군위현감을 지냈고. 관직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琴椅 梧弟號海村中廟進 文歷翰苑至府使在史官四年屢經士禍士氣消沮獨持淸議從實直書

以孝行聞家藏周禮正廟登乙覽退溪李滉撰碣

금의(琴椅) 1489(성종 20)1551(명종 6).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중재(仲材).

조부는 간(). 아버지는 사도시첨정 치잠(致湛). 외조부는 문절공(文節公) ()

1513(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 성균관·예문관의 전적·기사관을 거쳐 예조정랑 등 청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늘 어머니의 병환을 염려하여 내직에 있기보다는 외직에 나가기를 원하여 울산부사·

풍기군수·청송부사를 지냈고, 영천군수가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이 풍기에 있을 때 서로 왕래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묘갈명은 퇴계 선생이 찬하였다.

*金​廷準 係行曾孫中廟文學諭

김정준(金廷準)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증조부는 보백당(寶白堂) 계행(係行). 조부는 극례(克禮). 아버지는 세은(世殷)

중종 35(1540)에 문과급제하여 성균관 학유(學諭)를 지냈다.

*金中淸

廷憲孫 號苟全 遊寒岡鄭逑,月川趙穆,嘯皐朴承任門 著文章經術尤精易學 壬辰倡義

光海朝文承旨 甲寅以書狀官出使明國 卞誣奉還先聖影幀 有文集 漫浪黃(/)撰碣

김중청(金中淸) 1567(명종 22)1629(인조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 또는 구전(苟全).

증조부는 세은(世殷).조부는 정헌(廷憲).아버지는 첨중추 몽호(夢虎).외조부는 박승인(朴承仁)

월천 조목(趙穆)의 문인.

1610(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예조좌랑·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묘갈명은 만랑(漫浪) 황호()가 지었다.

*權克明 仁廟進文

권극명(權克明) 1587(선조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보(晦甫),

조부는 질().아버지는 성암(醒庵)사공(士恭).외조부는 조응문(趙應文). 처부는 김사원(金士元)

백부인 동강(東江) 사온(四溫)에게 배웠다.

1610(광해 2) 생원 진사 양시 합격, 인조 2(1612)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을 지냈고

文行으로 당대에 이름났다.

주부 금응석(主簿琴應石)이 묘갈명을 지었다

*金柱宇

中淸子 號易眠齋 愚伏鄭經世門人 以筆鳴世年十二書 矗石樓額 仁廟進文魁書進闕門

扁額陞通政賜馬鞍官至持平 有遺稿 訥隱李光庭撰碣

김주우(金柱宇)1598(선조 31)1644(인조 2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역면재(易眠齋).

아버지는 승지 중청(中淸). 외조부는 이영승(李永承). 처부는 이경엄(李景嚴)

1603(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정언이 되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광해군 때 국가에 곡식을 바치고 벼슬을 산 신하라 하여 간원에서 심히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김류()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정언이 되었으며, 그뒤 지평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의 강도파천(江都播遷)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하여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있을 때,

온 집안이 큰 변을 만나 숙부가 옥에 갇히고 할머니는 이 때문에 자살하였으며,

그도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서예에 명망이 있어 13세에 진주 촉석루의 액()을 썼으며,

1625년에 왕명으로 동궁의 대병(大屛)에 사잠(四箴)을 쓰기도 하였다.

인조는 즉위하기 전부터 그의 재질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물고 말았다.

문집이 있고, 묘갈명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었다.

*琴尙絃

元貞玄孫 號磻川 仁廟文吏正至縣監 立朝廉謹有文學疏卞崔相鳴吉斥嶺儒疏丁卯扈駕江都

有文集 及筆語錄

금상현(琴尙絃) 1587(선조 20)~l663(인조 11)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경오(景五), 호는 반천(磻川),

영렬공의 후손. 조부는 옥순(玉筍). 아버지는 현룡(見龍).

인조 2(1624)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분관. 인조 9년 전경문신(專經文臣)에 발탁되었다.

그해 형조좌랑. 인조 10년 통훈대부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갔다가.

인조 16년 공조좌랑이 되고, 17년 겸춘추. 공조정랑. 이조정랑을 지냈다.

학행과 덕망으로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고 직위와 권세에는 관심 없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문집이 있다.

*琴聖奎

(+)曾孫 號易安堂 肅廟進文司藝文行夙就筆法名世燕人來使者求見稱奇晩構澗棲菴經史自娛

有遺集 江左權萬撰狀

금성규(琴聖奎)에 대하여

1636(인조 14)1700(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숙(文叔).

증조부는 글씨로 유명하여 이황(李滉)의 묘비를 쓴 보()이며, 아버지는 시진(是津)이다.

1677(숙종 3) 진사가 되었고

다음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사예 등을 역임하였다. 벼슬에는 큰 뜻이 없어,

고향에 돌아와 증조부의 묵묘(墨妙)에 매료되어 서예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의 특출한 필법은 널리 알려져 글을 얻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와 막역하게 사귀던 당대의 이름난 사람으로는 이동표(李東標)·권두인(權斗寅) 등이 있다

문집이 있고, 묘갈명은 강좌(江左) 권만(權萬)이 지었다.

*鄭鐸 淸州人

文克公后 號梅溪 遊霧隱任碻門淹貫墳典尤精經學肅廟進文歷兩司至察訪

有遺集 李光庭撰狀

정탁(鄭鐸) 1452(문종 2)1496(연산군 2).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숙(警叔).

조부는 포(). 아버지는 지평 충기(忠基). 외조부는 김연종(金連宗). 처부는 이원형(李元亨)

1483(성종 15) 문과급제. 예조좌랑·사간원헌납·호조정랑을 지냈으며,

상의첨정(尙衣僉正)으로 호남에서 봉사하던 중 죽었다.

이조참판동지경연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마음이 항상 관대하고 일체 사치를 일삼지 않았으며,

종족(宗族)사이에는 은의를 다하고 남을 대함에 있어 정성을 다하였다.

문집이 있고, 묘갈명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었다.

*琴暹 胤先后 遊任碻門肅廟進文學錄秀雅能文 有遺集 密菴李栽撰碣

금 섬( ) 1659(효종 10)~1696(숙종 22)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중서(仲舒)

동래부사 문곡(文谷) ()의 후손.

숙종 9(1683)에 진사시에 합격. 숙종 16(1690)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지냈다

문집이 있고, 묘갈명은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지었다.

*金翰運

中淸后 號浮翁 肅廟進文牧使 有遺稿

김한운(金翰運) 1680(숙종 6)~1749(영조 25)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붕로(鵬路), 호는 부옹(浮翁),

승지 중청의 후손. 조부는 지강(至剛). 아버지는 세경(世鏡). 외조부는 이순원(李舜元).

처부는 심육(沈堉)

숙종 37(1711)에 문과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진주목사를 하였다.

유고가 있다.

*金渭均 中淸后 哲廟文正言

김위균(金渭均) 1830(순조 30)~1860(철종 1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견(景堅).

승지 중청의 후손. 조부는 회근(晦根). 아버지는 병혁(炳赫). 외조부는 권약회(權若會)

철종 9(18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 정언으로 재임 중 31 세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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